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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의 가치관과 그가 보여 준 한국사랑 by

헐버트의 가치관과 그가 보여 준 한국사랑  by

(김낙환 목사)

 

머리말

2010년 한글날 564돌 기념 학술대회(주제: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미국인 헐버트)에서 김종택 한글학회 회장은, “파란 많은 질곡의 역사인 근대사에 이 어른보다 우리 역사를 아낀 애국자가 더 있을까요. 큰 은혜 잊으면 안 됩니다.”, 서울대학교 이현복 명예교수는, “맥아더 장군이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구했다면 헐버트는 19세기 말(末)에 조선의 말글, 역사, 문화를 연구하여 전 세계에 소개함으로써 조선을 문명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라고 헐버트를 평가하였다. 그 분들이 왜 그렇게 평가했을까?

헐버트(Homer B. Hulbert)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매우 특출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교육자이며, 역사가이며, 언어학자이며, 언론인이며, 선교사이며, 또한 탐험가이자 운동을 좋아하였다. 그는 인격이나 성품, 아름다운 삶의 행적으로 볼 때에 교육학에서 가장 바람직하게 여기는 인간상인 ‘전면적으로 고르게 발달된 인격체의 전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인 재능이 넘쳐서 그 덕을 해치는 경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고귀한 인격과 더불어 그의 뛰어난 재능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에 걸쳐 한국인들을 위해 고귀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신앙과 교육 그리고 선교를 중시하는 명문 가문에서 태어난 헐버트는 훌륭한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의 영향으로 고귀한 성품과 다양한 지적능력을 갖출 수 있었고 엄격한 칼뱅주의 신앙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헐버트의 모교인 다트머스대학의 도서관에는 헐버트가 1929년에 쓴 졸업 후 신상기록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나는 천 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웠다.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의 그러한 행동은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헐버트가 86세에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국빈자격으로 1949년 7월 29일 인청항에 도착하였다. 8월 15일에 열리는 한국의 두 번째 광복절, 건국일에 맞추어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그의 노고에 감사하기 위해 초대된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그러나 헐버트는 워낙 고령이어서 장기간의 배를 타고 오는 힘든 여정에서 오는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내한 1주일 만인 8월 5일에 피어선 박사가 주치의로 있던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타계하였다. 헐버트의 오랜 동지였던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그의 가족들과 그를 아는 모든 미국인 친구들과 한국인들에게 큰 슬픔의 날이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부민관에서 사회장으로 거행된 장례식장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조사를 하셨다.

헐버트 박사는 말이 미국사람이지 그 마음과 평생의 행동은 오직 우리 한국을 위하여 일편단심 분투하여 온 사람이다. 박사는 한국에서 추방당한 이후로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혹은 말로 혹은 글로 한국의 억울한 사정을 널리 호소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평생을 바쳤던 것이다. 이제 독립된 한국을 방문하고자 한국에 돌아와서 발전하는 우리나라의 이모저모를 구경도 하지 못하고 친우들과 이야기도 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유감이다. 우리는 고 헐버트 박사의 유지를 따라 민족국가를 위하여 앞으로 더욱 싸울 것이며 박사의 공을 영원히 빛나게 하여야 할 것이다.

같은 해 8월 12일 동아일보는 헐버트의 서거를 슬퍼하는 사설을 다음과 같이 실었다.

우리는 은인(恩人)을 잃었다. 아니 애국자를 잃었다. 우리 한국을 사랑하기를 그의 조국을 사랑하는 것 보다 못지않게 사랑하였고, 우리의 어느 애국자 보다 못지않게 한국을 사랑하던 헐버트 옹은 90평생 꿈에도 잊을 수 없던 이 조국 아닌 조국의 흙을 다시 밟은 지, 1주일 만에 황천의 객이 되고 말았으니 고인인들 어찌 눈을 무심히 감을 수 있으랴. 그렇듯이 고인을 박해하였고 이 고인이 그처럼 사랑하던 이 겨레를 못살게 굴던 일제가 물러가서 이 땅에 자유는 깃들었건만 그래도 우리 앞길에는 의연히 태산 같은 난적이 산적해 있는 이때에 은인을 잃고, 애국자를 잃은 우리의 슬픔은 비길 데 없이 큰 것이다.

19세기 말에, 일제의 조선 침략과정에서 기울어 가는 조선의 국운을 걱정하며 청년들을 가르친 교육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 조선의 교육을 위하여 자신의 온 몸을 바치고, 독립운동가로서 또한 조선의 역사와 한글을 연구한 학자로서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헐버트는 우리 민족의 은인이며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이 본 받아야 할 삶의 모델인 것이다. 헐버트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미래 한국의 청년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또한 우리의 조국인 대한민국과 그 속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나아갈 방향은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헐버트의 가치관과 사상적 배경을 연구하기 위해 그의 생애를 주기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4기로 나누어 봤다.

1기 – 미국에서 출생하여 부모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다트머스대학에서 받은 대학교육과 유니온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2년간의 교육을 받고 조선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Royal College)의 교사로서 조선에 올 때까지의 과정 (1863년-1886년)

2기 – 육영공원 교사로 조선에 와서 산 5년 반의 삶 (1886년-1891년)

3기 – 자신의 조국인 미국으로 되돌아갔다가 감리교회의 목사가 되어 선교사의 자격으로 조선으로 재입국하여 삼문출판사의 책임자로, 배재학당의 교사로, 또한 여러 가지 교육활동과 고종황제의 특사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일인(日人)들에게 추방당하기까지의 삶 (1893년-1907년)

4기 – 추방을 당한 뒤에 미국에 정착하여 살면서, 미국인들을 향하여 그리고 세계를 향하여 일본의 침략과 야욕의 부당성을 알리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애쓰시면서 활동하다가 돌아가실 때까지의 삶 (1907년-1949년)

헐버트의 출생과 교육 그리고 삶과 죽음 등, 그의 일생의 총체적인 삶의 모습을 생각하며 필자는, 그의 한국 사랑의 근원인 그의 가치관의 형성 과정과, 그가 선교지 조선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경험하면서도 지쳐 넘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저류에는 어떤 사상과 정신이 있었는가? 라는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본 발표를 진행하고자 한다.

