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 감리교회 (United Methodist Church)
* 연합감리교회의 유래
존 웨슬리(John Wesley)는 1703년 6월 28일 영국의 동북쪽 링컨 주의 엡워스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사무엘 웨슬리와 그의 부인 수산나 아네슬리 사이에서 열아홉명의 자녀중 열다섯번째로 태어났다. 특별히 그는 영국과 미국에서 수많은 변화가 있었던 18세기를 두루 걸쳐 산 인물이었다. 18세기 초 영국의 인구는 5백만 정도였으나 18세기 말엽에는 8백만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인구의 약 10%가 런던에 살았는데 대다수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질병이 만연했고 규칙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직업도 확실치 않아 불안정한 생활에 좌절감과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은 일종의 해소책으로 술과 폭력, 매춘과 도박에 빠져 있었다. 반면에 토지소유자, 귀족, 부유한 상인들은 가난한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사치스럽고 평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즐겼다. 즉 18세기의 영국은 경제력에 따라서 백성들의 계층이 심히 양극화되어 있었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농업과 제조업의 새로운 기술이 증가하고 직물업, 철 제련업과 같은 사업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며 산업 혁명의 초기 단계에 있었다. 백성의 대부분은 국가에서 공인된 영국교회에 속해 있었고 소수지만 영국교회가 아닌 캐톨릭, 장로교, 회중교, 침례교, 퀘이커교에 속한 사람들도 있었다. 영국교회는 정치적인 세계와 아주 긴밀한 연관을 맺고 기존 체제를 바꾸기보다는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인도하였다. 그렇기에 영국교회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영적이고 도덕적인 지침이 주어졌다. 영국이 이러한 상황에서 존 웨슬리는 태어났던 것이다.
그의 부모는 분리파라고 불리던 청교도 목사의 자녀들이었으며 후에 사무엘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 시절에 영국교회로 개종하였고 영국교회의 목사로 안수받은 후 엡워스 교구를 맡아 거의 40년간 봉직하였다. 존 웨슬리는 엡워스 목사관에서 성경과 영국교회에서 사용하는 기도서에 대한 사랑을 배웠고 부모의 영향을 받으면서 학문과 교회의 가르침, 기독교인으로서의 필요한 훈련,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1714년 상류층의 자녀들이 다니는 차터하우스에 입학하였고 1720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입학을 하였다. 1724년 졸업할때에는 고전과 현대문학, 신학, 역사, 과학을 두루 섭렵하고 부모의 권위로 종교적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1726년 3월 링컨 칼리지의 연구원으로 뽑히게 되었고 1729년 9월 링컨 칼리지로부터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동안에 그의 동생인 챨스 웨슬리는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의 학생이 되어 영적 성장을 목표로 옥스퍼드 대학의 학생들과 소그룹으로 규칙적인 만남을 갖고 있었다. 존 웨슬리는 그들의 초청으로 이 그룹의 일원이 되었고 곧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기도와 성경공부, 금식, 성만찬, 사회 봉사. 특히 옥스퍼드의 감옥을 방문하는 일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규칙적으로 행하였다.
