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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백과 Bible Encyclopedia

유대성서와 구약성서의 비교연구

 

  1. 머리말

구약성서가 히브리어로 쓰여지고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쓰여진 것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i] 그러나 우리가 읽는 구약성서가 내용은 히브리 성서를 따르면서도 그 순서는 칠십인 역을 기초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순서야 앞뒤가 바뀐들 그 내용만 같다면 무슨 상관이랴. 그럴까? “신사 숙녀 여러분”과 “저 연놈들”에서 보여주는 남녀의 뉘앙스는 같지 않다. 전자는 좋은 의미에서의 남자와 여자를 가리키지만 후자는 나쁜 의미로 여자와 남자를 함께 일컫는 표현이다. 남성 중심 사회의 문화적 유산이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구약과 신약의 순서를 굳이 바꾸어 가며 “신구약 성경”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신약(만?)을 강조한 우리 선조 들의 성서 관(觀)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구약성서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를 살피고, 아울러 신약성서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현존하는 여러 모습의 구약 성서들을 비교하려고 한다. 그 다음으로 히브리 성서의 구성과 이해, 칠십인 역의 구성과 이해, 구약과 신약이라는 주제 하에 구약성서 입문의 첫 글을 쓰고자 한다.

 

  1. 구약성서들의 형태

유대 성서와 5 가지 구약성서 비교

 

유대성경 칠십인역 개신교성경 로마카톨릭 그리스정교 러시아정교
타나크   구약 구약 구약 구약 
토라 오경 오경 오경 오경 오경
창세기 창세기 창세기 창세기 창세기 창세기
출애굽기 출애굽기 출애굽기 출애굽기 출애굽기 출애굽기
레위기 레위기 레위기 레위기 레위기 레위기
민수기 민수기 민수기 민수기 민수기 민수기
신명기 신명기 신명기 신명기 신명기 신명기
유대성경 칠십인역 개신교성경 로마카톨릭 그리스정교 러시아정교
타나크   구약 구약 구약 구약 
여호수아 여호수아 여호수아 여호수아 여호수아 여호수아
사사기 사사기 사사기 사사기 사사기 사사기
사무엘 룻기 룻기 룻기 룻기 룻기
열왕기 1-4 왕국 사무엘 상하 사무엘 상하 1-4 왕국 1-4 왕국
이사야 역대기 상하 열왕기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 역대기 상하
예레미야 1 에스드라(외경) 역대기 상하 역대기 상하 1 에스드라 2-3 에스드라
에스겔 2 에스드라 에스라 에스라 에스라 1 에스드라=에스라
호세아 (에스라-느헤미야) 느헤미야 느헤미야 느헤미야 느헤미야
요엘 토비트   토비트 토비트 토비트
아모스 유딧   유딧 유딧 유딧
오바댜 에스더+첨가 에스더 에스더+첨가 에스더+첨가 에스더+첨가
요나 1-2(3-4)마카비   1-2 마카비 1-3 (4) 마카비 1-3 마카비
미가          
나훔 시문/지혜서 시문/지혜서 시문/지혜서 시문/지혜서 시문/지혜서
하박국 욥기 욥기 욥기 욥기 욥기
스바냐 시편 시편 시편 시편+시편 151 시편+시편 151
학개 잠언 잠언 잠언 잠언 잠언
스가랴       므낫세 기도 므낫세 기도
말라기 전도서 전도서 전도서 전도서 전도서
  아가(雅歌) 아가(雅歌) 아가(雅歌) 아가(雅歌) 아가(雅歌)
  솔로몬 지혜서   솔로몬 지혜서 솔로몬 지혜서 솔로몬 지혜서
  집회서(시라크)   집회서(시라크) 집회서(시라크) 집회서(시라크)
           
성문서 예언서 예언서 예언서 예언서 예언서
시편 호세아 이사야 이사야 이사야 이사야
욥기 아모스 예레미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잠언 미가 예레미야 애가 예레미야 애가 예레미야 애가 예레미야 애가
룻기 요엘   바룩 바룩 바룩
아가(雅歌) 오바댜   예레미야 서신 예레미야 서신 예레미야 서신
전도서 요나 에스겔 에스겔 에스겔 에스겔
예레미야애가 나훔 다니엘 다니엘-그외(外) 다니엘-그외(外) 다니엘-그외(外)
에스더 하박국   아자랴의 노래 아자랴의 노래 아자랴의 노래
다니엘 스바냐   세아이노래 세아이노래 세아이노래
에스라 학개   수잔나 수잔나 수잔나
느헤미야 스가랴   벨과 드레곤 벨과 드레곤 벨과 드레곤
역대기 말라기 호세아 호세아 호세아 호세아
  이사야 요엘 요엘 요엘 요엘
  예레미야 아모스 아모스 아모스 아모스
  바룩 오바댜 오바댜 오바댜 오바댜
  예레미야 애가 요나 요나 요나 요나
  예레미아서신 미가 미가 미가 미가
  에스겔 나훔 나훔 나훔 나훔
  다니엘-그외(外) 하박국 하박국 하박국 하박국
  아자랴의 노래 스바냐 스바냐 스바냐 스바냐
  세아이노래 학개 학개 학개 학개
  수잔나 스가랴 스가랴 스가랴 스가랴
  벨과 드레곤        

 

먼저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히브리 성서(이후, MT로 약함)와 개신교 구약 성서는 같은 내용의 책들을 순서만 다르게 열거하고 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문서들이 구교 성서들에 추가되었다: 제 1-3 에스드라, 토비트, 유딧, 에스더 추가문, 솔로몬 지혜서, 집회서(시라크), 바룩, 예레미야 서신, 다니엘서 추가문 (아자랴의 노래, 세 아이의 노래, 수잔나, 벨과 드레곤), 므낫세 기도, 시편 151, 제 1-4 마카비.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1947)을 따르는 일부 개신교에서는 이를 숨겨진 책 (Apocrypha < Latin, Libri Apocryphi < Gr. avpokru,foi이라 하며, 그들의 성경에서 제외시킨다.[ii]

칠십인 역(이후, LXX로 약함)의 배열 순서는 사본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사등분 구조에 맞추어 바티칸 본(B), 알렉산드리아 본(a)을 중심으로 재구성해 보았다.[iii]

서기 4세기에 제롬(Jerome)은 LXX에 기초한 구(舊) 라틴어 성서를 대신할 목적으로 당시의 MT에 기초하여 Vulgate를 번역해 냈다. 그 결과 LXX에는 있으나 MT에는 없던 많은 추가 문서들이 라틴어 번역본에서는 제외되었었다. 그 후 서방(西方) 교회에서는 개신교 종교 개혁을 거부하는 뜻에서, 1546년 트렌트 종교회의를 통해 이 모두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iv]

LXX은 므낫세 기도문을 포함하지 않고 있으며, 로마 카톨릭에서는 므낫세 기도문과 함께 제 3, 4 마카비를 제외시키고 있다. 므낫세 기도문과 시편 151편은 정(Orthodox)교회에서만 받아들여진다.

위의 도표가 말해 주듯 오늘날 각 기독교 교회에서 이해하는 구약성서는 히브리 성경과 다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자체 내에서도 구교, 신교, 또 각 교파에 따라 그 모양이 다양하다. 여기에 서로 다른 번역본을 추가한다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게 된다.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외경(外經), 위경(僞經)이란 표현 등은 이미 자신들의 성서를 정경(正經)으로 보는 보수, 비판적 성격이 있음으로, 학문적 용어로 적합치 않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사실은, 개신교의 구약 성경이 히브리 성경을 모체로 삼으면서도, 내용이나 순서에 있어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v] 여기에 초점을 두고, MT와 구약성서를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1. 히브리 성서의 구성과 이해

MT는 세 단계(threefold division)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토라 (Torah, hr’AT)요, 둘째는 예언서 (Prophets, ~yaiybin>)요, 셋째는 성문서 (Writings, ~ybiWtK.)이다. 히브리어의 첫 글자들($nt)을 따서 MT를 타나크 (Tanakh)라 부른다. 이러한 세 등분 구조는 서기전 2 세기경 쓰여진 문서로 추정되는 시라크 서문에도 나와 있다.

