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의 책 , 떠나는 독서 (감리교의 성지)
제대로 읽기 7단계 : 케포스 동방 (윤유원)
읽은 책: 헨리G.아펜젤러 – 조성환 편저
참고도서:
우리가 몰랐던 한국사 비밀 32가지 – 이수광 지음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 이만열 지음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 – 헐버트 지음
아펜젤러 – 윌리암그리피스
잊히지 않는 것과 잊을 수 없는 것 – 이만열
[책은 도끼다]를 읽으면서 경동교회를 가보았다. 멀리서 보이는 경동교회는 엄지손가락을 꺽어 놓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평일이라 조용했고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가벼운 층을 이룬 오르막 같은 계단이 담쟁이 잎처럼 부드럽게 본관을 감아 돌아 교회 입구까지 안내하고 있었다.주위의 벽이며 조각이며 유심히 지켜 보았다.붉은 벽돌 하나 하나를 손으로 깨 큰 것은 쓰고 짧은 것은 버렸다는 일화처럼 작업했던 손길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김수근 설계자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엉청난 일을 했을까?
경동교회를 설계한 김수근은 “인간과 그 신앙의 대상인 신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의 표본이 되어 신자와 성직자, 그리고 그들이 이루는 교파와 그들을 둘러싼 사회, 나아가서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 간의 관계를 대립적 관계가 아닌 신앙에서 하나라는 ‘공동채 의식’아래 이루어지는 만남, 이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 그것이 교회다” 라고 했다.건축 설계자인 그가 한 말이 뭐가 대수일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요즘 사회를 보면서 신자인 나와 성직자 그리고 공동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닌 억지 끼워 맞춘 것 같은 억압을 느낀다. 그래서 일까 경동교회는 감리교와 장로교를 넘나드는 교파를 초월하는 행보를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기독교는 언제 한국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
내가 믿는 기독교 감리회는 누구에 의해 전달 된 것인가?
매일 읽고 있는 이 성경책은 어떻게 우리 언어로 완성된 것일까?
교회를 한바뀌 돌아 나오면서 이런 저런 질문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어린시절 강원도 고한에서 장로교회를 다녔다. 서울에 와서도 장로교회를 다녔고 그러나 지금은 감리교회를 다니고 있다. 아펜젤러 처럼 어떤 교리적인 이유가 있어서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다니게 된 것이 아니다.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오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나는 지금부터 지난 1주일간의 여행을 정리할 생각이다.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시작된 질문이 다른 책으로 현장으로 나를 움직이게 했다.
첫 방문지는 충남 서천에 있는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이었다.다행히 미리 전화하고 가서인지 사모님께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감리교는 가우처 목사님으로 부터 시작하여 지난 100년간 800여분이 한국을 다녀가셨고 초교파 적으로 2,380명의 선교사님이 한국을 다녀가셨다.아펜젤러 이후 수 많은 선교사님의 헌신과 노력으로 한국까지 복음이 오게 되었다.그분들의 값진 죽음으로 우리는 지금 이렇게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기독교의 전파로 가장 큰 성과라고 한다면 한글의 정착화라 볼 수 있다.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이 16세기에 반포되었으나 일반 민중의 문자로 정착되는 데는 수 세기가 흘렀다.19세기 말 개신교의 수용은 한글의 대중화를 가능하게 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한글의 대중화는 무엇보다 성경의 번역과 함께 본격화했다고 할 수 있다.성경이 번역되자 그것을 읽기 위해 한글을 공부하게 되었고 글자를 익힌 대중들은 다른 서책을 읽음으로서 개화를 주도하게 되었다.’성경번역’운동은 한국의 언어를 한글 문자로 정착시킨 것으로, 이는 마치 마르틴 루터의 성경 번역이 독일어를 문자로 정착 시킨 것과도 비교될 수 있다.독일 민족의 탄생은 바로 루터의 성경번역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1891년에 출간된 사민필지 머리말에는 이런 글이 있다.” 중국 글자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며 널리 볼 수가 없고 조선 언문을 본국 글일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쉬우니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 이글을 쓴 헐버트는 내한 초기 20대에는 한민족의 말글을 배우고, 30대를 전후해서는 역사,문화를 탐구하고,40대 이후에는 일본의 침략주의에 맞서 싸우며 한국의 주권 수호와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그가 한 이말이 한글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다.당시는 한글보다는 한문 중심이었다. 성경번역이란 한 가지만 보더라도 종교를 떠나 한국인이라면 모두 이분들의 헌신에 다시 한번 감사해야 한다.
