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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감리교의 역사(The history of Methodist)

복음 수용과 선교사 내한

1870∼1880년대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갈망하는 한국인들은 만주와 일본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하고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이들이 해외에서 출판한 한글 성서들은 매서인을 통해 국내에 들여와 읽혔고 그 결과 많은 세례 지원자들이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1883년 9월 미감리회 볼티모어 연회 소속인 가우처(John F. Goucher) 목사는 외교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 중이던 민영익을 만난 후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우처 목사는 미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 착수를 촉구하였고 일본 주재 미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 로 하여금 한국 선교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서 감리회선교를 개척했던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 내한해서 ‘학교와 병원 사업을 해도 좋다’는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이에 미감리회 국외선교부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부부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부부, 국외여선교부는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을 초대하여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들 중 아펜젤러 부부가 제일 먼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내한하였다.

미감리회의 한국 선교

미감리회의 선교는 교육과 의료, 문서 사업으로 시작되었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한국 근대 교육의 요람이 되어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시병원과 보구여관은 한국 근대 의료사업의 요람이 되었다. 감리회 출판사에서 펴낸 성서와 서적은 복음 전도에 유효한 도구가 되었고 한글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1887년 7월 24일 배재학당 학생 박중상이 첫 감리교 세례교인이 되었고, 1887년 10월 9일 서울에서 오늘의 정동제일교회의 모체인 ‘벧엘예배당’이 설립되었다. 1897년 서울과 인천, 평양에서 엡웟청년회가 창설되었는데 이는 오늘의 감리교 청년회와 청장년선교회 및 남·여 선교회의 모체다.

선교 초기부터 신학반과 신학회를 조직하고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추진하여 1901년 최초 한국인 목사로 김창식 목사, 김기범 목사를 배출했다. 미감리회에서는 1902년 하와이 이민 선교를 시작으로 북만주와 몽고, 일본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

남감리회 선교의 시작은 개화파 지도자 윤치호가 망명중인 1887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세례 받고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면서 부터이다. 그는 미국에 유학할 때부터 남감리회 국외선교부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였다. 이에 1895년 10월 18일 중국에 있던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 선교사가 내한하였고 이듬해 8월 리드 부부가 서울에 정착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1897년 5월 2일 고양읍에 첫 남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남감리회에서도 배화여학교, 한영서원, 호수돈여학교, 구세병원 등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였고, 태화여자관을 비롯하여 개성, 원산, 춘천 등지에 여자사회관을 설립하여 한국 근대 사회복지사업의 문을 열었다. 남감리회는 선교 초기부터 신학교육에 있어서 미감리회와 협력하였고, 1907년에 두 교회 연합으로 협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남감리회는 1907년 동만주 선교를 시작으로 만주, 시베리아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부흥운동과 토착 신학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의 회개로 시작된 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거쳐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으로 연결되었다. 한국인들은 이 부흥운동을 통해 회개와 중생과 성결을 체험하였고, 기독교적 가치와 윤리 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신앙체험을 바탕으로 복음을 주체적으로 해석하려는 토착 신학이 감리교 신학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노병선 목사는 기독교를 동양과 서양을 포괄하는 ‘하늘의 종교’이자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은혜의 종교’로 변증하였다.

최병헌 목사는 동양 전통 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절대성’을 규명하였다.

이같은 토착 신학은 성서와 기독교 신앙 전통에서 동양의 문화·종교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여 수구 세력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소시켰으며, 기독교가 민족 문화와 종교 전통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문화선교의 길을 열어 주었다.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저항하는 감리교인들의 민족운동은 구국기도회로 시작하여 다양한 항일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전덕기 목사는 상동교회 엡윗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규합하여 국권 회복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경기도 이천지방 구연영 전도사는 교회 청년들로 구국회를 조직하여 민족 계몽운동을 벌이다가 아들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희생되었고, 같은 해 강화읍교회 김동수 권사도 의병운동과 관련되어 두 동생과 함께 일본군에 희생되었다.

1911년 105인사건 때 윤치호, 서기풍, 안경록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3·1운동 때 이필주 목사, 신홍식 목사, 정춘수 목사, 최성모 목사, 오화영 목사, 신석구 목사, 박동완 전도사, 박희도 전도사, 김창준 전도사 9명이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루었다. 3·1운동 당시 교회는 만세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그로 인한 희생도 컸다.

수원지방의 제암리와 수촌리, 화수리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당이 일본군의 방화로 불탔고 교인들이 희생되었으며,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과 평양 남산현교회 부목사 박석훈 등이 옥중 순국하였다.