 

토라와 예언자들, 그리고 그것들 뒤에 나오는 다른 것(문서)들 (tou/ no,mou kai. tw/n profhtw/n kai. tw/n a;llwn tw/n katV auvtou.j hvkolouqhko,twn)

토라와 예언자들과 조상들의 다른 책들 (tou/ no,mou kai. tw/n profhtw/n kai. tw/n a;llwn patri,wn bibli,wn)

토라와 예언들과 성서의 나머지 책들 (o` no,moj kai. ai` profhtei/ai kai. ta. loipa. tw/n bibli,wn)

 

토라 (hr’AT)는 “Teaching, instruction”이라는 뜻이다. 명사형을 이루는 접두어 t를 뺀 hry는 “가르치다”라는 뜻의 동사이다. 이로부터 hr,Ah(부모), hr,Am(선생)와 같은 명사가 파생되었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일컫는 오경이란 기본적으로 “가르침”이란 의미이며, 더 나아가 그런 성격을 띈 문서라는 말이다. 이를 법(法)이니 율법(律法)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실제 일부 개신교인들 중에는 마치 유대교가 율법(律法)만 중시하는 종교라고 지래 짐작하는 경향이 있다. 앞으로 살피겠지만, 최소한 예수님 당시에는 그런 좁은 의미의 유대교 이해란 없었다고 말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정경 비판(Canonical Criticism)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한 샌더스(Sanders)에 의하면, 오경에서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vi] 하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며, 또 하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는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문제(Ontology)이며, 다른 하나는 윤리, 도덕적 측면의 현실적 문제(Ethics)를 다룬다고 보는 입장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은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 속한 여러 나라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신들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라 믿었다. 마치 고대 희랍 철학자 플라톤이 현상 속에서 불변하는 선(善) 혹은 궁극적 진리를 조명해 본 것과 유사한 논리다. 신약성서 히브리서 11:1-3 이나, 구약성서 사무엘 상 5-6장에 나타나는 법궤 이야기는 이런 이원론적 우주관을 잘 나타내 준다. 법궤를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빼앗기고 다시 돌려 받는 과정에 다곤 신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이스라엘의 신 야훼가 블레셋 신 다곤보다 강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이 일련의 사건은 앞으로 지상에서 펼쳐질 블레셋 부족에 대한 (다윗 왕국을 통해) 이스라엘의 승리를 예견한 신명기 사가의 신앙 고백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히브리 인들의 생각에, 인간은 신 혹은 하느님 (~yhil{a/)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믿었다. 즉,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하느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이 앞서야 된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참 자아를 발견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당시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믿음에 반대하는 의견, 철학, 관(觀)은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메소포타미아 우주관, 신관을 통해 엘(lae)로 알려진 최고 우두머리 신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요, 그 외의 신들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이라는 생각이 구약을 통해 나타나는 히브리 신론(神論)이다.[vii]

고대 근동 시대에, 전쟁에서 패함은 곧 패배자들이 섬기는 신의 무력함을 상징했다. 앞에서 본 야훼 신상과 다곤의 한 판 승부가 그렇고, 유다 멸망 (587 BCE)을 보는 이들의 생각이 그랬을 것이다.[viii]

창세기 1장은 포로기 혹은 그 후에 정리된 제사장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 야훼가 바벨론 신 마르둑에 패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며, 아울러 유대 멸망은 그들의 가치관 혼란을 야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창세기 1장은 새 꿈과 비전을 제시한다: “태초에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니라”(창 1:1). 하느님이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창 1:14-19), 또한 자신(들)의 형상을 좇아 인간을 만드셨다(창 1:26-27). 해와 달과 별들은 모두 신으로 받들어지는 형상들이다. 특히 셈족 언어인 vm,v,(해)는 고대 근동에 가장 널리 알려진 태양신으로, 열왕기 하 23:11에 따르면, 요시아 왕이 태양신 제사에 쓰인 말들(horses)을 제거했고, 에스겔 8:16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에서조차 제사장들이 태양신을 숭배했다고 기록한다. 결국 창세기 1장의 신학적 주장은 유다를 멸망케 한 바벨론의 신은 피조물일 뿐 신이 아니며, 이스라엘 하느님의 패배는 더더욱 아니라는 주장이다. 생각해 보라. 용기와 희망을 잃은 포로기 유대인에게 이 말씀이 주는 신학적 메시지를! 창세기 1장에서, 6000여 년이니 하는 인류 기원을 찾고자 한다면, 방향을 크게 벗어난 해석이다. 성서가 전혀 뜻도, 생각도, 말도 하지 않는 것을 성서의 이름으로 우기는 “내가 복음”이요 어리석음의 말기 현상이다. 창세기 1:1-13 사이에 3일간의 사건이 기록되었다 하자. 어떻게 제4일째 등장하는 해와 달도 없이 밤이 되고 아침이 됨을 말 할 수 있을까.

창세기 1-11장 신화와 설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된 사상 중 하나는 신들의 세계를, 그리고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신(들)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다. 성서를 가리켜 신화나 설화라고 말하면,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 중 펄펄 뛰며 흥분할 이가 있을 텐데 다음 설명을 보자.

 

신화(Myth)란 일종의 시의 형태나 진리를 선포한다는 면에서 시를 능가하고, 또 일종의 사고 능력이나 진리를 끄집어내고자 한다는 면에서 단순 사고 노동이 아니다. 또, 일종의 제사적 행위나 단지 그 행위에 그치지 않고, 시적 진리를 선포하고 설명한다는 면에서 제사 행위를 초월한다.[ix]

 

즉, 신화나 설화란 시, 잠언, 법조문, 예언, 신탁 등과 함께 고대 문학 장르에 속한다는 말이다.

창세기 12장 이후는 창세기 1-11장에 걸쳐서 소개된 신(하느님, 야훼)이 바로 이스라엘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강조한다. 아브라함을 통한 이스라엘의 선택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존재, 속성을 말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신들은 누구인가 하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종교, 철학적 성찰의 결과라는 면에 그 신학적 의미가 있다. 12-21장에 걸쳐 하느님이 과연 이스라엘의 신이 되기에 합당한가에 대한 물음이 계속되는데, 이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겠다.

모세를 통한 야훼의 소개(6:3), 또 출애굽 등 일련의 사건들은,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현실적, 실존적 질문에 대한 성서적 대답이요 가르침(토라)이다. 시내 산에서의 사건 등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블렌킨솝은 열 가지 generations (톨레돗, tAdl.AT) 형식을 빌어, 오경 내(內)의 레위기의 중요성 및 포로기 시대 배경을 밝혔는데,[x] 그 만큼 윤리 도덕적, 종교적 행위의 필연성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말로 “예언서”라 번역된 ~yaiybin>(Prophets)은 “예언자들”이라 옮겨야 더 정확하다. (여기서는 편의상 예언서로 부르기로 한다.) 예언서에는 전기, 후기 예언서가 있다. 전기 예언서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를 일괄 통칭하며, 그 순서는 집필자 연대순에 따른 것이라 생각했다.[xi] 후기 예언서는 보통 “The three and the twelve”라 부르는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대(大) 선지서와 열 두 소(小) 선지서를 일컫는다. 외경 시라크(집회서) 48:23; 49:6,8,10 등에 이미 토라와 예언서, 대소(大小) 선지서가 구분돼 있다.

여호수아 1:7-8은 모세 이후 지도자로 지명된 여호수아에 대한 말씀이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에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니라 네가 형통하리라(개역 한글).

 

어떤 새로운 계명도, 정치적 공약도 나타나지 않고, 단지 이미 주어진 토라에 충실할 것만 강조한다. 예언서의 끝을 이루는 말라기 3:22에서도 모세를 통해 소개된 토라는 반복된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개역 한글 4:4).

