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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6장 1절-6절
시편 126편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시이다. 아마 5절과 6절 때문일 것이다. 이 구절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찬송가도 있다(260장, <새벽부터 우리>). 특히 추수감사주일에 교회현장에서는 이 시편을 설교본문으로 삼는 경우를 왕왕 보게 된다. “눈물로 뿌린 씨는 반드시 기쁨의 열매로 돌아온다“(6절)는 원리에 비추어 한해 동안의 수고를 위로하고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교회현장에서는 이처럼 주로 ‘감사’의 맥락에서 이 시를 사용하고 있다. 이 시가 ‘감사적’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가령,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과거를 회상할 때 시인 마음에는 감사가 넘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를 통상 ‘감사시’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5-6절도 내용면에서는 ‘감사’보다는 ‘권면’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학자들은 보통 이 시를 ‘공동체 탄원시’(Community Laments)로 분류한다. 4절의 아직 포로지에서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을 향한 간구 등은 탄원시에서 흔히 보게 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시가 4절에서 끝났다면 탄원시로 구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권면 및 결단을 촉구하는 5-6절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시를 탄원시로만 보는 것 역시 부적절함을 보여준다.
요컨대 이 시를 ‘감사’를 키워드로 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나 ‘탄원’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시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을까?
쉬바트인가 숴부트인가?
본문의 전반적인 내용과 메시지를 생각해 보기 전에 먼저 지적해 둘 것이 있다. 우리나라 <개역>이나 <공동번역>, 그리고 <표준새번역개정판> 성경에는 1절에 ‘포로’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곧 여호와께서 ‘포로들’을 시온으로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편 126편의 역사적 정황이 바벨론 포로귀환과 연결됨을 의미하며, 상당수의 영역성경들도 같은 입장을 따르고 있다(가령, NIV, JB, TEV 등).
하지만 다른 견해가 있다. 즉 1절에서 여호와께서 돌아오게 하신 것은 포로가 아니라 ‘(시온의) 행복’(fortunes)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RSV는 1절을 “When the Lord restored the fortunes of Zion, we were like those who dream”(주께서 시온의 행복을 회복시켜 주실 때 우리는 꿈꾸는 자들 같았다)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회복시킨 것은 ‘시온의 회복’이라는 일반적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온의 ‘포로’로 번역하지 않고, 시온의 ‘행복’으로 번역한 근거로 히브리어 본문을 제시한다. 즉 히브리어 본문에는 ‘포로’를 뜻하는 ????<숴부트>가 아니라, <쉬바트> (기본의미는 ‘회복’)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일부 학자들은 1절의 정황을 바벨론 포로들의 귀환으로 보면 몇 가지 난점이 발생한다며 RSV의 번역을 지지한다. 바벨론 포로 이후의 실제 상황은 본문이 묘사하는 것과 너무 대조적이었기에 본문을 바벨론에서의 귀환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즉, 바벨론에서 귀환 이후의 상황은 가뭄의 연속이었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의 부족으로 인해(학 1장) 백성들의 불만이 높았다는 것이다(슥 7:11-14). 성전 재건도 지리멸렬하게 진행됐었고, 느헤미야 시대 때 조차 예루살렘은 황무했으며(느 2:17), 백성들의 원성은 최고조에 달했었다(느 5장)는 것이다. 이런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바벨론에서의 포로귀환은 시편 126편의 시인이 묘사하듯 백성들이 그렇게 행복해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선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동포들의 귀환을 두고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는 정도의 감격도 없었을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동시에 위에서 지적한 대로 귀환 공동체를 핍절한 공동체로 묘사하고 있는 곳도 일부 있지만(cf. 학개서), 귀환 시에 가져온 물건 목록들을 보면 이들이 결코 가난한 공동체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cf. 스 2:66-69). 또한, 1절에 <쉬바트>가 사용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쉬바트>의 본래 의미가 ‘회복’이고, 1절 상반절의 동사 <슈브> 역시 ‘회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동어반복이 된다. 따라서 BHS의 시편 편집자인 바르트케(H. Bardtke)의 제안대로 <숴부트>(‘포로들’)로 읽는 것이 온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부 중세 히브리어 사본들과 칠십인역도 <숴부트>로 읽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4절에도 <숴부트>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즉 시편 126편은 오랜 세월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들이 돌아온 정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cf. 1절, 4절)고 보아야 한다. 시인은 이 포로귀환을 회고하며 시를 써 내려간다. 그런데 이 시의 끝을 보면 다소 이상하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회고하며 시작된 시가 갑자기 마지막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날이 올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시의 시작과 마지막이 잘 안 어울리는 것 같다. 포로귀환을 회상하며 기뻐하다가 왜 갑자기 씨 뿌리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이 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이런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이제 본문 내용을 톺아가며 메시지를 탐색해 보자.