3·1운동 이후에도 감리교인들은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 애국부인회 등 민족운동 단체에 적극 참여하였고, 농촌계몽운동, 절제운동 같은 민족주의적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감리회 신앙

감리교회 신앙은 1884년 6월 미감리회(MEC) 맥클레이 선교사가 내한하여 고종황제의 윤허(7.3)를 받아 선교사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스크랜턴대부인을 파송하여 교육사역과 의료선교, 여성교육을 시작하였고, 1930년 조선감리교회가 자치교회로 성장하여 자립하면서 발표한 기독교조선감리회의 교리적 선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1997년 새롭게 신앙고백을 하고, 사회에 대한 봉사와 책임의지를 발표한 사회신경 역시 현대적 의의를 담아 개정하여 발표하였다.

선교사역

한국감리교회는 미국 감리회를 통해 전래되어 두번의 분열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단일 조직의 교회로 성장하였다.

선교 초기에는 한반도 지역 뿐만 아니라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 하와이에서 미주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영적인 변화와 성장을 가져왔다. 최근에는 세계 선교를 통해 다른 민족들을 위해 복음과 봉사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교육사역

감리교회는 한민족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과 출판 등 지식문화를 넓히는데 막대한 지원을 하였다. 감리교신학대학교, 목원대학교 협성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 배재, 이화, 배화 학당의 기초를 세웠으며, 종로서점의 설치와 출판문화를 통해 사회 의식을 개혁하고 변혁시키는 등 건전한 사회 교육의 지도적 원천이 되었다.

사회복지사역

감리교회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환자, 장애우를 위해 시병원, 보구여관, 정동병원, 동대문부인병원, 태화복지관 등 끊임없는 사회봉사 및 사회 정의를 위한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선교 초기부터 여성의 지위 상승에 대한 관심과 병원의 설립, 사회봉사 단체를 형성함으로써 복지활동에 힘쓰는 등 사회적 책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복음으로 어두움을 깨우는 교회 (1884 – 1903)

1884년 6월 맥클레이의 입국으로부터 시작된 감리교회는 이듬해 4월 5일 아펜젤러선교사 부부와 스크랜턴 선교사 부부 그리고 스크랜턴의 어머니가 제물포항에 발을 내딛음으로 본격적으로 선교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정동에 기지를 마련하고 각각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그리고 여성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민족의 고난기에 들어온 감리교회는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민족을 섬기며 성장하였다.

병원을 세워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학교를 세워 근대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공급해 주었다. 이런 헌신적인 섬김의 자세를 보고 한국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1887년 10월 9일 정동에서 최초의 감리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그 후 복음은 북쪽으로는 평양, 동쪽으로는 원산, 서쪽으로는 제물포에 각각 선교기지를 마련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감리교회가 퍼져나가게 되었다. 교회는 가는 곳마다 매일학교를 세웠다.

매일학교를 통해 교회는 가장 기초적인 국민교육을 감당하는 한편, 유교경전 대신 성경을 가르쳐 선교의 지평을 확장시켜 나갔다. 또 서울에 복음전파를 위한 출판사를 세워 기독교서적과 국민계몽을 위한 많은 책을 출판함으로 우리 나라 출판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많은 인재들이 입교하여 교회를 통해 만민평등사상과 주권재민사상을 배움으로 이 나라 독립을 위한 꿈을 간직하며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야말로 복음을 통해 이 땅의 어두움을 물리치려는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이 입교하였다.

이들 중에서 1901년 한국교회사에서 최초로 두명의 한국인 목사가 탄생하였는데 그들의 이름은 김창식, 김기범이다.

구한말 선교의 시작과 교육사업 (1985-1910)

감리교회의 처음 선교사인 아펜젤러, 스크랜튼 부부, 스크랜튼 대부인은 고종께서 윤허하신 대로 미감리교회의 파송을 받아 교육사업과 의료선교를 한국에서 시작하였다.사범학교와 일반대학 및 드류신학교를 졸업한 젊은 선교사 아펜젤러는 의술을 배우려고 스크랜튼에게 찾아온 학생들을 위한 영어교육을 하면서 1886년 6월 서울에 “배재학당” (전 배재고 터 – 현 고덕동으로 이전)을 정식으로 시작하였다.

이 학교의 명칭은 고종께서 하사하셨고, 공적으로 인정받는 학교가 되었으며, 이 곳을 졸업한 이들은 정부의 공무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한편, 스크랜튼 대부인은 1885년 10월 정동에 선교부지를 마련하고 여학당과 사택을 마련하여 “한국의 부녀자들이 보다 좋은 한인이 되며, 한국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하여 훌륭한 한국”이 되게 하자는 목적으로 시작하였다.

또한 왕비께서 “이화학당”(현 이화여고 터)이란 이름을 지어 보내주었으며 점차 성장하기 시작했다.

1888년 내한한 올링거 목사와 존스 목사는 배재학당에서 가르치며 문서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인천 내리교회의 담임자로 시무하였다.

