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Tel)이란 무엇입니까?
성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도시들은 30~50 m 높이로 솟아있는 언덕 위에서 유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왜 고대 유적들은 땅속에 묻혀 있으며, 그 묻혀 있는 곳은 높은 언덕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이스라엘에서 가장 현대적으로 건설된 도시 중에서 지중해 연안에 있는 “Tel Aviv”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 “Tel Aviv”라는 이름은 언덕을 뜻하는 “텔”과 봄을 뜻하는 “아비브”가 합쳐진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텔(Tel)”은 단순한 언덕(Hill)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성서의 배경이 되는 중동 지방의 고대 도시들의 유적들은 대개 아주 독특한 형태의 약간 높은 언덕 위에서 발굴되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도시나 마을을 건설할 때 전략적으로 유리한 곳에 세우기 위해서 다른 지역들 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또 옛날 사람들은 새로운 지역에 정착할 때, 몇 가지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장소를 거주지로 선택하였습니다.
우선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유리하게 약간 높은 위치에 있어야 적들의 공격을 잘 관측할 수 있고 방어할 수 있는 곳, 즉 군사적으로 유리한 곳에 있어야 했습니다. 또 주위에 경작할 수 있는 비옥한 들판이 있어서 식량을 얻는데 어려움이 없어야 했으며, 무역과 군사 도로와 가까운 곳에 있어야 도시로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도시로서 적합한 조건을 갖추게 된 곳은 대개 작은 언덕 위에 건설되었는데 이러한 도시가 전쟁과 같은 시대적 변혁 등으로 인하여 파괴되어 폐허로 남아 있곤 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그곳은 원래부터 전략적으로 유리한 곳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사람들은 폐허로 버려져 있었던 그곳의 건물 잔해들을 치워버리지 않고 위에 흙으로 메워서 평평하게 만든 다음 새로운 흙벽돌과 돌들을 가져다가 또 다시 새로운 건물을 세우고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도시의 건축물의 재료로 사용된 돌들과 흙벽돌 등은 우기의 비바람과 건기의 열풍에 의해서 풍화작용이 계속적으로
진행되면서 1년 중에 건기와 우기로 반복되는 날씨 때문에 오래 견디지 못하고 쉽게 무너져 내리기도 하였으며, 전쟁이나 지진 등으로 인하여 부서졌다가 흙으로 메워졌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반복하여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그 언덕(Tel)은 점점 높아져 갔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많이 흐르는 동안 원래의 언덕보다 점점 높아지면서 만들어진 높은 언덕을 아랍어로 “Tel(텔)”이라고 부릅니다.
텔 여리고에서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텔 여리고(Tel Jericho, Tel es-Sultan)
성서의 대표적인 도시로서 예루살렘, 헤브론, 브엘세바, 실로, 세겜, 욥바, 사마리아, 벳산, 므깃도 등과 같은 곳이 이러한 도시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고대 도시들입니다. 또 이렇게 도시로서 발달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고대 도시들은 대부분 “텔”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30 층 이상의 도시 문화 흔적을 가지고 있는 텔 므깃도(Tel Megiddo)
텔 벧산(Tel Bethsan)
그렇다면 이러한 “텔”을 처음에 어떻게 발굴되기 시작하였을까요?
1871년 10월11일 이른 아침,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의 서쪽에 위치한 “히싸를리크(Hisarlik, “요새가 있는”이라는 뜻) 언덕” 위에 10여명의 인부들이 한 독일 갑부의 지시에 따라 삽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그리스 영웅들의 전쟁터인 “트로이”라고 확신했던 사업가이면서 고고학자인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은 평생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트로이 전쟁이 호메로스의 시(Poem) “일리아스”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밝히려고 하였습니다.
발굴 작업이 계속되면서 매일 새로운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발굴단의 인원은 100 명으로 늘려 작업을 계속하였습니다. 로마 시대의 웅장한 신전 터가 발견됐지만, 그는 그러한 유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트로이의 성벽을 발굴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땅을 팠습니다.
이듬해인 1872년 4월부터 다시 시작된 제 2차 발굴 작업을 하면서 그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땅을 파면 팔수록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듯 한 도시의 잔해 밑으로 또 다른 도시의 유적이 나타나 모두 아홉 개나 되는 도시들의 유물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트로이의 언덕에는 서로 다른 여러 시대의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밑바닥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도시의 유적들은 금속을 사용할 줄 몰랐던 선사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트로이는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는데, 그것은 9개의 서로 다른 시대의 도시 유적 중에서 어느 것이 호메로스의 시에서 등장하는 트로이 시대의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고고학적인 어려움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성서고고학 발굴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인 “주거 층 론(stratigraphy)”이라는 이론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주거 층”이란 고대 사람들이 한 시대를 살아온 삶의 터전을 말하는 것이며, “주거 층 론(stratigraphy)”이란 각 “주거 층”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은 맨 밑에서부터 여섯 번 째의 도시를 “프리암과 헬렌 왕비의 전설적인 트로이”로 보고 있습니다.그 밖에도 그는 황금의 도시로 알려진 “미케네의 유적”들도 발굴하여 내었습니다.
성서 고고학의 발굴의 기원은 1890년 페트리(F.M. Petrie)에 의한 “텔 엘 헤시(Tell el-Hesi)”발굴로 부터 시작됩니다. 1890년 봄, 영국 출신의 이집트 고고학자 페트리(W. M. F. Petrie)는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광야의 한 언덕을 주목하였습니다.“텔 엘 헤시(Tell el-Hesi)”라고 불리는 이 언덕의 동쪽에 흐르는 “와디”는 고대 도시의 유적들을 절반쯤 침식시켜서 그 잔재를 드러내게 하였습니다.
그는 이곳이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점령했던 성서의 “라기스”로 확신하고 6주간에 걸쳐 발굴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특히 페트리(W.M.F. Petrie)는 당시 다른 고고학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수많은 토기 조각들에 많은 관심을 기우렸습니다.
고고학자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 과정에서 창안된 “주거 층 론”에 영향을 받은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주거 층의 연대는 함께 출토된 토기들의 모양으로 결정된다는 “토기 연대 측정법”을 처음으로 고안해 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와 달리 쉽게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고대 도시 발굴에서 페트리(W. F.M. Petrie)의 토기 연대 측정법은 성서 고고학의 달력처럼 인정되어 이제는 토기의 아가리 부분 한 조각만 있으면 그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서고고학 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획을 긋는 페트리(William Matthews Flinders Petrie(1853~1942))의 “텔 엘 헤시” 발굴은 1990년에 1백주년을 맞았는데 이때에 예루살렘에서는 국제 성서 고고학 학술대회를 열어 이 일을 기념하였습니다.
슐리만과 페트리가 발굴하였던 트로이와 텔 엘 헤시 발굴을 통해 고대 근동지역 수 백 개에 달하는 텔(Tel)들이 성서 도시들의 무궁무진한 유물을 간직하고 있는 보물 창고임이 비로소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Heinrich Schliemann과 그 발굴 팀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Heinrich Schliemann와 트로이에서 발굴된 보석 장식품으로 장식한 그의 부인
William Matthews Flinders Petrie (1853–1942)
(Source: Haeun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