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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적 배경에서 본 공생애 이전의 예수

유대적 배경에서 본 공생애 이전의 예수

복음서는 공생에 이전의 예수에 대해서 거의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마가와 요한은 공생애 이전의 예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공생애 이전의 예수를 연구 함에 있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정경 가운데서)는 마태와 누가의 전승 뿐이다. 예수의 생애 33년 가운데서 드러나지 않은 30년 동안의 예수의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생애 이전의 예수의 삶에 대한 책들이 나와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감추어진 예수의 생애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역사적, 성서적 근거가 희박한 것이 사실이며, 학문적 가치가 없다. 많은 문학서들도 이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단순한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공생애 이전의 예수에 대하여 바로 알기 위해서는 1세기 문헌과 유대인들의 관습과 종교, 사상, 문화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며, 그러한 배경에서 복음서 이전의 예수의 삶을 조명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신비에 차있는 공생애 이전의 예수의 삶을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으며, 공생애 동안의 예수의 사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1. 예수의 탄생마굿간(?)에서 태어나시다

누가의 전승은 마리아가 여관에 방이 없었기 때문에 구유에서 해산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말구유”라는 표현 때문에 예수의 탄생 장소가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되어 왔다. 예수는 소나 말이 있고 여물통이 놓여있는 그리고 건초더미가 쌓여있는 그런 마굿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다. 누가는 예수가 마굿간(stable)이 아니라, “구유”(manger)에서 태어나셨다고 전하고 있다(누가복음 2장에 구유라는 표현이 3번 나오나 마굿간이라는 표현은 한번도나오지 않는다). 구유가 있으니까 그곳은 당연히 마굿간이 아니었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추측일 뿐이다. 1세기에는 아직 짐승들을 보호하기 위한 은신처로서의 외양간 같은 건물은 없었다. 예수께서도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서 울타리 정도를 쳐놓은 양우리 같은 곳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면 이 구유가 놓여 있던 곳이 어디인가? 여관 안마당이었다. 예수 당시에는 사람들이 여행할 때 대부분 짐승을 이용하여 짐을 실어날랐다. 그리고 더 여유있는 사람들은 종들도 데리고 갔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 들게 되면, 주인은 방에 들어 묵게 되고, 종들이나 짐승들은 밖에서 밤을 지냈다. 따라서 여관에서 는 그들을 위한 시설을 대부분 안쪽 마당에 마련해 놓았다. 종들은 짐승들의 짐을 풀어주고 그것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리고 짐을 지키면서 잠을 자야 했다. 가난한 사람들도 방에들지 못하고 이곳에서 밤을 지냈다. 물론 이 여관 마당에는 여기저기 많은 구유들과 건초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과 짐승들로 붐볐다.

마리아와 요셉도 여행 가운데 있었다. 여관에 들기를 원했지만, 방을 구할 수가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방에 들지 못하고 종들과 짐승들과 함께 여관 마당에서밤을 지내야 했 던 것이다. 왜냐하면 방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밤을 지내기가장 좋은 장소는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바로 그곳에서 해산하게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구유가 이제 막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눕히기에안성?춤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탄생 하신 곳은 외양간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여관 뜰이었던 것이다. 아기 예수는 짐승들과 그것을 지키는 하인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태어나셨던 것이다.

모든 그림들은 동방박사들이 마굿간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모습을그리고 있으며, 거기에는 한결같이 소와 나귀가 등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사야서에서 발견된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사 1:3). 즉 이 이사야서의 말씀을 메시야의 탄생과 연관짓는 것이다. 밤에 양을 치던 목자들(눅 2:8-20)누가는 한밤 중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사들이 전해준 예수 탄생의소식을 듣고 달려가 아기 예수께 경배했다는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탈무드에 의하면 보통 양들은 광야를 제외하고는 방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광야 지역이 아니었다. 따라서 양을 방목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목자들은 들에서 방목하는 양들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이 목자들은 어떤 목자들이었으며, 그들이 치던 양들은 어떤 양들이었는가? 미쉬나(오랜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전승들을 200년경에 편 한 유대 문헌)에 따르면 일반 양들은 아무곳에서나 방목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성전에 희생제물로 바쳐질 양들만 방목을 하도록 하였다(Baba Qamma 7: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베들레헴에서 기르던 양들은 대부분 성전에 바쳐질 희생제물들이었다(Shekalim 7:4) . 따라서 이 양들은 들에서 방목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목자들이 치던 양들은 바로 희생제물로 바쳐질 특별한 양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드려질 양들을 치는 사람들이었음으로 특별히 성별된 사람들이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목자들은 보통 말하듯이 가난해서 밤에도 양을 돌보아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성별된 목자들이었던 것이다.

