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비전 사순절묵상(이사야 53장)
‘고난주간, 빈센트 반 고흐’
🔖설명
고난주간을 맞아 그림 한 점을 묵상하게 합니다.
빈센트 반 고호(Vincent van Gogh, 1853-90)의 ‘성경이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Bible, 1885)은 화가로 활동한 10년 남짓한 그의 생애 중 파리에서 인상파 미술을 접하기 전 네덜란드에서의어두운 색조와 사실주의 초기 화풍이 나타나는 작품입니다.
반 고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였던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고흐(Theodorus van Gogh)가 1885년 3월 26일 작고한 후 생전에 부친과 불화하였던 자신을 뉘우치며 내면의 신앙을 이 작품에 담았습니다.
화면의 중앙에는 어두운 심연을 배경으로 말씀이 기록된 흰색 지면이 펼쳐진 성경이 놓여 있습니다.
소재가 된 성경은 아버지가 읽던 가죽성경으로 아버지 자신을 뜻하며, 그 옆의 불 꺼진 초는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았던 목사이며 가장이었던 아버지가 이제 생을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툼하고 정돈된 이미지의 성경과 달리 그 앞에 던져지듯 놓인 밝은 레몬 색 표지의 얇은 책은 당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자연주의 작가 에밀 졸라(Émile Zola)의 소설 ‘생의 기쁨’(La joie de vivre)입니다.
여러 차례 읽혀진 이 책은 에밀 졸라로 집약되는 19세기 후반의 이념과 사상을 쫓아온 반 고흐 자신을 의미합니다.
성직을 지망해 신학수업을 받기도 하였고(1878), 보리나주(Borinage) 광산촌에서 설교자로 광부들의 입장에서 헌신적으로 사역하다가(1878/79) 교회와 사회의 편견에 의해 해고당한 후 기성교회에 대해 비판적이던 그가 부친의 영전에 고개 숙인 모습을 회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둠을 배경으로 펼쳐진 성경의 본문은 오른쪽 페이지 위의 흰색 여백에 쓰인 문자 ISAIE와 그 아래의 로마숫자 LIII에 의해 그의 부친이 일생동안 삶과 믿음으로 추구해온 이사야 53장 ‘고난의종’에 대한 말씀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학비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할 만큼 청빈하였지만 모든 이들에게 경건의 귀감으로 존경받아 온 아버지를 아들이 마음 깊이 추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고 섬기기 위해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으로 교회의 본질을 구현하고자 한 아버지의 믿음과 삶을 아들이 기리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담당시키셨도다“ (사 53:4-6)
– 빈센트 반 고흐, 성경이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Bible), 1885, oil on canvas, 65.7×78.5cm, Van Gogh Museum, Amsterdam
✍️ By 독일감리교회 임재훈목사
이 작품은 ‘고난의 종’의 삶을 살아온 아버지와 그렇지 못한 인생을 사는 아들 반 고흐의 모습이대조적으로 부각되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위기에 온 인류가 직면한 지금. 이 그림은 말씀이 가리키는 고난의 종의 모습, 삶의 방식을 외면하고 세상 방식대로 살아온 우리 자신에게 아들 반 고흐의 모습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지금은 ‘생의 기쁨’ 만을 인생의 지고가치로 추구하며 살아왔던 오만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말씀앞에 겸손히 고개 숙일 때입니다.
우리가 결국 자연의 일부이며 피조물이었는데 마치도 이 모든 것의 주인인양, 인생의 주인인양 착각하며 살아온 교만의 죄(hybris)를 회개합니다.
반 고흐가 부친의 영전 앞에, 이사야 53장 말씀이 가리키는 고난의 종 그리스도 앞에 고개 숙였듯이 십자가 고난과 대속의 죽음을 짊어지신 주님을 깊이 만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