2. 헐버트의 성장과정

헐버트의 한국 사랑에 대한 근본은 한마디로 말하면 기독교 정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회중교회 목사인 부모님을 통하여 배우고, 몸으로 익히고, 알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을 단순히 머릿속의 정신으로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표현한다면 ‘화육의 신학 (Incarnation Theology)’이라고 표현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신세계에 자리 잡은 기독교 정신은 그의 삶을 통하여 한국 사랑으로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글을 통하여 그의 가치관이 어린 시절에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의 가치관들이 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실천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였다. 그가 살아간 삶의 행적들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의 삶에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고,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하는 기독교적 사랑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1) 헐버트의 부모
헐버트는 남북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863년 1월 26일 미국의 동북부 지역인 버몬트(Vermont) 주 뉴헤븐(New Heaven)시에서 아버지 캘빈 헐버트(Calvin B. Hulbert)와 어머니 매리(Mery E. Woodward) 사이에서 3남 1여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헐버트 가(家)는 17세기 초, 영국 국왕 찰스 1세가 통치하던 시기에 정부에 불만을 품고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의 일원이었다. 헐버트의 아버지는 항상 냉철한 사고 속에서 절제된 행동을 하는 당시 미국 사회의 주류를 이루었던 청교도의 후예였다. 그는 다트머스대학(Dartmouth College)을 나와 미들베리 대학(Middlebury College) 총장을 지냈으며 회중교회의 목사였다. 그가 미들베리 대학의 총장이 된 것은 그의 정직성과 청렴성, 그리고 종교적 신념이 높이 평가되어 특별히 초빙된 것이라고 한다.

헐버트의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도덕성과 사랑, 겸손을 가르쳤고, 유머(Humor)를 잃지 않을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자녀들에게 감상적인 기독교관을 갖기보다는 진실한 믿음을 요구하였다. 헐버트는 일요일에는 보통 아이들처럼 떠들썩하게 놀 수 없었으며, 일요일은 주님의 날로 알고 이를 성실하게 지키면서 정신세계를 가다듬는 하루를 보냈다고 회고하였다. 아버지는 또한 자녀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자녀들이 신앙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처럼, 학교 교육에도 충실 할 것을 바랐다. 헐버트는 한국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교육만이 인간을 깨우칠 수 있으며, 교육만이 나라를 문명화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국민의 계몽 개화, 교육에 앞장을 섰는데 오늘날 한국 교육의 선진화는 이미 헐버트와 같은 선각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헐버트의 어머니는 헐버트가 나온 다트머스대학 설립자의 증손녀이며, 헐버트의 외할아버지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였다. 부계와 모계 모두 청렴성과 정의, 사랑, 겸손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의 피가 흐르는 가문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모성애가 극진한 사람이었다. 헐버트는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어머니처럼 희생적일 수 없다고 회고하였다. 약 50여 년 동안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어머니의 격하거나 자애롭지 못한 모습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으며, 화를 내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고 하였다.

헐버트의 성격은 항상 희생적인 어머니의 인자함과 아버지의 강직함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고 보여 진다. 헐버트 자신도 정의감, 일에 대한 열정, 신앙에 대한 투철한 자세는 집안의 내력과 연관이 있다고 하였다. 헐버트는 명문가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겸손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헐버트의 교육철학은 항상 교육에 철저하였던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명문 대학의 창립자의 후손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 진다. 칼뱅주의의 엄격한 도덕성, 어떠한 형편에 속한다 할지라도 헐버트가 지키고 있었던 인간중심 사상, 그리고 충실한 그리스도의 정신 아래에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정의를 사랑하는 정신, 평화를 추구하는 정신, 따뜻한 인간애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신앙과 성품은 일평생 함께 갔다. 그리고 이 성품은 그의 인격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삶의 행적과 모습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2) 헐버트의 학창 생활
헐버트는 유‧소년기에 유난히 모험심이 강한 어린이였다. 친구들과 더불어 미국 동북부의 산악지대에서 대자연을 벗 삼아 모험하는 것을 즐겼다. 어른들이 사용하는 곰의 덫을 사용하여 날짐승을 잡고 물살이 빠른 계곡에서 카누를 즐겼다고 하였다. 헐버트가 7살이 되던 1970년에 아버지가 뉴저지 주의 뉴어크(Newark) 시의 한 교회를 목회하게 되어 가족들이 모두 그 곳으로 이주하였다. 헐버트는 그곳에서 잠시 초등학교를 다녔다.

헐버트는 이미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서재를 자신의 도서관으로 삼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독서하는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특히 아버지 어깨너머로 라틴어를 공부하여 후일 학교에서 선생이 놀랄 정도로 라틴어를 구사한 헐버트는 어릴 적부터 어학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1872년 아버지가 버몬트 주 베닝턴(Benington) 시의 회중교회로 이동하자 헐버트도 그 곳으로 전학하였다. 1875년에는 아버지가 미들베리 대학의 총장이 되면서 헐버트는 미들베리에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어서 1879년 버몬트 주에 있는 세인트 존스베리아카데미를 1년 동안 다닌 뒤 미국 동북부 뉴햄프셔 주에 있는 다트머스대학에 입학하였다.

헐버트의 대학 생활은 항상 향학열에 불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시간을 아껴가며 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스케이트 타기와 같은 운동을 좋아하였고, 미식 축구팀의 선수로 활약하며, 대학에서 체육부장도 지낼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헐버트는 문학과 역사에도 관심이 깊어 그리스 신화, 섹스피어의 문학작품 등을 섭렵하며 Tri-Kappa 라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봉사와 희생을 배웠다. 한편으로 헐버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목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어린나이에 사회생활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대학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선발 되어 졸업생 인사를 하기도 하였다. 대학은 그의 사상을 성장시키고 그를 전인적인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산실이었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헐버트는 뜻이 있어 1884년 여름에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Worcester) 시에서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여름학교에 다녔다. 비록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나마 히브리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던 시간들이었다. 유대인의 교육방식인 집중력을 기르는 훈련, 질문을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훈련을 이 학교에서 배웠다. 헐버트가 가진 언어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훈련을 받으며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어서 헐버트는 뉴욕에 있는 유니언 신학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2년을 공부하였으며 1886년 여름에 조선으로 오기 위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 유니온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은 본래 1836년 설립되었으며 처음에는 장로교회를 통하여 시작하였으나 지금은 초교파적 신학대학이라 할 수 있다. 진보신학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문대학으로 알려진 유니온 신학대학은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와 같은 유명한 신학자를 배출한 신학대학으로도 유명하다. 헐버트가 이 대학에서 가장 청년의 때에 공부하였다는 것은 헐버트의 사상이 상당히 진보적이고 포괄적이며 또한 실천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가 조선에 온 이후로 여러 가지 다양한 주제의 수많은 연구논문들을 발표하고, 역사를 기록하며, 한글의 문법체계를 연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채록하고, 한국의 민담을 기록하는 등 그의 다양한 학문활동은 그의 어린 시절의 좋은 습관들과 대학 시절의 학구열에서 나온 결과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한국 문명화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

