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의해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미감리회 목사 두 분.
1845년 6월 7일 펜실베이니아 웨인스보로에서 태어나 1868년 딕킨슨 대학을 졸업한 가우처는 14살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1869년 감리교 목회자가 되었으며, 1877년 12월 24일 메리 존 가우처 세실리아 피셔(1850~1902)와 결혼했다.
20년 이상 볼티모어 여러 교회에서 목회를 했고, 러브리 레인 감리교회에 있을 때 미 서부지역에 175개의 교회 건축을 위한 재정을 지원했으며, 중국 · 인도 · 일본 · 한국 등에 많은 학교를 세웠다. 1885년 볼티모어에 여자대학을 세웠고, 1890~1908년까지 이 학교의 제2대 총장으로 재직했다. 1922년 7월 19일 운명했다.
그는 조선의 기독교 선교와 고등교육의 모태를 제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가우처의 한국선교 인연은 1883년 9월 고종황제가 파견한 미 외교사절단을 기차(샌프란시스코→시카고→워싱턴) 안에서 만나면서부터였다.
이후 조선 외교사절단을 볼티모어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 한국에 대한 정보를 청취한 그는 1884년 친구 로버트 맥클레이와 그의 아내를 조선으로 보내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도록 일체 경비를 지원했다. 1884년 6월, 가우처의 부탁을 받은 맥클레이는 외교부 주사 김옥균의 주선으로 고종을 알현하고 ‘학교’와 ‘병원’ 사역에 대한 윤허를 얻어냈다. 한국선교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이후 가우처는 6번에 걸쳐 조선을 방문했으며, 배재학당 · 이화학당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미감리교 선교부에 2000불 헌금함으로 초기선교 자금을 뒷받침했고, 이후 3000불을 더 헌금해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의 대지를 구입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연세대학교 전신인 조선기독교대학 등에 재정적 지원을 하기도 했다.
가우처는 아시아지역의 선교와 교육을 위한 지원을 이어나갔다. 1883년 일본 청산학원대학 지원하는 한편 북인도에 60개 가우처 학교를 세워 최하위계층 어린이, 기독교와 타종교(힌두교, 회교)어린이, 그리고 여자에게도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1880년 중국 복주에 신학과를 개설했고, 천진에 여성병원을 개원하는 일과 청도에 화서연합대학을 설립하는데 협력했다.
|
||||||||||||
(그는 6번 조선을 방문했으며, 배재학당 · 이화학당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
|
||||||||||||
▲ 가우처 |
한국 개신교선교는 1883년 9월 13일 민영익 일행 보빙사절단(報聘使節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볼티모어에서 탑승한 해외선교 열정에 불타고 있던 미감리교회 목사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 1845-1922) 박사를 만나 3일 동안 함께 여행하며 대화하던 중 “한국에도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결심을 가우처가 굳히면서” 시작됐다. 그 후 가우처 목사는 미감리회 선교부에 한국선교를 적극적으로 요청했고 가우처의 요청을 받아들인 미국감리회 선교부 파울러(Charles H. Fowler) 감독은 한국 선교지답사를 추진하게 됐다. 1883년 미국감리회 총회선교위원회에서 한국에 선교할 것을 결의했으며 일본주재 감리교 감리사 맥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1824-1907) 목사에게 한국답사를 훈령하게 됐다. 가우처 박사는 한국의 선교지가 성공적으로 개간되도록 거액의 선교기금을 수차례 헌납했다. 훗날 가우처 목사를 “한국 선교의 대부(大父)”라고 추앙하고 있다.
맥클레이 목사는 동경영화학원 교장 당시 1884년 6월 19일 일본나가사키를 출발, 6월 23일 오후 1시 제물포항에 도착, 다음 날 상륙즉시 서울정동에 들어와 미국공사 후트(Lucius H. Foote)의 영접을 받으며 며칠을 머물다가 6월 30일, 일본에서 매우 즐거운 안면을 형성한 바 있는 정부관리 김옥균을 만나 국왕께 “미 감리회가 한국에서 의료와 교육 사업을 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일본어로 쓴 선
▲ 매클레이 |
교 청원서를 전달했다. 7월 2일 황제 고종(高宗 : 1852-1919)로부터 ”미감리교회가 한국에서 의료와 교육 사업을 곧 착수해도 좋다“는 『선교윤허』 통지문을 7월 3일 받았다.