다른 학생들은 이 적은 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성경벌레, 규칙주의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결국 웨슬리와 동료들이 그리스도께 헌신하면서 지키려고 했던 엄격한 규율은 그들로 하여금 “규칙주의자(Methodist)”라는 별명을 얻게 만들었고 이것이 그대로 나중에 감리교단의 이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동생 찰스(Charles)와 함께 존 웨슬리는 미 대륙에서 복음 전도자로서의 사역을 시작했고 이런 웨슬리의 복음 확산을 위한 열정적 행동과 후에 함께 보여지게 되는 사회적 관심과 통찰은 미대륙에서의 감리교회의 성장과 형성에 불을 당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미 감리교회의 역사는 영국에서 웨슬리와 찰스 형제와 함께 일해 왔던 열심있는 남녀 그룹들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1768년 존 웨슬리는 뉴욕의 감리교 평신도인 토마스 테일러로부터 뉴욕에서 성장하는 감리교 운동을 위하여 유능하고 경험이 있는 전도자를 보내달라는 요청의 편지를 받고 2명의 설교자 리차드 라이트와 프랜시스 애즈버리를 파송하게 되었다. 프랜시스 애즈버리는 미국에 새롭게 조직되는 감리교회의 감리사의 역할을 위임받고 보내진 것이었다. 훗날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1771년 미국 감리교회 역사의 첫 장을 연 인물이 되었다. 1774년 9월 웨슬리는 토마스 코크 목사와 자신이 직접 안수하여 세운 2명의 목사, 곧 리차드 윗코트와 토마스 베이시를 미국으로 보내었다. 코크 일행은 미 감리교회를 조직하고 몇 명의 평신도 전도자를 안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보내졌다. 그들이 미국에 올 때 웨슬리가 미국의 감리교인들을 위해 만든 책을 가지고 왔다. 이 책에는 영국교회의 공중기도서를 요약해서 웨슬리가 만든 ‘북미 감리교 주일예배서’(The Sunday Service of the Methodists in North America)라는 제목의 기도서와 주일용 찬송 시편집(A Collection of Psalms and Hymns for the Lord’s Day)라는 제목의 작은 찬송집이 들어 있었다.
1784년 12월 크리스마스 총회라고 불리우는 감리교 전도자들의 모임이 메릴랜드의 볼티모어에 있는 러브리 레인 채플(Lovely Lane Chapel)에서 모였다. 이 곳에서 감리교 전도자들은 미 감리교회라는 이름을 채택하게 되었고 토마스 코크를 감리사로 만장일치 추대하고 또한 프랜시스 애즈버리를 초대 감독으로 선출하여 그 조직체의 명칭을 감리교감독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라고 하였다. 이들이 새롭게 세운 미감리교회의 목적은 ‘미 대륙을 개혁하고 이 땅에 성서적인 성결을 전파한다’임을 채택하고 이를 장정에 수록하였다. 영국교회의 ‘삼십구개강령’을 수정하여 웨슬리가 만든 ‘종교강령’과 ‘총칙’도 채택하였다. 아울러 1785년에 ‘미감리교회의 교리와 장정’이 최초로 나오게 되었다.
1784년 크리스마스 총회이후 수십년동안 미감리교회는 인종차별과 노예제도, 감독의 권한과 권위, 교회 지도력에 있어서의 평신도 역할과 같은 문제들로 인해서 심각한 분열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9년 3개의 감리교회들 곧 미감리교회, 감리교 개신교회, 남감리교회가 통합하여 감리교회를 만들게 되었다. 1968년 미감리교회 (The Methodist Church)는 펜실바니아주 죤스타운에서 복음교회와 연합형제교회가 통합하여 만든 복음연합형제교회와(Evangelical United Brethren Church)통합하여 마침내 텍사스주의 달라스에서 미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 연합감리교회 교리의 특징
1. 연합감리교회는 선행적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는다.
웨슬리는 인간이란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선행적인 은총과 자유의지를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셨다고 믿었다.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죄인에게 유일한 희망은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요 아무런 공로없이 받을 만한 값어치가 없는데도 그저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것을 웨슬리는 선행적 은총이라고 불렀다. 그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선행적 은총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져다고 믿었다. 이것은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유롭게 역사하는 은혜라고 불렀다. (설교, ‘Free Grace’ 1739)
이러한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하신 선행적인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악된 상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며 새 생명의 길을 보여주고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와 화해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게 하며 회개와 변화를 할 수 있게 한다. 선행적 은혜없이는 죄로부터 자유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와 새로운 삶으로의 응답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혜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자유를 회복한다.
2. 연합감리교회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믿는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다른 신학적인 용어가 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이다.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가 새로운 삶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개신교 종교개혁의 중요한 사상인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계승하였다. 웨슬리는 구원을 받기 위한 우리의 자세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응답하는 길이고 그의 용서를 받아들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신뢰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의지, 확신을 뜻한다.