“예언자들은 … 근본적으로 그들을 앞서 산 현자들과 같은 기능을 가졌으니, 곧 토라를 보호, 전수하는 일이었다”고 블렌킨솝은 본다.[xii] 열왕기하 17:13은 이를 잘 나타낸다: “야훼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열조에게 전한 모든 가르침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그러나 예언자들이 단지 수동적으로 “율법”을 지키기만 할 뿐은 아니었다. 아모스 5:26; 이사야 1:10-17; 예레미야 6:20 등의 말씀은 신명기 18:1-8; 레위기 1-7장; 민수기 28-29장들과 직접적으로 대치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토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가르치는 생활 지침서라면, 예언서는 이 토라를 둘러싸고 이를 보호, 전수할 뿐 아니라, 후대에 맞게 새로운 해석을 가(加)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성문서(Writings, ~ybiWtK.)는 문자적으로 볼 때 “쓰여진 문서들”(Those that are written)을 말한다. 예언서와 달리 토라와의 직접적 유대 관계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 권위가 예언서만큼 크지 못 했는지 모르겠다. 성서에서 “토라와 예언서”라는 표현은 종종 접할 수 있으나 (단 9:2; 2 마카비 15:9; 마 5:17; 7:12; 11:13) 토라, 예언서, 성문서를 함께 일컫는 표현은 볼 수 없다. 두 가지 면에서 설명이 가능 한 데, 하나는 예언서와 성문서 구분 없이 예언서라는 표현이 이 둘을 함께 지칭했다는 생각이며, 다른 하나는 성문서라 지칭할 문서들(body of literature)이 당시에 아직(혹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가설이다.[xiii]

성문서는 시편, 욥기, 잠언과 다섯 개의 절기 문서들(룻기, 아가(雅歌), 전도서, 예레미야 애가(哀歌), 에스더),[xiv] 그리고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 상하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다니엘서가 개신교의 성경과는 달리 예언서에 속하지 않고 성문서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성문서의 특징 중 하나는 어느 하나 예언서에서 보듯 하느님이 앞으로 어찌 행동할 지에 대한 성찰(reflection)이 없다는 점이다. 다니엘이 예레미야서를 읽는 중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의 뜻을 발견했다(단 9:2)는 사실은 ①에스라 이후 예언의 중단과 ②토라와 예언서를 통해 자신들의 문제점들에 대한 답을 구했다는 점을 나타낸다.[xv] 이렇게 토라와 예언서를 읽고, 지켜 시험과 환난을 이기는 지혜가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를 통해 가르치는 점이다. 다니엘서 하면 7장을 떠올리는 뭇 교회의 가르침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성문서의 첫 장을[xvi] 이루는 시편 1:2에서도 토라의 중요성(central position)은 강조된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보통 시편 1-2 편이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이해하는데 이 가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그 위치 상으로 볼 때 시편 1 편에서 강조한 토라의 중요성은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상에서 본 바와 같이, MT는 토라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예언서를, 그리고 그 주위에 성문서를 배치하는 동심(同心, concentric) 구조를 취한다. 이스라엘의 자아의식 (철학)과 삶의 방향 (윤리)을 설정해 주는 토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도식에는 기독교나 회교에서 믿는 또 다른 예언자의 등장이 불가하다. 문제나 질문이 있는가? 토라를 읽으라 그 말이다.

 

  1. 칠십인 역의 구성과 이해

이미 앞에서 지적한 대로, LXX은 MT에 없는 여러 문서들을 포함하고, 그 배열 순서 또한 일정치 않다. 같은 책이라 할지라도 형식과 내용 면에서 적잖은 차이를 보이는데, 책이름의 변화, 다른 순서 배열, 내용의 가감(加減), MT와 서로 다른 히브리 본 사용 등등을 들 수 있다.[xvii] 예를 들어 예레미야의 경우, LXX는 MT보다 약 1/7 가량 짧고, 소위 말하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신탁도 LXX에서는 26-32장에, MT에서는 25:15-38(LXX 32)와 46-51장에 걸쳐서 나타난다. LXX가 MT보다 짧다는 사실은 LXX가 일반적으로 보충 설명적 성격을 띈 번역본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간과할 수 없는 발견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LXX의 예레미야서가 MT의 그것보다 오래된 사본에 기초하여 번역되었다 주장한다.[xviii]

MT와 달리, LXX가 오경, 역사서, 시문/지혜서, 예언서라는 4단계 구조(fourfold division)를 갖추고 있다.[xix] LXX 사본들의 다양한 형태 중에도, 이 4단계 구조는 공(共)히 나타나고, 특히 제일 많이 읽히던 바티칸 사본의 경우, 예언서가 가장 나중에 배치되어 있다. 오경을 고대 역사에 속한 문서로 보면, 구약성서가 반드시 시대적으로 배열되었음이 아닐지라도,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관여가 점진적으로 발전 내지는 구체화되어 간다는 점이다. 또 그 범위(scope)가 점차 우주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MT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에 의해 좁은 히브리 문화권에서 더 넓은 헬라 문화권으로 소개되는 과정에서 오는 적절한 적응 혹은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기억할 것은, 본래의 LXX는 서기 전 3세기에 쓰였다 할지라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온전한 사본인 바티칸(B), 시내(a), 알렉산드리아(A) 사본 등은 서기 4세기 이후에 쓰여졌다는 사실이며,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LXX에서 나타나는 4단계 구성이란 초기 기독교인의 구약 이해를 반영했다는 것이다.

집회서 서문에서도 밝히듯, 히브리어를 직역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일뿐만 아니라 종종 무의미 할 때가 있다.

 

나는 여러분이 이것에 흥미를 가지고 주의 깊게 읽어 주기를 바라며,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구절의 번역이 혹 잘못되었으면 널리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원래 히브리어로 표현된 말을 다른 언어로 번역에 놓으면, 그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수가 많다(ouv ga.r ivsodunamei/ auvta. evn e`autoi/j Ebrai?sti. lego,mena kai. o[tan metacqh/| eivj e`te,ran glw/ssan; for things spoken in Hebrew itself [themselves] do not have equal power, whenever translated into another language). 이것은 비단 이 책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예언서와 그 외의 다른 저서들, 심지어는 율법서마저도 그 번역서와 원서와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공동번역).

 

실제 구약 성서의 한 책을 MT와 LXX로 함께 비교, 분석한 이들은 LXX에서 문자적 직역 외에 의역 또는 주석에 가까운 번역을 대할 것이다.[xx] 그러므로, LXX은 단순한 번역(들) 그 이상이며, 따라서 키텔(Rudolf Kittel)은 LXX을 신학적 주해(theological commentary)라 부르기까지 했다.[xxi]

LXX는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의 번역의 결과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완성된 개 개의 책들을 모은 것임으로, 그 일관된 신학 혹은 사상을 말하기는 무리다. 단지 눈에 띄게 당시 시대 배경 속에 일어나는 중대한 신학적 변화 중 하나는 유대 교파에 등장하는 메시아 사상이다.[xxii] 이 사상이 종종 번역자의 펜을 바꾸어 놓았고, 이를 읽는 신약성서 저자들의 구약 이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었다.

 

  1. 구약과 신약

기독교 구약 성서들이 예언서를 끝에 배치함으로써 오실 메시아의 사상을 강조했다면, 신약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체화, 현실화했다. 이미 마가복음에서, 세례 요한의 등장을 엘리야의 모습으로 그림으로써 말라기 예언(3:24// 막 1:2)을 성취시켰다. 마가복음 1:6에 의하면,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 하 1:8은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의 종들이 묘사한 엘리야의 모습이다: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개역 한글).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지만 이는 마가복음 저자의 풍부한 상상력의 결과이다.

