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설교는 대구동신교회 권성수 목사님께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제45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 셋째날 저녁집회에서 하신 설교입니다
초심(初心)과 야성(野性)-본문 : 계시록 2:1-7
2005년 11월 1일 기준으로 통계청의 <인구 주택 총조사>에 의하면 개신교 인구는 862만 명으로 나타났다. 충격적인 것은 10년 전인 1995년도와 비교해 볼 때 개신교인수가 14만 명이 줄어들었고, 인구 구성비로는 19.7%에서 18.3%로 1.4% 감소했다. 불교는 인구 구성비로는 23.2%에서 22.8%로 감소했지만 불교 인구는 오히려 40만 5천 명이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주교는 295만 여명에서 514만 여명으로 219만 5천 명이 증가하여, 74.4%라는 경이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고, 새삼스럽게 언급하는 것조차 이상하게 들릴 지경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사실을 두고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 동안 불교가 성장하고 천주교는 74%나 성장했는데 개신교만 왜 이렇게 감소했는가? 이런 추세가 더 계속되면 우리나라의 개신교는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게다가 개신교 안에서 발생해서 사회의 지탄까지 받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개신교는 자정능력을 상실했다는 목소리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개신교의 교세 약화, 개신교의 대사회적 공신력 상실과 영향력 감소, 심지어 개신교에 대한 사회의 질타와 지탄 증가–이런 참담한 현실을 인식하면서 작년 2007년에 평양 대부흥 1백 주년을 기해서 부흥의 재현을 위해 개신교가 교단적으로, 또한 범교단적으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평양 대부흥이 재현되었는가, 아니 재현되고 있는가? 부분적으로 부흥의 조짐은 있다고 하지만, 개신교계 전반에서 부흥의 재현이 체감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가? 개신교가 정체와 침체와 퇴보를 벗어나서 다시 한 번 도약해야 하겠다는 열망은 있지만,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 에베소 시
에베소는 로마 속령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본래 번창하는 항구 도시였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중요한 도시들을 거의 다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렇게 편리한 교통 때문에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베소는 또한 로마에 대한 충성과 봉사를 인정받아 “자유 도시”(자치 도시)가 된 탓에 군대는 주둔하지 않았으며 총독들이 가끔 방문하여 회의를 주재하는 정도였다. 에베소는 또한 매해 운동경기를 개최했다. 교통 상업 자치 운동경기 등의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탓에 에베소는 번창한 도시가 된 것이다.
종교적으로 보면 에베소는 헬라의 아데미(로마의 다이아나, 괴상하고 납작하고 검고 유방이 많은 여신으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소문이 있었음) 신을 주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행 19:24, 27, 28, 34, 35). 길이 127미터, 너비 66미터인 아데미 신전은 고대 세계의 7대 경이 중의 하나였다. 아데미 신전은 종교적인 이유로 사람들을 끌어들일 뿐 아니라 성적인 쾌락 면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었다. 신전은 여사제들이 종교적인 행위로 창녀역할을 하는 곳일 뿐더러 범죄자들이 은신하는 곳이었다. 인종적으로 에베소는 본래의 원주민들과 아테네에서 온 헬라인들과 기타 헬라계 주민들과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었다.
만왕의 왕의 태양 같은 모습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처럼 되었던 요한은 만왕의 왕께서 7교회 중 제일 먼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한다.”고 하실 때에 가슴이 덜컹했을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목회하던 곳이고, 자신이 그 교회의 “사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 내용은 에베소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2:7)이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 교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 정행 교회
우리는 흔히 에베소 교회라고 하면 ‘첫사랑을 버린 교회, 그래서 촛대를 옮긴 형편없는 교회’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 아는 내용이라 아예 듣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에베소 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을 설교 본문으로 잡으면 청중은 ‘우리 교회를 형편없는 교회로 아시나?’하는 반감을 가지고 듣는 것 같다. 에베소 교회는 정말 형편없는 교회였는가?
2-3절의 주님의 평가를 보라. 주님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으로 에베소 교회를 평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교회들 사이에 계속 다니시면서 교회들을 세밀하게 감찰하시는 절대적인 통제권을 가지신 분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런 주님이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고 하셨다.