맥클레이 목사는 1888년 초 미국으로 귀국하기까지 최선을 다해 헌신한 이 땅의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로 황금 추수 밭으로, 아펜젤러와 그의 아내, 의사 윌리엄 스크랜턴 목사와 그의 아내, 메리 스크랜턴 부인, 그리고 스크랜턴 의사의 모친에게 영광스런 기회와 명예가 돌아가게 한 위인이다. 맥클레이 목사는 ”한국 선교의 양부(養父)“로 불리워지고 있다. 가우처 목사와 맥클레이 목사의 희생적인 효험 있는 수고와 시도들과 공헌들과 봉사들은 잘 문서화시켜 한국에 의해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민족의 역사를 한 몸에 품고 있는 한국 감리교회.
▲ 현순 |
초기 한국 감리교회는 1902년 아펜젤러(H.G. Appenzeller) 선교사의 순교와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의 병환으로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모자(母子)가 병 치료를 위해 귀국함으로 해서 선교에 큰 타격을 입는다. 의외로 이 일은 이 땅에 한인 선교시대를 열며 정동의 최병헌, 상동의 전덕기라는 구국, 구령의 위대한 선각자를 낳게 한다. 두 분 문하에서 훈련받은 두 사람의 또 다른 선각자가 있으니 현순, 손정도 목사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전덕기 목사가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순교하자 현순(상동) 전도사, 손정도(상동-동대문) 목사는 최병헌 목사의 정동제일교회로 합류, 두 분이 결성한 협성회(충군애국지심, 민족계몽)를 주축으로 새로운 기독교 국가건설에 앞장서게 된다. 아펜젤러, 최병헌, 현순, 손정도 목사는 오늘의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있게 한 주춧돌(초석)이다.
▲ 손정도 |
감리교회 초기역사를 몸으로 쓴 대표적인 인물로 아펜젤러 선교사와 헐버트(H.B. Hulbert) 선교사를 손꼽을 수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쓴 역사가 한국 감리교회의 내적인 면에 충실했다고 본다면 헐버트 선교사가 쓴 역사는 한국 감리교회의 외적인 면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초대 한국선교사로 한국 감리교회를 설립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역사는 그가 한국에 오게 된 1884년부터 순교한 1902년까지로 5,000장이 넘는 기록들이 미국 드류 아카이보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정동제일교회와 배재대학교 조성환 목사가 마이크로 본을 해독, 5권의 책으로 발간했다. 1902년 이후 아펜젤러 선교사의 한국감리교회 역사는 스크랜튼에서 존스(G.H. Jones), 노블(W.A. Noble), 스웨워러(W.C. Swearer) 선교사 등으로 옮겨가게 된다. 스크랜튼을 비롯하여 드류 아카이보에 있는 이 분들의 기록이 해독, 국역됨으로 미진한 한국 감리교회사를 말끔하게 재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 헐버트 |
헐버트 선교사(H.B. Hulbert)는 벙커(D.A. Bunker) 그리고 길모어(G.W.Gilmore)와 함께 국립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오게 되나 아펜젤러의 배재학당과 삼문출판사, 스크랜튼의 상동교회를 맡아 일하게 된다. 벙커와 함께 고종의 극진한 신임을 받았던 헐버트 선교사는 상동 만월(마누엘루) 청년회의 이상설, 이준(李儁)과 함께 대황제 고종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동행했고 회의 참석이 좌절된 후 대표 이상설과 함께 미국을 순회한 다음 그로 하여금 한국 최초의 민주국가를 연해주 소왕령(小王嶺)에 건설하도록 뒷받침했다. 헐버트의 애국독립운동사 또한 한국 감리교회사의 핵으로 애초 중국에서 올링거 선교사(Franklin Ohlinger)에 의해 시작된 이 역사의 줄기는 벙커와 헐버트에 이르러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로 하여금 신민회로 태동되며 이는 상해 임시정부를 건국한 손정도 목사와 현순 목사로 이어진다. 