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주일을 피해 거사일이 결정됐다?
정답은 ‘그렇다’이다. 3월 1일이란 날짜 자체가 주일 성수를 우선시하는 기독교인을 배려해 정해졌다. 종교 간 배려와 연합의 중요한 증거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인으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당초 1919년 3월 3일 월요일을 거사일로 모의했다. 그해 1월 22일 사망한 고종 황제의 발인 예식이 3일로 예정돼 있어 많은 사람이 서울 종로에 모일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국장(國葬)을 하는 날 소요를 일으킨다는 건 예법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어 2일 일요일로 변경하려다 최종적으로는 하루 더 앞당겨 1일 토요일로 정했다.
민족대표 천도교 측 핵심인 최린은 당시 공판에서 “3월 2일이라는 설이 나왔으나 2일은 일요일로 예수교파의 형편이 나빴기 때문에 1일로 했다”며 “일시는 가급적 빨리 발표하지 않으면 발각될 우려가 있었고 국장 전에 발표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해서 최종 1일로 결정했다”고 진술했다.
최린은 해방 후 남긴 자서전을 통해 “3월 1일을 요약해서 부르면 ‘삼일’인데, 이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다각적 해석이 가능하다”며 “세 교단(기독교 천도교 불교)이 일체가 되어서 일으킨 운동이고 영토·인민·주권의 세(三) 요건으로 한(一) 국가가 성립된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홍승표 연구원은 “3월 1일로 날짜를 정한 것 자체가 기독교에 대한 배려의 결과물”이라며 “종교 간 평화의 상징이자 오늘날 말하는 에큐메니컬의 모범”이라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