  1. 유아 시절의 예수할례를 받다

예수는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그랬듯이 태어난지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받았다(눅 2:21).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기 시작한 것은 이삭때부터였다. 유대인들은 이 할례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믿었다. 새로 태어난 이들은 이 할례를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유대인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할례받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유대 공동체에서 축출하였다. 할례는 난 지 여드레 만에, 즉 안식일을 한번 지나고 난 다음에 행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일찍 할례를 행하도록 한 것은, 할례는 빨리 베풀수록 그 고통이 덜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과 예수께서도 이규정에 따라 난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으셨다. 그러나 유대법은 만일 아이가 아프면 할례를 받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해진 다음에 할례를 베풀도록 하였다(미쉬나, Shabbat 19:5).

한편 할례는 아버지가 베풀도록 하였다. 요셉은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 예수에게 할례를 베풀며 전통에 따라 이렇게 기도를 하였다. “당 신의 계명으로서 우리들을 성결하게 하시고 이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게 함으로 이아이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언약 속으로 들어가게 하심을 찬양하나이다.” 이어서 동네 사람들은 “이 아이가 언약 속으로 들어간 것같이 이 아이로 하여금 토라를 연구하게 하시고 후파(결혼식을 거행하는 야외에 세워놓는 텐트)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시고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탈무드, Shabbat 137b).

명명식

요셉은 갓난 아기에게 할례를 행하고 나서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주었다(눅2:21). 그러나 이 이름은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었다. “예수”라는 이름은 헬라식 표기로서, 예수의 본래 이름은”예슈아”이다. 예슈아라는 이름은 여호수아와 같은 어근으로서, 구원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이름은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다. 나사렛에서 예수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파편에 예슈아라는 이름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다. 사가랴도 요한에게 세례를 주고 나서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어주었다. 성서의 관례는 아기가 태어났을 때 곧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다. 1세기 당시에 할례시에 이름을 지어주는 관례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몇 세기 후에는 그것이 관례가 되었다.

대속제물을 바치다(2:22-23)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지 33일만에 남편과 함께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아이를 대속하기 위하여 “산 비둘기 한 쌍이나 집 비둘기 두마리를” 바치라는 규정에 따라 제물을 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누가는 실수를 하였다. 이 제물은 대속제물이 아니라 정결 예식을 행한 산모가 드리는 희생제물이다. 그러나 누가는 여기에서 대속제물과 산모가 바치는 희생제물을 혼동했던 것이다.

한편 이 첫 아이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대속제물 대신에 속전으로 아무데서나 5세겔을 바칠 수 있었다. 예수의 부모들처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들처럼 맏이를 속량하기 위하여 아기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간예는 구약 성서나 신구약 중간기 문헌, 그리고 랍비 문헌 어디에서도 발견되지않는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예수를 방문하다(2:1-12)

대부분 동방박사들이 예수가 탄생하시던 날 밤에 예수께 경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마태는 동방박사들이 예수께 경배하던 그날 밤에 예수의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을 갔다고 전하고 있다(마 2:12-15). 만일 그들이 예수가 탄생한 날 밤에 예수를 찾아갔다면,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지 33일만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정결 예식을 행하고 대속제 물을 드렸다고 하는 누가의 전승과 상충한다. 따라서 마태와 누가의 전승을 다 받아들인다면, 예수의 정결 예식이다 끝나기까지 동방박사들은 예수를 방문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마태는 동방박사들이 별이 머무른 “집”에 들어가 예수께 경배했다고 전하고 있다(마 2:11). 만일 이 일이 예수가 태어나신 밤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누가의 말구유 전승과 서로 상충된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는 예수가 태어난 곳은 말구유에서였고, 동방박사들은 그 후에 마리아가 산후 조리를 하고 있었던 “집”으로 예수를 찾아갔던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면 몇 명의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경배하기 위하여 왔는가? “동방박사 세사람 귀한 예물 가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따라 왔도다” 대표적인 성탄 송 가운데한 곡이다. 그러나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세사람이었다는 이야기는 성 서에 나오지 않는다. 복음서에는 그들이 몇명이었는지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마 2:2). 대부분 그들이 세명이었다고 믿고 있으나, 어거스틴이나 크리소스톰 같은 이들은 그들이 12명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세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바친 예물이 세가지 종류였다는데서 비롯된것으로 보인다.