헐버트가 학생들을 가르친 ‘육영공원(Royal College)’은 1886년에 설립하여 8년을 지속하다가 1894년 폐교하였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과거에 합격한 관리와 고관 양반들의 자제들로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초기에는 학구열에 불탔으나 후일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히고 배우려는 의지가 약해 교육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국가의 재정도 부족하였다. 헐버트와 함께 교사로 온 길모어(George W. Gilmore)는 부임 2년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또 다른 교사인 벙커(Dalzell A. Bunker)만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남아있었다.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성공적인 신교육과 선교를 성취하고 있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선교사는 첫 안식년을 맞이하여 1892년에 미국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1년 동안 조선 선교에 대한 보고와 계속적인 조선 선교를 위한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미국 내의 여러 곳을 바쁘게 여행하였다. 그 때 헐버트는 오하이오(Ohio) 주에 있는 남 군사학교(Putnam Military School) 교장으로 있었다. 아펜젤러는 조선에서 돌아온 그를 만나 다시 조선에 가서 사역하도록 간곡하게 권면하였다. 아펜젤러는 미국 감리교회의 본부에 헐버트를 추천하면서 ‘헐버트는 조선말이 유창하고 조선의 감리교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두 사람의 신뢰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으며, 후에도 두 사람은 조선에서 친밀한 관계로 지냈다는 사실이 여러 자료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헐버트는 아펜젤러의 권유를 받아들여 1893년에 미국의 감리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이번에는 먼저와는 다르게 미국 감리교회에서 인정을 받은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조선에 다시 왔다. 그리하여 그는 F. 올링거(F. Olinger)의 후임으로 문서선교의 책임을 맡아 아펜젤러와 함께 배재학당과 삼문출판사에서 그에게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였다.

헐버트는 이후 일본에서 추방당하는 1907년까지 한국에 살면서 보통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일들에 헌신하고, 많은 업적을 남기는데 이 글에서는 헐버트의 출판 및 언론 활동, 교육 활동, 한글 자강운동, 역사 연구 및 저술 활동, 그리고 장대한 독립운동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려 한다.

1) 출판 및 언론 활동
헐버트는 육영공원을 위하여 조선에 온지 5년 반이 되는 1891년 12월에 조선을 떠난 뒤 본국에서 2년을 지내고 1893년에 감리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감리교회 선교사의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싱가폴로 자리를 옮긴 올링거(Frankin Olinger)가 운영하던 감리교회의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에서 그의 후임 책임자로 일하면서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에게 지리와 역사를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그는 조선에 오기 전에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출판에 대한 교육을 받고 왔으며, 또한 신시내티에서 서울로 신식 인쇄기도 들여왔다. 또한 수시로 상하이에서 성능이 좋은 활자를 구매하여 사용하였다. 삼문출판사에서는 그가 온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각종 신문 그리고 전도지, 종교서적 등 100만여 면을 인쇄하여 파격적인 성과를 내 출판사 경영을 자급자족 할 수준에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헐버트는 삼문출판사 운영을 통하여 조선의 출판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2년 동안 휴간되었던 《한국소식(Korea Repository)》이 삼문출판사를 통해 1895년부터 다시 발행되었고, 우리나라 최초로 영문소설인 《천로역정》 제1부의 번역본 《텬로력뎡》이 1895년에 삼문출판사를 통해 출판되었다. 또한 《독립신문》, 《협성회보》등 우리나라 개화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각종 신문과 인쇄물들이 헐버트 당시에 인쇄되고 출판되었다. 삼문출판사는 기독교선교 관련문서 외에도 일반서적과 교과서, 그리고 조선의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매일신보》와 《경성신문》 등의 언론매체의 인쇄에도 기여하였다. 1893년에서 1897년까지 삼문출판사를 운영하면서 헐버트는 인쇄, 출판에 관하여 많은 경험을 축적하였으며, 이 때 그는 누구보다도 한글의 우수성 등 한민족의 기원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헐버트가 쓴 회고에 의하면 언론과 국민계몽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헐버트는 서재필이 이 분야에 있어서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 자리에서 그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귀국한지 얼마 안 되어 《독립신문》이 발행될 수 있었던 것은 삼문출판사의 시설과 이를 운영하던 헐버트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헐버트는 출판사 운영을 통하여 한국 근대 출판뿐만 아니라 국민의 계몽에도 앞장을 섰다.

1898년 말에 《한국소식》이 폐간되고 《독립신문》도 폐간되자 헐버트는 1901년부터 월간으로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이라는 잡지를 간행한다. 이러한 활동은 기독교를 효율적으로 선교하는 차원을 넘어서 국민들에게 근대적인 사상을 고취시켰으며, 우리의 사정을 대내외에 알리는데 크게 공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삼문출판사는 근대 신문 출판의 산실이었다. 헐버트는 이런 출판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조선 근대 언론의 환경을 조성하고, 언론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근대 교육의 주춧돌을 놓음
한국에 살면서 헐버트의 주요한 관심은 교육이었다. 선교사로서 동대문 교회를 목회한 일이 있기는 하나, 그의 전문 목회 사역은 지극히 짧은 기간에 불과하였다. 삼문출판사가 아펜젤러가 운영하는 배재학당에 속한 기관이었기에 학생들이 삼문출판사에서 일을 하자 헐버트는 그들과 가깝게 교류하였고 또한 틈틈이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것을 생각하면 헐버트는 거의 19년간을 한국에서 교육가로 활동하였다. 한국에서의 대부분의 시간을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고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발전과 기독교 선교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교육이 최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교육만이 나라를 지킬 수 있고, 근대 문명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그의 정신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헐버트는 교육을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수월하게 또한 골고루 교육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헐버트는 한글로 책을 쓰고 가르쳤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의 교육활동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1886년 7월 5일 육영공원 교사로 내한
1893년 10월 감리교 선교사로 재내한 배재학당에서 가르침
1897년 한성 사범학교 책임자
1900년 관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교관

