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부스 족속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까지 이 성읍의 지배자였다. 여부스라는지명은 사사기 19:10에 `곧 예루살렘’이라고 주석을 달아 쓰였고, 역대상 11:4에는 예루살렘은 “곧 여부스에 이르니 여부스 토인이 거기 거하였더라”라고 설명되어 있다.이것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정이 분명해질 것이다. 즉, 여부스는 예루살렘 본래의 이름이 아니고, 이 성읍을 전에 지배하고 있던 사람들의 명칭에서 따온 이름이다. `예루살렘’이라는 성읍 이름은 이스라엘 사람이 팔레스틴에 침입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이교적인 유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후의 성경 기자들은 예루살렘을 신성한 이름으로 생각하게 되었음으로 `여부스’라는 이름을 창작했다고 생각된다.여호수아 18:28에서 베냐민 자손이 얻은 성읍 중 하나로서 `여부스 곧 예루살렘’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것은 70인역에 따른 것이다. 마소라 본문에는 `여부스 족속 곧예루살렘’이다. 따라서 이것은 오히려 `여부스 족속의 성읍 곧 예루살렘’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창세기 10:15-16에는 여부스 족속은 아모리 족속과 더불어 가나안자손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요세푸스(Josephus)는 여부스 족속을 가나안 사람으로 분류한다. 여부스 족속은 또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기르가스 족속과 대등하게 열거되어 있다(창 15:21). 또, 예루살렘(여부스 족속) 왕 아도니세덱은 연합하여 여호수아에 대적하는 다섯 아모리 왕 중의 하나이다(수 10:5). 여부스 족속의 아모리적 배경은어느 정도 인정된다. 여부스 족속이 가나안 족속과 같이 열거되어 있는 것은 족속적관계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리적 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모리 족속과 그 근친의 부족은 팔레스틴의 고지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지의 가나안 족속에 둘러싸여 그 한가운데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여부스 족속의 성읍인 예루살렘은 베냐민 지파의 소유의 성읍 중 하나이다(수 18:28).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인이 여호수아의 지휘하에 가나안 땅에 침입했을 때에는이스라엘 백성에 점령되지 않고 예루살렘의 주민인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다(수 15:63). 이 절에는 `유다 자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남왕국의 수도로서의 이 성읍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사사 시대에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사람의 지배하에 있지 않았던 것은, 베들레헴으로부터 북쪽으로 여행하는 에브라임의 오지 출신 레위인의 이야기로 입증되고 있다. 이 레위인은 “여부스 사람이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사이다”라는 종의 말을 물리치고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외인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라고 말했다(삿 19:10- 12).다윗은 예루살렘을 공략하여 여부스 사람에 의한 이 성읍의 지배에 최후의 철추를 가했다(삼하 5:6-7, 대상 11:4-6). 다윗은 예루살렘을 그의 왕국 수도로 정했다. 이후성읍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르 다비드(다윗의 도시)
다윗은 왕이 된 후, 시온산 예루살렘에 있던 여부스 족속의 산성을 취하여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그곳을 새 도읍으로 정한다. 이스라엘 첫 통일 왕국의 수도였던 다윗 성은 정치•종교•문화의 중심지가 되며, 당시 그 성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다윗 성은 히브리 말로 ‘이르 다비드(다윗의 도시)’라 이르는데, 예루살렘뿐 아니라 다윗의 고향으로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던 베들레헴도 ‘다윗 성’ 혹은 ‘다윗의 동네’라고 불린다. 훗날 예수님의 탄생이 약속된 베들레헴은 신약 성경에는 ‘다윗의 동네’라고 기록되어 있다(눅 2:4).
다윗은 하나님의 뜻이 다윗 성에 있음을 알고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옮겨왔으며(삼하 6:12,16), 압살롬의 공격을 받아 도망할 때에도 법궤를 메고 온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법궤를 다시 다윗 성으로 옮겨갈 것을 명한다. 훗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때, 옛 다윗 성의 샘문•층계•왕의 묘실•다윗의 궁 등을 복원하는데, 그것은 다윗 성의 복원이 곧 이스라엘 나라의 복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이르러 다윗 성은 영역이 더 넓어진다. 성벽을 바깥쪽으로 쌓아 다윗 성은 모리아산 부근까지 넓어진다. 옛 다윗 성은 북쪽을 제외한 3면이 기드론 골짜기•힌놈의 골짜기 등 골짜기들로 둘려 있었다. 이 골짜기들은 천연 방어벽이 되어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적들의 공격 속도를 늦추어 주는 좋은 방패였다.