동방박사들이 이용한 교통수단은 무엇이었겠는가라고 질문하면 누구나가 자신있게 낙타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들이 무엇을 타고 왔는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들이 낙타를 타고 왔다고 교회에서 가르쳐온 이유는, 이사야서(60:6)에 근거한 것이다. 이사야서에 보면 마지막에 예루살렘이 다시 회복할 때 세계 곳곳에서 많은 민족들이 금과 유향을 싣고 예루살렘에 올라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 때 그들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낙타로 되어있다. 동방박사들도 황금과 유향을 가지고 왔는데, 교회에서는 예수의 탄생 사건과 예루살렘의 회복 사건을 연관시켜서 동방박사들도 낙타를 타고 왔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것을 미드라쉬(Midrash) 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서 해석 방법이다.

한편, 동방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들은 위에서 언급한 황금과 유향 외에도 몰약이 있었다. 학자들 간에는 마태가 동방박사들이 몰약을 예물로 가져왔다는 이야기의 배경을 열왕기상 10장에서 찾기도 한다. 여기에 보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의 이야기를 듣고 그 를 만나기 위해 올 때 향료를 가져왔다. 당시 에스바의 향료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이 몰약이었다. 사실상, 동방박사들이 가져온 예물들은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어울리는 것들이 아니었다. 이 예물들을 각 나라의 특산물로도 볼 수 있으나, 마태가 이 세 가지 예물을 특별히 제시한 것은, 예수의 메시야성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가족이 피신간 곳은?(2:13-15)

예수의 가족이 피신 간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그러나 그들이 이집트의어느 곳 으로 갔는지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집트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자주 피난처로 이용되었다. 1세기 당시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전 세게에 흩어져살고 있었다. 이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이집트에도 많이 살고 있었다. 당시에 이집트에서 가장 큰 도시는 북쪽에 있는 알렉산드리였는데, 인구가 백만이 넘었으며, 삼분의 일 이상이 유대인이었다. 또 한 곳은 나일강 남부에 위치한 엘레판틴이라는 곳으로, 그곳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하며 살고 있었다. 예수의 부모들은 동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피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엘레판틴보다는 알렉산드리아가 더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엘레판틴이 알렉산드리아보다 훨씬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아 대학살?(2:16-18)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메시야의 탄생은 분명히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온 예루살렘 사람들은 메시야의 탄생 소식을 듣고 “당황하였다”(마 2:3). 그 이유는 헤롯이란 인물 때문이었다. 새로운 메시야(왕)의 탄생 소식을 헤롯도 알고있었음으로, 그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할것인지를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예상대로, 헤롯은 자신이 동방박사들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베들레헴 주변의 2살이하의 아이들을다 학살하도록 하였다.

헤롯은 그런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요인들을 300명 이상 학살하였으며, 나중에는 그의 아내와 어머니 세아들까지도 죽였다. 그가 죽을 때에는 이스라엘의 요인들을 다 모아놓고서, 그가 죽는 순간에 그들도 모두 한꺼번에 죽이도록 여동생에게 부탁을 할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유아들이 학살을 당했을까? 1세기 당시의 인구와 연령비율로 미루어 볼 때, 이 때 학살된 아이들은 20여명 남짓했을 것으로추정된다.

  1. 소년 시절의 예수12살되던 해 유월절에 생긴 일(2:41-51)

유대인들은 13세가 되면 “바 미쯔바”(bar mitzbah)를 거쳐 성인이 되며, 이때부터는 “계명의 아들”로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주어진다(미쉬나, Avot 5:21;창세기 랍바 63:14; 미쉬나, Hagigah 1:1). 어떤 주석가들은 예수가 율법을 준수할 나이가 되어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으로 설명을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도 공생애 기간동안에 해마다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이는 유대인(성인 남자)들은 해마다 세차례씩(장 막절, 유월절,오순절) 예루살렘에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23:17; 34:23 이하; 16:16).

누가는 예수가 12살이 되던 해 유월절에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리아와 예수는 율법이 부여하는 의무 때문에 올라간 것이 아니었다. 형편이 닿는 사람들은 예수의 가족처럼 가족이 함께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경우도 많았다(마 27:55-56; 막 15:40-41; 눅23:49; 요 19:25).

