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러 가는 장면들이 여럿 나옵니다. 예수님은 밤늦게까지 사역을 하신 후에도 새벽에 일어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사도로 택하시기 전에도 예수님은 산에 올라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의 수난을 맨 처음 예고하시기 전에도 기도하셨고, 용모가 변화되어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던 그때도 기도하시던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잡히시던 날에도 예수님은 습관처럼 감람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과의 기도를 통한 친밀한 교제였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셨음은 자명한 일일 겁니다. 어느 날 제자 중 한 사람이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보고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2~4절을 통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며,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한 비유를 드셨습니다. 5절부터 8절까지를 표준 새번역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었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그가 졸라대는 것 때문에는,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대접하는 일이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친구가 찾아와 청을 하면 들어주어야 했고 호의를 베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밤중’에 왔다는 데 있습니다.
이때 쓰인 ‘밤중’은 원어로 보면 ‘자정’을 뜻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집은 작은 창문 하나만 달리 단칸방이었다고 합니다. 그 작은 방에 한 식구가 따뜻함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밀착해서 잠을 잤는데, 그러다보니 한 사람이 일어나면 가족을 깨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밤중에 잠자리에 누운 사람이 일어나는 것은 여간 귀찮고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모든 가족이 잠들어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낮에 찾아온 친구의 청은 들어 주어야 했지만,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청은 들어 주지 않아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으로 8절을 보면, 자정에 찾아온 친구의 청은 친구라는 이유로는 들어 주지 않아도 되지만, 계속적으로 체면 불구하고 요청하는 그 졸라댐을 인하여서는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드시고는 이렇게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9~13절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앞부분의 비유와 대조하며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앞의 비유와 9~13절을 대조함으로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 되시는 지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한 친구가 밤중에 찾아와 졸라대는 자신의 친구의 요청을 굳이 들어 줄 필요가 없지만, 계속 졸라대니 마지못해 들어준다면,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요청을 마지못해 귀찮아서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분은 온종일 귀찮게 매달려도 귀찮아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관대함으로 받아주며, 기꺼이 우리의 요청과 함께 호흡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선한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아버지가 되신다는 그 관계성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인식할 때, 어떤 형편도 솔직하게 아뢸 수 있게 될 것이고, 아버지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실 것이라는 그 사실도 의심치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원하던 그 대답을 들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에 근거한 응답임을 믿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예수님의 기도의 삶을 모범삼아 인생의 우선순위를 주님과의 교제에 두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깊은 교제가 예수님이 걸으셔야 했던 그 사명의 길을 완성케 하셨던 것처럼, 사명자로서의 우리 인생도 끝까지 견고히 걷게 만드실 것입니다.
본문은 또한 우리가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능히 뚫고 지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시고, 그 너머를 보게 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한분이면 우리 인생이 부족함 없이 진정한 풍족함을 누릴 수 있음을, 또한 진정한 평안 가운데 거할 수 있음도 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성령을 주시는 분이심을 잊지 마시고, 또한 주님이 선한 아버지 되심도 잊지 마시고, 그분께 마음과 우선순위를 내어 드리며 오늘 하루를 시작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 친히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어 갈 길을 밝히실 것입니다.
기도
주님!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어떤 아룀도 귀찮게 여기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당신께 나아오는 우리를 기쁘고 관대함으로 여겨주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그 말씀을 의지하여 주님께 담대히 나아갑니다. 지혜로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그 안에 참 소망을 보는 하루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천천히 반복해서 읽어 보십시오. (2~4)
2.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3.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4. 나는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는 선한 아버지 되심을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5. 현재 내 삶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기도로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입니까? 급한 일(문제)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