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프랑스는 독일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항구적인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그 방어선은 당시 프랑스 육군 장군이었던 앙드레 마지노의 이름을 따서 ‘마지노(Maginot)’선이라고 불렀습니다. 프랑스는 제 1차 대전때의 경험을 충분히 살려 이 요새를 만들기 위해서 1927년부터 10년간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보병을 막기 위해 철조망을 쳤고 직경 6미터 콘크리트 벽을 설치하였습니다. 아울러 탄약고, 작전실, 통신시설을 지하 깊숙이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2차 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이 마지노선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1940년에 독일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우회하여 침공하였기에 마지노선은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프랑스가 만든 이 마지노선으로 인해 그 이후 사람들이 물러서거나 양보할 수 없는, 허용할 수 없는 경계를 ‘마지노(Maginot)’선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신앙인에게도 마지노선이 있습니다. 그 마지노선은 감사입니다. 감사의 영성이 무너지면 삶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삶의 위기는 돈과 명예의 상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술에서 감사가 사라질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 복음주의 부흥운동에 영향을 끼쳤던 윌리엄 로(William Law)는 그의 책 ‘경건한 삶을 위하여 (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성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그는 기도를 제일 많이 하고 금식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선을 제일 많이 하고 절제와 정숙과 공의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사람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자는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존 웨슬리가 대서양을 건너는 가운데 풍랑을 만났습니다. “풍랑이 배를 덮친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선교사이면서도 영혼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판에서 갑자기 찬송소리가 들려와서 나가보니 모라비안 교파들이 풍랑에 아랑곳없이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두렵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들은 “왜 우리가 두려워합니까? 내가 사랑했던 주님께서 우리를 지금 이 순간 부르신다면 우리는 구원의 주님앞에 서게 될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큰 도전을 받았다고 합니다.
인간의 아이러니는 믿음이 필요한 상황가운데 믿음을 갖지 못하고 문제속에 침몰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신앙인의 불신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닥치는 매 순간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Think)하느냐에 따라 감사(Thank)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큰 슬픔을 표시하는 3종류의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일 낮은 급의 사람들은 슬픔을 당했을 때 울부짖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급에 있는 사람은잠잠히 고통을 느낍니다. 그런데 가장 높은 차원의 사람은 그 슬픔으로 노래를 만듭니다. 인간의 절망의 끝은 하나님의 섭리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살’을 꺼꾸로 하면 ‘살자’가 됩니다. 역경을 꺼꾸로 하면 ‘경력’이 됩니다. evil’을 역전하면 ‘Live’가 됩니다. 절망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희망은 ‘희한하게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위기는 ‘위험한 기회’입니다. 고난은 ‘변장된 축복’입니다. 그러하기에 삶의 고통과 절망속에서도 감사와 기도의 밧줄을 놓치않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전진하는 오뚜기 예수 영성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결코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신앙인의 마지노선(Magino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