예수께서 최초로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부모의 품에 안겨서 성전에 올라가 대속제물을 바친 때였다. 그 후로 이 때 처음 올라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러나 분명한 것은, 소년 예수의 눈에 비친 예루살렘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예루살렘 거리가 온통 사람들로 붐비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요셉푸스는 당시에 300만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고 하나, 이는 과장이고, 당시의 숙박시설이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20만 정도가 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골 나사렛에서 올라온 예수는 20만명이나 모여든 예루살렘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고향 나사렛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처음으로 여기 저기에서 삼엄하게 경계하는 로마 군인들을 대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에게 강한 인상을 준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을 것이다. 나사렛의 작고 단순한 모양의 회당과는 전혀 다른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은 소년예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후에 제자들도 감탄했듯이 예루살렘 성전은 길이가 32 미터, 너비가 11미터, 높이가 16 미터나 되는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었다. 어떤 돌은 하나가 12.5미터x4미터x6미터되는 것도 있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성전을 짓는데 8년이 걸렸으며, 25만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전은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감탄할 수밖에 없는 건물이었다.

유월절이 되면 성전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토라에 대하여 토론도 하고 강론도 하였다. 소년 예수는 그들 틈에 끼어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하였다. 12살의 어린 소년을 율법의 전문가들이 토론에 참여하게 했겠는가에 대하여 의심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가 죽은 다음 태어난 1세기의유대인 역사가 요셉푸스는 자신이 16살이 되었을 때에 제사장들과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그에게 와서 그들의 종파에 대하여 열심히 가르쳤다고 전하고 있다. 물론 요셉푸스는 유명한 집안 출신이었음으로 그를의 종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우리는 토라에 대하여 강론하고 토론하던 사람들이 예수와 같은 소년들에게도 호감을 갖고 묻기도 하고 그들이 묻는것을 대답 해주기도 하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린소년이라고 해서 토론에서 배제했다고 볼 수는 없다.

누가는 예수를 토론에 환영한 “선생”들이 어느 종파에 속하는 사람이었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율법에 대하여 강론하고 토론하던 “선생”들이 반드시바리새인이나 랍비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당시의 유력한 종파였던 사두개인이나 엣세네파 선생들일 수도 있고 열심당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바리새파에 속하는 선생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선생”들은 직업적인 율법 전문가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토라에 전문가들이긴 했지만,가르치는 일을 생업으로 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랍비라고 할지라도 생업은 따로 갖고 있었다.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로 소득을 얻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소년 예수는 이 때에 바리새인들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생애 동안에 바리새인들에게 보인 반감이 이 때부터 싹텄을 것이라고 보기는어렵다. 확실한 것은, 이 때 소년 예수는 토라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에 처음 접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흘 후에 예수의 부모들이 예수를 성전에서 만났을 때에 예수는 “내 아버지 집에 내가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라고 반문하였는데, “내 아버집 집”이라고 하는 전문 용어도 아마 이 때 “선생”들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예수의 부모는 명절을 마치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하는데, 유월절만을 마치고 내려갔다는 것인지, 아니면 무교절 행사까지 다 마치고 내려갔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이 두 절기 는 본래 따로 지켜져왔었으나, 예수 당시에는 이 두절기를 1주일 동안에 같이 지켰다. 아마도 예수가 남아서 율법학자들과 토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유월절 행사만을 마치고 일찍 내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바 미쯔바(Bar Mitzbah)예수는 13살이 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 의식 가운데하나를 행하 셨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바 미쯔바라고 부르는데, 성년이되는 의식이다. 유대인 남자들은 이 의식을 거쳐서 “계명의 아들” 또는 “토라의아들”이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게 된다. 오늘 날도 이 의식은 할례와 더불어 가장 중요시되는 의식 가운데 하나이다. 이 의식을 거치기 위해서 아이들은 몇 달 동안에 걸쳐 중요한 성경 구절들을 암송하고 기도문들을 외우고 하면서 준비를 하게 된다. 그리고 회당에서 처음으로 기도 숄(shawl, 이를 tallith라고 부른다)을 걸치고 안식일을 준수하게 된다. 바 미쯔바를 행함으로 그는 정식으로 회당의 일원이 되며, 성경을 낭독할수도 있고, 기도를 할 수도 있게 된다. 모든 유대인들이 그렇듯이 예수도13살이 되는 안식일에 행해진 이 미쯔바 의식은 오랜동안 마음 속에 잊혀지지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1. 예수의 가정 환경 예수의 식구

복음서는 공생애 이전의 예수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예수의 공생애 이전의 숨겨진 삶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나오는 기록들을 통해서 예수의 성장 과정과 가정 형편을 알수가 있다. 성경에는 종종 예수의 동생들과 누이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예수의 형제가 몇 명이었는지는 모른다. 학자들은 적어도 4명의남동생들과 2명의 누이 동생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예수의 가족은 9명이 넘는 셈이다.

