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단어사이의
치열한 영적전쟁
“Brother and sister, how is your soul today ?”
시편 6:1-10
우리는 왜 자주 우울해질까요 ?
지옥에는 네가지 고통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지옥불의 고통이고, 둘째는 자신 때문에 지옥에 온 사람들의 미움과 괴롭힘 때문이고, 셋째는 양심의 가책 때문이고, 넷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이라는 것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특별히 이 고통은 양심의 가책으로 오는 것으로 ‘우울함과 두려움’입니다. 다윗은 오늘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옵시고, 징계하지 마옵소서…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 6:1-2) 간절함에 여호와의 이름을 연속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에 대한 답을 그의 서신에서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고통을 인정하고 극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이미 구원은 시작된 것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후7:10).
사람들은 ‘죄의식’과 ‘죄책감’을 같은 의미로 봅니다. 그러나 죄의식과 죄책감은 다릅니다. 죄의식(Sin Consciousness)는 성령께서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죄의식은 주님께서 내가 죄인임을 알게 하실 때 갖게 되는 죄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입니다. 죄의식은 자신이 지은 죄의 값이 하나님의 목숨값과 같음을 깨닫는 은혜입니다.
반면에 죄책감(Guilt)은 ‘내가 과도하면 병리적일 수 있습니다. 죄책감은 자기 합리화로 갑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자책하며 자신을 괴롭힙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죄책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서로에게 핑계를 대고 판단함으로써 죄책감을 합리화하고 소멸하려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다 ‘죄책감’에서 나오는 ‘자기 합리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두려워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남을 판단하며 죄책감을 소멸시키는 것은 소용이 없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씀한 전자의 근심은 죄의식으로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지만, 후자는 죄책감으로 자신이 그 죄를 담당하려고 하나 그 끝은 사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한 자기 합리화는 그 죄의 굴레에 가둘 뿐입니다. 죄책감은 벗어내야할 생각이고, 죄의식은 간직해야할 생각입니다.
우리는 이 두 단어와 치열한 영적 전투를 치루며 성장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사람들을 만나면 인사말로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Brother, how is your soul today?(형제여, 오늘 형제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그 질문 후, 후속 질문이 따랐습니다.
Are you going on perfection? (거룩한 온전함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 16)는 말씀에서 ‘거룩하라’는 명령을 진지하게 삶가운데 실현해 나아가는 것에 촛점을 둔 것입니다.
거룩의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죄의식과 죄책감의 문제입니다. 죄책감의 해결 없이는 거룩함도 담대함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누구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서면 누구나 부끄럽지만, 죄가 용서받았다는 믿음으로 나설 수 있게 되는 용기를 우리는 ‘의로움’이라 부릅니다. 이때 죄의 심각성을 깊이 깨달아 그 ‘죄의식’으로 더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않을 결심을 하게 되며 그런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오늘 다윗은 본문 9-10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부끄럽지만 주 앞에
주의 보혈을 의지하고 담대히 나옵니다
우리의 죄와 죄책감을 씻고 덮어주소서
주님 예비하신 정결한 신부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