이 외에도 상동청년학원과 광혜원 같은 곳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1895년 이승만이 배재학당을 입학했을 당시 배재학당의 교사진은 아펜젤러를 비롯하여 벙커, 헐버트, 노블과 같은 사람들이었고, 헐버트가 역사와 지리를 가르친 것을 《배재 100년사》는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1904년 한국평론 10월~12월 호를 보면 〈한국 교육을 위한 제언〉 이라는 글을 통하여 헐버트는 자신의 교육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상층 계급과 하층민 사이의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유일하고 또 유일한 방법은 평민들에게 훌륭한 한글로 쓴 문학을 선사하여 한자 시대를 뒤집어 진정한 교육이란 소수가 아닌 다수에게 있다는 인식을 널리 퍼뜨리는 일이다. 만약 교육 운동이 아니라면 한국인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나라 전체가 자랑스러워할 훌륭한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진정으로 완벽한 학교 말고 무엇이 있는가? 한국인 스스로 이런 학교를 만들 가능성이 없다면 누가 이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가? 학교가 정치적으로 치우치거나 파벌 싸움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의심을 받을 가능성이 추호도 없도록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짊어져야 한다.

헐버트는 한국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양반들만이 아니라 평민들까지도 주어져야 하며, 그 교육은 반드시 나라 전체가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학교가 세워져서 바르게 운영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운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3) 한글 범용의 지평을 열다
헐버트의 놀라운 업적 중 하나는 그가 한국에서 많은 저술 활동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한민족을 일깨운 《사민필지》를 비롯하여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안개 속의 얼굴(The Face in the Mist)》, 《엄지 마법사(Omjee The Wizard)》 등의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뿐만 아니라 《협성회보》, 《독립신문》, 《한국소식》, 《한국평론》 등 개화 초기의 한글과 영문으로 발행하던 신문 잡지에도 깊이 관여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연구물을 발표하였다.

《안개속의 얼굴》은 미 해군장교가 보물을 찾는 모험을 그린 소설로서 주인공이 제주도에서 목화라는 아가씨를 만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은 비교적 제주도의 지형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제주도를 직접 가서 보지 않고는 불가능할 정도로 제주도의 풍광이나 민속을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1927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엄지 마법사》라는 동화책을 미국에서 출간하였다. 민담들이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한국 이야기의 맛을 보존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헐버트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는 미국의 어린이들에게 동방의 신비한 나라 한국의 민속을 소개하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헐버트는 서울에 살 때도 아이들을 사랑하여 자기 집 마당에서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헐버트의 저술에서 주목할 부분은 그의 한국의 말글과 문학, 예술에 대한 연구이다. 한글사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사민필지》와 한글에 대한 논문 그리고 민족의 혼 아리랑에 대한 그의 공헌을 살펴보자.

– 사민필지
헐버트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가장 크게 어려움을 느낀 것은 교과서 문제였다. 이미 미국에서 교과서를 준비하여 오기는 하였으나 절대적으로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오면서 지리, 역사, 수학 등 고등교육의 기본적인 저작들을 교재로 사용할 목적으로 조선에 가져왔다.

헐버트는 당시 조선인에게 필요한 것이 세계지리이며 거기에는 일반적 지리학에서 알려주지 못하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책을 통하여 세계지도의 조감도와 개별국가들이 이룬 부(富)와 문화, 그리고 국력의 정도를 한눈에 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헐버트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책을 집필하여 1890년에 《사민필지》라는 불후의 명작을 출간하였다. 실로 조선에 온지 4년 만에 이루어진 놀라운 일이었다.

《사민필지》에서 다루어진 내용들은 영역(폭원, 수리적 위치, 경계), 지형(산, 강, 평원), 기후, 산물(초목, 가축, 곡식, 지하자원) 국세, 재정, 군사 교육제도, 종교, 대외정책, 도로의 사정, 및 교통 등 대단히 광범위한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정보가 매우 정확하고 서술 방식이 조직적이라는 점에서 잘 쓰여 진 지리서였다. 전반적인 내용이 국제 이해와 교육이라는 세계지리 교과서답게 각국의 차이점과 지역적 특색, 문제점 등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주목되는 점은, 세계정세 변화에 따른 국제 이해의 필요성 및 지리 수업에서 학생들이 보여 준 세계지리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에 대한 부응이라는 점이다. 이는 당시 육영공원의 학생들이 근대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자하는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길모어(Gilmore) 교사의 회고를 보면, 육영공원 학생들이 가장 흥미를 가졌던 과목이 지리였고, 그들이 만국의 지리를 배우게 되자 세계적인 안목이 크게 열리게 되었다는 내용이 이를 뒷받침 하여 주고 있다. 사민필지의 서문에는 책 출판의 목적이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 다음과 같은 서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서문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쉬운 글로 풀어 썼다.

천하형세가 옛날과 지금이 크게 같지 아니하여 전에는 각국이 본 지방을 지키고 본국 풍속만 따르더니 지금은 그러하지 아니하여 천하만국이 언약을 서로 믿고 사람과 물건과 풍속이 서로 통하기를 마치 한 집안과 같으니 이는 지금 천하형세의 고치지 못할 일이라. 이 고치지 못할 일이 있는 즉 각국이 전과 같이 본국 글자와 사적만 공부함으로는 천하 각국 풍습을 어찌 알며 알지 못하면 서로 교류하는 사이에 마땅치 못하고 인정을 통함이 거리낌이 있을 것이오.

거리낌이 있으며 정의가 서로 두렵지 못할지니 그런 즉 불가불 이전에 공부하던 학업 외에 각국 이름, 지방, 폭원, 산천, 산야, 국경, 국세, 재화, 군사, 풍속, 학업과 도학이 어떠한 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고로 대저 각국은 남녀를 막론하고 칠, 팔세가 되면 천하각국 지도와 풍속을 가르친 후에 다른 공부를 시작하니 천하의 산천, 수륙과 각국풍속,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라. 조선도 불가불 이와 같게 한 후에야 외국교류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도 생각하건대 중국글자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며 널리 볼 수가 없고, 조선 언문은 본국 글일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쉬우니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마는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

이러므로 한 외국인이 조선말과 언문 법에 익숙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특별히 언문으로서 천하각국 지도와 목견한 풍기를 대강 기록한다. 땅덩이와 풍우 박뢰의 어떠함을 먼저 차례로 각국을 말씀하니 자세히 보시면 각국 일을 대충은 알 것이요 또 외국 교류에 적이 긴요하게 될 듯하니 말씀의 잘못됨과 언문의 서투른 것은 용서하시고 이야기만 보시기를 그윽이 바라옵나이다.