두번째 방문지는 성경전래지 기념관이었다. 이곳에서는 아펜젤러 선교사 이전의 성경의 전래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서천군 서면 마량진은 1816년 9월 4∼5일 영국 해군 머레이 맥스웰 대령이 군함을 이끌고 서해안을 탐사할 목적으로 포구 해안에 들렀다가 해도를 작성한 곳이다. 이때 맥스웰 대령이 마량진 첨사(조선시대 무관) 조대복에게 성경을 처음 건네주었다는 기록이 2003년 확인되었다고 한다.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시관에는 영국에서 제작된 킹제임스 성경 원본과 시기별 한국어 성경 번역본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에서 400m 떨어진 곳에는 성경전래지기념비와 영국 범선 조형물 등이 비치된 9920㎡(약 3000평) 규모의 야외기념공원도 있다.
본격적인 성경 번역이 이뤄진 것은 1870년대 후반으로 ,1879년에는 신약성경의 복음서 번역을 거의 끝낸 상태였다. 그러다가 1882년 3월과 5월에 심약 문광서원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출간되었고, 그 번역이 계속되어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서’라는 신약성경이 전부 번역,간행되었다. 이번역에는 영국인 존 로스와 존매킨타이어 그리고 조선인 서상륜,이응찬,이성하,백홍준,김진기 등이 참여했으며 한문성경과 영어성경 및 희랍어 원어 성경세서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조선인은 의주 등 서북 사람으로서 장사차 만주에 갔다가 로스 등을 만나 성경 번역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국에 복음 선교사가 입국한 1885년 4월 5일 이전에 일어난 사실이었다. 이렇게 로스와 그 동역자들이 번역하여 봉천에서 간행한 성경은 선교사 입국 이전에 한국에 자생적 교회 공동체를 세우게 되었다. 그 뒤 내한한 선교사들에 의해서 성경이 새로 번역되었다. 1900년에 신약성격이 출판되었고 1910년에는 구약성경이 번역 완료되어 그 이듬해에 간행되었는데,한글역 신구약성경이 완간된 것은 1911년이다. 1938년에 신구약 성경을 개역 출판하게 되었고, 1998년에 나온 ‘성경전서 개역 개정판’(1998)은 기존 ‘개역 한글판’ 일차적으로 중요한 변화는 맞춤법의 변화로 바뀌게 되었다.
세번째 방문지는 군산에 있는 아펜젤러 기념 교회였다. 아이들과 함께 두곳을 방문하고 마지막 코스로 잡은 곳이라 오후 5시가 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장소는 조용한 어촌이었지만 아펜젤러 기념교회는 산뜻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교회에는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고 사무실도 비어있었다. 사모님께 전화를 드리고 숙소를 확인하고 아들 상준이와 기념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전시되어 있는 배에도 들어가 보고 다양한 성경책들도 관람할 수 있었다.아펜젤러 기념물과 책도 판매하고 있어서 책도 한권 샀다.아무도 지키는 사람도 없었고 자발적으로 돈을 넣고 책을 가져가도록 했다.믿음이 없는 사람이라 그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 돈을 넣고 올 수가 없어서 책만 들고 숙소로 왔다. 모두가 떠난 시간 저녁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아침 일찍 떠나야 했기에 사모님께 전화를 드렸다.게스트 하우스 비용과 책값을 드려야 하고 교회에 대해 묻고 싶은 것도 있다고 말씀드렸다.사모님은 “카페로 오세요” 라고 하셨다.목사님은 금년 안식년이라 잠시 출타 중이셨고 사모님과 40분가량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펜젤러 기념교회가 생긴 일과 그동안 사료를 수집하며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인터넷을 보다가 잘 정리된 것이 있어 함께 올린다.