올링거, 벙커, 헐버트, 최병헌, 손정도, 현순 문건이 그 순서를 찾아 정리된다면 한국 근대사, 특히 독립운동사, 대한민국 건국사 또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헐버트 선교사가 쓴 「대한제국 멸망사」에 의하면 한국근대사는 처음 청(淸)나라가 주도하여 쓰다가 소련과 미국, 일본이 끼어들어 제각기 쓰게 되는데 정작 역사의 주인인 한국은 구경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약해 설명하자면 명(明)나라의 사상가 황종희는 명나라의 회복을 자나 깨나 꿈꾸었던 인물의 한 사람으로「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에서 명나라의 멸망을 부패한 왕실이 자초(오랑캐를 대망함)한 것으로 새로운 국가는 민(民)이 첫째요, 사직(司直)이 둘째요, 임금은 셋째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황종희의 신국가론은 이홍장으로 하여금 미국을 방문하여, 민주국가를 경험하게 한 후 청나라의 직례총독으로 대권을 거머쥐게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의 속국으로 치부되고 있던 조선은 이홍장과 대총통 원세개(袁世凱)의 손 안에 있게 되는데, 당시의 이홍장이 자신을 대신해 조선을 섭정토록 한 것이 독일의 외교관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oellendorff)이다.
그러나, 조선의 외교권과 경제권을 거머쥔 묄렌도르프가 조선의 정세에 러시아가 깊숙이 관여되도록 길을 트자 이홍장은 주일청국 공사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통해 러시아의 조선침략설을 퍼트리는 한편 묄렌도르프를 파직시키고 미국의 변호사 데니(Owen N. Denny)를 그 후임으로 오게 한다. 묄렌도르프에 이어 조선의 실권자가 된 데니는 조선 왕실로 하여금 수출입 조세권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청한론」(凊韓論)을 통해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도 봉국도 아니다”라는 내용을 세계에 알림으로 서방의 자본을 조선 왕실로 끌어드리는 한편 자신의 신분 또한 이홍장의 청국과 상관없이 조선 왕실이 인정하도록 조치함으로 조선의 정세를 미국주도로 이끌어 버린다. 데니의 이러한 극단적 조치는 청나라 특히 원세개와 정면 대결하게 되며 이 일로 정동의 외교 관가는 분쟁의 소용돌이에 들게 된다. 이 외세의 분쟁은 동학란, 청일전쟁, 민비시해, 아관파천,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은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역사의 핵심에서 선교사들은 감리교회를 건설했고 그 감리교회가 이 민족의 역사를 한 몸에 품고 있다는 것이다.
▲ 엡윗 청년회(1921)F.S.파커 감독과 함께. |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
대한민국은 한국 감리교회 애국청년에 의해서 건설됐다.
유럽 열강의 약탈 장으로 역사에 등장했던 미국이 청교도들 특히 웨슬리안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로 건설된 과정과 대한민국이 선교사들이 길러낸 기독교 애국청년들에 의해서 오늘날 미국식 민주 대한민국으로 건설된 것이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된다. 배재 협성회와 YMCA, 독립협회를 축으로 활동했던 모든 애국지사들 특히 탁사 최병헌 목사를 중심으로 충성한 이들이 감리교회 성도들이었고 이들은 감리교 선교부의 지원에 의해 움직여지기도 했다.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김구, 박용만, 이동휘, 신익희, 조병옥 등이 이에 속한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의 비서였던 김규식과 경신학교와 인연이 있었던 안창호, 오산학교의 이승훈 선생 또한 장로교 성도였지만 정동의 감리교회 애국지사들과 한 부류를 이루며 활동했다. 이를 뒷바라지했던 사람이 감리교 현순, 손정도 목사와 장로교 김병조, 정인과 목사였다. 감리교 협성회의 목표인 충군애국지심을 바탕으로 한 민족계몽의 결과였다. 헐버트는 충군애국의 역군을 양성하는 한편 그 또한 애국독립의 선봉에 서 있었다.