본문 내용과 메시지
시편 126편은 경탄과 감격으로 시작한다. “꿈꾸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70여 년 동안 바벨론 땅에 끌려가 그곳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동포들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성경은 이때 돌아온 귀환자 수를 42,360명이라고 전해 주고 있다(스 2:64, 느 7:66). 이 수치를 느헤미야 시대인 주전 440년경의 인구로 보는 일반적 견해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귀환 직전의 인구가 성서고고학자 올브라이트(W.F. Albright)의 추산대로 약 20,000명 내외였다면 대략 20,000명 이상의 인구가 귀환한 셈이다. 엄청난 수가 돌아온 것이다.
이 많은 유대인들이 유다로 돌아오도록 허락해 준 페르시아의 왕은 고레스였다. 에스라 1장 1절에 의하면 이 고레스는 바벨론을 정복하자마자 바벨론 땅에 있던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하고 이들의 적극적 후원자가 된다. 페르시아가 바보가 아닐진대 이 정도 되는 노동력을 방출한다는 것은 ‘전혀’ 예측치도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생각해 보라. 70여 년 동안 헤어져 살던 자기 동포들이 찬양하며 예루살렘으로 우르르 몰려든다. 거민이 희소해서 적막했던 예루살렘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이쪽저쪽에서 서로 얼싸안고 춤추며 노래한다. 꿈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자신들의 목전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꿈꾸는 것 같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해준다(1절). 나아가 이 일로 인해 저주와 한탄으로 가득했던 얼굴에 이제는 웃음이 가득해 졌고, 불평의 도구였던 혀는 찬양의 악기가 되었다고 기뻐하고 있다(2절 상반절). 이 일이 하도 놀라워 다른 나라 사람들도 여호와께서 저들의 편이 되어 주셨음에 틀림없다며 거들고 있다(2절 하반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정리해 보자. 시인은 오늘 126편 전반부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질문한다. 그리고 답변한다. 그분은 ‘큰’ 일,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기에 엄두도 못 내고 기대치도 않았던 그 일을 우리를 위해 기꺼이 행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는 에스라 1장에 의하면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정복하여 세계의 제국이 된 원년에 부리나케 조서를 반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환시킨다. 에스라서의 저자는 이 일은 고레스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었음을 역설한다. 오래 전 베냐민 땅 촌구석에 살던 예레미야에게 하셨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시간이 차자 하나님이 직접 나셔서 고레스의 마음을 뒤흔드셨다(stir up)는 것이다. 에스라 1장 1절의 ‘감동시키셨다’는 히브리어 <우르>는 ‘휘젓고’, ‘뒤흔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새벽을 깨우듯이”(시 57:8, 여기서 ‘깨우다’도 같은 단어인 ‘우르’이다) 작정하시고 고레스의 마음을 휘저으셨다. 70여 년 전에 하신 약속을 유대인들은 다 잊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아니, 하나님은 그 시간이 다가오자 오히려 기뻐서 흥분하시고 계셨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차자 고레스를 통해 약속하신 일을 이루신다. 그 결과로 수많은 무리가 이제 고국 예루살렘, 시온을 향해 오게 된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새겨볼 때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경탄하고 감격한다.
하나님의 이런 은혜에 대해 우리가 경탄하고 감격하는 것은 오늘 본문의 시인처럼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또한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경탄의 자리에만 머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탄만 하고, 그런 유사한 일이 또다시 자신에게 있기만 기도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신앙을 오해한 것이다. 키에르케고어는 두 부류의 신앙인이 있다고 했다. ‘경탄하는’ 신앙인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전반부의 시인처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며 기뻐하고 감격하는 신앙인이다. 사실 하나님을 생각하며 경탄할 수 있는 것, 이것 역시 은혜이다. 하지만 경탄만 하는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따르는’ 신앙의 자리에까지 갈 것을 역설했다.
필자는 시편 126편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경탄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던 이 시인의 영성에 놀라게 된다. 바벨론에서 많은 사람이 돌아왔다. 이제 유다 사회를 재건해야 한다. 하지만 주변에는 부족한 것뿐이다. 인구가 늘었으므로 먹을 양식이 더 많이 필요해졌다. 성전도 없고, 성벽도 허물어진 채로 그대로 있었다. 주변 국가들은 유다에 대해 경계를 하고 때로는 전투준비를 한다. 이 시인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그 놀라운 능력을 목격한 사람이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다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 같다. 마음 한 켠에는 바벨론에서 귀환이라는 그 어려운 일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니 하나님께서 쉽게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을 것이다. 바벨론에서 이곳으로 보내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그 다음 일도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 믿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유혹은 비단 과거 이야기만이 아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도 하다. 가령, 유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된다. 유학을 올 때 대책을 마련해 오기보다는 믿음으로 오는 경우들이 있다. 유학은 현실인데, 하나님께서 유학까지 보내 주셨으니 경제적 문제나 영어문제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라고 무작정 믿는 것이다. 이것은 담대한 믿음이 아니다. 무모한 믿음이다. 조심해야 한다. 오늘 이 글의 제목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고,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는 이 구분을 잘 못하고 있고 또한 안 하려고 하고 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이 두 가지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놀랍고 큰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이 사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감탄하는 것이다. 기뻐하는 것이다. 시인이 만일 이것으로 끝나면 우리는 그로부터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
인간이 해야 할 일
하지만 시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시인 앞에는 해결해야 할 두 가지 큰 당면 문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아직도 바벨론 땅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 생각만 하면 가슴 아픈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유다 사회를 재건하는 문제였다. 이 중 첫 번째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력해도 불가능한 문제였다. 하나님께서 다시 개입해 주셔야 하는 문제였다. 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다시 한번 휘저어야 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다시 간절히 호소한다.