마가복음 1:3 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 40:3을 MT에 있는 대로 읽으면,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야훼의 길을 예비하라”( fwnh. bow/ntoj evn th/| evrh,mw| e`toima,sate th.n o`do.n kuri,ou euvqei,aj poiei/te ta.j tri,bouj tou/ qeou/ h`mw/n)고 쓰여 있고, 한편 마가복음 1:3 에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fwnh. bow/ntoj evn th/| evrh,mw|\ e`toima,sate th.n o`do.n kuri,ou( euvqei,aj poiei/te ta.j tri,bouj auvtou/)고 쓰여 있다. 물론, 마가복음의 저자는 LXX을 통해 구약을 읽었다.[xxiii] LXX 이사야 40:3는 “너희 하느님의”(tou/ qeou/ h`mw/n) 그리고 마가복음 1:3은 “그의”(auvtou/)라고 쓰고 있다. “주의 길”(th.n o`do.n kuri,ou)은 똑같이 써있다. 보통 LXX에서 “주”(ku,rioj)는 야훼(hA’hy>)를 유대인 전통에 따라 번역한 것이며,[xxiv] “하느님(qeo,j)은 엘로힘(~yhil{a/)의 번역이다. MT와 마찬가지로, LXX에서는 “주의 길”에서 “주”와 “너희 하느님”이 동격으로 쓰인 반면, 신약 성서에서는 예수를 “주”로 부름으로써 야훼, 곧 구약의 하느님과, 예수를 동일시했다. 물론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막 1:1)한 초대 교회의 산물이다. 여기에, “광야”라는 단어를 외치는 자의 생활 공간으로 이해함으로써, 엘리야의 광야 생활을 세례 요한의 그것과 기막히게 접목시켰다(막 1:3-4).

결국 세례 요한의 등장은 당시 대다수의 유대교 지파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언서의 연장선상에 있으며[xxv] 예수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었다. 로마서 10:4에서는 예수가 “율법의 마침”(개역 한글) 또는 예수로 인해 “율법은 끝이 났고”(공동번역)라 번역하는데, 이는 헬라어 te,loj를 너무 일방적으로 이해한 결과라 여겨진다. te,loj는 시작의 반대말인 “끝, 마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성취, 목적, 결과”를 뜻하기도 한다. 즉, 폐함 또는 거부의 의미가 아니라 절정 또는 완성의 의미이다. 이렇게 읽는 것이 바울이 앞서 말한 율법(?)이 거룩하고, 선하고, 의롭다(롬 7:12)는 뜻에도 맞고, 누가복음 22:37에 말한 “이루어짐” (te,loj)과도 통한다. 현대 히브리 신약 성경(Salkinson-Ginsburg Hebrew New Testament)에서 누가복음 22:37의 te,loj e;cei를 AMTu-d[; ~Wqy” (“온전히 이루리라”)로 풀어 쓴 것(paraphrasing)이나 또, 로마서 10:4의 te,loj를 목적, 목표를 뜻하는 타크리이트(tylik.t;)란 명사를 써 표현한 것도 같은 의미에서 일 것이다. 히브리인들에게 토라가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듯, 예수가 기독교인들의 삶을 가르치는 토라가 된다고 이해하면 어디 덧날까?

구약성서가 네 단계 구성을 통해 수평적, 점진적(linear and progressive) 성격을 취하였듯이 신약에서도 유사한 패턴을 찾을 수 있다. 즉, 복음서는 오경에 해당하고, 사도행전은 역사서에, 서신들은 시편/지혜 문서에, 그리고 예언서는 계시록에 비교할 수 있다. 유대교에서는 하느님 계시(啓示)의 결정체(結晶體)가 토라(오경)에 있다고 믿는 반면, 기독교에서는 그 절정을 예수의 삶(복음서)에서 찾는다. 신약의 눈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구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글로 또 신약은 다시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글로 마무리 지고 있는 것이다.

  1. 맺음말

이상은 성서를 있는 그대로 읽으려는 노력의 결과다. 성서를 신구약으로 읽지 않고, 구약 그리고 신약의 순서로 읽었다는 뜻이다. 히브리 성서가 보여 주듯, 예언서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토라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또한 사해 근처 쿰란 공동체나 다른 유대 교파들의 작품에서도 성서가 자신들의 상황 속에서도 성서로써 작용할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칠십인역 또한 그 결과이다. 그렇다면, 구약을 신약 시대에 맞게 읽으려는 노력은 이해할 수 있으나, 신약을 통해 구약을 읽는 것은 시대를 역행(anachronistic)하는 행위이다. 신약성서에서 메시아 사상을 예수 사건과 더불어 새롭게 적용시키는 해석은 늘 있어 온 성서 해석의 한 방법이나, 구약이 예수 사건을 예견했다고 주장하고 그 안에서 구약을 이해하려고만 한다면, 얼토당토않은 얘기다. 성서를 근본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며, 인간의 기본적 사고 능력의 상실이다.

이제는 성서를 공부하고 연구할 단계이다. 그리고 새 시대에 맞는 뜻을 창출할 단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활성화되고 있는 역사적 예수 연구는 환영할 만하다. 성서에서 답을 찾자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가 말하는 성서는 수많은 성경들 중 어느 하나만 꼬집어 말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 있는 독자는 읽었으리라.)

이를 위해 성서 언어(히브리어, 헬라어)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근 들어 북미에서는 신학교에서조차 성서 언어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참으로 슬픈 현상이다. 내가 성서를 읽고 이해할 수 없으면 번역본에 의존해야 아는데, 그 번역 자체가 또 하나의 해석이기 때문에 성서를 직접 읽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모든 번역이란 일종의 해석 행위이기 때문이다(Every translation is an act of interpretation). 만일 번역본마저 읽지 않고, 남의 해석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면, 그 삶은 주체성을 잃은 노예의 삶과 같다. 또 그런 설교자를 도둑에 비유하였다 (렘 23:30). 아직도 성서의 무흠(無欠) 무오(無誤)를 말하고 그 일점일획(一點一劃)에 오자가 없다고 믿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 성경을 보여달라고. 아마도 19세기말 카이로 게니자, 20세기 나그하마디, 사해문서 발굴 등을 훨씬 능가하는 천지개벽이래 최대의 사건이 될 것이다. 만일 보여줄 수 없다면 자신들에서 주어진 성서를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고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다.

 

 

구조분석과 성서해석

(Structure Analysis as a means for Biblical Exegesis)

박원일(Aaron W. Park) 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Adjunct Professor/구약학

 

(아래의 글은『세계의 신학』61 [2003/겨울] 63-78에 실린 원고를 확대한 것이다.)

 

 

  1. 머리말

 

해석이란 두 인격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의사전달 행위로, 그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혹은 어느 편을 중시하는가―에 따라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텍스트 이면(behind-the-text), 텍스트 내면(in-the-text), 텍스트 정면(in-front-of-the-text). 이는 고전 수사학에서 말하는 저자/화자, 텍스트, 독자/청중, 각각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1) 텍스트 이면(behind-the-text)은 텍스트를 산출한 배경에 대한 연구로, 저자의 의도, 사회/종교/정치/문화적 배경을 살피는 일이다. 고고학, 비교종교학, 고대 역사학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소위 일컫는 대부분의 역사비평 방법이 이에 속한다.2) 텍스트 내면(in-the-text)이란 현재의 텍스트 자체를 연구하는 것으로, 언어의 성격, 배열, 기능을 통한 문장/문서 속에 드러난 의미를 구하는 작업이다. 이는 본래 저자의 의도와 다를 수 있으며, 수사학 등 역사비평 이후 등장하는 대부분의 새로운 “문학비평”이 이에 해당한다.3) 텍스트 정면(in-front-of-the- text)은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의미를 말하며, 실제로는 모든 이해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4)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는, 해석학에서 독자의 기능을 한층 높인 독자반응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을 가리킨다. 원 저자의 생각/뜻과 그에 대한 독자의 이해 사이에는 커다란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있음으로, 각각의 논리는 모두 타당하며, 서로 상충(相衝)하기보다는 상호보완하는 쪽으로 이해함이 옳다. 해석의 세 분야―텍스트 이면, 텍스트 내면, 텍스트 정면―를 예수와 신약성서연구에 적용하면, 역사적(historical) 예수, 정경적/성서적(canonical/scriptural) 예수, 교리적/고백적(dogmatic/confessional) 예수로 나누어 비교할 수 있겠다.

