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과 웨슬리 회심의 자리 올더스게이트(Oldersgate Street)
세계적 글로벌 도시, 런던
런던(London)은 잉글랜드와 영국의 수도로서 템즈강을 중심으로 2,000여년동안 발전해 온 도시다.
로마의 율리어스 시저가 지금의 영국인 브리타니아를 정복할 때는 켈트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 후 로마인들이 론디니움이란 요새를 지은 것이 런던의 기원의 되었다.
‘모든 것이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었듯이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수도로서 런던은 지금도 세계적인 글로벌 도시다. 예술, 경제, 패션, 엔터테인먼트, 금융, 의료, 매체, 전문산업, 연구와 개발산업, 관광, 교통 등 거의 모든 부문에 있어 세계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가 런던이다. 런던은 세계의 문화수도라고 할 수 있다.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요 세계 최대의 여객 수송량을 자랑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런던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대학을 보유하고 있는 도시로도 유명하다. 무려 43개의 대학이 있다. 또 1908년, 1948년, 2012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현대 도시 중 최초로 세 번의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도시가 되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면서 런던 안에는 무려 300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2011년 기준으로 그레이터 런던 광역시의 인구는 2,100만, 1800년대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런던에는 런던 탑, 웨스트민스터 사원, 세인트 마가렛 성당, 그리니치 천문대 등이 있고 총 네 개의 세계유산을 갖고 있다. 유명한 랜드마크로는 버킹엄 궁전, 런던아이, 피커딜리 서커스, 세인트 폴 대성당, 타워 브릿지, 빅 벤, 트라팔가 광장 등이 있고 수많은 박물관, 갤러리들이 있다. 런던 지하철은 세계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철도망으로 유명하다.
요한 웨슬 리가 회심을 경험한 ‘올더스게이트’
영국을 변화시킨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카르투지오 수도회가 런던에 세운 차터하우스 스쿨(Charter House School)에서 수련을 쌓았다. ‘차터하우스’는 ‘특별히 허가된 기관’이라는 뜻의 ‘카르투지오(Carthusian)’란 프랑스어로 된 수도원 명칭에서 유래됐다. 수도사들은 1349년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웨슬리가 이 차터하우스 스쿨에 다닌 것은 그의 나이 11세인 1714년부터 1720년까지로 6년간이었다. 이곳에서 엄격한 신앙훈련과 함께 도제교육을 받았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을 거쳐 미국 조지아주의 선교사로 활약하다 귀국한 후 1738년 5월 24일 런던의 올더스게잇(Oldersgate)에서의 회심 체험은 다메섹 도상에서 있었던 바울의 체험이나 밀란의 정원에서 있었던 어거스틴의 회심과 동일하게 해석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래서 감리교 내지는 웨슬리언 교회들은 5월 24일을 웨슬리 회심기념일로 정하고 이 회심기념일을 전후한 주일을 회심기념주일로 지키고 있다.
‘회심(Conversion)’이란 우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변형의 역사로 볼 수 있으며, 문자 그대로 말한다면, ‘우리를 돌아서게 하는 것’이다.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 목사인 사무엘 웨슬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은 웹워쓰. 영국에서 웨슬리와 가장 많이 관련이 있는 도시 셋을 꼽으라면 우선 공부하고 가르쳤던 옥스퍼드, 회심을 경험한 런던, 그리고 회심 후 목회중심이었던 브리스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때 당시에도 명문이었고 지금도 명문인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 옥스퍼드에서 웨슬리가 학창시절을 보냈던 곳이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라면, 링컨칼리지는 그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더 깊은 학문적 연구와 성숙한 신앙으로 몰입해 들어갔던 곳이다. 링컨 칼리지에서 웨슬리는 교수직의 일종인 펠로우(Fellow)로 임명되었다.
웨슬리는 1735년 32세의 나이로 미국의 조지아 주 선교사로 나간 적이 있다. 2년 만인 1737년 12월 22일 귀국했는데 2년 동안의 그의 조지아 주 선교사역은 한마디로 실패였다. 그 실패로 인해 깊은 실의와 자책감에 빠져 있었다.
그 후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런던 올더스게잇 거리(Oldersgate Street)에 있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에 참석을 하였는데 이 때 예배를 집례 하는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을 때에 그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웨슬리는 이때에 비로소 완전한 구원과 성령이 내주하시는 체험을 하였다. 그는 일기에서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다. 유일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을 경험했으며 그가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지금 런던에 가면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웨슬리의 거듭남을 체험한 집회 장소는 남아있지 않고 웨슬리 탄생 300주년을 맞아 세워진 불꽃모양 동판이 런던 박물관 옆에 세워져 있다.
회심당일의 일기를 적은 커다란 불꽃 모양의 동판이 서 있는 그곳을 회심장소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영국학자들의 주장이고 미국 학자들은 회심의 장소에 이견을 갖고 있다. 영국학자들은 현재의 런던 박물관 옆을 주장하는 반면 미국 학자들은 거기서 30m 정도 떨어진 곳을 주장한다. 그래서 1926년에 미국 드류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회심장소를 기념하는 명판을 설치해 놓았다. 필자는 지난 2004년 미주 웨슬리언 협의회 주관 제1차 유럽 종교개혁 발상지 학습여행 때 방문단 60명과 함께 이 박물관 옆 ‘불꽃동판’을 찾아 기념촬영을 한 적이 있다. 이번 제2차 여행중에도 이 불꽃동판, 그러니까 웨슬리의 회심장소는 그냥 스쳐갈 수 없는 우리들 학습여행의 단골코스로 자리 잡았다.
회심한 지 얼마 후 웨슬리는 홀리 클럽 동료인 조지 휫필드의 부탁을 받고 브리스톨 근교 킹스우드에서 첫 옥외 설교를 시작했다. 엄격하고 전통적인 성공회 예배 환경에서 성장하여 사제가 된 웨슬리에게 옥외 설교는 낯설고 어색했다. 그는 또 일기에서 “나는 낯선 설교 방식 때문에 처음에는 좀 어색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옥외 설교가 성경적인 방식이라는 사실을 확신한 웨슬리는 주저하지 않고 모여드는 군중을 향해 담대하게 설교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통회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그의 옥외설교는 소문이 나서 주일 아침에는 무려 5∼6000여명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웨슬리 회심의 해인 1739년 영국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혁명적 전환기에 사회적 동요와 불안이 성행했고 풍기가 문란했다. 빈부의 불균형, 노동시장에서의 아동학대, 빈민 주거지의 열악한 생활환경, 비인간적인 공장노동조건, 불합리한 교도소 관행, 참담한 아프리카 흑인노예 매매 등이 사회를 어둠으로 몰아갔다.
암울했던 18세기 영국 사회는 물론 세계의 기독교 역사를 바꾼 웨슬리의 감리교 부흥운동은 이런 사회 환경을 배경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1738년 5월 24일 회심 사건 이후 1791년 3월 2일 웨슬리가 죽을 때까지 53년 동안 웨슬리는 영국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세계는 나의 교구다(World is My Parish)” 라고 외치며 복음을 증거 했고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특히 빈민 선교와 감옥 선교 등에 주력하여 호응을 얻었다.
[조명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