3. 연합감리교회는 믿음으로 거룩해지는 것을 믿는다.
믿음으로 거룩해진다는 신학적인 용어는 성화(Sanctification)이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죄의 용서로 인하여 새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면 믿음으로 거룩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안에서 영적으로 계속 성장해 가는 인간의 모습을 뜻한다. 그는 기독교인의 신앙의 구조를 집에 비교함으로써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도로 입구는 회개에 비유할 수 있다. 그 통로를 지나지 않으면 집으로 갈 수가 없다. 그리고 집의 대문은 믿음으로 의롭다 받음으로 용서, 죄사함,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집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도로 입구와 대문은 집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이며 집 그 자체는 마음과 삶의 성결이다(The Principals of Methodism Farther Explained, 1746).
성결에는 2가지 중요한 면이 있다. 개인적 성결과 사회적 성결이다. 개인적 성결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의도의 단순성, 하나님 중심의 온전한 삶을 뜻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사랑하며 예배하며 닮으려 하고 순종함이 포함된다. 내적 성결은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의지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를 쓰시게 한다. 외적 성결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을 뜻한다. 성결한 삶의 목표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온전이다. 그가 생각했던 온전은 무지와 실수, 유혹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웨슬리가 말하는 온전이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가장 큰 선물인 마음의 순수함을 기독교인들이 지녀서 이를 통하여 사랑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며 예수의 행하심을 우리도 따라감을 뜻하는 것이다. (설교, ‘On Love, 1737; ;’Christian Perfection’,1741) 이것은 챨스 웨슬리의 찬송(‘하나님의 크신 사랑’ 55장)가사가운데 분명히 나타난다.
“우리들이 거듭나서 흠이 없게 하시고 주의 크신 구원받아 온전하게 합소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천국까지 이르러 크신 사랑 감격하여 경배하게 하소서”
4. 연합감리교회는 연대적인 체제를 믿는다
연합감리교회는 연대적인 체제를 통하여 약한 교회를 도우며 함께 교인을 육성하고 선교사업에 힘쓴다.
5. 연합감리교회는 4가지 신학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 연합감리교의 헌법서라고 할 수 있는 “The Book of Discipline”에는 웨슬리의 신념을 아래와 같이 약술하고 있다.
“웨슬리는 기독교 신앙의 살아있는 핵심은 성서 안에 계시되었고, 전통에 의해 조명되었고, 개인적 경험에서 생기를 얻었고, 이성에 의하여 확고해졌다고 믿었다.”
웨슬리는 기독교 신앙을 해석함에 있어서 자신의 해석방법이 새롭거나 혁신적인 해석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는 18세기 영국교회에 이미 기존한 신학적인 접근방식과 방법을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그 중에서 기독교인과 기독교 공동체가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는데 있어서 성경, 전통, 이성, 체험, 이 4가지가 웨슬리에게 주요한 지침이 되었던 것이다.
1) 성경
웨슬리는 성경이 기독교인의 믿음과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789년 그의 설교 ‘Causes of the Inefficacy of Christianity’에서 “나는 대소에 상관없이 성경에서 벗어나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감히 그렇게 하지 않겠다. 나는 성경에 포함된 어떤 적은 것도 내 마음대로 할 권한이 없다. 나는 반 성경적이 아니라 완전히 성경적인 기독교인이 되려고 한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자신을 “한 권의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한권의 책이란 성경을 말한다(설교’On God’s Vineyard,”1787). 그가 스스로 “한 책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성경만 읽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성경 이외에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을 광범위하게 섭렵하였다.
웨슬리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책이므로 자신을 비롯하여 신앙을 신중히 받아들이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굳게 믿었다. 다른 3가지 근원인 전통, 이성, 체험은 성경을 해석하고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며 그 성경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데 필요한 지침이라고 본 것이다. 이 말은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헌법서에 잘 요약되어 있다. 즉 “성경은 기독교 교리를 위한 제일차적인 출처요 기준이다.” 여기서 일차적이라는 말은 그의 교리와 신학 형성에 있어서 성서가 전통, 이성, 경험 보다 우선하는 표준이라는 것이다.
