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우리 나라에서 여권을 제일 먼저 발급 받아 미국 유학을 떠난 분이 있습니다. 전영창(全永昌)이라는 분입니다. 그 때는 대한민국의 여권이 손수건만큼 컸다고 합니다. 이 분은 1940년대 해방후 군목통역으로 일하다가 군목의 주선으로 여권 1호를 발급받아 미국 웨스턴 신학교에 유학을 가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셨습니다.
그런 그가 웨스턴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졸업식을 열흘 앞두고 조국에 6.25동란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는 ‘조국이 망하면 박사 학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생각하고 즉시 귀국하여 군대에 자원하여 입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귀국 준비를 마친 후 학장을 찾아갔습니다.
“학장님 조국이 지금 전쟁이 일어나 위태로우니 저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서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조국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학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자네 열흘만 기다리면 박사 학위를 받게 되는데 무슨 소리인가? 지금은 조국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네” 전 교장은 학장과 심한 언쟁을 벌이다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통보했습니다. “학장님 ! 조국이 부를 때 돌아가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학장은 전영창교장의 의지를 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긴급 교수 회의를 열어 고국에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국을 위해 돌아가는 것을 높이 평가해서 졸업장을 주기로 교수회의에서 결의하고 그 학교 역사상 최초로 졸업식 이전에 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그 후 한국전쟁이 끝나자 한국에서 유명하다고 손꼽히는 한 대학교에서 그를 총장으로 청빙하였습니다. 또 당시 서울의 어느 큰 교회에서도 그를 담임목사로 초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교장은 조국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어린 학생들을 키우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총장과 담임목사 청빙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진을 양성할 고등학교를 물색하며 다녔습니다. 이 때 거창에 있는 한 고등학교가 부도로 인해 폐교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거창에 내려간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고 거창 고등학교를 인수하였습니다. 그가 교장 취임식을 가졌을 때 전교 200명의 학생 중 취임식에 참석한 학생은 겨우 8명뿐이었습니다. 그가 취임할 무렵에는 대부분 다른 학교로 다 전학 가버리고 여덟명만 남게되어 그들만 데리고 잊을 수 없는 취임식을 한 것입니다.
그는 빚더미학교를 인수하고 나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학교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정부 기관으로부터 학교를 차압하겠다는 통보를 받게 됩니다. 그는 견디다 못해 하나님과 최후 담판하기로 작정하고 거창읍에서 40리쯤 떨어진 웅양면에 있는 한 기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일주일 작정하고 금식기도 하기 위해 기도원의 기도굴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기도굴에서 하나님께 모든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 제가 여기 거창에 돈 벌러 온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그런데 왜 학교 운영할 만한 돈은 왜 주지 않는 것입니까?” 나흘동안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나흘째 되던 날 오후였습니다. 그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자 기도굴에서 나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없다”고 신문에 크게 광고해야겠다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 없는걸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안계시기에 자신처럼 다른 사람들도 피해를 입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산에 올라가 산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산 아래는 깊은 골짜기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는 문득 학교에서 배운 것이 생각났습니다. ‘지구는 자전 하면서도 공전 한다는데 이렇게 큰 지구가 엄청나게 빨리 도는데도 전혀 소리 없이 도는 그 배후에는 누가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한참 잠겨 있는 바로 그 때 태양이 산 너머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습니다. 석양의 아름다움은 하늘을 붉게 물들고 장엄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했습니다. 저녁 햇살을 받은 잎새들은 생명력 넘치는 윤기로 반짝이고 있었고 저녁 노을에 비친 풀잎과 나뭇잎들은 다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말합니다. ‘이 아름다운 자연 그림을 그린 화가는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화가 없이도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질 수 있을까?’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어둠이 서서히 짙어지자 주위의 새들은 울기 시작하고,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뭇잎을 스쳐가는 바람 소리, 계곡에서 흐르는 물 소리, 이 모든 소리들은 완벽한 화음을 이루어 내는 자연의 아름다운 합창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는 과연 누굴까?’ 그러다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한참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다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제 빚을 다 갚아 주시든지 갚아 주시지 않든지 학교에서 일하겠습니다.” 기도하는 그의 두 뺨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기도를 마친 그는 그날밤 모처럼 평안하게 잠을 자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교로 돌아와 보니 미국에서 온 전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보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당신 구좌에 2,050불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곧장 서울로 올라가 달러로 바꾸어 정부 기관의 빚을 다 갚았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거창 고등학교는 전국에서 모든 면에서 가장 실력있는 학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유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거창 고등학교는 또 한차례 곤욕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일단의 학생들이 반정권 시위를 벌여 교육부로부터 제재를 받게 된 것입니다. 교육부는 데모에 가담한 학생들을 전원 퇴학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난처한 입장에 처한 전교장은 학생들을 불러 놓고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왜 데모를 했느냐?” 그러자 학생들은 한결같이 말하길 “교장 선생님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하셨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셨으며 틀린 것은 틀렸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무슨 죄입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전 교장은 학생들을 절대로 퇴장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교육부의 지시를 일체 따르지 않아 결국에는 교장직에서 파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시민들이 거창 군청과 법원에 교장 파면 취소 청구 소송을 내고, 공판일 날 학부형들과 거창 군민들이 모여서 데모을 하였습니다. 결국 전 교장은 다시 복직하게 되었습니다.
황무지와 같이 버려진 곳을 믿음으로 다시 일구어낸 고 전영창교장이 세운 거창고등학교 강당에는 ‘직업 선택의 10계명’이 걸려 있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1계명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제2계명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제3계명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제4계명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제5계명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제6계명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제7계명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제8계명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제9계명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제10계명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저지대비전론’이란 말과 같이 가장 높은 보좌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낮은 곳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임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겸손히 자신을 비우고 소외되고 그늘진 곳을 향해 섬기고 봉사하려고 결심하는 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매도 맞고 감옥에 수없이 갇히기도 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지않고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23)”라며 자족하며 기쁨으로 감사의 고백을 드립니다. 그가 감사한 곳은 바로 로마의 감옥안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매 맞을 때는 가시관쓰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하늘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기뻐했습니다. 교회의 지원으로 넉넉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배고픔과 궁팝함속에 처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는 비천에 처하기도 하고 풍부에 처하기도 하는 일체의 삶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승화시켜 나아가며 말씀과 기도로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특히 그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감사가 그의 환경을 변화시키며 나아가는 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소유로 인해 감사한 것이 아니라 실존으로 인해 감사한 것있었습니다. 살아있음, 존재자체가 감사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미국 화폐안에 들어있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신뢰한다(In God we trust)”라는 문구는 바로 이러한 감사의 정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종교개혁가인 요한 웨슬리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윌리엄 로우(William Law)는 그의 저서 ‘진지한 부르심’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자는 기도를 많이 하는 자도 아니고 금식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절제나 정숙이나 공의의 사람도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삶이 힘겨워지고 시대가 어두워질수록 밤하늘에 더욱 더 찬란히 빛나는 하늘의 별과 같이 신앙의 정상에 우뚝서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8)”라는 하박국선지자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그 분으로 인하여 감사의 이유들을 발견하는 시간들로 가득 채워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 시대의 희망의 불씨로 사용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