한국교회 특히 감리교 신학을 이 땅에 정착시킨 존스 선교사의 신학반은 정동교회와 배재학당에 “협성회”라는 청년애국 단체를 탄생시킨다. 1896년 대부분 정동교회 교인이며 배재학당 학생이었던 애국 청년들에 의해 조직된 협성회는 충군애국지심을 기르며 전국 동포의 계몽을 목적으로 조직된 애국 계몽단체이다. 이 협성회를 지도하는 인물이 최병헌, 윤치호, 노병선, 강매, 여병현 선생이었으며 주요 구성원은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남국혁, 안창호 등이었다고 한다. 배재학당 토론회라고 불려지기도 한 이 모임은 1898년 3월 중순까지 42회의 토론회를 개최하여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현실 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토론회에는 당시 궁내부대신 이재순을 비롯한 한규설, 심상훈, 민종묵, 이윤용 등 대신들과 한성판윤 이채변 등 현직 관료들이 참석하여 토론회를 권면하며 조선의 개화와 자주 독립을 고취했으며 한국 개신교가 태어난 황해도 장연 소래에서는 서상륜, 김윤오가 중심이 되어 장연협성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협성회는 독립신문에 앞서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을 발간, 한국의 개화와 자주독립에 앞장섰으며 특히 이상재, 윤치호, 서재필이 주축이 되어 1887년 창립된 독립협회가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이 선임되고 조정의 대신 심상훈, 한규설, 박정양, 조병직, 민종묵, 고영희, 이재순 등이 위원으로 들어오면서 아관에 머물고 있던 고종의 환궁을 요구함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도구로 전락하자 신진 강경파 양흥묵, 이준, 이승만 등으로 아관파천 반대운동을 펴면서 이들을 제거하는 한편 기존의 배재학당 학생 외 벙커 선교사의 육영공원(외국어학교) 학생들이 합세함으로 협성회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주동하는 애국독립운동 단체로 거듭 태어나게 했다.
당시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이들 독립당(개화파)들에 의해 일본으로부터 1천만 원을 차용하게 됨으로 국운탈취의 빌미가 되게 했으며, 이 과정에서 1895년 11월 28일 국왕탈권 미수사건인 춘생문 사건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통정대부 호조참의(차관) 벙커 선교사를 비롯, 헐버트, 존스, 게일, 언더우드, 에비슨 등이 교대로 고종을 호위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이후 독립협회에 맞선 황국협회 출현과 보부상패의 본부습격, 만민공동회에 이은 독립협회의 강제해산, 을사늑약 체결로 우리는 주권을 잃게 된다.
이 암울한 시기에 충군애국지심의 횃불을 다시 든 이가 있으니 탁사 최병헌 목사이다. 탁사는 신천옹(信天翁)으로서의 큰 입을 열었으니 당시 고종의 예식관(종3품)으로 총애를 받고 있던 아들 최재학을 중심으로 1905년 이준(개혁당), 김구(서북파)와 함께 을사늑약 반대 상소운동을 벌이는 한편 개혁독립 세력의 핵심으로 의분 자결한 그 당시 주 영국공사 이한우 공의 추도식을 드려 항일애국 독립운동의 횃불을 들었다.