땅 속에 묻혀 있다 드러난 다윗 성
다윗 성 지역은 현재 고고학 발굴 공원, 그 주변의 무슬림 주거 지역, 그 내부의 유대교인 주거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윗 성은 일부만 발굴되어 발굴이 계속 진행중이며, 성터의 전체 모습은 아직도 땅속에 묻혀 있다. 성터의 위치는 ‘바위돔 사원’에서 ‘힌놈의 골짜기’ 방향으로, 지금 예루살렘의 성 밖에 있다.
성터의 발굴 작업은 19세기에 시작되었다. 발굴단의 노력으로 어둠 속에 있던 다윗 성의 모습이 마치 땅속에 파묻혀 있던 거인의 팔다리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발굴단은 여부스 사람의 성터, 다윗과 고대 왕들의 무덤, 전쟁시 방비용防備用으로 만들어진 히스기야 터널을 비롯한 고대 상수도 시설 등을 찾으려는 목적으로 발굴을 시작했다. 그 결과 여부스 사람의 옛 성벽, 기혼의 샘, 여부스 사람의 수구, 히스기야 터널,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실로암 연못,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위 무덤 등을 발굴했으며, 많은 유물들을 찾아냈다.
찾아낸 유물들 가운데 특히 토기 조각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멜기세덱 시대의 것에서부터 솔로몬 시대 이후 시대의 것까지 골고루 발견되었다. 지하 암반을 파서 만든 히스기야 왕의 터널은 고대 인공 연못이었던 실로암 못까지 연결되어 있었는데, 발굴단은 실로암의 옛 터와 비잔틴 시대에 증축된 지역까지 모두 발굴했다. 1867년에 영국인 찰스 워렌이 발견한 ‘여부스 사람의 수구水口’는 히스기야 터널과 함께 다윗 성에 있었던 고대 상수도 시설로, 둘 다 그 시작점이 ‘기혼의 샘’이다.
히스기야 왕은 기혼의 샘에서부터 밑으로 암반을 뚫어 터널식 수로를 만들었는데, 무려 533미터를 뚫었다. 그는 기혼의 샘 윗 물줄기를 막아 물이 샘에서부터 다윗 성으로 흐르게 하여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에 대비했다. 기혼의 샘에서 히스기야 터널을 통과한 물이 도착하는 곳이 실로암 못이다. 이러한 히스기야 왕의 행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한다(왕하 20:20).
여부스 사람의 수구水口
찰스 워렌이 발견한 여부스 사람의 수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워렌의 수구’ 혹은 ‘워렌 샤프트’라고 불린다. 워렌 수구는 히스기야 왕 시대 이전까지 다윗 성에서 사용하던 물을 공급했던 시설이었다. 워렌 수구를 통해 기혼의 샘에서 물을 길어 성안으로 물을 옮겼다. 여부스 사람의 수구에 대한 언급은 사무엘하 5장 8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사무엘하 5장에는 다윗과 여부스 사람의 전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6절에서, 다윗이 왕이 된 후 시온산에 성을 쌓고 사는 여부스 사람을 치려고 했다. 그때 산성에서 방어전을 펼치던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을 멸시하여 성을 점령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칠 것이다’라고 모욕을 주며 비웃었다. 이에 다윗은 군사들에게 여부스 성의 수구를 통해 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다윗의 군사들은 어떻게 수구로 올라가 이겼을까?
워렌이 발견한 여부스 사람의 수구 단면 그림을 보면, 당시 여부스 사람들은 전쟁 시에 성안으로 물을 길으려고 암반을 깎아 성안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터널식의 길을 내고 그 길 끝에 암반을 깎아 수직으로 수구를 만들고 긴 밧줄로 묶은 두레박을 수구로 내려 밑에 있는 기혼의 샘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 수구는 물을 긷는 바위 구멍을 이야기하는데 수직으로 된 수구의 길이는 바닥에서 지상까지 12미터가 넘는다. 만약 올라가다가 떨어지면 죽거나 크게 다칠 수 있는 높이다. 그리고 수구에서부터 성으로 들어가도록 나있는 암반터널까지는 전체 길이가 40미터에 가깝다.
12미터가 넘는 수직 수구를 군사들이 어떻게 올라가는가? 수구를 올라간다 해도, 암반 터널을 지나면 입구를 지키고 있던 여부스 군사들을 어떻게 물리치는가? 당시 다윗 성에 하나밖에 없었던 물 공급원인 그곳을 초병이 지키고 있었고, 경비 초소도 있었다. 그들은 수구로 올라오는 다윗의 병사들을 위에서 내려다 보다가 싸울 수 있는데, 다윗의 군사들은 어떻게 그 길을 통해 여부스로 들어가 여부스를 점령할 수 있었을까?
