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 켄드릭은 미국 텍사스 남감리회 소속의 선교사였다. 그는 1907년 9월에 남감리회 여자 외국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조선선교사로 내한 하였다. 그는 첫 선교지인 개성에서 조선말을 배우면서 아동교육을 담당하는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1908년 엡윗 청년회가 텍사스에서 선교대회를 열고 있을 때였다. 조선에서 사랑이 가득 담긴 편지 한통이 도착했다. 당시 선교사활동보고는 조선에서 미국으로 편지를 보내면 일본을 거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선박으로 다시 미국 내에서는 육로를 통하여 수개월씩 걸려서 전달되었다.
켄드릭은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에 대하여 진지하게 글을 썼다. 조선의 기후를 비롯하여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소개하는가 하면 인심이 넉넉한 조선 사람들을 극찬하면서 하루빨리 이들에게 복음이 들어가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염원하는 내용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러면서“내게 천의 생명이 있다면 그 모두를 조선을 위해 바치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 편지를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엡윗 청년회가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한 일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고 더 열심히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이튿날 루비 켄드릭이 세상을 떠났다는 전보가 도착하였다. 편지는 수 개월을 걸려서 전해지지만 전보는 즉시 전달된다. 급전을 받은 엡윗 청년회 모두는 큰 충격에 빠졌으며 대회장은 온통 울음바다로 변했다. 루비 켄드릭은 개성에서 맹장염에 걸려서 서울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던 중 조선 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25세의 나이로 꽃다운 청춘을 낯선 땅에서 마감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만일 내가 죽으면 텍사스 청년들에게 열 명씩, 스무 명씩 조선 선교사로 오라고 일러 주십시오.” 이 말은 텍사스 엡윗 청년회 선교대회장에 전달되었고 그 자리에 참석한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선교의 불씨를 지피기에 충분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들 중 20여 명이 마침내 조선선교사로 지망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선교헌금을 모아 매년 선교비로 지원하기로 하였다.
선교사들의 묘지 공원인 양화진에 가면 여선교사 루비 켄드릭(Rubye Rachael Kendrick1883~1908)의 묘비가 있다. “제게 천 개의 삶이 있다면, 그 삶 모두 한국 사람들에게 주고 싶어요.” “If I had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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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나라에 방방곡곡 골목마다 교회에 있는 것은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바로 이러한 복음의 열정을 지닌 젊은 밀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의 빚을 우리가 갚아야 합니다. 우리가 직접 가지 못한다면 이미 나가서 낯선 땅에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지원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