“행위”는 헬라어 원문에 ‘행위들’(복수)로 되어 있다. 에베소 교회는 말뿐인 교회가 아니라 일하는 교회였다. 실천 행위도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복수의 실천이 있는 교회였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송장 믿음이라고 한 야고보서의 메시지가 필요 없는 교회였다. 과거에 정치 신학에 영향을 받은 운동권 학생들이 사회적 실천(행함)이 없는 대교회를 불 질러 버리겠다는 말을 했다고 들리는데, 에베소 교회는 그들이 불 지를 필요가 없는 교회였다.
에베소 교회에 행위들이 있다고 할 때 그 행위들은 그저 하는 척하는 수준의 행위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고” 차원의 행위들이었다. “수고”는 그 행위들이 강도가 깊은 실천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적당주의로 대충대충 행하는 실천이 아니라 “게으르지 않고” 땀을 흘리는 실천이었다. 언덕 위로 구루마를 밀어 올릴 때에 입으로, 손가락으로, 두 손으로 미는 행위가 아니라 온 몸으로 미는 행위였다.
그렇게 강도 높은 실천을 할 때에 한두 번 해보고 그만두는 것도 아니었다. “인내”가 있었다. “인내”는 그 행위들을 행하는 자들의 내면적인 성향이 지속성이 있는 것을 말한다. 에베소 교회의 실천은 강도가 높은 실천일 뿐 아니라 지속성이 있는 실천이었다. 시작만 거창하게 해 놓고 끝은 흐지부지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가 기분 내키면 열을 올려 해보다가 기분 나쁘면 그만두는 실천이 아니었다. 편안할 때는 실천하고 고통이 올 때는 회피하는 실천이 아니었다.
여기서 인내란 모든 방해와 박해와 유혹에도 불구하고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 3절에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라는 구절을 유의해서 보라. 인내가 얼마나 강조되어 있는가. 인내의 동기 또한 “내 이름을 위하여”라고 했으니 그 동기는 인간적인 야망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이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우리 교단을 놓고 생각해 보자. 우리 교단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수고와 인내의 바른 행동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 교단 교회들이 교회 내부와 교회 외부 사회의 시각으로 볼 때 바르게 행동하는 교회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 목사들과 장로들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바르게 행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목사나 장로라는 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혹시 교회와 교단 내의 자리가 마치 무슨 벼슬인 것처럼 탐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나의 영광을 위한 자리에 연연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연연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혹시 돈을 주고받지는 않는가? 혹시 우리 안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같은 편이기 때문에 감싸기에 급급하지는 않는가? 우리에게 자정능력이 전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우리가 자정능력이 강한 집단인가?
걸핏하면 해외에서 행사가 있는데, 정말 해외에서 행사를 해야 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해외여행을 그럴듯한 행사로 가장한 것인가? 공무원 해외연수도 때때로 연수가 아니라 관광이라는 비판을 받는데, 우리의 해외 행사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고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승천하시고 우리의 교회들 가운데 다니시는 주님의 불꽃같은 눈으로 보실 때 우리의 행위는 어떤 수준인가?
우리는 우리 안의 범죄나 실수가 있을 때에 그것을 과감하게 척결할 수 있는 자정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공적을 과시하는 차원에서는 왼 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마 6:3-4).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현시하는 차원에서는 우리의 선행을 적극적으로 널리 홍보해야 한다(마 5:16). 가령, 텔레비전이나 신문이 연말 이웃돕기 성금을 모금할 때에 우리 교회들의 이름이 신문과 텔레비전 화면을 도배해야 한다. 개신교가 전국의 구제와 선행의 80%를 감당하고 있으면서도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행의 홍보가 적거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가나 지역이 어려움에 처할 때에 적극적으로 뛰어나서 국가의 구제와 선행을 선도해야 한다. 우리 각 교회는 이번 여름 수련회는 태안반도로 가서 그 지역 주민들을 도와주고 격려해야 한다.
- 정통 교회
에베소 교회는 열심이 있고 땀이 있고 시종일관 주님을 위하여 참는 실천이 있는 교회였다. 이 정도라면 가히 ‘정통 행위’(orthopraxy)이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이런 정행이 있으면 자칫 교리적 정통을 무시하기 쉽다. 바른 행위를 부르짖는 교회가 바른 교리는 무시하기 쉬운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상황과 실천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진보주의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정치경제적 실천과 문화적 실천을 강조하는 신학이 왜 ‘바로 가든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종교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와 주관주의를 절대화하는 후현대주의를 용납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정통 행위가 자유주의 신학 교리와 연결된 교회가 아니었다. 정행이 정통 교리와 연결된 교회였다.