2) 전통
웨슬리가 전통에 충실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로 50권으로 된 기독교 문고(A Christian Library)를 편집해서 출판한 일을 들 수 있다. 이 기독교 문고는 2세기부터 웨슬리 당시까지 기독교 저자들의 글을 선택해서 모은 것이다. 그는 이외에도 기독교 전통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었고 200여권의 고전을 번역 출판하기도 하였다. 웨슬리는 기독교 전통가운데 초대교회 연구에 심취하였고 초기 기독교 학자들의 글을 많이 참고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성경을 신실하게 해석한 사람들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16세기에 만들어진 공동기도서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는데 여기에는 영국교회에서 사용되는 기도와 예배의식, 그리고 시편과 다른 성경구절들로 이루어진 매일 아침과 저녁 기도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왜 전통이 신학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아니될 요소인가? 전통이란 북음의 진리를 각 시대를 위해서 해석하는 노력인데, 복음은 하나이지만 해석의 관점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것이다. 이 다양한 전통은 복음을 충실히 해석하려는 노력이었다는 의미에서 가치있는 것이다. 지난 2000년의 교회역사는 성서 해석의 역사라고 말해서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의 교회는 그 성서 해석의 토대 위에 서 있어야 하고 또한 우리 시대를 위한 해석을 일삼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전통을 무시하면 우리 스스로 기독교 전통에서 소외되고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3) 이성
웨슬리가 활동하던 18세기 서구사회는 이성의 지배 아래 있었다. 특히 기독교 이신론(理神論, Deism-인간이 이성으로 절대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의 계시가 필요 없다는 학설, 일명 자연신론)이 풍미했던 시대에 이성을 종교의 적으로 거부하는 전통주의도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성을 동반자로 보고 적극적으로 받아드렸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참된 종교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건을 발굴하려 할 때, 하느님이 주신 이성을 유감없이 활용하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권고하는 바이다” 고 하였다.
그는 종교에 있어서 이성과 감성, 이 두가지를 모두 수용하고 있음을 자신의 입장으로 분명히 하였다. 성숙한 신앙이란 언제나 건전한 이성과 이해에 근거를 두어야 하고 이성과 신앙은 적대 관계에 있지 않고 적절한 동반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4) 체험
웨슬리는 기독교 신학에서 체험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서 끊임없는 관심을 가졌다. 그는 1786년 ‘Thoughts Upon Methodism’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감리교인들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감리교가 영력없이 종교의 형태만을 갖춘 죽은 종파의 모습으로 남을까 두렵다”
웨슬리는 자신의 목회사역을 통하여 종교의 극단적인 형태에 치우친 사람, 바른 신학적인 이해, 예배와 성찬의 참여, 자선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미쁘심을 얻을 수 있다는 편파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비판하였다. 그는 이런 사람들에게 참된 종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생생하게 느낄때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신시켰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깊은 내면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알기를 원하며 하나님께서도 그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으시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올더스게잇의 회심할 때 직접 체험하였다. 그는 올더스게잇의 회심을 통해 비로서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경험의 빛에서 성서, 전통, 이성을 재조명할 때 새로운 생명이 솟아난 것이다. ‘웨슬리의 사변형’이라고 불리우는 이 4가지 신학을 위한 지침, 즉 성경, 전통, 이성, 체험은 웨슬리 신학의 중요한 근간이 된 것이다.
