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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마커스 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

 

 

 

 

 

예루살렘은 단순히 하나의 도시가 아니었다. 1세기까지 예루살렘은 천 년 동안 유대인들의 거룩한 땅의 중심지였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기원전 900년경에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했다. 그 성전은 유대 세계의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성전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학에서 볼 때 그 성전은 이 세상을 그의 근원인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그리고 이곳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이 거하는 장소였다. 성전은 단지 하나님의 임재뿐만 아니라 그의 용서를 매개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은 부정적인 연상들과 결합되기도 했다. 다윗 왕이 죽은 후 50년도 안 되어 예루살렘은 “권위적 지배체제”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성서 전체를 통해 흐르는 충돌과 특히 예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서 잠시 그 개념을 설명하고자 한다.

1. 정치적 억압 : 그런 사회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강력하고 부유한 소수의 엘리트들, 즉 군주, 귀족, 특권계급, 그리고 이들의 제휴에 의해 지배되었다.

2. 경제적 착취 : 산업화 이전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부의 가장 주요한 수단이 농산물이었는데 그 부의 대부분은 권력자와 부자에게 돌아갔다.

3. 종교적 정당화 : 고대 사회에서는 이 체제들이 종교적인 언어를 가지고 정당화되었다. 종교는 왕은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다스리며, 왕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사회질서는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며, 권력은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다고 가르쳤다.

이런 사회형태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부유한 소수에 의한 군주적이고 귀족주의적인 통치는 약 오천 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고대 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사회제도였다. 이런 의미에서 “권위적인 지배체제”는 비정상적이 아니라 정상적이며 따라서 그런 사회체제는 “문명화의 정상적인 상태”라고 불릴 수도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런 체제의 등장으로 다시 돌아가자. 다윗의 아들이자 그의 후계자인 솔로몬이 다스릴 때 권력과 부는 점점 더 예루살렘에 집중되었다. 결국 솔로몬은 새로운 바로가 되었으며 이집트가 이스라엘에서 다시 탄생되었다.

예루살렘과 관련된 부정적인 연상들은 특히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난다. 기원전 8세기의 선지자였던 미가를 예로 들어보자. 미가는 유다의 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는 놀랍게도 “그것은 예루살렘이 아니냐?”(미 1:5)라는 수사학적 물음의 형태로 대답한다. 같은 세기에 활동했던 선지자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통치자들을 “소돔의 관원들”이라고 고발하며 그 백성들을 “고모라의 백성들”이라고 고발했다(사 1;10).

그렇지만 그 성을 그렇게 신랄하게 고발한 선지자들에게도 예루살렘은 또한 하나님의 도시와 희망의 도시라는 긍정적인 연상으로 남아 있기도 했다. 구약성서의 가장 유명한 구절들 중 하나에서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전 세계에 공의를 가르치는 중심지로 묘사한다(사 2:2-4). 그러나 미가는 평화의 세계를 약속하는 구절 뒤에 다음과 같은 말을 추가한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미 4:4). 이런 일들은 정의와 번영과 안전의 상징이다. 더 이상 두려움이 없을 정의와 평화의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올 것인데 그 하나님의 거처가 바로 예루살렘이다.

– 예수 이전의 예루살렘 –

선지자들이 희망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고 그들이 경고했던 일이 일어났다. 일 년여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예루살렘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정복되었다. 약 50년의 포로생활 후에 유대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용되었다. 500년대 후반기에, 즉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후 수십 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성전을 재건했다. 에루살렘을 수도로 한 유대는 수세기 동안 이방의 제국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페르시아 제국과 그 뒤의 희랍제국이 지배할 때는 예루살렘 성전이 유대의 지방정부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대제사장과 성전의 관리들이 결국 유대인들을 통치했다. 물론 그들이 제국의 상급 군주들엑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런 사정은 유대인들이 기워전 164년경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희랍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기원전 2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마카베오 일가에 의해 주도된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유대 왕조를 멸망시킨 후 로마제국은 우선 대제사장과 성전과 성전을 중심으로 한 현지의 귀족사회를 통해 다스렸다. 하지만 로마가 유대 지방을 통치한 지 수십 년 후에 유대의 귀족사회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그래서 로마는 유대교로 개종한 지 얼마 안 되는 이두메사람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했다. 헤롯은 기원전 4년까지 오랫동안 통치했으며 드디어 헤롯 대왕으로 역사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부와 권력을 가진 옛 귀족들을 제거하고 그들 대신 자기에게 충성하는 신진 엘리트들을 기용했다. 그는 또한 대제사장의 궈한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유대교의 율법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종신직이었지만 헤롯은 33년의 제위기간 중에 7명의 대제사장을 교체시켰다.

