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
예수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후 12제자를 부르셨다. 예수께서 부르신 열두 제자의 이름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이다. 이들 제자 중 가버나움 세리출신 마태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리는 다른 제자들보다 교육을 많이 받은 편에 속하였지만 그 당시에 유대의 랍비나 종교교사가 지나다가 세리를 만나면 절대 쳐다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로마에 붙어서 세금을 걷어내기 위해 동족들을 착취하는 민족의 반역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인간이하로 취급하고 법정증인으로도 세우지 않았다. 세리는 결코 명예로운 직업이 아니었다. 관할지역에서 일정한 지역을 맡아서 자신이 세금을 미리 내고 주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그 차액을 착복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금문제로 여러 차례 봉기가 일어날 정도였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이 세리들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면서 세리들과 같은 민족의 반역자를 처단하기로 맹세한 열심당원 가나나인 시몬이 있었다(마10:4). 열심당원(Zealot)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무력사용을 서슴지 않는 과격한 애국단체로서 로마정권과 로마인들에게 보복을 서슴지 않았다. 그렇기에 열심 당원이었던 가나나인 시몬과 세리 마태는 상식적으로는 함께 제자가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모두 나란히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다. 아울러 복음서 어디에도 두 사람의 갈등과 다툼의 기록이 없었다. 상식적으로 보면 열심당원 가나나인 시몬은 마태를 보자말자 감추어 두었던 비수를 뽑아 그의 가슴에 꽂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었을까!
마태와 열심당원 출신인 시몬은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고 사랑할 수 없었던 사이였지만 예수를 만난 이후 제자가 되고 보니 둘의 관계가 정적의 사이가 아니라 함께 손잡고 일해야 할 동지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예수를 만난 이후 새로운 인생의 가치관을 가지고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함께 손잡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1990년 중반 첫 이민목회를 캘리포니아 LA에서 시작할때 선배 목회자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목회 1년은 설교로, 목회 2년차는 덕으로, 목회 3년부터 은퇴시까지는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사람은 진정한 권위를 만날 때 잠자던 성실과 진실함, 소명과 사랑이 깨어나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실패하고 넘어진 아프고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과거를 보는 우리의 눈은 바꿀 수 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모든 일에는 사랑을(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라고 말했다. 깊어가는 이민의 역사가운데 승자도 패자도 없는 소모적이고 비본질적인 논쟁보다는 결코 후회함이 없는 삶의 본질인 사랑의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아픔을 감싸주며 마른 지팡이에 싹이나듯 사랑의 꽃을 피워야 할 것이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는 갈등과 위기의식, 변화들은 다음세대를 위한 비전과 희망의 씨앗들이기 때문이다.
(글: 장재웅목사, 워싱턴 하늘비전교회,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