2절에 보면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하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을 예수님이 인정해 주셨다. 여기서 “악한 자들”이 누구일까?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이란 표현을 보면 그들은 자칭 사도라는 미명 뒤에 거짓과 속임수를 숨기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을까?
그들이 6절의 니골라당처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한 바울과 그 일파(에베소 교회에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이 바울이었음)였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울을 자칭 사도라고 하지만 사기꾼이라고 말하실 리가 없기 때문에 그 해석은 타당성이 없다. 6절에 근거하면 그들은 사도의 권위를 주장한 니골라당이었을 것이다. 야고보, 바나바, 바울, 실라, 안드로니고 등이 12사도 외의 권위 있는 사도들로 불렸기 때문에 (행 14:14 고전 15:7 갈 1:19 살전 2:6), 본문의 “악한 자들”은 이런 사도들과 같은 급의 권위를 주장하면서 교인들을 속이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6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주님이 미워하시는 니골라당을 미워한 것이다. ‘니골라’라는 말은 ‘니콘’(삼키는 자, 이기는 자) + ‘라오스(’백성)(히브리어로 ‘발라’’삼키다’ + ‘암’’백성’), 즉 ‘백성을 삼키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어원적 의미가 얼마나 의식적으로 이 말에 들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내용상에 있어서 15-16절이 지적하는 대로 니골라당은 우상숭배와 행음으로 백성을 삼켜 망하게 한 것은 분명하다. 계시록 9장 11절에 아바돈이란 히브리어와 아볼루온이란 헬라어가 ‘파괴’라는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처럼 헬라어 니골라와 히브리어 발람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14-15절에서 주님은 니골라당이 구약의 발람과 같은 죄를 범했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이단을 시험하여 폭로하고 바른 교훈을 지키는 교회였다.
에베소 교회라면 종교 다원주의의 허구성을 해석학적으로 지적하는 학자들과 목회자들을 원천봉쇄적 편협한 수구주의자들로 몰아붙였을까? 기독교의 진리를 포기하는 것을 오히려 학문적 정직성과 창조적 개방성이라고 치하하고 복음 진리를 사수하는 것을 쇄국적 편협성이라고 매도했을까?
에베소 교회는 사도행전 20장에 나온 대로 바울의 마지막 경고와 권면을 경청하고 순종한 교회였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 20:29-31).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경고대로 이단을 폭로하고 정통 교리를 지킨 교회였다.
정통 행위에 정통 교리(orthodoxy)를 겸전한 교회, 이런 교회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교회이다. 한국에 이만한 교회가 몇 개나 있겠는가? 정통 교리를 강조하는 교회는 대개 입과 머리만 강하고 손발은 마비되거나 허약한 반면 정통 행위를 강조하는 교회는 대개 손발은 튼튼하지만 머리는 인본주의로 가득 차 있는 실정이 아닌가? 우리 교회는 정행과 정통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우리 교단은 정통성을 어느 정도 지키고 있는가? 이단이 결코 발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강한 정통성을 지키고 있는가? 신앙의 선진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신앙의 지조를 설교나 강의를 해 주고 돈 몇 푼에 팔아넘기는 일은 없는가? 몇 년 전 총회에서 이단 교회가 우리 교단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쾌거 중의 쾌거였다. 그 때 우리는 우리 교단에 인자와 성실을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우리 교단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좋은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우리는 종교다원주의의 경계선에서 안 걸릴 정도로 교모하게, 그러면서도 적당하게 신사적이고 적당하게 개방적인 입장을 적당하게 취하는 일은 없는 것인가? ‘편협하다, 비신사적이다, 비개방적이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구원을 받을 다른 이름이 없다는 그리스도 유일 구원관을 잘 지키고 있는가? 성경보다 리더십 이론이 더 인기가 있고, 성경의 진리보다 경영학 이론이 더 영향력이 있고, 치유와 회복에 있어서 성경의 복음보다 심리학 이론이 더 깊이 파고드는 일은 없는가?우리 교단은 성경적 개혁주의를 지킨다는 차원에서 특별히 다음과 같은 면을 주의해서 관찰하고 경성해서 보수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 성경관: 성경의 영감뿐 아니라 성경의 무오 사수. 구원과 생활 면의 무오뿐 아니라
과학과 역사 면의 무오 사수.