정동 엡윗청년회 주관으로 개최된 이 추모식에서 최병헌 목사는 추도사를 통해 「오호라! 조선천지가 왜구의 발 아래 있다」고 애도함으로써 항일 애국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이후 이 반대운동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와 연대하여 감.장.침례교 지도자 연합기도회, 구국철야기도회를 갖는 한편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는 고종의 밀서를 감리교 헐버트 선교사에게 주어 미국정부에 전달하도록 했으며 을사늑약 무효화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도 하고 정동의 최재학을 소주(疏主)로 상동의 이준, 진남포감리교회 김구 등 22명이 대표로 발기, 대대적인 구국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 일은 미국정부가 승인한 조약을 교회청년회가 정치적으로 반대했다는 이유로 엡윗청년회의 해산을 가져오게 했고, 이듬해인 1907년에는 이준의 헤이그 밀사사건 실패와 고종의 양위, 안창호의 귀국과 신민회 조직,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로 이어지면서 이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신민회가 지목되어 기독교 지도자 105인이 검거되는데 1910년 최병헌 목사도 이 조직의 경기지방 책임자로 몰려 일시 투옥되고 전덕기 목사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1914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 전덕기 |
이 일의 주동자는 최재학, 이준, 김구였다면 그 배후에는 최병헌, 전덕기, 이승훈이었으며 이들의 대표적인 상소주 최재학이 최병헌의 장남인 점으로 보아 이는 곧 최병헌 목사의 정동제일교회와 상동교회가 주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와중에서 최병헌 목사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 투옥까지 당하는 수모 속에서도 정동교회는 재적 1,968명으로 1,500여 명이 동시에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당 증축을 실행에 옮겼으며, 1913년 3월 배재에서 10일간 개최된 사경회에서는 정동, 배재, 이화학당과 함께 정동의 여섯 지 교회 교인들이 함께 부흥회를 가짐으로 영적생활의 심화를 더했던 것이며 집회 후 70명의 젊은이가 정동교회에 모이는 결실이 있었다.
이로써 정동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변화하면서 정동교회는 민족교회로 우뚝 서게 된다. 또한 6명의 새로운 전도사를 파송 받으면서 이들로 하여금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선교와 애국독립운동을 앞장서게 했다. 이들 중 후일 송기용, 민찬호, 문경호 전도사가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 이승만 (민찬호 전도사), 샌프란시스코 안창호(문경호 전도사)를 돕게 했고, 현순, 이필주, 손정도(상해) 목사가 미국과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이승만(하와이), 안창호(샌프란시스코), 김구(상해)를 도와 대한민국을 건국하게 하는 초석을 쌓게 했다. 삼일독립운동을 전후한 1920년대까지 기독교 목사는 독립운동가로 불렸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계속) (글:서대문교회이주익 목사)
맥클레이(한국선교의 문을 열다)
누가 들어가서 길을 열것인가?(감신대 이덕주교수)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다.”(고전 3:6)
사도 바울의 진술처럼 한국 감리교회 및 개신교회 선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롬 8:28) 그렇게 이루어졌다. 한민족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1883년 9월 미국 볼티모어의 가우처 목사가 워싱턴행 열차 안에서 만난 보빙사절단 단장 민영익과 대화한 후 마음의 감동이 있어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면서 개척 선교비를 냈고, 가우처 목사로부터 그 소식을 들은 일본의 매클레이 선교사는 1884년 6월 서울을 방문하여 김옥균을 통해 “선교사가 들어와 학교와 병원 사업을 해도 좋다”는 고종황제의 ‘선교 윤허’를 얻어냈으며, 마침내 1885년 4월 미감리회의 개척 선교사 스크랜턴과 아펜젤러 가족들이 서울 정동에 들어와 병원과 학교, 그리고 교회를 설립함으로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요약하면, 가우처는 한국 선교의 동기와 물질을 제공했고 매클레이는 굳게 닫혔던 선교의 문을 열었으며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은 그 열린 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와(앞서 들어온 귀츨라프나 토마스처럼 ‘몰래’ 들어오지 않았다) 한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로써 매클레이는 한국선교 개척과정에서 ‘길을 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에게 ‘한국 개신교 선교 개척자(a pioneer of the Korean Protestantism)’란 칭호가 붙여지는 이유다. 그런데 매클레이는 한국에서만 개척 선교사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서울을 방문하기 전 이미 중국에서 25년, 일본에서 10년, 감리교 개척선교사로 사역한 경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아시아 감리교 선교 개척자’(a pioneer of the East Asian Methodism)로 불렸다. 그가 이처럼 19세기 ‘땅 끝’(행 1:8)으로 인식되었던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쉽지 않은 개척 선교사역에 헌신하였고 그로 인해 훗날 ‘개척자’의 명예를 얻게 된 동기는 스물 세 살 청년목회 시절 모교 학장으로부터 받은 편지의 끝말, “누가 길을 여는 영광을 얻을 것인가?”(Who shall have the honor of leading the way)라는 질문 때문이었다.