* 미연합감리교회 조직과 현황
870만 명에 달하는 연합감리교회는 스스로 교회의 나아갈 길을 결정하는 민주적인 방법에 따라 치리되고 있다. 가장 중요하고 최종적인 결정기구는 미 전역에서 선출된 총회 대표들이 모여 매4년 마다 한 번씩 개최하는 총회(General Conference)이다. 이 총회 아래 5개의 지역구(Jurisdictional Conference)가 있다. 이 지역구는 미국을 지리적 구도에 따라 지역별로 구분한 것으로 그 속에 몇개의 연회(Annual Conference)가 소속되어 있다. 이 지역구는 감독을 선출하며 각 연회의 목회와 행정을 돕는다. 연회는 몇 개의 지방(District)으로 구성되며 연회를 주관하는 감독(Bishop)이 상주하면서 치리하는 연합감리교회의 가장 기초적인 조직이다. 연회는 매년 그 연회가 담당하는 지역의 목회 계획을 세우고 되돌아본다. 아울러 각 지역은 감리사(Superintendent)에 의해 치리되며 여러 개의 개교회로 구성된다. 그리고 각 개 교회는 구역회(Charge Conference)를 구성한다. 구역회는 각 개교회의 중심 된 기관으로서 일 년 교회의 예산 및 목회의 방향과 제반 행정적인 사항을 의결하는 한편 교회의 임원등 인선작업도 병행한다.
연합감리교회는 교인 구성에 있어서 가장 많은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및 미본토인들로 구성된 교단이며 포괄적이며 복합주의적인 성격을 지향하고 있다. 미대륙의 최초의 종교출판사는 감리교출판사였고 또 현재 100개가 넘는 대학과 13개의 신학교, 15개의 초급대학, 400개의 병원, 고아원및 양로원을 운영하고 있다. 연회에서 파송을 받아 일하는 목사의 숫자는 수만명에 이르며 특별파송을 받고 일하는 목사의 수도 수천명에 이른다. 연합감리교회는 세계의 7대륙중 6대륙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으며 일곱째 대륙인 오스트라리아는 상당한 규모의 영국계 감리교회가 있다. 연합감리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주로 중산층 65%에 속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연합감리교회의 80%는 인구 1만명 이하의 시골지역이나 중소 도시에 세워졌고 그중에 4분의 3은 200명이하의 교인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총 감리교인수의 60%는 도심지에 살고 있다.
한국에서는 감리교의 첫 선교가 한국 개신교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1884년 6월 27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매클레이(Maclay,R.S.)가 한양에서 당시 개화파 지도자인 김옥균(金玉均)을 통하여 대한제국 고종에게 감리교회의 선교사업에 대한 윤허를 요청하였고, 고종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활동만을 허용하였다. 직접적인 선교는 188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부부와 스크랜튼이 인천에 도착하며 시작되었다.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감리교회와 배재학당을 설립하였고 선교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스크랜튼은 의료사업에 종사함으로써 또 다른 선교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전신인 조선감리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전래 초기부터 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한국 내 관련 대학으로 감리교신학대학교,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 연세대학교(장로교회와 공동 설립), 이화여자대학교, 배재대학교 등이 있고, 감리교회 목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감리교신학대학교,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 등의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이 있다.
미국 내의 감리교회는 ‘연합감리교회’ (The United Methodist Church)외에’자유감리교회’ (The Free Methodist Church) 및 ‘나사렛교회’ (Church of the Nazarene)가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 아울러 인종차별로 인해 아프리카 감리교 감독교회와 아프리카 감리교시온교회등의 교파가 생기게 되었고 20세기 초에는 감리교회 내에서 개인의 성화를 중요시 하는 성결운동로 인해 성결교회가 발생하였고, 영적 체험과 은혜를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이 벌어지면서 오순절 교회, 즉 순복음 교회가 발전하게 된다.
연합감리교회의 조직은 미국 이외에도 캐나다와 유럽, 아프리카와 필리핀의 교회들을 포함한다. 그 외 감리교회들은 국가별로 독립된 교단을 형성하여 운영되고 있다. 세계 각지의 감리교회의 교류를 위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세계감리교협의회 본부가 있다. 보편교회의 감독제 교회 전통을 계승하여 감독을 중심으로 한 감독제 교회의 치리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글정리: 장재웅목사(롱아일랜드 연합감리교회)
참고도서(Reference)
Jack M.Tuell ‘The Organization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Abington
원달준 역 ‘연합감리교회의 특징’
‘챨스 유리겐, Jr ‘존 웨슬리:tjdrufgks akdmas과 삶을 위하여’
연합감리교 출판사 ‘평신도 지침서(Guide Lines for Leading Your Church)”
웨슬리의 균형잡힌 영성
웨슬리(John Wesley, 1703-1790)의 영성은 특히 기도를 통하여 형성되었습니다. 그는 기도야말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기도가 부족하게 되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보충할 수 없음을 확신하고, 기도의 생활에 평생 전념하였습니다.