위와 같이 《사민필지》 서문에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나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세계의 양상에 대한 이해와 세계교류에 대한 필요성 이외에도 한글의 의미를 지적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글이 한자와 비교해 너무나 편리하고 탁월한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조선인들 사이에서 그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것이 누구보다도 한글의 우수성을 깨닫게 된 헐버트가 순 한글로 된 근대식 교과서를 최초로 만들게 된 이유였다. 이러한 헐버트의 지혜와 용기는 조선인들에게 한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 또한 모든 계층의 사라들에게 널리 보급하며, 조선인들에게 국제교류에 필요한 기본지식을 제공하겠다는 조선에 대한 사랑과 그의 사명감에서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서구 중심의 시각과 내용 서술의 전개 방식이 조선인에게는 익숙지 않다하더라도 이 책은 당시의 교육기관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계 지리에 관한 인식은 곧 세상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것과 직접 연관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은 조선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썼다. 도량형 단위를 척, 관, 근 등의 조선의 방식을 썼다. 심지어 거리도 ‘리’로 표기하였다. 헐버트가 얼마나 배려심이 많은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또한 그동안 오로지 청나라와 일본 정도만 알고 있었던 조선인들에게 국제사회를 본격적으로 알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 책은 1895년 갑오개혁 이후에 출판된 많은 종류의 지리서 및 근대 서적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909년 세 번째 판이 나온 뒤 한국인들의 사상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출판 및 판매가 금지 되었다. 일제는 한국인들이 이 책을 통하여 세계정세를 깨달아 안목을 넓혀 국제사회를 접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헐버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우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이 책을 사용하였고, 육영공원, 배재학당, 한성사범학교, 관립학교 및 상동청년학원에 재직할 때에도 지리를 가르치며 이 책을 교재로 사용하였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협소한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던 조선의 청년들에게 넓은 세상, 국제사회를 인식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 이 책으로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였던 윤성열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배재학당은 1890년도에 들어 중등교육과정의 교과목을 갖추어 수업을 하였지만 아직 각 과목의 교과목을 모두 갖추지는 못하였다. 이때 사용된 교과서로는 《사민필지》가 대표적인 것이었는데 그 내용은 지리와 비슷한 것으로 과번이 66번까지 나간 이 책은 한역으로 출판되었고, 그 당시로는 구하기도 힘든 지도가 8장이나 삽입이 되어 있었다. 우주, 성좌, 태양의 위치도 까지 있었다.

– 한글 연구와 아리랑의 재발견
헐버트가 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한 일은 조선의 글인 한글을 배우는 일이었으나 그는 한글을 배운지 3년 만에 《사민필지》라는 지리 교과서를 집필하였다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다. 그는 한글을 점차로 알게 되면서 한글 자체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할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도 수준 높게 연구하는 놀라운 자질과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연구의 결과물들이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헐버트는 《한국소식》, 《한국평론》 그리고 미국에서 발행되는 여러 소식지들을 통하여 조선의 문화나 역사 그리고 한글에 관한 자신의 연구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그가 쓴 글들의 제목은 한민족의 기원, 로마가톨릭교 조선 선교 약사, 갑오개혁, 조선의 새해맞이, 조선의 미국인 교사들, 한국 교육을 위한 제언, 한국의 소리 음악, 한글 맞춤법 개정, 훈민정음, 이두, 한국어, 한국어 로마자 표기, 한글 등이 있다.

헐버트는 한글을 배우면서 바로 한글이 대단히 과학적이고 배우기가 간편하며,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음성언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한글은 영어와 달리 발음기호가 없고,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간편해서 쓰기와 말하기가 세계 어떤 언어도 따라 올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결론은 그의 진지한 학구적인 태도와 치밀한 분석력을 통하여 연구한 결과이며, 그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조선인들에게 이렇게 우수한 한글을 쓰자고 외쳤다. 그의 연구는 훈민정음이나 이두와 같은 조선인들조차도 연구하기 어려운 주제로 심화되었음도 알 수 있다.

만약 조선인들이 과도하게 지식의 부담을 주고,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반상제도를 고착시키고, 편견을 부추기고, 게으름을 조장하는 한자를 내던져 버리고 한글 창제 직후부터 자신들의 새로운 소리글자 체계인 한글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인들에게는 무한한 축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허물을 고치는 데에는 너무 늦은 법은 없는 것이다. 한 민족은 이제부터라도 한글을 받아들여야 한다.

헐버트 연구가 김동진은 말하기를 헐버트는 학창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음악이든지 한 번 들으면 그 노래를 소화해 낼 수가 있었다. 그는 단아한 여선생이 가르치는 음악시간을 좋아하였고, 대학시절에는 음악부장을 지내며 합창단에서 단원으로 활약하였으며, 교회에서는 성가대를 이끄는 음악 애호가였다고 한다. 헐버트는 당시 어떠한 조선인도 관심을 갖지 못하던 단순한 전통 민요와 조선인들에게 가장 많이 불리어지는 아리랑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헐버트의 음악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노래를 채록 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전래 음악인 민요를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경상북도 문경 지방에서 구전되는 아리랑을 채록한 것은 그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2015년 (사)서울아리랑페스티벌은, 아리랑을 세계에 알린 헐버트에게 제1회 ‘서울아리랑 상’을 수여하였다.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조직위원회는 아리랑의 가치 공유와 확산을 위하여 ‘서울아리랑 상’을 제정 하였다면서 첫 수상자로 헐버트를 선정하면서, ‘헐버트는 한국 최초로 아리랑을 서양식 음계로 채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연구한 논문을 발표한 공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어서 ‘헐버트는 한국 음악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음악가이다’라고 평가하였다.