◈감리교의 뿌리가 순교한 어청도 앞바다
그동안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난당한 군산 앞바다를 찾아오는 순례객들은 꾸준하게 있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현장에는 아무런 안내판도, 기념물도 없었다. 장로교 통합 합동교파 다음으로 국내 3대 교단을 형성하고 있는 감리교를 국내에 첫 도입한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해상성지’는 1백 년간의 고독에 묻혀 있었다. 도시의 대형교회들은 저마다 외형적인 성장이라는 허울에 빠져 본질을 잊고 있을 때, 군산 내초도(지금은 육지로 바뀌어 내초동) 바닷가 한 작은 교회에서 기도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타국에서 이방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모르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던 개화기 조선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순교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숭고한 넋을 후세들에게 전하도록 기념관을 세우겠습니다.”
◈선교사의 죽음 헛되이 할 수 없어
과거 내초교회로 불리던 온누리교회 임춘희 목사와 불과 1백여 명 신도들은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지만,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곳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이기에 이런 사명감을 느꼈다. 더이상 늦출 수 없다고 생각되던 어느날, 저마다 가슴 저린 기도를 올리면서 한마음으로 뭉쳤다. “우리가 해야돼. 큰 교회 믿을 것 없어.” 갯벌가 언덕교회에서 소박하게 살던 신도들은 그때부터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하였다. “벽안의 선교사가 바로 저기서 숨졌다.”는 어청도 앞바다 전설을 더이상 속절없이 떠돌지 않도록 해야할 의무가 그들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여 끝을 알 수는 없는 역사가 시작된 게 불과 십여 년 전이었다. 바닷가의 초라한 개교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기념관이라도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선한 일을 열정을 갖고 추진하려는데 하나님이 동참하심일까? 군산지방 감리교단에서 아펜젤러 선교사 순교기념교회 추진위를 구성하며 든든한 울타리를 쳐주었다. 사업의 정당성을 부여받은 셈이다. 물론 일부 재정지원도 있었지만, 거의 전부 온누리 교인들의 헌금이 놀라운 힘을 발휘, 애당초 기념관을 세우려던 소박한 구상이 순교기념교회 헌당으로까지 커졌다.
◈겨자씨만한 보은의 마음이 큰 열매 맺어
환경운동을 하는 임춘희 담임목사의 지향에 맞춰, 교회는 친환경적으로 지어졌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과 교회 곳곳에 예배당과 기도실, 수련시설, 기념관, 영사시설까지 갖췄다. 겨자씨만한 보은의 마음이 순교기념교회라는 큰 열매를 맺은 것이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배를 찾기 위한 작업은 다각도로 진행되었다. 미국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고, 학자들도 여러 갈래로 검증에 나섰다. 그러나 아직 아펜젤러 선교사가 타고 있던 조난배와 유해 탐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비용부담이 큰 탓이다. 지금 서울 마포구 양화진에 있는 선교사 묘역은 가묘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 젊은 신학생이던 아펜젤러 선교사는 지금 조선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해 날마다 영적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는 한 목사님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서 자발적으로 조선행을 택하였다. 지금부터 123년 전인 1885년 4월 5일 제물포(현재의 인천)를 통해 조선에 입국한 아펜젤러 선교사는 저멀리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에서부터 남쪽의 벼농사꾼에게까지 골고루 복음을 선포하였다. 입국 초기에 선교활동이 자유롭지 못할 때는 교육사업에 주력하여 왕실의 큰 신뢰를 받았다. 어느 정도 선교활동이 보장되자, 전도여행을 자주 떠났던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8년 한해만 무려 1천830마일이나 지방을 찾아다녔다. 1889년 8월에는 대구를 거쳐 부산을 방문한 것으로 그의 일기에 나오지만, 정확히 대구의 어디에서 묵었고,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성서번역자대회에 참가하려다 조난당해
고종으로부터 교명을 하사받아 배재학교를 세우기도 한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글성서편찬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실제로 당시 마태오 복음, 마르코복음, 고린도 전후서를 번역한 장본인이다. ‘저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습니다.’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 아펜젤러 선교사가묘의 추모비에 서있는 이 글처럼, 아펜젤러 선교사는 죽음의 철창을 산산이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옭아맨 결박을 끊고, 조선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복된 삶과 자유를 허락하라고 기도하였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복음의 꿈을 접고, 급히 하나님 나라로 들게 된 것은 사고사 때문이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어조수(조한규), 친지의 부탁을 받은 이화학당 여학생 목포에서 열린 성서번역자대회에 참석하러 배를 타고 가다가 다른 배와 해상충돌당하였다. 조난당한 배에서 살아남은 광산업자 보울비에 따르면 아펜젤러 선교사는 충분히 탈출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 아래칸 3등 선실에 있던 한국인 조수와 이화학당 여학생을 구하려고 아래로 내려갔다가 참변을 당했다고 쓰고 있다. 혼자만의 탈출 대신, 조선인 친구를 구하려다 희생된 아펜젤러 선교사야말로 친구를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다고 한 요한복음의 말씀을 실천한 인물이다. 하지만 한국 교계의 충격은 컸다. 해야할 엄청난 일들을 두고, 급작스레 떠난 것이다.