* 신론: 지금 전 세계를 휩쓰는 뉴 에이지(New Age) 운동의 범신론 경계. ‘나도 내 속에
있는 신적 가이드의 소리를 들으면 신(神)이 될 수 있다.’는 범신론 비판.
* 인론: 주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자신의 신념의 마력을 의지하도록 하면서 죄가 있어도
그저 ‘기분 좋게 느끼도록’(feel good) 만드는 적극적 심리학(positivistic
psychology) 주의.
* 구원론: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길 외에 구원의
다른 길들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 경계.
* 교회론: 복음적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문화 위주의 예배나 문화적 적응성을 무시한
수구적 예배 경계. 세상 속으로 파고들어 복음과 사랑으로 영향을 미치는
대신 무조건 세상을 비판하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도원주의나
세상의 유행하는 사상과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세속주의 경계.
* 종말론: 이단적 휴거사상에 근거한 내세편향주의 경계. 자신이 현세에서 범죄한 만큼
지옥에서 의식적 고통의 징벌을 받고 그 후에는 멸절한다는 조건적 멸절설 주의.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포함한 모든 부분에서 성경적 개혁주의 사상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일을 함과 동시에, 정통을 표방하고 자기 멋대로 사는 망행(妄行)을 주의해야 한다. 걸핏 하면 ‘보수주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이라고 하면서 혹시 보수주의와 개혁주의의 우산 밑에서 부정부패와 우정을 즐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되겠습니까?’라고 정행이 없는 것을 지적할 때마다 오히려 ‘나는 정통 중의 정통이요, 보수 중의 보수입니다.’는 식으로 정통이라는 무기로 역습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 초심 상실
에베소 교회는 이렇게 정행과 정통이 겸한 교회의 귀감인데도 주님은 그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이 우선 요한 자신에게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주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실천하며 강조한 요한이 목회한 교회인데, 에베소 교회에 “처음 사랑”이 없다고 하시니 그 말씀이 요한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겠는가? 목회자가 사랑을 실천하고 강조해도 교회는 이렇게 첫사랑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 목회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놓고 고심하던 중에 주님이 말씀하신 대책에서 그 뜻을 찾을 수 있었다. 5절에서 주님은 “처음 행위’원문에 행위들’를 가지라’행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 행위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에베소 교회가 놓친 “처음 행위들”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에베소 교회의 창립 당시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찾을 수 있다. 사도행전 19장 1-20절을 보면 A.D. 53년경 에베소 교회 초기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19장 9절과 10절을 보면 바울 사도가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 2년간 매일 성경 강좌를 열었다. 어떤 사본에 의하면 매일 5시에서 10시, 요즘 시간으로 11시에서 16시까지 성경 강좌를 열었다. 점심시간을 빼면 매일 4시간씩의 강좌가 개최된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바울 사도가 매일 여러 시간씩 말씀을 전한 것은 분명하다. 그 결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 에베소의 초기 교회는 매일 몇 시간씩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열정이 있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영적인 식욕이 강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말씀을 사모하는 초심이었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 야성이었다.
사도행전 20장 17-35절을 보면 A.D. 55년경 에베소 교회가 어떤 형편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바울 사도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 놓고 고별설교를 한 다음에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고 되어 있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올리는 간절한 기도의 초심이었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 야성이었다.
에베소의 초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욕적으로 청종하고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교회,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교회였다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인간들 서로간의 깊은 관계로 나타나서 인정이 넘치는 교회였다. 장로님들과 목회자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다 크게 울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전송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관계인가.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들 간의 순수한 인간 사랑의 초심이었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 야성이었다.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바울이 에베소서를 쓴 지 약 35년이 지난) A.D. 95년경 요한이 계시록을 집필한 당시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의 첫 행위들을 버렸다. 은혜 받은 초기에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의 말씀을 헐떡거리며 받아먹고 주님을 나의 생명, 나의 사랑, 나의 기쁨, 나의 인생으로 여기고 모시던 삶이 변질된 것이다. 강렬한 열정이 세월과 함께 시들해지고 파릇파릇한 새 싹 같던 사랑이 덤덤하고 무감각해지고 처녀의 풋풋한 사랑이 싸늘한 두뇌 작용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첫사랑은 갓 결혼한 신부의 뜨겁고 순결하고 순수한 사랑인데 (렘 2:2 고후 11:2), 에베소 교회는 처음 회심할 때의 사랑이 식어버렸고 그것은 생명이 없고 형식적인 정통에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영적인 식욕이 감퇴되어 설교는 지루하고 예배는 덤덤해져 버린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초심을 잃고 야성을 잃었다.