맥클레이는 1824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콩코드의 독실한 감리교 집안에서 출생하여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칼라일에 있는 감리교계통 디킨슨대학을 1845년 졸업한 후 볼티모어연회 게티스버그 구역에 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목회를 시작하였다. 게티스버그에서 1년 만에 새 신자 1백 명을 얻으며 목회에 자신감을 얻어갈 즈음 1847년 모교인 디킨슨대학 에모리 학장으로부터 “중국에 개척 선교사로 나가지 않겠느냐?”는 편지를 받았다. 아편전쟁(1840년)에서 패한 중국이 서구 열강국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이 앞을 다투어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는데 미국 감리회는 아직도 선교사를 파송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해외선교에 관심이 깊었던 미들타운 웨슬리언대학의 올린 학장과 디킨슨대학 에모리 학장이 앞장서서 중국 선교를 주창하였고 그런 배경에서 매클레이는 모교 학장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에모리 학장의 편지를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인 매클레이는 즉시 해외선교부에 중국선교 지원의사를 밝혔고 그렇게 해서 콜린스와 화이트, 히칵 등과 함께 중국 개척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847년 10월 뉴욕에서 제인스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국을 출발, 115일 항해 끝에 1848년 2월 홍콩에 도착하여 중국 선교를 시작하였다.
미감리회 중국 선교는 개항장인 푸저우(福州)를 거점으로 해서 추진되었다. 매클레이는 비롯한 개척 선교사들은 성 밖에 선교사 사택과 남녀 학교, 그리고 진신당(眞神堂)과 천안당(天安堂) 등 집회소를 마련하고 전도사역에 나섰지만 개종자(세례자)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푸저우가 개항장이긴 했지만 아편전쟁 직후 지배자처럼 들어온 서양인과 서양종교에 대한 반감과 저항의식이 강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푸저우 사람들은 선교사들에게 노골적으로 “아편 무역만 중단해라. 그러면 당신들의 종교를 믿어보겠다”고 하였다. 더욱이 푸저우의 개척 선교사들은 3년 만에 질병과 죽음으로 선교지를 떠났고 매클레이만 남았다. 매클레이도 푸저우에서 얻은 첫째 아이를 1년 만에 잃는 슬픔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매클레이의 좌절과 실망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신도 선교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여러 번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를 붙잡아 준 것은 본국 교회의 변함없는 지지와 격려였다. 매클레이는 복음전도에 임하면서 동시에 뒤에 올 후배 선교사들을 위해 푸저우 방언으로 성경과 교리서를 번역, 출판하였고 푸저우방언사전을 편찬하였다.
개척 선교사의 기다림과 인내, 선교사를 파송한 본국 교회의 신뢰와 격려, 그것이 합하여 중국 선교는 결실을 얻기 시작했다. 즉 미감리회가 중국선교를 시작한 지 10년 만인 1857년 7월 14일, 천안당에서 첫 번째 중국인 개종자 치엔안(陳安)이 매클레이에게 세례를 받았다. 중국인 최초 감리교도가 나온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중국인 세례와 교회 개척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즉 1857년에 16명, 1858년에 47명이 세례를 받았고 교회도 6곳으로 늘어났다. 이후 선교 지역도 급속도로 확장되어 1867년에는 서부로 푸젠(福建)과 장시(江西), 쓰촨(泗川), 남부로 난징(南京)과 양저우(楊州), 북부로 베이징(北京)과 텐진(天津)까지 선교사들이 들어가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877년 중국연회가 조직됨으로 선교 개척 30년 만에 중국 감리교회는 (미국교회에서) 독립된 교회로 세워질 수 있었다.
이처럼 중국선교 개척자로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매클레이는 1872년, 제2차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에 돌아갔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에 감리교 선교사를 파송하자” 호소하였다. 이런 매클레이의 호소에 대하여 해외선교부에서는 “그러면 당신이 가시오” 하는 식으로 1872년 11월, 매클레이를 일본 선교 개척자로 임명하였다. 중국에서 개척선교 25년 경력의 매클레이는 중국 언어와 문화, 음식과 풍토에 익숙하여 중국선교 관리자로서 후반기 안정적인 선교사역을 전개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갖추고 있었는데 다시 ‘낯선’ 일본에 가서 선교 개척자로서 고된 사역을 감당할 처지가 된 것이다.