◈이름없는 바닷가 교회가 이룬 기적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해상성지는 지난 105년간 방치되고 있었다. ‘한국을 자유와 그리스도의 빛으로’ 덮고 싶었던 아펜젤러 선교사의 순수한 꿈이 일백여 년 만에 교회로 다시 피어난 것은 은총이었다. 도시의 대형 교회들이 지교회의 성장만을 외치면서 아펜젤러 선교사가 숨진 해상성지를 복원할 꿈도 꾸지 못하고 있을 때, 고군산열도에 속한 내초도의 한 이름없는 교회(온누리교회)가 기적을 만든 것이다. 아펜젤러 선교사일가는 한국을 위한 봉사를 대물림한 집안이다. 아들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14세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한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방황하던 시절까지 겪었다. 그러나 고통 뒤에 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가? 철이든 헨리 다지 아펜젤러 2세는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하던 조선사람, 매일같이 영적 장례식을 치르는 조선인들을 위한 헌신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조선을 위한 헌신의 자세를 물려받았다. 헨리다지 아펜젤러는 아버지가 세운 배재중고교의 교장으로 자신의 삶 전부를 우리 민족을 위해 내놓았고, 아펜젤러 선교사의 첫 딸로 한국에서 태어난 첫 서양아기인 엘리스 또한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땅을 밟은 뒤, 이화학당을 맡아 헌신한 후, 1950년 이대에서 설교하다가 강단에서 순교하였다. 바다에 수장된 아펜젤러 선교사와 신병 치료차 건너간 미국에서 숨졌지만 조선땅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그 유해가 이장되어온 헨리 다지 아펜젤러, 그리고 강단에서 숨진 아펜젤러의 선교사맏딸 엘리사의 죽음, 잊어서는 안되리라.
(글·최미화기자 200706)
기독교 감리교회의 시작 요한 웨슬레( John Wesley 1703-1791) 그는 누구인가?
18세기의 영국은 산업혁명의 초기 단계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길거리에는 술취함, 도박, 도적질, 자살등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는 상황이었다. 인구의 약 10%정도가 런던에 살았는데 대다수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집에는 질병이 많았다. 불안정한 생활에 절망감과 좌절감에 빠진 사람들은 일종의 해소책으로 술, 폭력, 매춘, 도박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당시 국교도 즉 지금의 성공회(Episcopal)와 청교도(Puritan)사이에 심한 갈등이 있어 종교적인 상황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백성들의 대부분은 형식적으로나마 국가에서 공인된 영국교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소수이긴 해도 영국교회가 아닌 카톨릭, 장로교, 회중교, 침례교, 퀘이커교에 속한 사람들도 있었다. 영국교회는 정치적인 세계와 아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다른 교파에 속한 사람들은 17세기에 카톨릭과 청교도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으로 인해 투표를 하거나 의회에 참석을 할 수도 없었다. 영국교회는 기존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사람들이 현재 처한 위치를 바꾸도록 돕기 보다는 이러한 현 상황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인도하였다. 그렇기에 영국교회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영적이고 도덕적인 지침을 주었다. 많은 목회자와 평신도의 선한 의도와 성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백성들의 처지 개선을 위한 일에 영국교회는 공헌을 별로 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영국이 이러한 상황속에서 요한 웨슬레가 태어났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아네슬리 웨슬리는 비범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자녀 양육은 직접 가정에서 조기 교육을 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독서는 광범위하였고 특히 종교와 신학에 관한 서적들을 섭렵하였으며 남편 목사의 출타 중에는 목사관에서 기도회를 직접 인도하였다. 수산나와 사무엘은 종교와 정치 문제에 있어서 서로 의견대립이 있을때가 많았는데 때론 이 일로 인해서 목사관에 심각한 긴잠감이 감돌기도 하였다. 물론 경제적인 궁핍과 연이은 출산과 아울러 계속된 어린 자녀들의 죽음이 또 다른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요한 웨슬레는 그 당시로서는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1714년 상류층의 자녀들이 다니는 챠터 하우스에 입학하였고 그 곳에서 대학 진학 준비를 하였다. 그는 1720년 옥스퍼드 대학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입학을 하였다. 1724년 졸업을 할 때에는 고전과 현대문학, 신학, 역사, 과학을 폭넓게 공부하였고 신약성경을 원어로 능숙하게 읽을 정도였다.