헐버트는 1896년 영문 잡지인 《한국소식》 2월호에서 〈한국의 소리음악(Korean Vocal Music)〉이라는 논문을 기고하면서 한국의 고전음악과 소리음악을 분석하고 서양식 음계로 채보한 아리랑을 비중 있게 다루어 전 세계에 알리는 창구의 역할을 하였다.

제일 먼저 살펴본 노래는 현저히 빼어나며 대중적인 이해도가 높은 대략 782마디 정도 되는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은 존재이다. 다른 노래들은 말하자면 반찬과 같은 불과하다. … 후렴구에 이어서 부르는 노랫말은 전설, 민속, 자장가, 연회, 일상생활, 여행, 사랑 등 다양한 주제를 표현한다. 한국인들에게 이들 노랫말은 서정시이요, 교훈적 시구요, 서사시이며, 이들이 어우러져 멋들어진 아리랑이 된다.

헐버트가 최초로 채보하여 소개한 것은 문경새재 아리랑으로 알려져 있다. 문경새재 아리랑은 대원군 집권시절, 경복궁의 중건 시기(1865년-1872년)에 부역꾼들이 많이 부르던 노래였다. 문경의 특산물인 박달나무가 경복궁 중건을 위하여 공출되자, 이에 따른 실망감과 저항의 정신을 공감하며 부른 노래인 것이다.

헐버트는 조선인조차도 관심을 갖지 못한 전통 민요와 아리랑을 통하여 조선인의 보편적 정서를 이해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가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애정 어린 눈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상당히 수준 높은 이해를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한국과 관련한 많은 논문들을 발표하여 한국 문화의 독자성과 우수성을 알리는 일에 앞장섰던 것이다.

4) 한국 역사의 재발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나온 조선에 관하여 출판된 외국 저술을 살펴보면, 조선에 진출해 있던 선교사들이나 외국인들이 조선에 대하여 남긴 많은 기록들이 있다. 잠시 머물렀던 군인, 관리, 혹은 여행자들도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동기들에 의해서 왔기에 조선에 도착하여 갖게 된 조선에 대한 인상은 거의 대부분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인들 눈에 비친 조선은 너무나도 가난하고, 형편없는 나라였다. 그들은 중국과 일본 위주의 조선관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이란 단지 일본이나 중국의 속국이거나 아니면 보잘 것 없는 변방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들이 전해 준 정보들이란 이처럼 부정적 인식이 가득 찬 정보들이었던 것이다.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가 1880년을 전 후로 해서 쓴 《은둔의 나라 조선(Corea, the Hermit Nation)》과 퍼시밸 로웰(Percival Lowell)이 쓴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en, The Land of Calm)》이 조선에 대한 대표적인 책이었다.

그리피스의 책 《은둔의 나라 조선(Corea, the Hermit Nation)》은 저자 자신이 조선에 직접 방문하지도 않고,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자료와 관점으로 조선에 관하여 기술했는데 많은 내용이 부정적이고 일방적이고 부정확하였다. 조선에 관하여 부정적이거나 차별적인 인식을 가진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을 통해 얻어진 자료를 사용하였기에 조선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태도가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다. 로웰(P. L. Lowell)의 책도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1883년 겨울 미국의 특별 사절단으로 조선에 온 로웰은 자신이 목격한 서울은 더러운 오물로 악취가 진동하는 비문명적 세계라고 혹평했다. 헐버트는 이러한 책들이 서양인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에 엄청나게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헐버트는 은둔의 나라 혹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그리피스의 묘사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조선인들은 그저 웅크리고 숨어 사는 사람들이 아니며, 그리피스가 조선에 와부지도 않고 쓴 이 글은, 오류투성이며 실제 조선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로웰이 ;조선‘을 조용한 아침의 의미인 ’Morning Clam’으로 번역한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한자에서 원래 ‘선(鮮)’이란 조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곱다 혹은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조선이란 ‘빛나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로 번역을 했어야 바른 번역이 된다는 것이 헐버트의 주장이었다.

헐버트의 조선을 바라보는 눈은 항상 애정이 넘치며, 긍정적이었다. 그의 조선을 바라보는 눈, 조선관(朝鮮觀)은 동시대에 장로교 선교사로 활동했던 제임스 게일(James Gale)과는 완전히 달랐다. 게일은 ‘조선에 미친 중국의 영향’이란 글에서 조선 사회는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조선의 전통, 문화, 언어, 역사 등을 모두 중국 문화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조선의 고대사 부분을 중국의 전설적 시대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헐버트는 조선의 역사는 ‘중국과 분명하게 구별이 되는 주체적인 역사와 전통을 발전시켜 왔다’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역사와 전통을 지속해 왔고 독자성을 간직해 왔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강조해서는 안 되며, 조선은 중국과는 종족, 언어구조에서부터 전혀 다르다는 것이 헐버트의 생각이다. 헐버트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조선 나름의 독창성을 인정하면서 중국 문화와의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한민족은 개성이 뚜렷한 민족이며, 언어의 독창성으로 보아 주변 국가의 어느 나라보다도 구별되는 완전한 민족이며 독자적 민족이라는 것이다.

헐버트는 조선에 대한 편견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독자성과 차별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제대로 소화하고 그 실상 및 역사, 문화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활발한 저술 활동에 참여한 것이다.

헐버트는 조선에 온 초기부터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탐구를 꾸준히 그리고 심도 있게 진행하였다. 한문으로 된 역사책을 공부하면서 꾸준한 노력을 하여 15년간의 집념어린연구가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와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로 나타나게 되었다.