나는 이 중에 텍스트 내면(in-the-text)의 세계를 살피는 데 초점을 둘 것이며, 이는 다른 두 분야의 연구를 무시 혹은 경시해서가 아니다. 해석 작업이란―더욱이 그 대상이 누구에게나 읽히는 성서의 경우에는―한 사람, 하나의 방법론으로는 온전히 이룰 수 없는 역사적, 범인류적 행위이다. 다만 위에 열거한 세 분야 중에서 본문 연구에 일차적 관심을 두는 이유는 현존하는 문서를 통해 그 의미를 독자/주석자들 사이에 비교, 검토, 반성해 볼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주석입문서에서는 종종 주석(exegesis)과 사석(eisgesis)을 필요 이상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는데, 주석자들은 어떤 주석이던 엄격한 의미에서 일종의 사석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5) 독자/주석자가 나름대로 본문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없이는, 처음부터 해석 작업에 발을 들여 놓지 않을 것이며, 또한 독자/주석자의 상황과 필요에 맞지 않는 해석은 결국 기억에서 사라지고 그 의의를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해석 방법론적 연구는 이미 잘 알려져 있음으로,6) 여기서는 구조분석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예를 구약과 신약에서 들며, 단계별로 소개하고자 한다.

 

  1. 구조분석

 

구조분석은 궁켈(Gunkel)로부터 비롯된 양식비평(From Criticism)의 연장으로, 1970년대 초 모일렌버그(Muilenburg) 이후에 등장하는 수사비평과 함께 새로운 문학비평의 전기(轉機)를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모일렌버그는 1968년 북미주 성서학회 회장 취임 당시 발표한 논문에서 양식비평의 부족함을 메울 대안으로 새로운 문학비평론을 폈다.

 

무엇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히브리 문학 작품의 성격을 이해하고, 문학 단위-시든 산문이든-를 이루기 위해 쓰인 구조적 패턴을 밝히며, 또한 모든 서술을 질서 있게 배열하여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만드는 여러 많은 문학적 고안(devices)를 살피는 일이다. 그런 작업을 나는 수사학으로, 또 그런 방법론을 수사 비평이라 묘사해야 할 것이다.7)

 

크니림(Knierim)은 이에 응하여, 구조분석을 통해 양식비평의 새로운 장을 모색했다.8)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양식비평은 대표적 양식(typical form)에 초점을 맞춤으로 해서 텍스트가 갖는 개별적 성격을 간과했고, 또 양식의 구전성(orality)에 초점을 둠으로 문학적 성격(textuality)를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 “삶의 자리”(Sitz-im-Leben)라는 이해 역시 재분석의 여지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사회적, 제도적 환경(setting)으로만 이해된 “삶의 자리”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모하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고, 문학적 콘텍스트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또한, 크니림은 성서의 주석, 신학, 해석학을 구별해 논하는데, 주석을 “성경 본문을 그 자체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우리와는 다른 의도적인 구별성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으로, 또 해석은 폴 리쾨르(Paul Ricoeur)를 인용하여 본문의 형식과 내용을 넘어 신학적, 철학적 영역으로 이해한다.9)

수사비평과 구조분석의 공통점은 둘 다 현 텍스트의 문학적 성격을 살핀다는 데에 있다. 차이점은 수사비평은 내용과 주제에 치중하는 반면, 구조분석은 형식에 보다 비중을 둔다는 것이다.10)

캠벨은 다음의 예를 통해 두 분석의 차이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내용분석 구조 분석
인물, 지명, 시간 서론
율법준수의 중요성 권면
번영과 평안의 약속 동기
거짓말과 도적질에 반대하여 금지
왕의 죽음 결론

캠벨은 구조분석을 “저자 마음속에 있는 생각의 틀을 그려내는 행위”(recapturing the outline that was in the author’s mind)로 보았다.11) 더 정확히 말해, 문서상에 나타난 편집자의 생각을 말한다. 현실적으로, 주석자가 만나는 문서 속의 편집자의 생각이 원 저자의 생각과 일치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또한 편집자의 의도 역시 독자에 따라 그 이해가 다르며, 또 같은 주석자라도 같은 텍스트에서 매번 다른 생각을 그려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분석이라는 방법을 통해, 우리는 보다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접근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III. 구약의 예: 암 1:1-2과 1:3-5

 

아모스 1장 1-5절은 주석을 위한 문장 구성단위로는 다소 어색한 면이 있으나, 구조 분석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예문으로 택했다. 이를 통해 암 1:1-2과 암 1:3-5이 왜 구분되는지 또 서로 어떤 유기적 관계를 갖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아모스 1:1-2

hY”ZI[u ymeyBi hz”x’ rv,a] [:AqT.mi ~ydIq.NOb; hy”h’-rv,a] sAm[‘ yreb.DI

laer’f.yI %l,m, va’Ay-!B, ~[‘b.r’y” ymeybiW hd’Why>-%l,m, laer’f.yI-l[;

`v[;r’h’ ynEp.li ~yIt;n”v.

~y[iroh’ tAan> Wlb.a’w> AlAq !TeyI ~?l;v’WrymiW ga’v.yI !AYCimi hw”hy> rm;aYOw:

`lm,r>K;h; varo vbey”w>

 

개역한글: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 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공동번역:  드고아에서 양을 치던 목자 아모스의 예언집. 그는 이스라엘이 어찌 될지 계시를 받고 그대로 예언하였다. 우찌야가 유다에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서 왕위에 앉아 있던 때로서 지진이 있기 바로 이 년 전이었다. 아모스가 말했다. 야훼, 시온에서, 예루살렘에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시니 양떼 풀 뜯던 목장이 탄다. 가르멜 산마루의 풀이 시든다.

 

표준새번역: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가 전한 말이다. 그가 이스라엘에 일어난 일의 계시를 볼 무렵에, 유다의 왕은 웃시야이고, 이스라엘의 왕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었다. 그가 계시를 본 것은, 지진이 일어나기 이 년 전이다. 아모스가 선포하였다. “주께서 시온에서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 큰소리로 외치시니, 목자의 초장이 시들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른다.”

 

먼저 히브리성서의 문장 구조를 살펴보면, 아모스의 말씀(yreb.DI sAm[‘)이 두 개의 관계대명사(rva)에 의해 수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관계대명사는 아모스라는 인물에 대해 설명하고([:AqT.mi ~ydIq.NOb; hy”h’-rv,a]), 두 번째는 그의 말씀을 수식하는 구절이다(hz”x’ rv,a]). 또한 두 번째 구절은 예언의 성격(hz”x’) 외에 그 시기를 두 가지로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는 두 왕조를 함께 표기하는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왕정시기요 다른 하나는 구체적 시기(“지진 이 년전”)이다. 한 편 2절은 아모스의 말을 전달하는 형식으로 짜여 있다. 그러므로 2절 전반부(2a)는 리포트 형식구를 이루며, 후반부(2b)는 아모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를 구조 분석하여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아모스 예언의 서문                              1:1-2

  1. 소개문1:1
  2. 제목: “아모스의 말씀”                       1:1aα
  3. 제목 부연 설명1:1aβ-b
  4. 예언자에 관하여:                         1:1aβ
  5. 예언에 관하여:                           1:1b
  6. 예언의 성격1:1ba
  7. 예언의 시기1:1bb-b
  8.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왕정 시기
  9. 구체적 시기
  10. 주제: 보고 형식1:2
  11. 보고 형식구―“그가 말하기를”                1:2a
  12. 아모스의 말1:2b

 

우리말 성경 번역본 중에는 개역한글이 히브리 문장구조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개역한글은 히브리 성서처럼 두 개의 맞춤표로 이루어져 있으나,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은 각각 여섯 개와 다섯 개의 맞춤표를 사용함으로 문장 구조를 바꾸어 놓고 있다.