경제적 형편

아버지 요셉이 목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목수라고 하는 직업은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부자가 될 수도 없는 직업이었다. 요셉은 목수 일을해서 9명이 넘는 가족의 생계를 근근히 유지해 나가야 했다. 마리아는 정결 예식을 위한 제물로 비둘기 한 쌍을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레위기의 제사법에보면 원래는 어린 양을 바쳐야 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양을 바치지 못하고 비둘기로 바쳤다. 비둘기 두 마리는 양을 바칠 힘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제물이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고 했다. 물론 이 구절은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가난하게 사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유하게 사셨다면, 이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가난하게 사셨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자라셨다.

조실 부

복음서에는 요셉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바울 서신에는 전혀 요셉이나 마리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복음서 가운데서도 예수의 탄생스토리 이외에서는 예수님이 12살 때, 예수를 데리고 아버지 요셉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었다는 기록밖에 나오지 않는다. 예수의 공생에 기간동안 여러차례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를 찾아갔었는데, 그 때도 예수의 어머니와 남동생들과 여동생들만이 그를 찾아갔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동 안에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3번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 때 온 가족이 다 함께 올라갔는데도, 요셉의 이름은 한번도 거론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일찍 죽은 것 같다. 그 시기는 빠르면 예수가 12살 되던 해가 될 수도 있고, 늦어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이 될 것이다.

가장 예수일찍 아버지를 여윈 예수께서는 장남으로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목수일을 하면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의무였다. 탈무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자식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과같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의 유명한 랍비들도 모두가 다 한결같이 직업을 갖고 있었다. 랍비의 대부라 할 수 있는 힐렐도 나무를 자르는 일을 했으며, 바울도 유명한 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텐트만드는 기술을 익혔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통해 목수일을 배웠을것임에 틀림없다. 그 당시의 목수는 오늘날의 석수와 비슷한 일을 했다.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만드는 일보다는 돌을 캐고, 쪼개고, 다듬고, 그것을 옮기고, 그것으로 집을 짓고 하는 그런 일을 주로 했다. 대부분의 예수의 초상화들은 남성미보다는 여성다움을 더 많이 느끼게 해주는데, 이러한 그림들은 석수였던 예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갖게 해 주기 쉽다.

평범한 삶

공생애 이전에 예수는 결코 비범한 삶을 살지 않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복음가공생에 이전의 예수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일 것 이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행하신 “처음”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외경에서는 어린 시절의 예수께서 마술과 같은 기적들을 많이 행했다고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신뢰성이 없다!) 어린 시절 예수는 동네 어른들에 게 이웃집 아이였으며, 또래들에게는 친구였다. 청년이 된 예수는 동네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였을 것이다.

  1. 공생애 이전의 예수의 경건 생활

예수의 부모는 경건한 유대인들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였다. 율법에 따라 할례도 베풀고, 정결 예식도 거행하고, 대속제물도 바쳤다. 유월절이 되면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월절을 지키기도하였다. 이러한 경건한 가정에서 예수는 신앙을 배우면서 자랐던 것이다.

1) 메주자, 옷 술

예수께서 살던 집의 문설주에는 메주자(mezuza)가 붙어있었다. 예수는 집을 나가고 들어 올 때마다 이 메주자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주는 오직 한분 뿐이시다”(신6:4). 예수께서도 세 살이 지나고부터는 그의 부모와 다른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겉옷 자락 네 귀퉁이에 술이 달린 옷을 입으셨을 것임에 틀림없다(신 22:12).

2) 안식일 준수, 회당 출입

예수는 부모들과 함께 금요일 해가 떨어질 때부터 가정에서 안식일을 지켰다.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기신 일은 한번도 없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에 관한 논쟁을하기는 하셨지만, 안식일 법규를 어기신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유대의 랍비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 39가지를 규정하였는데 (미쉬나, Shabbat.7:2) , 예수는 이 모든 규정들을 다 지키셨던 것이다. 토요일이 되면 예수는 부모들 손을 잡고 회당에 갔다.

회당은 성전과는 다르다. 성전은 예루살렘 한곳에 있지만, 회당은 5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 는 어느 곳에나 있었다. 이곳은 성전과 그 기능이 달랐다. 회당은 기도를 하는 곳이며,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곳이었다. 희생제사를 드리는 성전과는 달랐다.이곳에는 특별히 책임을 맡은 성직자가 없었다. 누구나가 다 예배와 성경 공부를 인도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기도를 하였다.