필자는 이글을 쓰는 동안 《한국사》의 번역본 《한국사, 드라마가 되다》라는 책을 구입해 볼 수 있었다. 우선 그 양의 방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헐버트는 1,000쪽이 넘는 방대한 양의 역사를 영문으로 작성하였는데 고조선에서부터 격동의 근대 조선에 이르는 5천 년의 한국 역사를 자신이 직접 연구하여 이 방대한 통사(通史)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한국사, 드라마가 되다》로 번역된 《한국사》는 모두 두 권으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1권에는 단군조선에서부터 조선 선조 때 일어난 임진왜란 초기까지의 역사가, 2권에서는 임진왜란 중기부터 청나라와의 두 차례 전쟁(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영‧정조의 정치적, 문화적 개혁기 그리고 1904년의 러일전쟁의 역사가 왕조 순, 사건 순으로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은 서구 이방인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기는 하나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던 역사적 사건들의 이면과 새로운 시각 그리고 통찰력을 보여 주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헐버트는 역사를 기술해 나가는데 있어서 어느 한 순간도 한국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놀라울 뿐이고 또한 한국인의 한사람으로서 헐버트에게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야 왜 헐버트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인가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5) 독립운동가이자 황제의 밀사
1882년 조선과 미국 간에 맺어진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거중조정(居中調整)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만약 타국이 불공경모(不公輕侮)의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서로 돕고 조정함으로서 그 우위의 두터움을 표시한다.’이러한 조항에 의거하여 고종은 절박한 심정으로 비밀 특사를 통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당시 일본의 감시 하에서 공개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일한 방법은 개인적 사신을 통하여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국내에 친서를 전달할 만한 마땅한 특사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외국인인 헐버트가 고종의 특사로 선발이 되는데 이는 고종과의 친밀한 관계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헐버트는 육역공원 시정부터 고종과 친분이 있었고, 춘생문 사건을 통하여 끝까지 고종을 지킴으로서 고종의 신임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헐버트는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를 위한 특사들이 파견될 당시에 중심인물이었다.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 독일, 미국 등 9개 국가를 방문하여 친서를 전달하는 일을 헐버트에게 맡겼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서 사람을 보낸다면 그는 헐버트일 것이라 판단하고 헐버트를 밀착하여 감시하였다.

일본의 기밀문서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미국인 헐버트는 시종 우리의 대한정책을 방해하는 자이다. 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무엇인가를 할 것이다.’ 헐버트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과 더불어 헤이그 평화클럽에서 일본을 비난하며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나 한국의 외교권이 상실되었다는 이유로 평화회의에는 참여하지도 못하고 말았다.

헤이그 특사파견 사건은 헐버트에게 조선을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일제의 박해로 더 이상 조선에 살기가 어려워진 헐버트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스프링필드(Springfield)로 거처를 옮겼다. 미국의 친구들은 헐버트에게 이제 한국은 희망이 없다면서 한국과 관련한 일들을 이제는 그만 두고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헐버트는 자신의 사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하면서 한민족과 고종 황제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미국에서도 특사 정신을 잃지 않고 조선의 주권회복을 위한 투쟁의 횃불을 계속 태우리라 다짐하였다.

그는 우선적으로 언론을 접촉하면서 일본의 부당성을 성토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 7월 19일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뉴욕타임즈》, 《뉴욕헤럴드》 등 국제적 신문들과 잇달아 회견을 가지면서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자행하고 있는 만행들에 대하여 고발하였다.

한국인들은 끝까지 투쟁 할 것이며 일본은 한국인들을 말살시켜야만 한반도에서 평화를 얻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침묵을 지키기보다도 계기만 마련되면 일어서서 1592년 임진왜란 때처럼 그들에게 고통을 준 자들에게 게릴라전도 불사할 것이다.

헐버트는 강연을 통하여 일본의 부당성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1907년 가을, 미국의 서부지역을 돌면서 한국의 입장을 호소하였다. 그는 강연을 통하여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빼앗은 것뿐만 아니고 한국인들의 재산을 불법으로 빼앗고 있으며,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횡포에 말할 수 없이 시달리고 있다고 전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동시에 미국인들을 향하는 미국은 이를 바로잡는 노력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호소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을 상대 할 때에는 한국은 틀림없이 나라를 되찾을 것이므로 절대로 독립을 포기하지 말라고 희망을 주고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한제국 멸망사》에 나오는 ‘잠이란 죽음의 가상이나 결코 죽음 자체는 아니다’라는 문구처럼 한국인들에게 다시 일어나 나라를 되찾아야 할 것을 주문하였다.

1907년 11월 샌프란시스코 한인청년회가 주최한 강연에서는 ‘일본이 강하다 하나 일본 문명은 뿌리가 없어 오래지않아 한국에서 일본세력이 패망할 것이다.’ 또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는 ‘정의는 반드시 승리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틀림없이 나라를 되찾을 것이다’라면서 한국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면 이제 조선을 끝장이라고 하였지만 헐버트는 한민족이 가진 생존능력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포틀랜드(Portland)지 기사에 의하면 헐버트는 자신의 형의 교회에서 강의를 하면서 ‘나는 언제나 한국 국민을 지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1919년 3.1 만세운동 직후 서재필의 주도로 필라델피아에 한우친우동맹(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을 결성하고 이어서 1919년 8월 이승만의 주도로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들은 강연, 집회 등을 통하여 한국의 현실을 미국인들에게 알리고 자유를 위해 싸우는 한국인들을 격려하며, 일본에게는 한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만행을 중지 할 것을 요구하였다. 헐버트는 이 두 단체에서 중심적인 연사로 참여하였다. 헐버트가 행한 연설 횟수는 수천 번이 넘으며 청중의 수는 1919년 한해만 하여도 10만 명이 넘었다.