그는 성전을 다시 지었다. 헤롯은 포로기 후에 지어진 소박한 성전을 기원전 1세기의 20년대에 리모델링하기 시작했지만 결국은 대리석과 황금을 사용하여 우아하게 장식된 기둥들과 넓은 뜰로 둘러싸인 새로운 성전이 건축되었다. 헤롯은 자기를 위해 궁전을 지었는데 그 궁전은 후에 빌라도를 포함한 로마 총독들이 예루살렘에 머물 때 그들의 관저가 되었다. 그는 유대의 지중해 해안 지역인 가이사랴 마리티마에 거대한 전천후 항구를 건설했는데, 이 항구는 후에 유대에 있는 로마 행정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도시의 이름은 율리우스 옥타비아누스 캐사르의 이름을 따라 “가이사랴”로 지어졌으며, 항구의 이름은 아우구스투스(그리스어로는 세바스토스)의 이름을 다라 지어졌다. 이 모든 것을 위해 어머어마한 돈이 들었다. 그의 건축계획들과 사치스런 생활방식 때문에 지출되는 돈 이외에도 그는 해마다 공물을 거두어 로마에 보내야 했다. 그의 수입원은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들에서 통치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수단들이었다. 즉 농지의 소유권, 세금, 그가 혜택을 베풀어준 부자들로부터의 착취 등이었다.

비록 역사적으로는 “헤롯 대왕”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는 많은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실제로 기원전 4년에 그가 죽었을 때는 왕국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상황이 대단히 심각하였기 때문에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시리아에서 로마의 군대들이 파견되어야 했다. 갈릴리에서는 로마인들이 나사렛에서 4마일이 떨어진 세보리란 도시를 불태우고 파괴하였으며 많은 생존자들을 노예로 팔았다. 예루살렘이 탈환된 후 로마인들은 그 도시의 수비대원들을 한꺼번에 2천 명이나 십자가에 처형시켰다.

헤롯은 유대 땅 전체를 통치했다. 그가 죽은 후 로마는 그의 왕국을 세 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을 그의 아들들이 다스리도록 했다. 갈릴리와 요단 강 건너편의 페라아는 헤롯 안티파스, 요단 북동쪽 지역은 헤롯 필립, 그리고 유대와 사마리아는 헤롯 아르케라우스에게 할당되었다. 그러나 기원후 6년에 로마는 아르케라우스를 폐위시키고 대신 그의 지역을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들이 다스리게 했다.

– 1세기의 예루살렘 –

주후 6년에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폐위된 아르케라우스 대신 지역을 다스리는 역할은 성전과 성전 관원들에게 맡겨졌다. 성전은 지역 행정조직의 중심지로서 헤롯의 역할을 대신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체제는 소수에 의한 지배, 경제적 착취, 그리고 종교적 정당화라는 고대의 지배체계들이 가지는 명확한 특징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이중의 지배체제였다. 즉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체제는 로마제국의 지배체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경제적 사정에 있어서 성전 관리인들은 그들이 사제이건 아니면 일반인이건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근대 이전 세계에서 부는 토지의 소유와 토지에서 생산된 농업 생산물에 의존하기 때문에 성전 관리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대지주였다. 심지어는 많은 대제사장 가문들도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유대교의 율법은 제사장들의 토지소유를 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토지를 확장하기 위해 부자들은 – 그들이 일반인이건 아니면 제사장들이건 – 유대교의 성경에 있는 토지에 관한 법률을 뜯어 고쳐야 했다. 이 법률들 가운데 농지의 매매를 금지하는 법이 있었다. 따라서 남의 땅을 자기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는 강제로 빼앗는 방법밖에 없었다. 남의 땅을 강제로 빼앗는 는 경우는 적어도 두 가지 형태로 일어났다. 첫째, 토지는 왕에 의해 몰수될 수 있었다. 두 번째 유형은 토지를 담보로 돈을 빌려주고 그 빚을 갚지 못할 때 토지를 다시 찾을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비교적 넓은 토지에서는 흔히 농업생산이 기초적인 농산물(곡식, 채소)에서 특용작물(무화과, 대추야자, 올리브 등)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전 소유주들 중 대다수는 대체되었다. 따라서 땅을 잃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의 소작농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토지가 더 이상 가족의 생계유지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더 이상 기초적인 식량을 생산하지 못하고 대신 사야 했다. 헤롯의 통치에 의해 대지주들이 넘쳐나게 되었으며 부의 집중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1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땅이 없는 농민들은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일일 노동자가 되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든가 아니면 도시의 건설현장에서 일하거나 구걸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은 토지로부터 부를 축적한 대지주들의 본거지였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이유들로 인해 그 도시에 부가 흘러들었다. 성전은 유대 지역과 제국의 조세제도의 중심지였다. 통상적으로 “십일조”라고 일컬어지는 지역의 세금은 농업생산물에 부과되었다. 대부분의 십일조는 성전과 제사장에게 지불되었으며, 나머지는 예루살렘에서 소비되도록 되어 있었다.

