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한인 이민 생활에 대한 종합적 논의
1. 한인들의 하와이 이주(1903~1924)
1902년 12월 22일에 121명의 한인이 하와이 이주를 위해 제물포(인천)에서 갤릭(S.S Gaelic) 호라는 미국 상선에 승선하였다. 당시 미국인 선교사들이 신도들에게 하와이 이주를 권장하였는데, 이에 영향을 받고 하와이 이주를 결심한 사람들이 많았다. 제물포를 떠난 갤릭 호가 일본의 고베(神戸)에 닿자 이곳에서 하와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관계자들은 한인들의 이주 자격을 조사하였는데, 이 조사에서 20명의 한인들이 신체 검사에서 떨어졌다. 이리하여 나머지 101명은 갤릭 호를 타고 1903년1월13일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에 도착하였다. 이 101명 중에는 55명의 남성, 21명의 여성, 그리고 25명의 어린이가 있었다. 처음에 도착한 한인 101명 중에서 8명이 눈에 이상이 있다는 이유로 입국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첫 번째로 하와이에 이주한 한인은 정확하게 말해 93명이었다.
이후부터 한인들의 하와이 이주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1903년4월30일 니폰마루(Nippon Maru) 호를 타고 142명의 한인들과 같이 오던 한인 통역관이 이민국 당국에 계약 노동 관계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났다.
당시에 계약 노동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계약 노동 관계를 인정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 여름이 지나고 이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다시 한인들의 하와이 이주가 진행되어 1905년4월1일까지 지속되었다. 1903년1월13일부터 1905년4월1일까지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의 수는 7,226에 달하였다. 이 한인 이주자7,226명은 6,048명의 성인 남성, 637명의 성인 여성, 그리고 541명의 어린이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하와이에 도착한 7,226명 중에서 479명은 신체 검사에 떨어져 되돌아왔기 때문에 실제로 하와이에 이주한 한인의 수는 6,747명이었다. 그 당시 한인 이민 중에서 약 10%만을 차지하는 여성들은 남편이나 아버지를 따라서 사람들이었다.
1905년 이후에 하와이로 들어온 한인 이민은 많지 않았다. 1905년4월1일 한국의 외무성(Korean Foreign Office)은 한인들의 해외 이주를 금지하였고, 곧 이어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해 감으로써 한인들의 해외 이주는 부활할 수 없었다. 1907년11월부터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발행하는 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포고하였다. 이에 따라 한인이 미국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일본 외무성이 발행하는 여권을 소지하여야 되었다.
하와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생활은 한마디로 비참한 것이었다. 농막이라 하여 긴 판자집을 짓고 노동자들이 생활하였다. 민족에 따라 각기 다른 농막에 거주하기도 하였고, 인종이나 민족의 구별 없이 공동으로 생활하기도 하였다. 새벽에 기상하여 식사하였고, 6시에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점심에 30분만 쉴 수 있었다. 하루 10시간씩 노동을 하였다. 한 줄로 서서 작업을 하였는데, 감독이 뒤에서 감시하였다. 감독은 한인 노동자들이 작업 도중에 옆의 사람과 말 못하게 하였고 담배를 피우지도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는 말을 안 듣는다고 뒤에서 채찍으로 등을 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감독은 노동자들을 마치 노예와 같이 다루었다.
1910년의 센서스에 의하며,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 총수는 4,533명이었다. 1905년 4월1일까지 한인 이민자가 총7,226명이었으므로, 1905~1910년 사이에 약2천 명의 순수한 인구 감소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구 감소는 하와이 한인들 중에 1천여 명이 귀국하였고 또한 1천여 명이 미국 서부 연안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1907년 3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하와이의 일본인과 한인들을 미국 본토로 이주할 수 없게 하는 시행령589호(Executive Order 589)를 발표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하와이 한인들이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 어렵게 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인들의 미국 이주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한인들의 미국 이주는 억제되었다. 단지 주목할 만한 이주는 1910년부터 1924년 사이에 소위 ‘사진 신부(picture brides)’가 미국으로 들어왔다. 사진 신부로 하와이에 도착한 최초의 한인 여성은 최사라(Choi Sara)였는데, 그녀는 1910년11월28일 하와이에 도착하여 이래수의 부인이 되었다. 1910년부터 1924년 사이에 951명의 사진 신부가 하와이로 들어왔고, 115명이 미국 서부 연안으로 들어왔다.
사진 신부의 도착은 한인 이민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사진 신부의 도착으로 가족이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 미국 태생의 한인 세대가 출현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사진 신부들은 그 이전에 도착한 남편들보다 좀더 교육 수준이 높았고, 좀더 계몽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진 신부들은 남편들을 설득하여 플랜테이션 노동을 그만두게 하고 도시로 진출하게 만들었다. 도시로 진출한 한인들은 소규모 사업이나 교역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진 신부들의 연령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남편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그래서 사진 신부에 의하여 맺어진 한인 가정의 이혼율이 대단히 높았다. (크리스천 투데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