예수께서도 나사렛 동네에 있는 회당을 다니면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던 것이다. 우리는 나사렛 동네의 회당에 들어가서 예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펼쳐 읽으시고 그것을 해석한 것을 잘 알고있다(눅 4:16-22).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신 나사렛에 가셔서 늘 하시던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셨다”(눅 4:16).

3) 쉐마 암송

그는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처럼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한번씩 두차레에 걸쳐”쉐마”를 암 송하였다(쉐마는 “들으라”는 뜻으로 신명기 6장 4-9절의 말씀을뜻한다. 미쉬나, Berakhot 1;1-4; 4:1-7).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장 중요한게명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고 “쉐마”의말씀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답하셨던 것이다.

4) 기도

유대인들은 무엇을 하든지간에 감사를 드리는 기도문이 있었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기도문에 따라 기도를 드리셨을 것이다. 그리고 경건한 유대인들은 미쉬나가 규정하는대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였다(Berakhot 4:3).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하루에 두 번씩 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성전에 올라가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가정에서 드리는 기도였다. 성전은 오늘날 기독교적인 개념의 예배나 기도 또는 성경공부를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기도의 장소는 가정이었다. 성전에서 제사가 드려지는 아침 시간과 저녁 시간에 맞추어 예수께서도 기도했을 것이다.

5) 성경

예수는 성경에 능하셨다. 그것은 안식일마다 회당을 출입하면서 성경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613개의 율법 가운데 마지막은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든지 쓸 줄 는 사람은 토라를 써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신 31:19). 이스라엘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율법을 시내 산에서 받고 있는 것처럼 여기며 율법책을복사하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예수께서도 성경에 능통하셨던 것으로 보아 그의집에 전체 성경 사본을 갖고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성경을 열심히 읽으셨음에 틀림없다.

예수께서 자주 인용하신 성경들은 맛소라 본문이었던 것으로 보아, 예수의 성경은 70인역(헬라어 성경)이 아니라 히브리어로 된 성경이었음에 분명하다(참조. 마 5:18; 눅 16:17). 사해사본의 발굴에 따라, 1세기 당시에 성서의 사본을 소유한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사렛 같은 시골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서를 읽을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 사본이 그렇게 비싸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를 필사하는데 는 3일정도 걸렸다. 다시 말하면 이사야 두루말이 사본을 구입하는데는 사흘치 임금정도를 지불하면 되었던 것이다. 물론 구약 성서 사본전체를 소유하려면 그래도 비용이 들었겠지만, 신앙이 독실한 사람들은 모든 구약성서의 사본들을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늘 읽었을 것이다.

유대의 경건한 부모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가르쳤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의무가 주어져있으나(탈무드, Kiddushin 29a), 어느 정도 자란 다음에는 아버지가 성경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아버지는 자신이 직접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자녀에게 율법을 가르쳐야 했다(탈 무드 Sanhedrin 99b). 예수는 다른 경건한 집안의 아이들처럼 말을 배울 때 먼저 기도문이나 의식문들에 나오는 성경 구절들을 배웠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기도문이나 현인들의 가르침을 배우게 했을 것이다.

6) 신앙 교육

한편, 다섯 살이나 여섯 살이 되면 학교에서 정규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선생은 대개가 회당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들이었다. 학교에서 열살 때까지는성서만을 배웠다. 열 살부터 열 다섯 살까지는 미쉬나를 배웠고, 그 이후로는 신학적인 것을 배웠다. 성경은 레위기부터 배웠다. 그 다음에 오경과 예언서, 성문서를 차례로 배웠다. 그리고 탈무드는 15살 이상의 아이들에게만 가르쳤다. 나사렛에도 이런 교육 기관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나사렛에도 이런 교육 기관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에수께서도 이곳을 통하여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7) 절기 준수

유대인 성인 남자(13세 이상)라면 누구나가 다 일년에 세차레(유월절, 오순절,장막절)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나가야 했다(미쉬나 Avot 5:21, Hagigah1:1). 예수의 공생에 기간동안에도 예수께서는 한번도 거르지 아니하시고 유월절마다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다(요 2:13, 7:10, 12:12). 누가는 12살 때에 부모를 따라 예수께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눅 2:41-51). 장막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도 복음서에 나와있다. 이처럼 예수는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사셨다.

(이진희, 월간「기독교사상」97.10월호 대한기독교서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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