직접 본 사람이 없으니 이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다윗이 물 긷는 여부스 사람들 중에 정탐을 심어두었다고 하거나, 다윗이 여부스 군사들을 은과 금으로 매수했다는 황당한 주장도 펼친다. 그런 이야기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 사무엘하 5장 8절에는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라고 되어 있다. 즉, 다윗에게는 준비된 정예병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소수의 정예병이 수직 수구로 올라가 적을 죽이고, 밧줄로 동료 병사들을 올라오게 한 것이다. 먼저 올라간 병사들은 아마 암벽 등반하듯 손과 발을 이용해 수구의 암반 벽을 올라갔을 것이다.
이 싸움의 핵심은 ‘누가 먼저 용감하게 싸우러 올라갔는가?’이다. 그렇게 올라간다 해도 불리한 상황에서 여부스 군사들을 제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도 성경에 정확하게 있다.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에서 ‘누구든지’가 바로 승리에 대한 답을 주는 유일한 단서다.
나는 여부스 거민이 파놓은 물 긷는 수구로 내려가는 터널을 걸으면서 많은 발굴 현장을 보았다. 수구가 있는 곳을 직접 가보니 한눈에 보기에도 수구의 모양이 올라오기 쉽지 않아 보였다. 터널로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박물관에 전시된 처음 수구가 발견되었을 당시 발굴자들이 수구에서 줄사다리를 걸고 올라오며 찍은 기념 사진이 생각났다. 나는 바리케이드에 몸을 싣고 허리를 굽혀 좀 더 가까이서 수구를 보고 싶었다. 수구 안을 카메라 렌즈로 확대하여 보니 방문객들이 떨어뜨려 놓은 노트, 메모지, 모자, 콜라 병 등이 밑바닥에 보였다.
나는 여부스 거민의 수구로 가는 터널에서 손전등을 들고 이 부분의 히브리어 성경과 개역한글 성경을 대조하며 번갈아 읽어보았다. 말씀 속에서 다윗이 믿음으로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이라는 말은, ‘우리 중 누구라 할지라도,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여부스 사람을 쳐서 이긴다’는 분명한 약속이요, 하나님의 명령이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수구로 올라가면 만나는 여부스 군사들을 다 쳐서 이기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올라가라! 반드시 그들을 쳐죽이게 되어 있어!” 이런 말인 것이다.
다윗의 군사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렇구나!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구나! 저 위의 병사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다 우리 손에 죽게 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윗의 명령 속에서 믿음을 얻었고, 그 믿음이 그들의 마음을 채워 다윗이 한 승리의 약속을 마음에 품고 아무 조건 없이 올라갔으며, 그것으로 승리했던 것이다.
학자들은 다윗의 군사들이 어떻게 여부스 침공 작전을 성공했는지 자신의 생각을 나름대로 펼치지만, 답은 성경에 기록된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에 있다고 확신한다. 히브리어 성경을 한글로 직역하면 “모두가 여부스 사람을 칠 것이다. 그리고 수구로 올라갈 것이다. 모든 여부스를 치는 자들은 수구로 올라갈 것이다.” 이런 말이 된다. 즉, 누구든지 올라가 쳐서 이기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다윗의 군사들은 이 말씀을 의지했다. 그들은 수구를 향해 가는 길목에서 샘 지역을 지키던 여부스 군사들도 이 말씀을 의지해 무찔렀고, 수구를 올라가 성안에 있던 경비병들도 이 말씀을 의지해 무찔렀을 것이다.
기혼의 샘
다윗은 노년에, 자신과 마음으로 함께했던 사람들을 불러 솔로몬을 기혼의 샘으로 데려가게 하고, 거기에서 선지자 나단과 제사장 사독으로 하여금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게 하여 이스라엘의 왕을 삼는다. 솔로몬이 기혼의 샘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백성들이 피리를 불며 땅이 갈라질 듯 크게 즐거워할 때에 근처에서 마시고 취하여 있던 아도니야와 반역자들도 그 소리를 들었다(왕상 1:41).
‘기혼’은 그 이름이 창세기에 처음 나온다.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창 2:13) 에덴에서 발원한 네 강 가운데 두 번째 강의 이름이 기혼이었다. 다윗 성에 있었던 ‘기혼의 샘’이 거기에서 나온 이름인지에 대한 사실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기혼의 샘은 다윗 성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소로, 성안에서 필요한 물의 공급원이었다. 또한, ‘기름부음을 받은 왕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는다’는 약속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는 장소로 여겨졌다. 그래서 옛 이스라엘의 중요한 국가 행사나 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풀 때에는 기혼의 샘을 중심으로 시작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