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일은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독일의 비텐베르그에서 당시 교권의 타락과 부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전통과 관습으로 일관된 중세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신앙개혁 운동을 일으킨 날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나며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루터의 종교개혁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Back to the Scripture)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는 늘 새롭게 개혁 (Reformation)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이 날을 기념하는 이유 또한 과거의 인본주의 신앙의 잘못된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부흥과 회개(Revival and Repent), 갱신과 회복(Renewal and Recover)의 기회로 삼자는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종교개혁은 변질된 신앙과 교회로부터 성경본래 기독교로의 회복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일 보름(Worms)시에 있는 종교개혁자 상(중앙 마틴루터 왼쪽 프레드릭 4세) 로마 천주교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되었을 때 황제 찰스 5세도 루터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1521년 보름스(Worms)국회에서 이런 황제의 선언 속에서 그는 마지막 최후 진술을 합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Here I stand, help me God!: Ich stehe hier, helfe mir Amen” — Worms, Germany
특별히 오늘을 사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루터의 종교개혁은 4가지 현대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권위와 예전의 회복(The Authority of Scripture and Liturgy)입니다.
성경 최초의 개혁사건이었던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은 성전수리중 발견된 모세의 율법에서 시작했습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며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이 갖는 가장 우선적인 의미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교회가 정경을 결정하기에 교회권위가 성경권위보다 우선한다”는 논리에 맞서서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전통보다 우선이며 오직 성경위에 신앙의 표준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관한 바른 인식을 갖고 사제들만이 아니라 함께 만인들이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개방시킨 것이 종교개혁의 근본의도요 내용이었습니다. 특별히 종교개혁가들은 카톨릭 예전에 대하여 3가지(A-C)중요한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a. 중세의 예배에 대한 신학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반복 혹은 재현으로 보는 경향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로마 가톨릭 미사에서는 성찬 성례전을 미사의 절대적인 구심점으로 진행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카톨릭 교회의 예배신학에 종교개혁가들은 기독교 예배는 원래부터 말씀의 예전과 성찬 예전이 두 축이 되어 있었기에 모두가 동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b. 가톨릭 교회가 지켜온 화체설입니다. 이것은 봉헌된 성물(Bread and Cup)을 앞에 두고 성령임재를 위한 기도(Epiclesis)를 드리면 성물이 거룩한 변화를 일으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입니다. 그 당시 화체설의 영향을 받은 교인들은 성찬을 받는 사람들의 믿음이 없이도 집례한 성물을 보기만 해도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c. 개혁자들은 말씀의 선포인 설교의 위치를 초대 교회부터 가지고 있던 본래 위치로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말씀회복을 위하여 성경이 라틴어로만 고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져야 하고 설교가 회중들의 언어로 전달되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실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루터에 이어 칼빈과 쯔빙글리, 요한웨슬리와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카톨릭 교회안의 균형을 잃어버린 예전의 회복을 위해 말씀선포에 무게를 두고 성찬에 있어서 성체공재설(Consubstantiation), 영적임재설(Spiritual presence)을 가르치고 회중중심의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특별히 우리가 먹는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믿는 카톨릭의 화체설과는 비교적으로 마틴루터는 천주교교리에 대하여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며 예수님의 육체가 빵 속에 있고 예수님의 피가 포도주 속에 있는 것이지 빵과 포도주가 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후에 쯔빙글리와 요한 웨슬리는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하는 것이지 빵과 포도주의 본체가 변화된 것이 아니라는 영적임재설(Spiritual Presence)을 믿게 됩니다.
요한 웨슬리는 성찬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죄를 거부하고 그의 형상대로 우리의 영혼을 재생시키도록 돕기 위하여 그의 은총을 보내주는 방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예전의식과 제도에 신학을 반영함으로 종교개혁이후 예전의식과 더불어 예배당양식에도 변화가 오게 됩니다. 특별히 개신교 예배당에서는 강단이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고 성찬대는 그 밑에 두게 됩니다. 의식중심에서 말씀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람(Leader)의 회복입니다.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시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힐기야는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성경에 먼지가 쌓이도록 하였고 요시야는 성경을 찾아 백성들로 하여금 읽게 하였습니다. 한 지도자의 나태로 말미암아 전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살았고 다른 한 지도자의 의식있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전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였습니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은 ‘교회개혁’이란 말이 더 정확하다고 말할 정도로 종교개혁자들의 가장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교회 변질의 시작은 ‘섬김과 봉사의 직분’이 ‘종교적인 권위주의’로 계급화되면서 변질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회복은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즉 교황(인간)이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할 수 없고 사람이 영광 받아야 할 대상일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행위로 얻어지는 공로의 결과라는 변질된 구원관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재확인 한 것이 교회개혁운동이 가져온 신학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평신도사역의 재발견입니다. 마틴루터가 만인사제설을 주장했듯이 평신도의 전문성을 활용하고 그들의 역할을 다시 조명하고 발견하여 평신도를 사역의 동역자로 동력화 하고 세워나간 것입니다.