웨슬레 두 형제는 옥스퍼드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성클럽(Holy Club)을 조직하여 기도와 성서연구와 봉사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당시 대학가에 만연하고 있었던 도덕적, 종교적인 방종을 거부하고 대신 정규적인 신앙클럽의 모임으로 신앙생활을 지속하려고 노력하였다. 특별히 요한 웨슬레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심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꾸준히 기도생활을 계속 하였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성경을 읽으며 기도생활을 했고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을 했다. 또는 그는 매주 성만찬에 참석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고 특히 가난한 어린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매주 두 번씩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건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신이 십자가를 자신있게 질 수 없었던 사실에 대하여 늘 고민을 하였다.
다른 학생들은 이 적은 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성례주의자’ ‘성경벌레’ ‘신성구락부’ 혹은 ‘규칙주의자’라고 비아냥거렸다. 결국에 ‘규칙주의자(Method-ist)’라는 단어에서 나온 ‘감리교인’이란 말이 이 후에 웨슬레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되었다.
1738년 가을 영국으로 돌아온 후 요한 웨슬레는 종교적인 활동에 몰두하였다. 그는 독서와 연구, 기도, 감옥 방문, 성만찬 집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를 설교하는데 자신의 시간을 쏟으며 전력하였다.
1739년 웨슬레는 화운더리라고 알려진 런던에 있는 옛 무기 제조공장을 구입하여 개조하고 그 곳에 채플, 살림집, 출판시설을 갖추게 된다. 이 곳은 감리교인들의 사회봉사를 위한 여러 형태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후에 감리교인들을 위한 채플들이 다른 도시와 마을에 설립되어 예배와 목회사역을 위한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환자를 위한 진료소, 고아들을 위한 집,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경건한 생활을 위해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목사는 늘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첫째, 너는 항상 기도하는가? 둘째, 너는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가? 셋째, 너는 모든 경우에 감사하는가? 넷째, 너는 욕심내는 것이 없는가? 다섯째, 너는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가? 여섯째, 너는 네 중심에 연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가? 일곱째,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요한 웨슬리가 1791년 2월 14일 죽기 6일전에 영국 노예매매제도에 대항했던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에게 이런 편지를 썻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사람과 사단의 공격에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과연 누가 그대와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이 편지가 월버포스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6년후인 1807년 영국의회는 마침내 노예매매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1807년 ‘노예 매매 폐지법’과 1833년 ‘노예 해방 법령’통과는 아프리카를 넘어 전 세계에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는 세계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흑인 노예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백인들과 함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1791년 2월말 88회의 생일을 앞두고 요한 웨슬레는 중병으로 눕게 되었다. 그가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친구들과 가족들을 그의 침상 주변에 모였다,.