우리나라의 초기 교회도 에베소 초기 교회의 모습과 같았다. 그 때의 교인들은 쌀자루 짊어지고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며칠간을 걸어와서 사경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가져온 쌀로 밥을 해 먹어 가면서 말씀을 경청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교회의 첫사랑, 초심(初心)이었다. 쌀자루 짊어지고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걸어와서 며칠간 사경회에 참석하던 것이 우리나라 초기교회의 야성(野性)이었다. 초심이 야성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주일 대예배 설교가 30분에서 조금만 지나면 시계를 보면서 ‘빨리 끝나지 않고 뭐 하나?’하는 불만이 속에서 일기 시작하는 실정이 아닌가? 말씀을 너무 많이 들어서 말씀에 대해 식상해 있는 것 같다. 특별히 울고 웃기는 재미있는 설교나 에세이 식의 구수한 정신 훈화를 줄줄 흘러나오게 하는 설교에나 관심을 가질 뿐, 보통의 설교에는 진저리를 내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송이 꿀처럼 받아먹던 초심은 어디로 갔는가? 말씀 들으러 쌀자루 매고 수백리 길을 걸어가던 야성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의 기도는 어떤가? 하나님에게 문안드리고 ‘오늘도 무사히!’ 정도로 대충 때우는 기도가 아닌가? 한 밤 중에 산 속에 들어가서 소나무 붙잡고 울부짖던 초심과 야성은 어디로 갔는가? 새벽에 울며불며 기도하고 귀가하면서 남의 집 호박을 따먹는 식이 아닌가? 기도는 하는데 정행에는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가? 기도와 생활을 완전히 따로 떨어뜨려 놓고 사는 것은 아닌가? 인간관계는 어떤가? 일회 용 종이컵처럼 한번 쓰고 버리는 인간관계가 아닌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간관계, 무정 무자비 무감각 무표정의 인간관계가 아닌가?
에베소 교회는 강도 높고 지속성이 있으며 고난을 감내하는 실천 행위들과 이단을 증오하고 지적하고 폭로하여 정통 교리를 지키는 교회였지만,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사람들에 대한 들끓는 열정은 없었다. 정행과 정통은 있었었으나 뜨거운 가슴은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처음의 식욕과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기도와 하나님의 백성간의 뜨거운 교제가 사라졌다. 난로(fireplace)는 있으나 불(fire)은 없었다. 정통과 정행의 난로는 있으나 그 속에 초심과 야성의 불이 없었다. 외부적인 행위가 있고 이단으로부터 정통을 보호하는 머리는 있으나 그 행위와 그 교리에 가슴이 없었다. 신앙생활의 핵심이요 원천인 가슴이 떠난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초심을 잃었고, 초심을 표현하던 야성을 잃었다. 우리 교회들도 에베소 교회처럼 초심을 잃고 야성을 잃은 것이 아닌가? 이것이 오늘의 개신교가 내리막길로 내려가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닌가? 초심을 잃고 야성을 잃은 교회, 뜨거운 가슴과 생동적 활력을 잃은 교회–이것이 우리네 교회들의 모습이 아닌가?
- 문제 심각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난 후 첫사랑은 잃어도 그냥 그런 대로 별 탈 없이 사는 것처럼 신앙생활에서 첫사랑을 잃어도 별 것 아닌가? 첫사랑이 없어도 그냥 그런 대로 교회에 출석하고 맡은 일에 충성하고 사회에서 직장 생활을 충실하게 하니까 문제가 없는 것인가? 처음 행위가 사라지면 첫사랑을 버린 것이 분명하지만, 그저 그런 대로 덮어두고 살아가면 안 될까? 이제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4절에 “너를 책망할 것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이것은 “내가 너를 대항할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I have something against thee)라는 뜻이다. 첫사랑을 잃은 것은 주님의 가슴을 저버리는 것이고, 그 때문에 주님은 그 심령에 대해서 사랑으로 대항(against) 하시는 것이다. 5절에 “어디서 떨어진 것”이란 말씀이 있다. 이것은 첫사랑을 잃은 것이 주님과 깊이 교제하던 상태에서 세속의 땅바닥으로 추락한 것을 가리킨다. 5절에 보면 다시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말씀이 있다. “내가 네게 임한다”는 것은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은 에베소 교회에 징계를 주러 임하신다는 것이다.