구조분석을 할 때에 주의해야 할 점은 화자(speaker)와 청중(audience)을 구분하는 일이다. 종종 학생들에게 암1:1-2를 읽고 누가 말하고 있는가 물으면, 별 생각 없이 “하나님” 혹은 “아모스”라 답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문맥을 따라 자세히 읽으면, 아모스는 2절에서나 등장하며, 그것도 후반부 인용절에서 나타난다. 야훼는 3절 이 후에나 나타나며, 이 모든 것은 제 삼자 곧 편집자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러므로, 예언서를 읽을 때 편집자의 의도를 살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점인데, 이는 야훼의 말이나 예언자의 말이 편집자의 신학적 의도에 의해 재편성되었을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 점은 나머지 암 1:3-9:15를 전부 분석하여야 보다 명확해지겠지만, 여기서는 1:3-5만 살피기로 한다.12)

3절은 문맥상 2절과 분리된다. 이는 먼저 그 형식이 독립절로 이루어져, 새로운 문장을 이룸으로 알 수 있다. (2절은 접속사 바브[w]에 의해 1절에 연결되어 있다.) 또한 3-5절은 신탁 예언 형식으로 다메섹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다. 이 후 2장 끝까지는 각 나라에 대한 심판이 비슷한 구조를 통해 나열됨으로, 1:3-5은 구조상 1:3-2:16에 속함을 알 수 있다. 3절 이후에 등장하는 아모스의 말과 그 속에 담긴 야훼의 말은 1-2절의 편집자의 말과 구분된다. 1:3을 시작하는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은 9장 15절 “주의 말씀이니라”와 더불어 ‘문단 둘러싸기’(literary inclusio)를 이룬다. 곧, 아모스서는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뉠 수 있는데, 1:1-2의 편집자 서문은 이 후에 등장하는 1:3-9:15의 아모스 예언을 소개함과 동시에 독자들에게 해석학적 도움을 제공 (혹은 경계를 설정)한다. 1:1-5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절수 문학양식 및 주제 청중 화자
야훼 예언자 편집자
1 서문 머리말 x
2 a 주제 아모스의 말 x
b 전달형식구 x
3 aa 다메섹에대한 심판 메신저 형식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x
메시지 일반적 서술 x
정죄 x
심판 x
특수 서술 x
정죄 x
심판 x
5 bb 메신저 형식구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x

이 도표는 처음 구조 분석을 대하는 이들에게 스스로 연구할 기회를 준다. 오른쪽에 있는 청중과 화자를 통해, 1-2절과 3-5절이 구분됨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야훼의 말이 예언자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형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2절 혹은 3-5절은 주석의 단위(literary unit)로 삼을 수 있으나, 2-4절을 주석 (혹은 설교)의 대상으로 선택한다면 논리상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2절은 문맥상 1절을 통해야 이해가 가능하며 (제3인칭 “그”는 1절과 연결돼 있음으로), 4절은 5절과 더불어 하나의 문학 단위를 이루기 때문이다.

가운데 칼럼의 “문학양식 및 주제”는 문학 단위를 형식(form)과 내용(content)에 입각해 분석한 것이다. 왼쪽 칼럼은 보다 큰 구조단위로, 주로 문학적 장르, 형식을 나타내고, 오른쪽은 보다 자세한 내용을 말한다. 가장 왼쪽에 있는 칼럼은 절수를 표기함으로, 전체 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하였다.

 

이 도표가 암시하듯, 구조상 큰 틀이 그 안에 속한 작은 틀의 이해를 지배한다. 즉, 내용은 형식의 지배를 받는다. 재미있는 예를 들어보자. “조의,” “축결혼,” “등록금”이라 쓰인 세 개의 봉투에 각각 5만원씩 넣었다 하자. 그 내용은 변함없는 5만원이지만 그 용도/의의는 형식을 이루는 바깥 글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아모스 1:1-2은 1:3-9:15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해석학적 단서를 제공한다. 비록 아모스서의 내용은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지만, 유다의 입장에서 본 예언이란 점이 중요하다. 이는 1절에서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왕정 시기를 표현하는 과정에 유다 왕 웃시야가 먼저 등장함이 그렇고, 2절에서 “시온”과 “예루살렘”을 말함으로 심판하시는 야훼가 유다의 수도―왕의 도시―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곧, 서문(1:1-2)에서 이미 본문(1:3-9:15)을 이해하기 위한 해석학적 발판을 제공하고 있다. 독자가 이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본문 해석과는 별도인 독자반응비평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본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편집자의 의도를 살피는 일은 성서의 정치적, 사회적 입지를 살피는 매우 중요한 임무이다.

 

  1. 신약의 예: 주기도문

 

9 ou[twj ou=n proseu,cesqe u`mei/j\ Pa,ter h`mw/n o` evn toi/j ouvranoi/j\ a`giasqh,tw to. o;noma, sou\

10  evlqe,tw h` basilei,a sou\ genhqh,tw to. qe,lhma, sou( w`j evn ouvranw/| kai. evpi. gh/j\

11 to.n a;rton h`mw/n to.n evpiou,sion do.j h`mi/n sh,meron\

12  kai. a;fej h`mi/n ta. ovfeilh,mata h`mw/n( w`j kai. h`mei/j avfh,kamen toi/j ovfeile,taij h`mw/n\

13 kai. mh. eivsene,gkh|j h`ma/j eivj peirasmo,n( avlla. r`u/sai h`ma/j avpo. tou/ ponhrou/

 

9  Pray therefore in this way; Our Father who is in heavens; let you your name be sanctified;

10  let your kingdom/reign come; let your will be/become/take place, as (it is) in heaven and on earth;

11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12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13  And do not lead us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소서;

10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하늘과 땅에서처럼13)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12 또한 우리 역시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사(赦)해 준 것처럼, 우리의 빚을 사(赦)해 주소서;

13 또한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지 마시고, 악한 자로부터 구하소서.14)

본문번역 및 분석

번역은 일종의 해석 행위이다. 그렇기에, 주석자는 본문을 자기의 말로 이해할 뿐 아니라, 명확하게 독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개역한글,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등에서 볼 수 있듯, 번역은 반드시 일치하지도, 또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주석자의 역본 선택에는 그 이유가 분명해야 하며, 본문에 관한 한 서로 다른 역본들의 차이점을 이해하기에 힘써야 한다.

먼저, 문장 구성을 살펴보면, 9절은 양식과 내용 면에서 앞 절과 구분된다. “그러므로”(ou=n)는 논리 전개상 결론에 해당하는 표현 양식이다. 즉, 9절은 5-8절에 대한 마지막 논조의 성격을 띠며, 8절의 “그러므로”(ou=n)는 1-7절에 대한 결론이다. 8-9절은 함께 다룰 수도 있으며, 그럴 경우, 9절은 8절을 보충 설명하는 형식으로 이해하면 된다.

13절은 14절과 구분된다. 구문상(syntactically) 13절은 접속사 “그리고”(kai,)에 의해 12절과 연결되며, 14절은 독립절로 13절과 떨어져 있다. 주제상(thematically) 9-13절은 기도에 관해, 14절은 용서에 관한 말씀이다. 14절은 앞에서 계속된 예수의 가르침의 연속이다. 또한 9-13절은 하나의 맞춤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전에는 8절에, 또 기도문 이후에는 14-15절에 각각 맞춤표가 나타난다.15)

9-13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9a는 명령(command)이며, 9b-13절은 그 명령의 세부 내용이다. 9-10절에서는 “당신”이라는 단수, 11-13절에서는 “우리”라는 복수를 쓰고 있다. 즉, 두 개의 독립된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형식상 9-10절은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의 다스림을 다루며, 이는 유대 캇디쉬 기도문이나 계시록(11:15; 12:10) 등에서도 볼 수 있다.16) 주목할 것은, “하늘과 땅” (Matt 6:10//Didache 8.2a)이라는 문구가 이 기도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는 눅 11:2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17) 11-13절을 한 단위로 이해하는 또 다른 이유는 12절과 13절에 접속사 kai,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12절에서 부정(不定)과거형(Aorist)을 쓰고 있다. 즉, 우리가 남의 빚을 탕감해 준 것이,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앞선다. 간구 이전에 자신의 선행을 고백하는 것은 신명기 26:13-15에서도 가르치는 바다. 또한 계속되는 마 6:14-15절은 이런 생각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일부 개신교의 믿음 중심의 교의학을 바탕으로, 이런 믿음과 행위를 양분화하는 해석은 시대를 역행하는[anachronistic] 행위이다.)