# 웨슬리의 균형잡힌 영성
웨슬리가 추구한 영성은 기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즉 ‘한 책’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았으며, 특히 성서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신중심적인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성서와 전통, 이성과 경험이라는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연결시킬때, 이 영성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이 영성을 통하여 웨슬리는 만인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철저하게 순종하며 평생을 헌신한 것입니다.
웨슬리는 성서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됨을 믿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에 유일하고 충분한 법칙이 됨을 믿었습니다. 그는 성서에 주어진 구원의 길을 통하여, 종교의 제반 문제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는 성서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중요시하는 전통과 경험의 가치를 통찰력의 자료로 사용하였으며, 정태적이고 기계적인 문자주의의 위험에서 벗어나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진리로 말씀을 선포하는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0)
웨슬리는 최고의 권위인 성서의 바른 해석을 발견하는 데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성서에서 직접적으로 승인되지 못한 목회의 직제와 교회의 예전과 같은 중요한 전통적 형식들이 매우 큰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웨슬리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적인 자연신학적 이성의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알 수 없다”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연적 지식의 부적합성에 대하여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성의 중요성은 그것이 계시의 다른 자료를 마련하는데 있지 않고, 논리적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계시의 증거를 정리할 수 있게 하는 데에 있으며, 또한 그것은 전통과 마찬가지로 성서에 대한 방종한 해석의 위험성을 방어하는 데에 필요한 무기들을 우리에게 제공하여 준다고 보았습니다.
웨슬리는 또한 경험을 강조하여 성서와 전통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과의 산 관계를 말살하는 형식 종교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성경은 가장 결정적인 진리의 증거이지만, 경험은 가장 강력한 논증이 되기 때문에, 이 둘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서로 연관이 되고 상호 보완하는 표준이 되는 공동의 협력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웨슬리에게 종교의 생명력은 성서와 전통이 산 경험으로 자신과 연관이 될 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으며, 성령의 내적 증거로써만 그리스도에 대한 참신앙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성령은 동시에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에게 산 경험을 가지고 온다고 믿었습니다.
웨슬리의 사상에 보편주의와 사해주의 특성이 나타나는 이면을 살펴보면, 웨슬리의 선행 은총론이 핵심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선행적 은총은 인간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을 은총으로 부여하셨다는 뜻입니다. 원죄로 인하여 자연적 인간은 하나님께 죽었지만, 인간은 이 선행적 은총에 대하여 응답, 또는 반항할 능력을 가지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선행적 은총론에서 웨슬리가 이해한 인간의 양심은 인간의 책임이라는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관점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그는 양심을 자연적 양심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자연적 인간 위에 초자연적으로 부여하신 은총으로 보고, 인간이 순간적으로나마 하나님의 뜻에 역행할 때, 하나님의 영이 인간을 내적으로 통제하고 불안을 느끼게 하는 그 영역이 바로 양심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종교개혁 정신을 따라서 구원을 공적의 율법적 질서 안에서 보존하여 인간의 업적을 신앙에 부가하는 것에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논리적 예정론의 결정론적 체계를 또한 절단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과 부름에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역학관계를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하향식 운동이 인간의 자연적 의지를 통한 상향식 운동과 마주쳐서, 인간은 구원을 이루기 위한 역사의 협력자가 되고, 아울러 구원에 필요한 도덕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웨슬리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웨슬리적인 ‘신인 협력설(synergism)’은 구원의 과정에서 어떤 일들은 인간의 주도와 자유의지에 의하여 가능하고 어떤 일들은 신의 은총을 요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인간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성령에 의하여 영감을 받는 것이며, 성령의 본성과 모순되지 않는 가운데, 개인의 완전화와 인류의 회복이라는 실천운동의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에서의 신생체험은 그의 신앙에 일대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는 의인(義認)이라는 복음을 통하여 인간을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구속적 개입을 완성시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이며, 그가 하시는 일만이 화해의 기초를 마련하여 주며, 자기-의인(self-justification)을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은 불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 웨슬리의 실천적 영성
웨슬리에 의하여 강조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義認)은 그의 성화 개념에 있어서, 실천된 사랑과 연관됩니다. 웨슬리의 성화 사상은 칼빈적인 수동적 은총론에 기초하고 있지만, 의인화(義認化)를 의인화(義人化)로 발전시키듯이(imputation to impartation), 성화(聖化)도 성인화(聖人化)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imputed to imparted sanctification).