▲독일 보름(Worms)시의 마틴루터 기념교회당 정문에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고 기록
셋째는 선교적 사명(Mission)의 회복입니다.
1999년 10월 31일에 로마 카톨릭교회는 16세기와는 다르게 마틴루터의 “Sola Fide”(오직 믿음으로만) 사상을 수용하면서 루터교회와 공동으로 “칭의론(Justification)에 대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을 함께 고백한다. 이 구원은 그 죄인에게 세례 가운데서 성령에 의해 그의 전 그리스도교적 삶의 기반으로서 주어진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안에 포괄되어 있는 곧 의롭게 하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신뢰한다. 이 의롭게 하는 믿음이 사랑 안에서 역사한다. 따라서 행위없는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인간 안에서 믿음의 자유로운 선물에 앞서가고 뒤따르는 모든 것은 칭의에 대한 근거가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칭의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아예 공로를 치루고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로가 아닌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하면서도 믿음은 사랑 안에서 역사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행함 없는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음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 당시 카톨릭교회는 하나님을 교회 안에 가두어 두고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속의 빛과 소금의 공동체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지역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을 포기한다면 교회로서의 존재의미와 목적을 잃게 됩니다. 18세기 부패한 영국사회가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감리교의 창시자이요 영국의 종교개혁가였던 요한웨슬리의 칭의와 성화사상에 근거한 구제와 사회개혁운동, 전도와 선교운동이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칼빈(Calvin)은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했을 때 격리된 수도원에서의 삶이 아니라 이 세상가운데 악과 불의에 맞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것이 진정한 거룩임을 일깨워 준다고 말했습니다. ‘유럽의 양심’이라고 불린 성 버나드(St. Bernard)는 교회나 성직자가 부를 통제할 신앙적인 자제력이 없으면 차라리 가난해지는 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부는 분배되어야지만 부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분배되지 않는 물질은 ‘소유의 본질’을 상실한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중세말기 성직자의 타락가운데 나온 경구중의 하나가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Vita Clerici est evangeliuum laice)’이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은 성과 속의 이원론적인 구분이나 성직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길이라는 잘못된 가치를 바로 잡아준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이신칭의 사상(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사상, 롬1:17)에 근거한 사회개혁의 전제이면서 동시에 완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의미는 교리의 전통과 신조의 권위만을 주장하는 교권주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문을 열어가야 한다는 선교적인 사명의 회복인 것입니다.
넷째는 본질(Essence)의 회복입니다.
중세의 교회는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정치와 권력, 재력을 통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본질적인 사명을 잃어버리고 교권주의와 물량주의에 빠져 자기의 권력만을 확장하는 일에 몰두하였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그런 부패한 교회를 향하여 교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당시에 면죄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면죄부 사건이란 카톨릭 교회의 교황 레오10세가 자기 당대의 사업으로서 베드로 대성당을 완공할 계획을 세우고 당시 엄청난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그 모금방법으로 고안해낸 것이 바로 면죄부입니다. 알베르트(Albert of Brandenburg. 1490-1545)라는 사람은 당시 이 면죄부의 판매를 청부 맡아서 그 이익금을 교황과 반분하기로 하고 유명한 웅변가 테첼(Tetzel, Johann.1450-1519)을 고용하여 그에게 신학박사의 학위를 주고 가는 곳마다 면죄부에 대하여 설교 아닌 웅변을 하게 하였고 이 유창한 웅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웅변에 속아서 너도나도 거금을 들여서 면죄부를 사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타락상을 목도한 마틴 루터는 당시 천주교의 잘못된 관행을 95개 조항을 만들어 성당벽에 붙이고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를 계기로 개신교(항거하는 자, Protestant) 즉 지금의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자신의 명예와 권력, 기득권을 유지, 보존키 위해 이전투구에 참여하는 지배적 소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회복을 위해 땀 흘리는 창조적인 소수, 이 땅에서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운 때입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모든 일에는 사랑을’의 요한 웨슬레는 말년에 감리교단의 존폐여부보다는 감리교의 정신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종교개혁이 가지는 현대적인 의미는 바로 이 시대의 교회가 물량주의와 교권주의, 형식주의와 탈사회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교회본연의 본질에서 크게 이탈된 모습에 대한 경종으로서 개교회주의의 이기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에큐메니칼 교회로서의 ‘선교적인 사명과 책임의 회복’, 성례전에 대한 의미의 중요성과 더불어 잃어버렸던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 즉 ‘말씀의 회복’, 물량주의와 교권주의에서 벗어나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구원함을 얻는다는 사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Soli Deo Gloria) ‘본질의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UMC 메릴랜드 하늘비전교회, 장재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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