여호와여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이 문제는 주께서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네겝의 시냇가에서 다시 물이 흐르듯이 남아 있는 저들을 보내 주옵소서.
하지만 유다 사회를 재건하는 것, 이것은 시인이 보기에 백성들이 땀흘려 일하면 되는 것이다. 농사를 짓고, 성전을 쌓고, 성벽을 중건하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바로 우리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을 향해 촉구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인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실 일과 인간이 해야 할 일을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이것은 저희의 몫이므로 저희가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이런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유대 사회는 다시 일어섰다. 성전을 짓고 성벽을 지었다. ‘마음 들여’ 수고하고 땀 흘렸다. 예루살렘 성벽의 경우 후대 요세푸스(Josephus)라는 역사가는 느헤미야 시대에 쌓아 올린 성벽을 보며 이것은 최소한 2년 4개월 걸리는 공사였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성경은 저들이 마음 들여 역사할 때 52일 만에 완공됐다고 기록하고 있다(느 6:15).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믿음 만능주의’에 빠져있다. 또한 ‘은혜’를 먼저 요청하는 습성이 배어 있다. 잘못된 습성들이다. 틸리히(P. Tillich)의 주장대로 믿음으로만(sola fide)의 왜곡을 떨쳐 버려야 한다. 믿음 만능주의는 하나님을 때로 자신의 이익에 따라 조정하고 이용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큰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또한 은혜의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은혜를 달라고 먼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농부는 새벽에 일어난다. 춥고, 배고프고, 귀찮을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눈물 없이는 씨를 뿌릴 수 없다,” “씨는 울며 뿌리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독일속담에는 “씨를 뿌릴 때에는 웃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거둘 때 울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감사한 것이 있다. 이렇게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크다는 것이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언젠가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둘 날이 온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요구하시는 공의이다. 농부에게 요구된 공의는 씨가 저절로 밭에 뿌려지고 또한 자라서 열매를 맺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울며 부지런히 씨를 뿌리는 것이다. 목회자에게 요구된 공의는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마음을 소 떼에 두어 전심으로 목양하는 것이다(잠 27:23). 학생들에게 요구된 공의는 순발력으로, 요령으로 공부하지 않고 졸음을 참고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는 것이다.
시편 126편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다. 무슨 뜻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시를 성전에 올라가며 불렀다는 뜻이다. 이들은 성전에 올라가며 “은혜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보다는 “하나님, 제가 오늘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러 나가겠습니다. 하오니 주님, 기쁨으로 단을 거둘 날을 보게 해 주옵소서”라고 노래한 것이다.
논의를 정리해 보자. 오늘 본문의 시인은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묻는다. 그리고 답변한다. 그 분은 우리를 향해 ‘큰 일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기억할 때마다 시인은 경탄하고 감격하게 됨을 고백한다. 지금 시인 주변에는 할 일이 널려 있었다. 우선 먹고 살 것이 문제였다. 또한 성전도 지어야 하겠고, 성벽도 중건해야 했다. 이때 시인은 어떻게 했는가? 하나님께 이번에도 도와 달라고 떼부터 쓰지 않았다. 혹은 이번에도 도와 주셔야 한다고 하나님을 협박하지 않았다. 그럼 뭘 했는가? 은혜를 기억했다. 경탄했다. 감사했다. 그리고 나서 다짐했다.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셨으니, 이제 우리들 차례라고 다짐했다. 그 일이 쉽지 않겠지만, 그래서 눈물 흘릴 날이 많겠지만, 씨를 뿌리며 열심히 일하는 것은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이 다짐을 되뇌였다. 성전에 오르며 무작정 “복 주옵소서” 요구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자. 힘들지만 힘을 다해 일하자.
우리를 돌아보자. 곱씹어 보면 감사한 것들이 참 많다. 귀한 것일수록 거저 받은 것들이 많다. 나무도 산도 공기도 거저 받았다. 부모도 거저 받았고 생명도 거저 받았다. 신앙도 거저 받았고 구원의 약속도 거저 받았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던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큰 일’을 행하고 계셨다. 우리 한명 한명을 위해 역사를 주관하고 계셨다. 또한 앞으로도 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또한 경탄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탄과 감격의 자리에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 오늘 본문의 시인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부지런히 행하는 실천의 자리로 나가야 하겠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들에게 기쁨의 단을 선사해 주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기대하며 힘껏 일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인간이 해야 할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은 분명 지혜로운 신앙인이다.
민경진 l 교수는 연세대 철학과와 장신대 신대원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옥스포드 대학교(M. St.) 더럼 대학교(Ph. D.)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선구자들의 하나님: 설교를 위한 에스라-느헤미야서 연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