“마지막 날 밤에 그는 아이삭 와트의 찬송가 ”내 생명 다할 때, 말할 수 있을때까지, 내 창조주 찬양하리“를 불렀다. 너무나 약해진 웨슬레는 ”내 찬양하리….내 찬양하리“라는 말밖에는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모든 것 중에 가장 최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1791년 3월 2일 아침,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는 유산으로 남긴 것이 별로 없었다. 그의 생애 동안 벌은 돈의 거의 전부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남은 재산이라곤 겨우 두 개의 숟가락과 하나의 찻 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 자신의 관을 런던에 있는 감리교 예배당 뒤뜰에 있는 묘지로 운반해 준 여섯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수고비밖에 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요한 웨슬레는 기도와 전도운동, 드림과 사회정화운동을 위해 헌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위해 경건과 거룩의 삶, 성화의 삶을 사시다가 1791년 3월 2일에 53년의 전도사업을 마치고 88세를 일기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이란 말을 남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글 정리: 뉴욕 롱아일랜드 연합감리교회 장재웅목사)
한국 감리교의 시작 아펜젤러(1858~1902) 그는 누구인가?
아펜젤러는 1885년 1월 14일 드루신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의 축복을 받으며 한국으로 향했다. 2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울러 감독에게 안수를 받고 갓 결혼한 아내 엘라 닷지와 함께 이튿날 아라빅호에 몸을 실었다. 그 배에는 스크랜턴 의사 부부와 그의 모친인 메리 스크랜턴 여사도 동승했다. 24일간의 항해를 거쳐 2월 27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이들은 3월 5일 맥클레이 선교사 자택에서 제1회 한국선교사회를 조직했다. 여기엔 개화파 거두 박영효와 성경 번역의 선구자 이수정도 참석했다.
아펜젤러는 4월 5일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서언해’를 손에 들고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후 1902년 6월 11일 순교할 때까지 배재학당과 정동감리교회, 성경번역, 연합운동을 비롯해 너무도 많은 족적을 남겼다. 대학에서 쌓은 고전어와 현대어, 자연과학과 인문학 지식은 한국 선교의 중요한 밑거름이었다.
그는 유창하고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복음전도자요 설교자였다. 성경 언어와 독일어는 물론 프랑스어까지 능숙하게 읽어낼 정도의 탁월한 어학 실력은 성경 번역에 유감없이 발휘됐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 창세기 신명기를 비롯한 많은 신구약 한글성경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이뿐인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일기와 사역을 기록했으며, 학교를 설립해 서재필과 이승만 윤치호 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를 양성했다. 한반도의 복음화와 민주화, 근대화는 그가 일생동안 가슴에 품었던 선교 비전이었다. 그는 이 비전을 붙들고 사명에 살았다. 죽는 순간까지 이타적 사랑을 실천한 아펜젤러는 확실히 이 땅에 심겨진 한 알의 밀알이었다. 박용규 교수(총신대·역사신학)
네번째 방문한 곳은 배제학당역사 박물관이었다.
정동 일대에는 100년을 넘나드는 붉은 벽돌 건물이 점점이 흩어져 있어 이국적이면서도 정감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국 근대 기독교 선교와 교육,외교의 중심가에서 현재 역사와 문화의 공간으로 정체성의 변화를 맞이해 온 정동. 그 중심에는 시대의 변화에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켜온 붉은 벽돌의 근대건축물이 있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고, 이듬해 고종황제가 배재학당 설립을 재가하고 ‘유용한 인재를 기르는 집’이란 배재학당이란 학교명을 하사하였다. 배재학당 역사 박물관으로 쓰인 배재학당 동관은 1916년 세워진 배재학당의 교실로 한국 최초의 서양식 학교 건물로 근대 교육사, 근대 건축사에 큰 의미가 있다. 건물은 당시 유행했던 르네상스양식을 따라 지어졌다.
입구에 들어서자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에서 사모님께 들었던 바로 그 교가가 울렸다.1층과 2층을 보고 건물을 한바뀌 돌아보며 건물 정면에 수없이 많은 총탄자국을 볼 수 있었다.지난 시간 이 건물이 받았던 고통을 시간을 대변하는 듯 했다. 정동교회로 갔다.예배 중이라 본당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아펜젤러 목사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있었다.
다섯번째 방문한 곳은 양화진이었다.
