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돌(Living Stone)
베드로전서 2장 1-10절
오늘 말씀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베드로전서에는 그 분량에 비해 ‘그러므로’라는 접속부사가 여러 번 나오는데 그만큼 서신 전반적으로 앞뒤의 내용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무엇보다 베드로전서는 성도의 삶에 대해 많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구원 받은 자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역사와 시대속에서 성도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말씀합니다.
1절을 다시 보면 베드로 사도는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합니다. ‘모든’이란 단어를 무려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부분적으로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모든 마음의 악과 거짓과 그릇된 말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감정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끝까지 성도로서의 자신의 마음과 삶의 태도와 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수하고 신령한 젓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곧 갓난아기들이 자신들의 양식이며 즐거움인 엄마의 젖을 사모하고 바라듯이 성도의 양식이며 존재의 기쁨인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영혼의 배를 불리고 만족을 얻으며 수박 겉 핧기 정도가 아닌 세상의 그 무엇도 비교할 수 없고, 그 어떤 상황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구원의 진리를 더 깊게 더 풍성하게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3절은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않았습니까?”라고 반어법적인 질문을 통해 강조합니다.
4-5절은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 존재의 변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4,5절을 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 살아 있는 돌과 같은 존재로서 여러분도 집 짓는 데 사용되어 신령한 집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니다.”
4절은 먼저 우리에게 주님께로 나아오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 가까이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르게 인식하고 이해하라고 합니다. 곧 주님께 가까이 나아와 하나님의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주님 안에서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그렇다면 여기서 ‘산 돌’은 무슨 의미입니까? ‘산 돌’은 다른 번역본대로 ‘살아있는 돌’, ‘living stone’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산 돌’과 관련해 구약성경 이사야서와 시편 말씀을 인용해 말씀합니다.
6절에서 8절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산 돌’을 ‘모퉁잇돌’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모퉁잇돌’은 7절 말씀대로 ‘모퉁이의 머릿돌’입니다. 곧 직각으로 꺽여지는 벽과 벽을 잇는 기초석으로 모퉁잇돌이 없이는 벽을 세울 수 없고 집 자체를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퉁잇돌은 집을 짓는데 필수적인 돌인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사도는 ‘산 돌’이 어떤 이들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돌’, 그것도 살아있는 ‘산 돌’로 비유한 것은 은유적 표현으로 주님은 생명을 위한 기초석임을 일깨워 줍니다. 곧 참된 생명은 주님께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생명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연합과 연대의 자리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사장의 직무가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중보의 자리, 소명의 자리로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죽은 이후에도 생명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우리 주님 안에서 ‘아멘’이라고 분명하게 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 있는 자들로서 함께 주안에서 연합과 연대를 지향하고 누군가를 위한 소명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위에 서 있으면서도 도리어 그리스도에 대한 걸림이 되고, 성령님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항상 말씀을 귀담아 듣고 묵상하며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9-10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이 구절은 구원받은 성도의 자기 정체성(identity)를 보여주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자는 그분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독특한 백성으로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특권들을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되었습니다. 선택받은 증거는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회개와 순종입니다.
둘째로,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왕 같은’이라는 원어(바실레이오스 basileios)는 ‘높은 특권을 가진’이라는 뜻입니다. 성도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는 특권이 있습니다(히 10:19).
셋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들은 부정과 불법으로 가득하며 음란하고 부도덕한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진리와 사랑과 평강의 나라입니다.
넷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핏 값으로 사신 바 된 귀한 보배들입니다. 또 하나님의 것은 아무도 그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이 안전한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이런 귀한 특권을 동반한 구원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분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찬양을 나타나게 하려 하심”입니다. ‘기이한 빛’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식과 의와 행복을 말합니다.
호세야가 하나님과 회복된 후 그의 자녀들에게 하신 말씀대로(호 2:23, 롬 11:6-7, 11:30, 고전 7:25, 딤전 1:13, 히 4:16) “여러분들이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은총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은총을 얻은 자니라”고 합니다.
바로 이제는 생명의 빛을 본 자들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말씀에서 성도의 마음을 또 다시 배우고, 말씀에서 성도의 바른 태도를 또 다시 배우며, 말씀에서 성도의 언어를 또 다시 배우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덕을 언제나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사는 우리의 이유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하나되어 주님을 닮아가며 아름다운 구원의 덕,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살아가는 평생의 삶, 발자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 아침의 찬양과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