따라서 선행적 은총으로 회복된 자유의지에 의하여 의로운 행동과 거룩한 행동을 실천함으로써,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즉 의로움과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다고 웨슬리는 믿었으며, 따라서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는 성육신적 요소로서 세속성으로부터 분리된 성결의 힘을 갖고 세속을 찾아가는 참여를 통하여 사랑의 적극적 행위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첫째, 웨슬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단지 자선의 대상이나 극빈자 구호의 수혜자들로 보지 않고, 이들의 비참한 상황을 제거하는 것을 참된 기독교적인 사명으로 강조하였습니다.
웨슬리는 영국 사회 내 불의의 문제를 근본에서부터 해결하기 위하여 일반 대중의 의식 변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행동은 철저히 기독교의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서 하나님과 모든 인간을 향한 사랑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개인의 경제적 책임을 강조하여 재화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사유재산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리하도록 주신 재화라는 각도에서 자신과 가족에게 필요한 것 이외에는 궁핍한 이들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강조하였습니다.
둘째, 경제적인 불의에 대하여 웨슬리는 참혹한 현실에 대한 실례를 들어가면서, 항거와 동시에 다양한 조처들을 모색하는데, 이러한 웨슬리의 연구와 그 개선책은 비전문가의 의견으로서 비현실적인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는 정부나 국회 및 경제적으로 영향이 큰 그룹들에 대하여 변화를 계속 요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 영국 토리당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였던 웨슬리는 국가적 권력기구를 대표하는 이들로서, 왕과 각료, 그리고 의회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였으며, 이들은 국민의 행복에 이바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수행할 권한과 책임을 가졌다고 믿었으며, 특히 왕의 권리 중 경찰권과 조세권의 올바른 사용에 대하여 주장하였습니다.
셋째, 웨슬리의 노예제도 반대 운동은 당시 영국국교회와 대다수 회원들이 노예제도를 문제 삼지 않고 기층 사회의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팽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작된 것입니다.
웨슬리는 1774년 저술한 『노예제도에 관한 생각』이라는 소책자에서 한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창조하신 영혼 속에 있다고 확신하였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고상한 피조물들이 짐승과 같은 삶을 살도록 방치하며 조장하는 노예 소유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불의한 행위를 하나님은 징벌로 다스릴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넷째,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의 열악한 법률체계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부당한 법적 대우에 대하여 경악하고, 재소자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펴게 됩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로 하여금 어려운 운명을 견디어 내도록 도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는 자기의 사명을 이러한 재소자 구호 활동을 통하여 더욱 더 확신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운동을 통하여 영국 사회와 문화를 새롭게 구축하려는 목적을 가진 사람으로 충분히 재인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자연적 은총으로서 인간 책임의 영역을 강조하였으며, 그 책임은 단순히 개인의 구원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으로 모두에 적용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웨슬리의 윤리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신성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신성은 인간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추방하면서도 인간의 영혼과 영혼, 그리고 영혼과 신앙공동체에 기초한 감리교 공동체를 형성하는 에너지가 되었습니다.(유경동교수, 감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