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쓰는 시편
시9:13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은 나의 고통을 보소서”
우리의 인생에는 이해가 되는 일도 많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또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성경의 욥이나 시편의 다윗이 그런 고난을 겪은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고난과 어려움의 터널을 통과하지 못해 끝내 좌절하고 마는 인생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무신론자가 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윌리엄 서머셋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은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극작가입니다. 특히 그의 작품중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는 ‘서머셋 모옴’의 삶을 담은 자서전적 소설입니다. 그는 어려서 양친을 잃고, 한쪽 다리가 불편한 채 성장합니다. 말까지 더듬어 심한 놀림을 받고 열등감 속에 자랍니다.
엄격한 목사인 큰 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된 그는 율법적인 신앙 가운데 습관적인 기도를 하며 자랐습니다. 또한 생전에 어머니가 믿음에 대해 말씀하시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여인에게 반해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온전치 못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 다리를 고쳐 주시면 하나님께서 정말로 살아 계심을 믿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분명 다리가 정상적으로 되었을 것으로 믿고 침대에서 일어나 두 발을 내딛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다리는 변하지 않고 불편한 그대로였습니다.
그의 실망은 그의 삶을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인생, 사랑, 죽음의 무의미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날 이후 그는 신앙을 버립니다. 결국 ’버틀란트 러셀‘과 함께 영국의 지성 가운데 대표적인 무신론자가 됩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속박한 굴레(bondage)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평생을 스스로의 감옥에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자, 믿음을 버린 것입니다. 이해가 먼저냐, 믿음이 먼저냐는 오래된 논쟁입니다.
이해되지 않은 믿음은 위험하며, 지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이 진실하다고 주장하는 이성적 견해에 대해,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이나 진리의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일단 ‘예’ 하고 받아들이는 순종을 하면, 믿음이 깊은 이해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윗의 시편을 경험적으로 받아들인 어거스틴의 주장입니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은 나의 고통을 보소서”(13절) 이 말씀을 근거로 어거스틴은 ‘은혜 신학’의 기초를 다집니다.
은혜로 인한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핵심 요소(엡2:8)로, 행동을 지배하는 동력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 행동을 이끄는 동력이 되고, 그 후 경험과 지식을 통해 이해가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윗의 고백이 그의 믿음으로 녹아들은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10절).
믿음과 이해는 상호 보완적 관계로, 믿음은 이성적 탐구의 바탕이 되고, 이해는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순환적 구조입니다.
프랑스의 작곡가, 폴 드 세느비유가 딸을 위해 작곡한 ‘아들린을 위한 발라드’의 아름다운 선율에 감동해 누군가가 만든 스토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프랑스 판,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입니다.
서로 너무도 사랑했던 아름다운 연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남자는 전쟁터로 나가 불행하게도 전쟁터에서 그만 팔 한쪽과 다리 한쪽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그녀 곁에 머물 수 없었던 그는 그녀를 떠나갑니다.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깊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녀의 슬픔은 아주 컸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고향을 떠나 있던 남자는 그녀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결혼식이 열리는 교회로 갑니다.
자신이 아직도 가슴 아프게 사랑하는 그녀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결혼식에 도착한 그는 그만 주저앉고 맙니다. 그녀 곁에는 두 팔도, 두 다리도 없는 남자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서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아프게 했던가를 알게 됩니다. 또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었던가를 알게 됩니다. ‘아들린을 위한 발라드’가 연주됩니다. 이해하려는 노력은 때로 오해만을 낳습니다.
오해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해를 하려고 애를 쓰니까 오히려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해할 수 없어도 따르는 것이고, 사랑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해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자기의 이론을 부인하며, ’역설의 진리‘로 살때, ’삶으로 쓰는 시편‘은 우리의 인생 지도 가운데 믿음의 색종이로 그려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그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다윗처럼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주의 모든 기이한 일을 전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