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성경과 천로역정을 번역하고 많은 일꾼들을 세운 캐나다 최초의 제임스게일 선교사와 그의 생가.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적인 불을 지핀 하디선교사
로버트 하디(R. A. Hardie, 1865-1949 하리영) 선교사는 1865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출생했다. 그는 고향에서 대학까지 마친 후 고등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일하기도 했지만, 곧 의사가 되어 병든 이웃을 돕겠다는 큰 뜻을 갖고 토론토대학 의학부에 진학했다. 그리고 대학 2학년 때 ‘기독교 외국선교 학생자원운동’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선교사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하디(1890)는 켈리(M. Kelly)를 만나 결혼하고, ‘캐나다대학생선교회’의 지원을 받는 선교사로서 8년간의 사역을 목적으로 같은 해 가족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였다.
하디선교사는 부산에서 게일 선교사와 함께 사역하다가 상경하여 제중원에서 에비슨의사와 함께 몰려드는 환자를 진료했다. 이 때 하디는 상당수의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여 살렸고 그로부터 서양의사와 기독교에 대한 호감이 사회에 전파되었다. 1892년, 부산에 의료진이 부족하다는 요청에 따라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서 1년 동안 진료하던 중에 8년간의 후원계약이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곧 때를 맞추어 감리교 원산선교부의 초청을 받음으로써 미국 남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로 남게 되었다.
감리교 원산 선교부에서는 강원도 지방까지 맡아 선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활동무대는 광활해 졌다. 그는 1901년 10월에 강원도 동해안 지역 일대에서 선교하면서 15명을 전도해서 교회를 설립했다. 15명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을 전도하여 가르치면서 교회를 설립했지만 한편 그는 자신이 영적인 면에서 연약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나는 3년 동안 미국 남감리회가 세워진 동해안지방에서 애써 사역을 했지만 선교 사업에 실패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에게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1903년 8월, 그는 여름휴가도 포기한 채 갈급한 마음으로 원산에서 다른 7명의 선교사들을 모아 중국감리교소속 화이트(Miss M. C. White)선교사를 강사로 초빙하여 사경회를 개최했다. 이때 하디는 새로운 성령체험을 하게 된다. 하디선교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성령이 내 안에 충만하게 내재하심을 경험했으며 나의 부끄러움과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과 믿음의 부족함과 모든 잘못을 자복했습니다. 나의 이런 자복은 회중에게도 강한 영향을 미쳐 강한 죄의식과 믿음의 부족함을 비로소 깨닫고 모두가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원산 성령운동의 불씨가 되어 1907년에는 마침내 평양대부흥운동의 큰 불을 일으켰고 전국으로 번져 확산되었다.
하디는 각 지역에 모이는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받은 성령의 체험을 소개했다. 이 일로 하디는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장⦁감 구분 없이 각 교파의 초청을 받아 강의했으며, 1909년에는 감리교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교장이 되면서 요한 웨슬리의 회심과 그의 성령운동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감리교협성신학교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그는 1916년에 최초로 감리교협성신학교 교수 논문집인<신학세계>를 창간하는 데 공헌했다. 이 논문집은 감리교가 한국에 요한 웨슬리를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35년 4월, 45년간의 조선선교 사역을 마감하고 떠나는 날 두 딸이 묻혀 있는 양화진을 찾아 마지막 고별식을 가졌다. 하디는 1893년 8월 9일에 딸을 얻었지만, 하루 만인 8월 10일에 딸은 주님 곁으로 갔다. 그 후 1903년 9월 1일에 둘째 딸을 얻었지만, 둘째 딸 역시 1909년 여섯 살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양화진에 묻혔다. 당시 하디부부는 동료선교사들의 위로를 받으면서 양화진에 두 딸의 시신을 안장했다. 자신의 젊음과 재능뿐만 아니라 가족마저도 한국을 위해 바친 하디선교사를 볼 때 하나님께서 이땅을 얼마만큼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된다.
✍️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