13절의 “악한 자”(the evil man-남성)는 “악한 것”(the evil one-중성)으로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말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명사형은 아니며 추상적 의미의 악(포네리아-ponhri,a 여성형)은 더더욱 아니다.18) 그러므로 이것을 죄, 죄악, 혹은 그런 초자연적 권세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전혀 본문과 관계없는 해석이다. 아마도, 여기서는 그런 힘을 가진 남성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 악한 자가, 당시의 정치가를 의미했는지는 본문에서 알 수 없다.19)

또한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지 마시고”가 독자의 눈길을 끈다. 다음의 번역본들을 보자.

 

개역한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공동번역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NRS   And do not bring us to the time of trial, but rescue us from the evil one. (종말론적 이해?)

RSV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헬라어 페로(fe,rw)는 타동사로 “들어 옮기다”라는 뜻이다. 여기에 접두어 에이스(eivj)를 붙어서 “…속으로 끌어들이다”라는 의미이다. 현대인에게는 당혹스러운 표현이지만,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하느님중심 사상의 표현이다. 하느님은 악령을 보내 사람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사사기9:22-23; 삼상 18:10; 삼하 24:1; 왕상 22), 그들을 적극적으로 시험하거나 그 일에 암암리에 관여한다(창세기 22장; 욥기 1-2장; 마 4:1-11). 하느님이 시험을 주관한다는 생각이 RSV와는 달리 개역한글과 표준새번역에서는 약화되었고, 공동번역에서는 아예 삭제되었다.20)

 

이상의 분석을 도표로 그리면, 아래와 같다.

 

구조분석

 

주기도문                                    마 6:9-13

  1. 명령 Command to Pray                         9a
  2. 명령의 내용 Command Proper                  9b-13
  3. 호명(呼名) Address                         9bα
  4. 기도 Pray                                  9bβ-13
  5. 하느님에 관하여: 3 인칭 명령형9b-10
  6.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짐9b
  7. 나라가 임함10a
  8. 뜻이 이룸10b

1) 주절: 간구―뜻이 이룸               10bα

2) 종속절: 고백―하늘과 땅에서처럼     10bβ

  1. 인간에 관하여: 2 인칭 명령형11-13
  2. 양식을 주시고11
  3. 빚을 사(赦)하시고12

1) 주절: 간구 빚을 사(赦)하시고        10bα

2) 종속절: 고백―우리 역시 사(赦)해주었음    10bβ

  1. 악에서 구하시고13

1) 주절: 부정문                       10bα

2) 종속절: 긍정문                     10bβ

구조분석을 통해 얻는 주석의 가치

첫째, 대다수 역본에서는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라고 번역하며, 이 대조문구는 역자의 이원론적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 양식비평상(form-critically) 소원/간청의 의미보다 고백/찬양의 의미가 짙다. 그러나 헬라어 문맥(syntax)을 따라 읽으면, “하늘과 땅에서처럼, 당신의 뜻이 임하소서”가 보다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래야 헬라어 카이(kai,)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된다. 영어나 우리말에서는 그 의미가 상실되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하늘에서―땅에서 조차―처럼, 당신의 뜻이 임하소서”이다. 마치 ‘하늘에서 이룬 혹은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뜻이, 지구상에서도 현재 혹은 앞으로 이루어진다’는 고백이 아니라, 하늘은 물론 땅에서 조차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간청의 뜻이다. 어디에서? 설명은 없지만, 내 생활 속에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21)

둘째, 이 기도문은 특별한 주술(呪術)도 암기 교본도 아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다. 이것(tou/ton<ou-toj)을 기도하라가 아니고, 이렇게/이와 같이/이런 식으로(ou[twj) 기도하라는 가르침이다.22) 우리가 모임에서 주기도문을 (주문 외듯) 되풀이하는 것이 전자에 속한다면, 주기도문 속에 본보기로 보여준 예수님의 의식을 가지고 시대에 따라 새롭게 변화, 적응하는 삶과 기도가 본문에 입각한 해석이다. 여기서 기도하라(proseu,cesqe)의 현재명령형은 부정과거형과는 달리 지속적이며, 습관적인 행위를 의미하며, 이는 기도 생활을 말한다.

셋째, 간구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양식, 죄/빚, 악/위기를 다루며, 이는 인간이 기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활 여건을 지칭한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의 가르침(왕상 3:11-12)은 생존의 위기 속의 극빈자들(ptwcoi,)에게는 사치스러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마 6:29). 주기도문에 등장하는 간청과 기도란 기본적인 생필품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소수 권세 잡은 이들이 지배하는 제국을 비판하는 것이다.23)

 

 

 

[i] 아래의 구절들은 아람어로 쓰여졌다: 창 31:47 (일부); 렘 10:11; 스 4:8-6:18; 단 2:4b-7:28; 막 15:34b 그리고 계 22:20b 역시 아람어를 소리나는 대로 표기한 것이다.

[ii]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1장 3 단원에서, “소위 숨겨진 것들이라 불리는 책들은, 영감을 받지 않은 것들로, 정경에 속하지 않는다. 고로, 하느님의 교회에 아무 권위가 없고 일반 사람들의 책들과 다르게 구별되거나 소용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Philip Schaff and David S. Schaff (eds.),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3 (Harper and Row, 1931; Grand Rapids, Baker, 1985) 602.

[iii] LXX의 두 대표적 사본인 바티칸 본(B), 알렉산드리아 본(A)의 순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Henry Barclay Swete,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in Greek (rev. Richard Rusden Ottle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4) 201-2. 다니엘서와 함께 대 선지서가 바티칸 본, 알렉산드리아 본 등에는 열두 소 선지서 다음에, 그리고 시내 본(a)에서는 대 선지서가 먼저 열거되어 있다.

[iv] James H. Charlesworth, “Apocrypha,” in Anchor Bible Dictionary, vol. 1 (New York: Doubleday, 1992) 293.

[v] 20 세기 이후 모든 현대 성경은 구약에 관한 한 레닌그라드 사본(L)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사본은 서기 1009년경에 쓰여졌는데, 현존하는 가장 온전하고 오래된(the most complete and oldest) 사본으로 간주된다. 이 사본은 수 년 전 folio로 출판되었다. David Noel Freedman, et. al. (eds.), The Leningrad Codex: A Facsimile Edition (Grand Rapids, Mich.: Eerdmans; Leiden: Brill, 1998). 마소라 필사 도중 오류로 인한 해석상의 어려움은 칠십인역, 사해 사본 등 다른 성서본과 번역본(texts and versions)을 통해 현대 성경에 재구성되었다. 결국 우리가 읽는 “그 모습 그대로”의 구약 성서는 역사상 실존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삼상 13:1을 마소라 사본대로 읽으면, “사울이 왕위에 오를 때 (한) 살이었고, 이 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가 된다. 칩십인역(LXX)에서는 이 구절을 삭제했으며, 행 13:21은 사울이 40년간 통치했다고 기록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사울 왕은 20년(Antiquities 6.378) 혹은 40년(Antiquities 10.143)을 통치했으며, 사무엘 생애동안 18년, 그의 사후에 22년을 통치했다고 기록한다(Antiquities 6.378). Rappaport는 22년이라는 숫자가 행 13:21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에 의해 수정된 것으로, 사무엘 사후 2년간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Josephus, Jewish Antiquities, Books V-VIII [Loeb Classical Library; trans. H. St. J. Thackeray and Ralph Marcu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34] 357). 최근 영어 성경 New Revised Standard Version에 나타나는 삼상 10:27 이후는 사해 사본 4QSama에서 옮긴 것이다.

[vi] James A. Sanders, Torah and Canon (Philadelphia: Fortress. 1972); idem, Canon and Community: A Guide to Canonical Criticism(Philadelphia: Fortress, 1984); idem, From Sacred Story to Sacred Text(Philadelphia: Fortress, 1987). 특히 다음을 참조하라. “Torah and Christ,” in From Sacred Story to Sacred Texts, 41-60.

[vii] 이러한 초기의 다신론 사상이 신 32:8에 잘 나타나 있다. 소위 말하는 서기관들의 수정(티쿠네이 쏘퍼림, ~yrps ynwkt)에 의해 “엘의 자손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바뀌었지만, 그 근본 뜻은 그대로 남아 있다. 지존하신 엘이 신들의 수효대로 기업을 나눌 때, 신들 중 하나인 야훼의 몫은 이스라엘 땅덩어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시 82:6-7도 참조하라.