부가 예루살렘에 집중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수십만의 유대인 순례자들이 해마다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아마도 1세기의 예루살렘에는 약 4만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월절과 같은 중요한 절기에는 이십만 또는 그 이상의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것이다. 게다가 유대인이 아닌 여행자들도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다.

대제사장과 성전 관리인들은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들 이전의 제국 예하의 통치자들처럼 로마에 대한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충성과 협조였다. 그들은 해마다 로마에 보내는 공물이 제대로 갔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들은 또한 국내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해야 했다. 로마는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의 역할은 현지의 지배체제와 제국의 지배체제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었다.

어떤 대제사장들은 다른 제사장들보다 더 성공적으로 줄타기를 했던 것처럼 보인다. 예수가 공적으로 활동할 때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특히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주후 18년부터 36년까지 18년 동안 대제사장 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배체제의 중심지로서의 성전의 역할은 신학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즉 그 체제 내에서 성전이 차지하는 위치는 하나님에 의해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성전신학은 계속해서 성전을 하나님의 거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매개해 주는 곳, 기도의 중심지, 그리고 순례의 목적지로 보았다. 이것이 예수가 종려주일날 예루살렘에 입성할 당시의 예루살렘의 상황이었다.

예수가 1세기에 유대교 내부에서 성전을 비판하는 유일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예수 이외에 성전을 비판하는 목소리들 가운데는 사해사본을 기록한 공동체와 거의 확실하게 동일시될 수 있는 에세네파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기존의 성전과 제사장제도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들 자신의 공동체를 임시 성전으로 생각했고, 예루살렘에 있는 정화된 성전에서 힘을 회복하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66년에 일어난 대규모의 유대인 폭동은 로마 자체에 대한 저항은 물론이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협력자들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복음서들에 보면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의 운동은 모두 반 성전적인 경향을 띠고 있어다.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어다. 그러나 용서는 성전신학이 자기의 것으로 주장한 하나의 기능이었으며 성전에서의 제사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었다.

요한처럼 예수도 성전의 제사와 관계없는 용서를 선포했다. 어떤 서기관들이 비난한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 그들의 비난의 요점은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는 하나의 길, 즉 성전의 제사를 통한 용서의 길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요한처럼 예수도 여기서 성전과 무관하게 용서를 선포하고 있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1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70년에 로마군은 그 도시를 다시 정복함으로써 대폭동을 진압했다. 그런 과정에서 로마군은 성전 뜰의 서쪽 벽 일부만을 남기고 성전을 헐어버렸다. 성전의 파괴로 인해 유대교는 완전히 다르게 변했다. 희생제사는 중단되었으며 제사장의 역할은 쇠퇴하였고 유대교의 중심은 성서와 회당이 되었다.

마가복음은 성전이 파괴되던 시기와 아주 가까운 시기에 기록되었다. 그 복음서는 성전이 파괴되기 몇 년 전에서부터 그 후 몇 년까지의 기간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예루살렘은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 대단히 큰 “화젯거리”였다.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마커스 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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