스 6:15-18(B.C. 516년)
이스라엘 역사상 성전은 세 번 건축되었다. 그 첫 번째가 솔로몬 성전(B.C.95년, 왕상 6:1-38), 그리고 두 번 째 여기의 스룹바벨 성전(B.C. 516년, 스 6:15-18). 세 번째가 신약시대의 헤롯 성전(B.C. 20-A.D. 63년)이다. 이 성전들은 지금은 모두 훼파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던 이 성전들이 각각 훼파 될 때마다 이스라엘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성전 건물의 파괴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충격 받을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돌과 쇠로 만든 건물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인 성소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할 때만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의 처소로 삼아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제 2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도 포로 귀환 이후 제 1 성전인 솔로문의 성전이 파괴된 이래 약 70년 만에 재건되었으나 B.C. 20년경 헤롯 성전 재건으로 대채됨으로 그 운명을 끝마쳤다. 이러한 스룹바벨 성전은 포로 귀환 이후 유대인들의 신앙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으로 성경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말라기서와는 간접적으로 스룹바벨 성전 재건 이후 느혜미야 시대의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과 관련을 가진다. 그리고 성전과 관련된 이스라엘의 순수한 신앙은 스룹바벨 성전 소멸 이후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외형적인 건물로서의 성전에 의존하지 않게 하고, 성전의 실체 되시는 메시야를 대망하게 하였다는 측면에서 이 성전이 이스라엘 역사에 끼친 영향과 그것이 같는 종교적, 영적 의의는 참으로 크다.
이제 스룹바벨과 연관된 전반적인 사실들을 살펴 보도록 한다.
- 스룹바벨 성전 건축 과정의 역사
바벨론왕 느붓갓네살에 의해 솔로몬 성전이 훼파된 이래 이스라엘이 다시 성전 재건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B.C. 539년 바사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모든 속국의 포로민들에 대한 유화 정책에 따라 그들로 하여금 각각 고국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 할 수 있도록 하라(B.C.538년) 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도 이러한 고레스의 칙령(스 1:1-4) 에 따라 세스바살과 스룹바벨, 그리고 대제사장 예수아의 지도하에 B.C. 537년 제 1차로 포로 귀환하여 성전 재건 사업을 펼쳐 나갔다. 그러면 솔로문 성전 이후 재건되어진 스룹바벨 성전의 건축 과정을 단계별로 살펴 보도록 하자.
가. 성전 지대(터) 건축
스룹바벨 성전 지대(터)가 건축된 것은 이스라엘 포로 귀환 제 2년째, 즉 B.C.536년 시 브월 곧 태양력으로는 5월이었다. (스 3;8). 이 시기는 근동 지역의 기후상 건조기후이기 때문에 성전 재건 작업에 착수하기가 용이하였다. 한편 스 5:16에는 당시 유다 총독인 세 스바살이 성전 지대를 건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스룹바벨이 세스바살의 대리인으로서 성전 지대 건축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스 3:8). 그리고 성전 지대가 완공되었을 때 대부분의 백성들이 즐거워하였으나 과거 솔로몬 성전의 크기와 웅장함을 익히 알고 있던 노인들은 그 지대의 크기가 솔로몬의 성전의 터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에 대성통곡을 하였다.
나. 성전 재건 공사 중단
성전 공사가 사작되자마자 곧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스룹바벨과 유대 족장들에게 나아와 자신들도 성전 재건 공사에 동참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것이 거부되자 그들은 한편으로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건축을 방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회적으로 바사국의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어 성전 재건을 중단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성전 재건 공사는 바사 왕 고레스 제4년 (B.C.536년) 에서 다리오 즉위 때(B.C.522년)까지 약 16년 간 중단되게 되었다.
한편 사마리아인들이 이렇게 성전 재건을 극구 방해한 것은 단순히 그들을 그 공사에 동참 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게 될 경우 지금까지 팔레스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그들의 입지가 약회될까 두려워서였다. 또 유대인들이 그들의 동참을 거부한 이유는 그들은 대부분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이 아니라 과거 앗수르의 식민지 백성 이주계획에 따라 사마리아 땅에 옮겨진 이방인들이었고 일부 이스라엘인들도 모두 이방인들과의 통혼으로 혈통적, 종교적 순수성을 완전히 상실하였 기 때문이다.
다. 성전 공사 재개 및 완공
사마리아인들의 방해 공작으로 중단된 이래 대부분의 백성들은 낙담하거나 아니면 이기주의적 무사안일주의로 인해 성전 재건을 시도할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학개, 스가랴 선지자의 책망과 권고로 성전 재건 공사가 다시 시작 되었다. 이 당시대 지역을 포함한 팔레스틴과 시리아 지역은 모두 강 서편 총독, 즉 유브라데 서편 지역을 관할하는 닷드내의 통치하에 있었다. 이에 유대인들이 성전 공사를 재개했다는 소식을 들은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는 그 당시 바사 왕이었던 다리오에게 상소를 올려서 유대인들의 성전재건 공사가 적법한지를 물었다(스 5:6-17). 그리고 그것의 적법성의 여부를 확인한 다리오 대왕은 성전재건 허가서를 내리고 또 유브라데 서부 지역 관할 총독에게 유대인들의 세금 면제는 물론 건축 경비까지 원조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때가 다리오 즉위 제 2년, 즉 B.C. 520년이었으며, 공사가 재개된지 4년만인 B.C. 516년, 즉 다리오 제 6년 아달월에 성전이 완공되었다.(스 4:24-6:15).