매클레이는 이번에도 ‘하나님 소명’으로 알고 일본 선교에 임하였다. 그는 소퍼와 데이비슨, 해리스 등 후배 선교사들로 개척 선교사진을 구성한 후 이들보다 먼저 1873년 6월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해서 일본 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중국 푸저우에서 했던 것처럼 요코하마에 남녀 학교와 천안당, 신학교를 설립하고 일본인을 대상으로 복음전도 사역에 나섰는데 중국의 경우와 달리 일본 선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선 일본선교 개척 1년 만인 1874년에 메이지유신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일본인 농학자 츠다센(津田仙)이 소퍼에게 세례를 받아 일본 최초 감리교인이 되었고 1877년에는 요코하마와 도쿄, 나가사키, 하코다테 등지에 일본인 목회자 9명을 파송할 정도로 교회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매클레이는 초교파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일본어 성경번역 작업에도 참여하였고 미감리회 교리서와 신학교 교재들을 번역, 출판하였다.
일본 감리교회는 선교 개척 7년만인 1881년에 이르러 남녀 선교사 20명과 일본인 목회자 51명이 6개 지방의 83개 교회에 입교인 478명, 학습인 160명, 세례아동 63명, 총 701명 교인을 돌보게 되었고 감리교 계통 13개 학교에 학생 407명, 15개 주일학교에 422명 학생을 기록하였다. 이런 선교 결과를 안고 매클레이는 1881-82년 안식년 휴가를 떠났다. 휴가 중 매클레이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였다. 캘리포니아 퍼시픽대학 여성교수 새라 바와 결혼한 것과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설립자금을 모금하는 일이었다. 매클레이는 중국 푸저우에서 사역할 때부터 초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는 전 과정을 같은 갬퍼스에서 가르칠 수 있는 ‘종합적인 기독교 교육기관’ 설립을 구상하였는데 일본 도쿄 시내에 그런 학교를 설립할 계획안을 가지고 미국 교회들을 방문하여 후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런 그의 구상에 적극 호응하고 나선 이가 볼티모어여자대학(현 가우처대학) 설립자 가우처 박사였다. 매클레이의 디킨슨대학 23년 후배이자 매클레이와 같은 볼티모어연회 소속이었던 가우처는 매클레이의 신학교와 새로 설립할 대학 설립 기금으로 1만 5천 달러를 후원하였다.
1882년 6월 일본에 귀환한 매클레이는 도쿄 중심부 아오야마에 3만 2천여 평 부지를 확보하고 1883년 신학교와 대학교, 남녀 중학교 건물을 지음으로 오늘까지 일본 사학명문(私學名門)으로 알려진 ‘아오야마학원’ 시대를 열었다. 그 사이 일본 감리교회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선교 개척 10주년이 되는 1883년에 이르러 전국 28개 교회에 1천 명이 넘는 신도수를 기록하였다. 지역적으로도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해서 남부 나가사키, 북부 홋카이도에 이르렀다. 이런 부흥과 발전을 기반으로 하여 1884년 일본연회가 설립되었으니 중국 감리교회가 선교 30년 만에 독립 연회를 조직한 것에 비교하면 일본 선교는 3배 속도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84년 일본 감리교회는 연회를 조직하면서 연회원들은 일본선교 개척자 매클레이에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신중하게 판단하고 공정하게 처리함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신 것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한다”는 찬사를 보냈다. 이런 찬사를 받을 때 그의 나이 60세였다.