“촛대를 옮긴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에베소 도시가 파괴되고 그 항구가 폐쇄됨으로써 도시의 장소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거나 이슬람의 암흑이 에베소에 몰려올 것이라는 뜻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촛대를 옮긴다”는 말씀은 에베소 도시에 무슨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에 무슨 변화가 올 것이라는 말씀이다.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교회 안의 구원받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존전으로 옮기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종말의 환난에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그 결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진실한 자는 지상의 교회 안에 한 명도 남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교회는 자동적으로 그 증거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여기 “네게 임한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를 징계하시기 위해서 임하신다는 것이다.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심판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처럼 교회가 증거의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교회가 그 증거의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 증거능력을 상실하고 교회의 생명력을 상실한다는 것 자체가 주님의 심판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탁월한 지도자를 상실하고 교회로서의 유용성을 상실하고 황폐해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촛대를 옮긴다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교회가 점점 약화되어 마침내 문을 닫는다는 면에서 생각하면 촛대를 옮긴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헤리 리더(Harry L. Reeder III)가 쓴 <불씨에서 불길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교회를 어떻게 다시 부흥케 하실 수 있는가?>(From Embers to a Flame: How God Can Revitalize Your Church)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한 때 불길이 활활 타오르던 교회가 그 불길이 점점 약화되어 약한 불씨로만 남아 있는 교회가 있다. 한 때 한 지역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교회가 25년이 지난 후 주일 오전 예배에 80명 이하가 출석하게 되었다. 교인들의 평균 연령은 69세다. 이런 교회는 주님께서 촛대를 옮겨가시는 과정에 있는 교회이다. 평균 69세로 80명 정도 출석하던 교회, 말하자면 약한 불씨 같던 교회가 3년 안에 400명 이상이 출석하여 이제는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런 교회는 말하자면 주님께서 촛대를 다시 회복시켜 놓으시는 교회이다.
우리나라 개신교는 어떤가? 개신교를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어떤가? 10년 만에 14만 명이 줄었다는 것은 50명 다니는 교회 2800개가 줄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계속 줄어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영국의 교회들이 술집들로 팔리고 독일의 교회들이 재적 4천 명에 노인들만 출석 40명 정도로 모이게 된 것은 주님이 촛대를 옮기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마르틴 루터 당시의 독일교회나 존 웨슬리 당시의 영국 교회와 비교해 볼 때 현재의 독일 교회와 영국 교회는 주님이 분명히 촛대를 옮기신 교회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장담하는 것은 교만한 것이다. 우리는 개신교 교세가 약화되는 이 시점에서 정신을 차리고 각성과 부흥을 향한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 야성 회복
주님은 첫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에게 회복할 수 있는 대책을 제시하셨다. 5절에 보면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가 되어 있는데, 이것을 원문으로 보면 “기억하라”, “회개하라”, “행하라”, 이렇게 3개의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기억하라”: 이것은 현재형으로서 계속 기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해서 그 떨어진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절벽 꼭대기 높은 곳에 있던 첫사랑이 그 아래 깊은 계곡으로 떨어진 격이다. 주님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한 때 그들의 가슴을 사로잡았던 열정, 새로 발견한 구원의 첫 감격,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했던 기쁨과 행복의 자리를 기억해 내도록 명령하셨다. 흔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처음으로 맛보았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회개하라”: 이것은 부정 과거형으로 우물쭈물 하지 말고 단호하게 회개하라는 것이다. 첫사랑의 꼭대기가 어디인지를 기억해 내면 떨어진 곳을 버리고 바로 그 꼭대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미련을 갖고 꾸물대면 회개하지 못한다. 회개는 김유신이 창녀 집으로 향해 가는 말의 목을 치듯 죄악을 과감하게 끊어 버리는 것이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해 낸 다음에는 현재의 잘못된 생각과 행위를 일격에 청산해 버리는 것이다. 서울로 가야 할 사람이 부산으로 가는 고속도로에 들어섰다면, 가장 가까운 인터체인지를 통해서 서울로 방향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다. 말과 생각으로만 ‘서울로 가야지’라고 하고 심지어 눈물로 ‘회개’는 하면서도 서울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행하라”: 이것도 부정 과거형으로 행할까 말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행하라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처음 행위들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청과 뜨거운 기도와 인정 넘치는 대인관계 등이다. 이런 것만은 아니었겠지만, 이런 것들이 포함된 것이 “처음 행위들”이다. 첫사랑의 행위들을 다시 그대로 행하라는 것이 주님의 대책이다.