- 관련 역사
가.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
스룹바벨 성전과 관련된 최초의 역사 기록은 새 성전 완공 후 백성들이 그곳에서 유월절을 지냈다는 것이다. (스 6:19). 그리고 제 2차 포로귀환(B.C.458년)이 있기 이전까지 약 58년간 성전과 관련된 기록은 없다. 제 2•3차 포로 귀환시 지도자들이었던 에스라, 느헤미야와 관련하여 스룹바벨 성전의 역사가 다시 언급된다. 에스라는 포로 귀환 후 성전 제사의 활성 및 백성들에 대한 율법 교육, 그리고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를 해결하였다. (스 7-10장). 느헤미야는 일차적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 한 후 (느 6:15) 에스라와 더불어 종교 개혁을 대대적으로 일으키고 성직자들의 직무 활성화를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을 취하였다. 심지어 B.C.432년 느헤미야가 바사 왕국을 다녀 온 후 암몬 지방 총독 도비야가 성전 뜰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그를 축출하고 십일조와 안식일에 관한 개혁을 시도하였는데 (느 13장) 이 모두가 성전 제사 활성화를 위한 것이었다.
나. 느헤미야 이후 마카비 시대까지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이 시기 곧 소위 중간사 시대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 다만 다니엘서의 예언이 이 시기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외경인 ‘벤시락의 지혜서 ’ 와 ‘집회서’라 부르는 책을 보면 오니아스(히브리 말로는 요하난) 의 아들인 대제사장 시몬 Ⅱ세 (B.C.220-180년경) 가 이 스룹바벨 성전을 보수하고 또한 이 정전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전 주변에 큰 성벽을 건축했음이 나타난다.
또 외경인 마카비서를 보면 B.C. 170년에 시리아의 셀류크스 왕조의 왕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을 크게 모독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유다 사회를 헬라화하기 위하여 여호와 종교 말살 정책을 폈으며 거기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B.C. 168년경 약 2만 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안식일을 지키던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고 성전을 파괴한 후에 성소 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으며 유대인들로 하여금 돼지를 잡아 그 신상 앞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이러한 성전 모독 사건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크게 격분하였으며 하스몬 가문에 속한 제사장 맛다디아와 그의 다섯째 아들 마카비가 셀류크스 왕조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소위 마카비 혁명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은 이미 다니엘서에 예언된 (단 11:20-45) 바의 성취이다. 그리고 다니엘의 종말에 관한 예언의 소위 ‘ 다니엘의 70 이레와 대 환란의 예언(단 (9:20-27)에서 언급된바 적그리스도의 예표가 바로 이 성전을 모독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이다.
한편 혁명에 성공하여 B.C.140년 로마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게 된 마카비 혁명군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파괴된 성전을 수리하여 그 제단을 성결케 한 후에 그 날을 명절로 정하였는데 그것이 소위 유대인의 ‘하누카’ 명절이다.
다. 마카비 시대에서 스룹바벨 성전 훼파까지
마카비 혁명 성공 후 유다는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독립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B.C.142-67년) 이때가 소위 하스몬 왕조 시대이다. 여기에서 ‘하스몬’ 은 마카비 가문의 칭호인데 마카비의 둘째 동생 힐카누스 1세가 대제사장직 뿐아니라 실질적인 왕으로서 유다를 통치하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하스몬 왕조 시대’ 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성전은 유다의 종교적 중심지일 뿐아니라 정치적인 중심지였기 때문에 여러 정치적 문제로 인해 성전이 훼손되거나 보수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한편 B.C. 63년에는 로마 장군 폼페이가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모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로마 원로원에 의해 유대 왕으로 즉위한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스룹바벨 성전이 너무 작고 초라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없애고 성전을 다시 재건하였다. 그것이 제3 의 성전인 헤롯 성전이다.
- 의 의
포로 귀환 이후 소위 중간사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와 백성들의 신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스룹바벨 성전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하는 바 그 의의는 실로 크다.
다음에서 간단히 살펴보자.
가. 눈에 보이는 성전으로써 성전의 중요성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과거 솔로몬의 성전에 비해 그 은총에 의한 성전의 규모나 화려함에 있어서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는 것(스 4:13) 그리고 성전 안에 언약궤가 없으며 대제사장은 우림과 둠밈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스 2:63). 성전이 이방인들에 의해 여러 차례 모독 받았다는 것 등이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에 불과한 건물로서의 성전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성전의 실체로서 메시야가 찾아 올 것을 대망하게 되었다. 스룹바벨 성전 시대, 소위 중간사 시대에 메시야 사상이 크게 대두되게 된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에 의한 이스라엘의 포로 회복의 일차적인 증거이다. 흔히 이스라엘의 포로 기간 70년을 솔로몬 성전 훼파에서 스룹바벨 성전 재건까지로 본다. 곧 스룹바벨 성전 건축 자체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을 중심으로 선민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회복되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스룹바벨 성전이 외적으로 매우 초라했을 뿐아니라 내적으로도 언약궤가 없고 대제사장에게 우림과 둠밈이 없었다는 것은 곧 선민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은 오직 성전의 실체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 짐을 강하게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