4. 맺음말 – 헐버트의 한국사랑은 매우 특별한 것

헐버트의 업적을 세세하게 살펴본 사람들은 그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1886년, 23살의 청년으로서 조선에 첫발을 디딘 후로 1949년 7월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조선의 청년들을 가르친 교육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조선에 전한 선교사, 한글을 연구한 언어학자, 한국 역사를 연구한 역사학자, 그리고 침략주의자들인 일본인들에 대항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로서 그 어떤 인물보다도 한국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헐버트는 조선을 제대로 알기 위하여 내한 초기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조선인들처럼 한국어를 구사하고 한글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한글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깨닫고 한글에 매료되어 스스로 한글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한글 연구의 많은 논문들을 국내외에 발표하였다. 그의 한글 연구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역사로 관심이 이어졌다. 많은 책들과 한국인 친구들을 통하여 그는 한국의 역사를 하나하나 배워 나갔다. 그리고 그는 한국 역사의 진수를 알게 되면서 한민족은 분명 그 당시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미개한 민족이 아니며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뛰어난 민족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 중국, 일본의 세 나라 국민 가운데 가장 창의적이고 타국에 호의적인 한국인들이 앵글로색슨 족의 특징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면서도 당시 지배층이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당파성에는 일침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한국인들은 바람직한 목표만 정해지면 뛰어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애정 어린 예언도 빠뜨리지 않았다. 한국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 그에게 한글을 연구하고 역사를 연구하고 결국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이제 그의 예언은 현실화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조선의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뤼순감옥에서 일본 경찰들에게 헐버트에 대하여 공술(供述)하기를 ‘헐버트는 한민족이라면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이 연구를 마감하며 필자는 헐버트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그는 전인적으로 온전하게 성장한 인격적인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신앙인이요, 교육가인 면문가정의 부모 밑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의 부모는 ‘원칙이 승리보다 중요하다(Character is more fundamental than victory)’라는 가훈 아래서 어린 헐버트를 교육하였다. 골고루 균형 있게 성장한 인격의 소유자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있을까? 겸손과 용기, 긍휼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사랑과 인내 등 헐버트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인격적 소양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또한 학문과 예능 분야에서도 다른 사람이 근접하지 못할 정도의 뛰어난 재능을 골고루 소유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둘째로 헐버트는 철저한 기독교 신앙을 가졌으며 그의 신앙은 머릿속의 신앙이 아니라 실천적 신앙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자신의 삶의 모습으로 옮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헐버트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화육(Incarnation)의 교리처럼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에 와서 그가 이룬 업적들은 대게 초인적인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미국인으로서 이방나라인 조선에 온지 4년이 채 안되어 순 한글로 된 《사민필지》라는 교과서를 집필한 일이나 한국 사람이라 할지라도 읽기조차 힘든 방대한 양의 한국 역사를 기록한 일 등은 모두가 그의 신앙의 표현이며 삶이었던 것이다. 고종의 명을 받들어 한국의 독립을 위한 특사로서 목숨을 걸고 활동하는 모습은 모두 그의 신앙의 표현이며, 신앙의 실천적 면모임을 알 수 있다.

셋째로 헐버트의 한국사랑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5년 반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조국에서의 평안한 생활을 버리고 2년 만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종의 특사로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하며, 1907년 일인들에게 쫓겨 갔을 때에도 은밀하게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또 미국에 사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해서 강연, 신문 기고 등을 통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조선을 무한한 가능성의 나라로 보았으며, 조선인보다도 더 크고 깊은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은 한 남성은 한 여성을 사랑하면서 살도록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한 인간이 자신의 조국도 아닌 이방인을 사랑하며 자신의 일생을 헌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서양으로서 이방나라에 불과한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사이며, 이는 아주 특별한 일에 속하는 것이다. 헐버트는 그 어려운 사랑을 한두 해 하고 그친 것이 아니라 일생을 두고 지속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아마도 한글에 대한 그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한국의 역사로 이어졌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알면 알수록 조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발견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넷째로 그는 세계 평화주의자였다. 헐버트는 한국친우동맹에서 연설하면서 ‘미국의 진실한 번영은 모든 국가의 번영에 달려 있다면서, 모든 나라가 평화롭지 못하면 어느 나라도 영원히 평화로울 수 없다고 하였다(No land can be permanently free unless all land are free).’

그는 어려서 훌륭한 부모 밑에서 성장하였다. 청교도의 후예들로서 아버지, 어머니 모두 철저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들이며 또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명문 교육가의 집안이었다. 그의 모험심과 개척정신은 조선과 동양에서도 거침없이 발휘되었다. 그의 평화주의 정신은 두려움을 모른 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몸 바쳐 일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위기의 시대에 헐버트와 같은 인물을 조선에 보내주셔서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깨우고, 조선의 국왕을 보필하며, 세계에 조선의 형편과 사정을 알리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헐버트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사표가 되는 인물이고, 우리 민족의 은인이며, 안중근 의사의 말처럼 단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될 조선의 위인이다. 한국의 독립을 열망하며 자신의 목숨을 불태운, 미국인이지만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며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파란 눈의 한국 혼, 호머 B. 헐버트’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헐버트가 다트머스대학 졸업 후에 자신의 신상기록부에 남긴 글을 다시 한 번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치려한다.

나는 천 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웠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 호머 B. 헐버트

참고문헌

단행본
김동진, 파란 눈의 한국 혼 헐버트, 참좋은친구, 2010년
배재학장, 배재 100년사
윤성렬, 도포입고 ABC 갓 쓰고 맨손체조, 학민사, 2004년
조성환, 헨리 G. 아펜젤러 이야기, 그리심, 2011년
헐버트(이현표 옮김), 마법사 엄지, 코러스, 2011년
헐버트(마도경, 문희경 역), 한국사 드라마가 되다 1권, 리베르, 2009년
헐버트(마도경, 문희경 역), 한국사 드라마가 되다 2권, 리베르, 2009년
헐버트(신복룡 역), 대한제국멸망사, 집문장, 1999년

논문 및 기고문
김동진, 금관문화훈장에 빛나는 헐버트의 한국사랑,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개관 6주년 기념 강연회 논문집
헐버트, 뉴욕타임스 기사, 1907년 7월 22일 자
헐버트, 한민족의 기원(The Origin of the Korean People), 한국소식, 1895. 6. 7월호
헐버트, 선교기술(The Science of Missions), 세계선교평론(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890년 7월호
헐버트, 로마가톨릭교 조선 선교 약사(A Sketch of Roman Catholic Movement in Korea), 세계선교평론, 1890년 10월호
헐버트, 뉴욕트리뷴 기고문(School Masters in Korea), 1886년 10월 1일 자
헐버트 중국내륙선교회(The China Inland Mission), 세계선교평론, 1889년 4월호
헐버트, 한국과 종교(Korea and Her Religions), 세계선교평론, 1889년 9월호
헐버트, 한국의 세계적 발명품(Korea Invention), 하퍼스, 1899년 9월호
헐버트, 훈민정음(The Hun-min Chong-eum), 한국평론, 1903년 4월, 5월호
헐버트, 한글 맞춤법 개정(Spelling Reform), 한국평론, 1904년 9월호
헐버트 한국교육을 위한 제언(The Education Needs of Korea), 한국평론, 1904년 10, 11, 12월호
헐버트, 한국어(The Korean language), 한국평론, 1902년 10월호
헐버트, 한국어 로마자 표기(Romanization Again), 한국소식, 1895년 8월호
헐버트, 갑오개혁(Korean Reforms), 한국소식, 1895년 1월호
헐버트, 한글(The Korean Alphabet), 한국소식 1892년 1월호 창간호
헐버트, 이두(The ITU), 한국소식, 1898년 2월, 이두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헐버트 박사 66주기 추모식 팸플릿, 2015년 8월 15일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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