아펜젤러 목사님은 어청도 바다에 묻혔지만 그분의 비문과 가족이 함께 묻혀있다.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현재 16개 국적 414기의 무덤이 있다. 그 가운데 143기가 선교사들의 무덤이다. 무덤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기도 하고 아홉 개 구역으로 나뉘기도 한다. 선교사묘원에는 아홉 구역으로 나뉜 표지판에 각 무덤에 잠든 외국인들을 기록해 두었다.
선교기념관 곁은 선교사묘원의 언덕마루에 해당한다. A묘역과 B묘역이 있다. 오른쪽에 H묘역과 I묘역이, 한강변 경사지로 C묘역과 D묘역이 차례로 자리한다. D묘역과 길을 사이에 두고 G, F, E묘역이 이어진다. 선교기념관 곁의 계단을 올라서면 B묘역과 처음 만난다. 그 오른쪽 모퉁이는 헐버트의 묘다. 고종의 외교고문을 지낸 그의 비문이 감동적이다. ‘나는 웨스터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 원하노라’고 적혔다.
한 살 때 죽은 그의 아들 역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그의 유언처럼 우리나라를 고국처럼 사랑한 인물이다. 길을 사이에 두고 A묘역의 모퉁이에는 베델의 묘비가 섰다. 그 역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쓴 언론인이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고 후에는 옥고도 치렀다. 그의 묘비는 동양적이다. 특히 그의 비문을 눈여겨 볼 일이다. 장지연이 썼던 ‘시일야방성대곡’을 일제가 지운 흔적이 남았다.
C묘역에는 눈에 익은 이름이 있다.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의 무덤이다. 그의 부인과 아들의 묘역이 모였다. 건너편에는 딸의 무덤도 있다. 유일한 일본인 소다 가이치의 묘도 있다. 일본인 최초로 문화훈장을 받은 이다. 그는 어느 해 겨울 만취 상태로 노상에 쓰러졌다. 그를 구해준 이가 한국사람이었다. 이에 감동해 우리나라에서 1천 명 이상의 고아를 돌봤다. 마지막 1년을 우리나라에서 보내고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최초로 묻힌 헤론의 무덤이 곁에 있다. 한강변에 가까운 F묘역에는 연세대를 세운 언더우드 일가의 무덤이 자리한다. 언더우드 부부를 비롯해 4대에 걸쳐 여덟 명의 자손들이 함께 묻혀 있다.
묘비들 사이로는 크고 작은 길들이 났다. 묘비에는 각자의 삶의 기록들을 담았다. 그 모양새는 외국 묘비의 형태를 한 것도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 묘비 형태를 따른 것도 있다. 묘비에 적힌 글들 또한 영문도 있고 한글도 있다. 그 흔적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지난 시간을 더듬는다. 선교사들의 자취가 짙다만 또 그들의 자취는 우리의 근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종교와 무관하게 걸음을 낼 만하다.
향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로 걸음 따라 흔들리는 맥문동을 바라보며 걷는다. 낯익은 수목들이다만 서울의 한강변 같지는 않다. 외국의 어디쯤 같다. 낯선 공간의 이질감이다. 듬성듬성 묘비 앞에 놓인 국화꽃도 보인다. 누군가는 아직 무덤가를 찾는 게다. 어슴푸레 한강의 노을이 깃들 때쯤에는 한층 더 고즈넉하다. 뉘엿한 햇살이 묘비 위에 기울면 성스러움도 깃든다. 낯선 땅에 묻힌 벽안의 영혼들이 올리는 기도소리가 어슴푸레 들려오는 듯하다. (박상준 글)
내가 다니는 곳마다 인터뷰를 했고 도움을 청했다. 책을 읽었고 눈으로 확인했다.독서는 한권의 책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생각, 계속들으면서 머리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그렇게 독서를 했다.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분명 나는 일주일 전의 내가 아니다. 한권의 책을 만난 나는 분명 다른 나, 독서는 매일 새롭게 눈뜨게 한다. 이렇게 한 주 한 주 새롭게 거듭나는 나를 만날때 매일 매일 새로와진 나를 기대한다. 독서를 하고 서평을 쓰고 떠나라 어디든지…. 독서는 그렇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