[viii] 왕하 18장에 나오는 랍사게의 말을 참조하라. 이사야 10:10-11 참조.

[ix] Henri and H.A. Frankfort, “Myth and Reality,” in The Intellectual Adventure of Ancient Man: An Essay on Speculative Thought in the Ancient Near East (ed. Frankfort, et al.; Chicago/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46) 8. 설화(legend)에 대해서는 궁켈의 이해를 참조하라. Hermann Gunkel, Genesis (trans. Mark E. Biddle and foreword by Earnest W. Nicholson; MLBS; Macon, Ga.: Mercer University Press, 1997; German 3d ed., 1910, 1901) vii-xxiii.

[x] Joseph Blenkinsopp, The Pentateuch: An Introduction to the First Five Books of the Bible (New York: Doubleday, 1992) 31-53. 이 열 개의 톨레돗은 창 2:4a; 5:1; 6:9; 10:1; 11:10; 11:27; 25:12, 19; 36:1; 37:2에 나타나는데 우리말 성경에 각각 얼마나 다르게 번역되었는지 확인해 보라.

[xi] 바벨론 탈무드 바바 바트라 14:14b-15에 의하면, 여호수아가 여호수아와 신명기 34:5-12를 사무엘이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를, 그리고 예레미야가 열왕기 상하를 쓴 것이라 하여, 전기 예언서가 예언자들에 의해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또한, 미쉬나 아보트에서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아서 여호수아에게 전해주고, 연이어 여호수아는 장로들에게, 장로들은 예언자들에게, 예언자들은 위대한 공회 사람들 (hldgh tfnk yvna)에게 전해 주었다고 주장함으로, 바리새파 운동이 예언자들, 더 나아가 모세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본다. H. L. Strack and G. Stemberger, Introduction to the Talmud and Midrash (trans. Markus Bockmuehl; Cambridge: T & T Clark, 1991) 69

[xii] Joseph Blenkinsopp, A History of Prophecy in Israel (revised and enlarge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6) 14.

[xiii] 1964년 이 전에는 학자들 사이에, 오경은 기원전 4세기 경, 예언서는 기원전 2세기 경, 성문서는 서기 90년 경 얌니아(히브리어, 야브네) 공회를 통해 정경으로 채택되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Jack. P. Lewis (“What do you mean by Jabneh?” Journal of Bible and Religion 32 [1964] 125-32)는 당시 얌니아 공회는 후의 기독교 공회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당시 믿었던 바대로의 정경화 작업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은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음을 참조. James Barr, Holy Scripture: Canon, Authority, Criticism (Philadelphia: Westminster, 1983) 55-57; James A. Sanders, “Canon, Hebrew Bible” in Anchor Bible Dictionary, vol. 1, 837-52, 특히 841 쪽; Lee M. McDonald, The Formation of the Christian Biblical Canon(revised and expanded edition; Hendrickson, 1995) 49-50.

[xiv] 룻기는 오순절, 아가(雅歌)는 유월절, 잠언은 장막절,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 에스더는 부림(Purim)절과 각각 연관이 있다.

[xv] 예언자들의 기능 중 하나는 그들에게 물어 오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편에서 답을 주는 일이었다(참조, 삼상 9:6; 렘 37:17). 예언의 중단에 대한 각 유대교 파에 대한 견해는 다음을 참조하라. McDonald, The Formation of the Christian Biblical Canon, 50-53.

[xvi] 레닌그라드 사본에는 역대기가 시편 앞에 기록됐는데, 대다수 사본들은 역대기를 에스라와 함께 제일 마지막에 두고 있다. Emanuel Tov, Textual Criticism of the Hebrew Bible (second revised edition; Minneapolis: Fortress, 2001) 4. 우리가 읽는 BHS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는 이런 이유로 시편을 앞에, 역대기를 마지막에 배열했다. 눅 24:44 에서도 “모세의 법과 예언자들, 그리고 시편들”(tw/| no,mw| Mwu?se,wj kai. toi/j profh,taij kai. yalmoi/j)이란 표현을 통해 시편이 성문서를 대표하는 책으로 인식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xvii] 앞의 책 Swete,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in Greek, 197-288.

[xviii] R. P. Carroll, Jeremiah (Old Testament Guide;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89) 21-30.

[xix] 학자들이 보통 일컫는 칠십인 역(LXX)은 현존하는 문서가 아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LXX이라는 것은 아리스테아스 편지 문에 나오는 애굽 왕 톨레미 전설과 함께 알려진 오경의 헬라어 번역본이다. 그 후 예언서와 성문서가 점차 번역되면서, 알렉산더 본, 바티칸 본 등 여러 번역본을 산출했다. 어느 하나 온전한 역본이 없으므로, 학자들은 원본이라고 추정되는 임의의 성경을 만들었다. 그 중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괴팅겐 LXX으로 알려진 Ziegler 본과 Rahlfs 본이다. LXX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도움이 될만한 글로 다음을 참조하라. Emauel Tov, “The Septuagint,” in Mikra: Text, Translation, Reading and Interpretation of the Hebrew Bible in Ancient Judaism and Early Christianity (ed. Martin Jan Mulder and Harry Sysling; Leuven: Leuven University Press, 1981) 161-88. 칠십인 역 연구에 있어서 고전에 해당하는 것으로 다음 두 권이 있다. 앞의 책 Swete, An Intorduction to the Old Testament in Greek; Sidney Jellicoe, The Septuagint and Modern Study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또 최근 연구로는 Natalio Fernández Marcos, The Septuagint in Context: Introduction to the Greek Version of the Bible(trans. Wilfred G. E. Watson; Leiden: Brill, 2000)을 참조하라.

[xx] Aaron W. Park, The Book of Amos as Composed and Read in Antiquity (Studies in Biblical Literature 37; New York: Peter Lang, 2001) 138-77.

[xxi] 앞의 책 Sidney Jellicoe, The Septuagint and Modern Study, 316에서 재인용.

[xxii] Jacob Neuser, William S. Green, and Ernest Frerichs (eds.), Judaisms and Their Messiah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James H. Charlesworth (ed.), The Messiah (Minneapolis: Fortress, 1992); John J. Collins, The Scepter and the Star: The Messiahs of the Dead Sea Scrolls and Other Ancient Literature (New York: Doubleday, 1995).

[xxiii] 신약성서와 구약 인용에 대해서는 Fernández Marcos, The Septuagint in Context, 320-35를 참조.

[xxiv]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이름인 4개의 글자 hwhy (YHWH)를 그대로 읽지 않고 히브리어로 “주, 주인”을 뜻하는 “아도나이”(yn”doa])의 모음을 빌어 읽었다. 알레프(a)에 붙는 반 모음이 composite sheva이기 때문에 요드(y)에서는 simple sheva로 표기되고, 나머지 헤이(h)에는 “ㅗ”를, 바브(w)에는 “ㅏ” 를 표기하게 되는데 이를 본래 의도를 모르거나 무시한 채로 읽으면 “여호아”라는 발음이 나게 된다. 이는 MT가 가르치는 바도 아니고, LXX이 이해한 것도 아니다. 학자들 간에 더러  “야훼”라는 발음을 생각해 내고 공동 번역에서도 그리 표기하나, 문서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굳이 “여호아”라고 하여 무지(無知)를 들어내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xxv] 예언은 에스라 이후 끊겼다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스가랴 13:2-6; 다니엘 3:38(칠십인역); 9:24; 시편 74:9; 제1 마케비 4:46; 9:27; 14:41; Josephus, Against Apion 1:37-41. 참조. 앞에 책 McDonald, 50; Rudolf Meyer, “profh,thj(”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6 (ed. Gerhard Kittle and Gerhard Friedrich and trans.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mans, 1968) 812-28. 예언의 연속성을 믿었던 대표적 유대 교파로는 에쎄네 사람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있다.

 

(아래의 글은『세계의 신학』56 [2002/가을] 103-22에 실린 원고를 일부 수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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