주님은 이런 대책을 제시하시면서 동시에 에베소 교회를 격려하셨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2:7).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요한1서 5장 5절 말씀처럼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막연한 이김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말씀대로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이 주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바로 승리하는 길이다. 즉 기억하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행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 먹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창세기 3장 22절과 계시록 22장 2절과 연결되어 있는 말씀으로서 승리하는 자가 영생을 풍성하게 누릴 것이라는 말씀이다. 특별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승리하는 자들은 약속된 영생을 실제적으로 더 풍성하게 누리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영생인데 (요 17:3), 본문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가 회복되어 불사약(the medicine of immortality) 같은 영생을 만끽하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진시황은 사방에서 불사약을 구하다가 찾지 못하고 죽었지만,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불사약을 구해 먹고 사는 자들이다.
우리는 지금 설교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울리고 웃기는 신학적 유흥(theological entertainment)으로부터 우리의 강단을 보호하고, 청중이 듣기에 불편해 하고 심지어 청중이 이를 가는 메시지라도(행 7:54) 성경대로 전하는 강단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선교와 전도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현장에서 안 믿는 사람들을 전도해서 복음적 가치관으로 키우고 고치는 선교와 전도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나라 국민의 70% 이상이 추수해야 할 황금벌판을 이루고 있음에도 목회지가 없다고 하는 푸념을 지우고 불신 가족 이웃 친구 동료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주셔도 좋고 안 주셔도 살 만합니다.’는 식으로 회전용 의자에서 드리는 고급 기도가 아니라 ‘안 주시면 죽습니다.’고 하는 야곱과 같이 씨름하는 기도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무너진 교육 현장을 보면서 복음적 가치관으로 사람을 키우는 교육과 훈련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 교육만이 아니라 사회 교육까지 책임질 수 있는 교육의 야성을 키워야 한다.
신학교육도 신학생들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초심을 가지고, 어디든지 뛰어 들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고 복음으로 그들을 키우고 고치는 사역의 야성을 키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모든 분야의 야성을 회복하고 키워야 한다.
정행과 정통뿐만 아니라, 첫사랑의 뜨겁고 순수한 초심이 있어야 한다. 주님에 대한 뜨거운 풋사랑과 사람들에 대한 싱싱한 사랑의 초심(初心)이 있어야 한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첫 감격과 첫 열정과 첫사랑이 없으면 그것을 기억해 내고 냉랭해진 신앙생활을 단호하게 청산하고 첫 행위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처음 행위, 즉 어떤 고생과 어떤 희생에도 굴하지 않고 험악한 세상의 정글에 들어가서 복음으로 살아가는 야성(野性)을 회복해야 한다. 난로(fireplace)만이 아니라 난로 안에 불(fire)이 활활 타올라야 한다.
우리 목사와 장로가 초심과 야성을 회복하면 교회마다 살아난다. 주님을 향해 지도자의 가슴이 뜨겁게 타오를 때 그 교회는 살아나지 않을 수 없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의 가슴이 주님을 향해 처음 은혜 받을 때의 초심을 회복하고, 안수 받을 때와 장립 받을 때의 야성을 회복하면 우리가 살고 교회가 살고 교단이 살고 개신교가 산다.
우리 모두 각자가 주님을 향한 초심과 야성, 복음의 감격과 실천의 야성을 회복하면 한국 교회는 다시 한 번 도약적인 발전을 기록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 교회와 한국 교회의 희망이 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Reference] : 다니, 「설교 – 초심과 야성」 http://lovebible.co.kr/xe/?mid=b_4&page=4&document_srl=3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