이처럼 일본 개척선교 10년의 결과로써1884년 9월 일본연회가 조직될 때 그 주역인 매클레이는 연회 석상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중국, 일본에 이어 한국도 오랜 쇄국 정책을 풀고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과 1883년 보빙사절단 파견으로 서구국가(특히 미국)와 교류를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워싱턴행 기차 안에서 가우처 박사와 보빙사절단장 민영익과의 만남, 가우처 박사의 결단과 호소, 그리고 매클레이의 방한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매클레이가 한국인을 처음 본 것은 1847년 중국 선교를 막 시작한 푸저우항에서였다. 중국 근해에서 난파되었다가 중국인들에게 구조되어 푸저우에 머물다가 귀환선을 타고 떠나는 한국인 상인들을 보면서 매클레이는 속으로 “언젠가 조선 백성에게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큰 명예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매클레이는 1884년 1월, 볼티모어의 가우처로부터 “귀하께서 한 번 시간을 내서 한국에 들어가 그곳 사정을 살펴보고 선교회를 설치할 부지를 확보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이교도 지역에 들어가는 첫 번째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될 것이며 그 일은 일본 선교회로서도 영광스런 일이 될 것이며 이미 여러 방면에서 개척의 사역을 감당해 오신 귀하에게 또 다른 영예가 될 것입니다”는 편지를 받았다. 매클레이는 가우처의 편지를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를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일본 교인들의 도움으로 한국 정부(국왕)에게 제출할 선교의향서를 작성한 후 6월 19일 부인과 함께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6월 20일 부산, 6월 23일 인천을 거쳐 6월 24일 서울에 도착했다.
매클레이 부부는 서울에 두 주일 머물렀는데 처음 한 주간은 허송세월하였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구한 통역인이 보수파와 연결된 인물이어서 매클레이와 정부 관계자 접촉을 방해했던 탓이다. 다행히 매클레이는 6월 30일 미국공사 푸트의 주선으로 당시 외부협판으로 외교업무를 관장하던 김옥균을 만날 수 있었다. 구면인 김옥균은 매클레이에게 적극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사흘후 7월 3일 저녁, 미국공사관에서 만난 김옥균은 매클레이에게 “어제 밤 전하께서 당신 편지를 세밀하게 검토하시고 당신이 제안한 학교와 병원 설립을 가납하셨다”고 통보하였다. 국왕의 ‘선교윤허’ 소식을 듣고 감격한 매클레이는 그날 저녁 서울 밤거리를 걸으면서 속으로 “국왕의 마음도 주님의 손에 잡혀 있으니 마치 강물과 같도다. 이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그 물줄기를 인도하시리로다”는 말을 반복하였다.
그렇게 해서 아편전쟁과 페리호사건을 거치면서 문호를 개방하고 선교사를 받아들였던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은 국왕의 허락을 받은 상태에서 개척 선교사들의 내한이 이루어졌다. 매클레이를 통해 “한국에 선교의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 감리교회는 곧바로 병원을 할 스크랜턴, 학교를 할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대부인을 개척 선교사로 선발하였다. 이들 개척 선교사들은 1885년 2월 일본에 도착하여 매클레이의 지휘와 지도를 받아가며 한 달 동안 준비를 한 후 순차적으로 내한하여 서울 정동에 정착, (중국과 일본에 비하여) 한결 수월하게 선교사역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그 사이 매클레이는 한국 선교를 계속 지원하였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선교 개척의 공을 세운 매클레이는 이후 4년 동안 일본에서 더 활동하다가 1888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산페르난도에 친형 찰스 매클레이가 설립한 매클레이신학교 학장이 되어 1901년 은퇴할 때까지 목회자 양성사역에 임하였다. 매클레이신학교는 1900년 로스앤젤리스의 서든캘리포니아대학 신학부를 거쳐 1957년 클레어몬트신학교로 발전하였다. 매클레이는 신학교 학장직에서 물러난 후 로스앤젤리스에서 조용한 말년을 보내다가 1907년 8월 18일 향년 83세로 별세하여 3년 전에 별세한 부인의 묘소가 있는 로스앤젤리스 로즈데일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중국과 일본, 한국의 개척 선교사로 사역했다는 짧은 언급과 함께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는 성구가 새겨져 있다. 탄생도, 죽음도, 그 사이의 삶과 사역도 ‘주 안에서’ 이루어진 선교 개척자 매클레이의 일생이었다.
이덕주(감신대 교수 | 한국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