1893년 인천에서 아펜젤러에 의해 시작된 어린이 매일학교로 시작된 교육사업은 남녀 공학의 영화학당(현 영화초등학교)으로 성장하여 존스 부인이 그 학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서울과 인천 및 평양 지역을 순회하며 신학교육을 하던 신학회는 배재학당 내에 신학반을 두어 운영하였다.

특별히 감리교의 신앙 교육은 사회적 복음으로 확산되어 문명 부국에 대한 사상, 애국정신, 문화적 토착화에 힘쓰는 교회로써 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특별히 청년운동은 주일학교 운동과 엡웟청년회 운동을 통하여 전개되었는데, 주일학교에서는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기독교 교육을 가르쳤으며, 엡웟청년회는 1) 경건한 신앙훈련, 2)교육활동, 3)선교와 4)사회봉사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을 지도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한 이들은 목회자들과 독립협회의 중심인물인 서재필, 윤치호 등이었다.

윤치호는 밴더빌트와 에모리에서 신학과 일반학문을 수학한 첫 신학도였다.

서재필은 1895년 귀국하여 아펜젤러 선교사의 집에 머물면서 순한글로 발행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한국의 사정과 국민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 영문판을 감리교 삼문출판사를 통해 발행하였다.

또한 1896년 7월 윤치호,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청나라 시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하는 등 자주독립과 내정 개혁을 목적하는 민권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가르치면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배재학당에서 조직된 “협성회”는 충군애국의 정신을 함양하고, 동창간의 깊은 우애를 심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복음전도와 봉사하는 것을 다짐했다.

당시 임원은 양흥묵, 노병선, 이승만, 윤창렬, 이익채, 주시경 등 이었다. 그들의 토론제목은 주로 국한문 혼용에 대한 것, 신앙의 중요성, 노비제도의 폐지 등이었다.

이러한 그들을 협성회회보를 통해 주간지로 발행하였고, 1898년 4월9일 한국최초의 “매일신문”을 발행했다.

감리교회의 교육 및 청년활동은 이 시기에 세 방향으로 나타났다. 독립협회는 정치적 단체로, 협성회는 계몽단체로, 엡웟청년회는 선교단체였다. 특별히 만민공동회 운동을 통해 내정간섭에 대한 개혁과 자주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수구파의 모략으로 서재필이 추방되어 아펜젤러와 윤치호가 독립신문을 발행, 국민의식을 고양시켰다.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현 YMCA)가 미, 영, 일, 중, 한인들에 의해 창립, 국제적인 성격을 띤 창립총회를 열고 헐버트 선교사를 의장으로 뽑았다. 이사회는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운영부는 한국인들에 의해 관장하게 되었는데 이 때 지도자들이 윤치호, 이상재, 최병헌 등이었다.

이외에도 배화학당 및 평양 광성학교, 정의여학교, 영명학교, 인천 송도학원 등을 건립하여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구한말 복음 선교와 사회구제사업 (1885-1910)

감리교회는 개인 구원과 사회구원의 조화를 믿는 교회로서 그리스도인의 복음 체험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통해 복된 사회를 이루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를 추구하는 교회가 되고자 했다. 교회는 기독교 복음 선교가 시작된 19세기말 우리 민족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사회선교 및 의료, 구제 사업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였다. 이는 1884년 6월 미선교사 맥클레이 박사가 고종께 “병원과 학교사업”을 해도 좋다는 윤허를 받아냄에 따라 의사나 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들어와 외래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제거하고 사랑과 봉사의 사역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감리교 최초의 의료선교사 스크랜턴은 1885년 9월 정동 사택에서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정부에서 ‘시병원(施病院)’을 지어 감리교 의료선교사업을 지원하였다. 1887년 10월 하워드에 의해 시작된 한국최초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은 의료사업을 시작한지 10개월만에 1137명을 진료했는데 대부분 빈민층이었다.

1890~1893년에는 서울 남대문과 서대문 밖 동대문에 시약소를 설치, 간의 의료사업과 복음의 구심점이 되어 상동, 아현, 동대문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외에도 평양에 광혜여원을 설치 소외계층을 위해 진료하였고, 해주에 구세병원, 원주에 서미감병원(현 원주기독병원), 개성에 남성병원, 원산의 구세병원을 설립하였고, 공주, 인천, 영변, 철원 등에 시약소 형태의 진료소를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의료혜택을 베풀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화학당(현 이화여대)과 정동교회(현 정동제일교회)를 통한 성탄절 구제사업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금을 모아 쌀지원 사업을 하였고 보호여회(여선교회)를 통해 복음전도, 친교사업 및 빈민구제사업을 하면서 경제적 자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후 애휼회가 조직되어 순수 빈민 구제사업 단체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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