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d sea diving resort(by 김우현감독)
넷플릭스에 최근 나온 이 제목의 영화를 보고서 나는
견디지 못하고 크게 울고 말았다.
70년대 내전 속의 이디오피아에서 그 땅의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비밀 작전을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까지 데려오는 그 치열한 과정도 매우
감동이지만 그들이 극적으로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해 그 땅에
입을 맞출 때..
그 장면을 보는데 갑자기 억누를 수 없는 눈물이 터졌다.
미리 고백하자면 나는 시온주의자가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시온의 회복’은 표면적인 ‘알리야(유대인 귀환)’
보다 훨씬 본질적 주제라 믿는다.
그래서 평소 잘 울지 않는 내가 그 마지막 장면에서 크게 울게
된 것의 감회는 사뭇 다른 개념이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오랫동안 ‘이디오피아 유대인’의 이미지로
계속 작업을 해 왔다는 것이다.
본디 소외되고 하찮아 보이는 것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나는
이스라엘에 가서도 검은 피부의 유대인들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들을 만나 물어보니 주로 이디오피아계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끌린 이유는 더욱 오래 되었다.
방송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때, ‘사라진 언약궤’가 이디오피아
‘악숨’에 있다는 그들의 자료와 전통을 확인하고 그것을 촬영하고
싶었다.
그 후 부터 이디오피아는 ‘숨겨둔 꿈’과 같았다.
놀란 것은 이디오피아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있고 그들은
솔로몬과 시바 사이에서 난 ‘메넬리크’의 후예들이라는 것이다.
실제 이디오피아는 ‘메넬리크 왕조’다.
그들은 그 ‘땅 끝’에서 수천 년을 정통 유대인으로 살아 왔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들의 꿈은 오직 ‘시온’으로 돌아가는
그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그 어둡고, 외진 변방에서 시온’을 그리워하는
영적 이미지를 ‘a long wait’이런 주제로 다양하게 작업하며
나의 갈망을 그 속에 담았다.
그러니 이 영화가 내게 남다른 감화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울음은 조금 다른 지점, 어떤 감정에서 분출한
것이다.
주인공인 진중한 히어로 ‘캡틴 아메리카’의 ‘크리스 에반스’와
그의 동지들은 각자 자기 일과 가정을 떠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들을 구하려고 목숨을 건 헌신을 한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죽을 수도 있는 위험 속에서 혼신으로
사투를 벌인다.
그리고 마지막 그들이 시온 땅을 밟을 때…
서로 탈진한 표정으로 한 켠에서 고요히 감격하고 작게 운다.
부끄럽지만 거기서 나를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견딜 수 없는 울음이 용암처럼 분출한 것이다.
10년 전 매일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소원으로 구할 때에
성령님께 사로잡혀 ‘이스라엘’로 인도 되었다.
처음엔 거의 초보적인 수준으로 유대인들이, 그 땅이 회복되기를
동지들과 뜨겁게 구했다.
수십 번을 가면서도 계속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그 진정한
본질을 홀로서 구하고 구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호14:1,2
몇년 후, 나는 갈릴리에서 이 말씀의 응답을 받았다.
진정한 ‘이스라엘’이 ‘돌아옴(슈브, 회복)’은 ‘말씀의 회복’이라는
성령의 음성이 내 안에 부어졌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 뿐이다.
나는 그것의 진정한 의미와 실제를 다시 구하고 구했다.
그러자 예상하지 못한 응답을 주셨다.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롬11:11,12
아버지는 유대인들의 ‘넘어짐’을 통해 ‘이방인’인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도록 역사하셨다.
그래서 그것이 사도 바울께서 깨달은 ‘신비’인 것이다.
(롬11:25).
그런데 그것은 또 유대인을 ‘시기나게 함’을 일으키시려는
아버지의 경륜이요 전략이다.
‘자기 의’에 갇힌 이들은 아버지의 뜻, 말씀으로 통전적으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나 어리석은 것’이다.
이방인의 구원만이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다.
그것을 통한 ‘유대인을 시기나게 함’까지 가져야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붙드는 것이 된다.
그것이 이루어 질 때…’하나님의 충만’이 완성된다.
이 모든 것이 진정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 여기는 자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하나님의 비밀’이다.
‘어떻게 하면 유대인을 시기나게 할 수 있나요?’
그 후에 나는 매일 아이처럼 이것을 구했다.
그리고 상상하지 못한 응답을 갈릴리에서 기도할 때 받았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롬3:1,2
유대인들의 ‘나음(페릿소스, 탁월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음(피스튜오, 믿음)’에 있다고 사도는 말한다.
‘그들을 시기나게 하는 것은 다른 것으로 되지 않는다.
오직 그들보다 더 온전한 진리를 받고 그 영적 본질을 깨닫는
자, 곧 ‘그 믿음(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 이른 이방인들이
일어날 때 …가능한 것이다’
이 응답은 내게 불과 같았다.
그것이 진정한 ‘이방인의 충만(플레로마)’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 충만이 나타날 때 까지 유대인들의 눈은 계속 가려져 있다.
그것이 아버지의 신비이다.
그래서 그 후 부터 7년 동안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장 온전히 듣기를 매일 간구하고 눈물로 말씀의 씨를 뿌려
‘시온의 포로들’이 돌아오기를(시126:4-6) 구한 것이다.
외부와도 격절한 채, 진정 그들을 시기나게 하는 ‘한 사람’이
되고 싶어 매일 말씀만을 타는 목마름으로 구한 것이다.
정말 이전에 알지 못하던 놀라운 말씀의 지경으로 들어 갔지만
여전히 너무 부족하고 부끄럽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
그들의 목숨 건 분투를 보면서…이 감추어진 나의 작은 투쟁을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완악함과 흑암에 갇힌 그 형제들을 진정한
‘시온’인 ‘그리스도 안’에 데리고 갈 날이 있을까?
그리고 한 켠에서 슬며시 감격하며…고요히 사라질 그 날…
그 장면을 상상하니….
또 나의 여전히 부끄럽고 지난한 투쟁을 생각하니
그렇게 울음이 터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