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의 샘(Gihon Spring)과 히스기야 터널
구약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는 샘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기혼 샘(Gihon Spring)은 그 중의 하나로서 기온이 높고 강수량이 많지 않은 곳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으로서는 참으로 중요한 수원지였습니다. 비도 많이 오지 않고 기온이 높은 지역으로서는 물이 그 만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최초의 성이 바로 기혼 샘 바로 옆에 세워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윗 왕은 기혼 샘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의 후계자인 솔로몬을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한 곳도 기혼 샘 옆이었습니다.
(왕상1:32-35) ” 다윗 왕이 말했습니다. “제사장 사독과 예언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내 앞에 오게 하시오.” 그러자 그들이 왕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왕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신하들을 데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워 기혼 샘으로 내려가시오. 거기에서 제사장 사독과 예언자 나단은 솔로몬에게 올리브 기름을 부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오. 그리고 나팔을 불며 ‘솔로몬 왕 만세!’를 외치시오. 그런 다음에 솔로몬과 함께 돌아오시오. 솔로몬이 내 왕위에 앉아 나를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릴 것이오. 내가 솔로몬을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기를 명령하오.””
시간: 일요일~목요일 08:00~17:00, 금요일 08:00~13:00
요금: 개인 일반 25 세겔, 어린이 13 세겔
그룹 일반 21 세겔, 어린이 12 세겔
기혼 샘에 들어 올 때 낸 입장료로 히스기야 터널을 통과하여 실로암 연못까지 갈 수 있습니다.
“기혼(Gihon)”은 히브리어로 “물을 내뿜다” 또는 “처녀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이 기혼 샘은 수천 년 전부터 예루살렘의 수원지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예전에는 더욱 풍부한 지하수가 솟아나와 키드론 골짜기로 흘러들어 가면서 많은 물이 흐르는 키드론 시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다윗의 도시(City of David)에서 키드론 계곡으로 내려가는 곳에 이 기혼 샘이 있으며,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맑은 물이 샘솟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히스기야 터널을 통하여 물이 실로암 못까지 흘러갑니다. 히스기야 터널은 기원전 740년에 바위를 파서 물길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길이가 약 525 m에 이르며 현재까지도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BC 701년 봄,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은 맹렬한 기세로 유다 왕국을 공격하였습니다.이미 라기스를 함락하였고, 유다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물밀듯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이런 다급한 상황을 성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2:1~3) “히스기야가 이 모든 일을 충성스럽게 했습니다. 그 때에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이 유다에 쳐들어왔습니다. 산헤립과 그의 군대는 성벽이 있고 굳건한 유다의 모든 성을 에워싸고 공격해 왔습니다. 그는 그 성들을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을 알고 신하와 군대 지휘관들을 불러 의논했습니다. 그들은 성 밖에 있는 샘의 물줄기를 막아 버릴 것을 결정했습니다. 신하와 군대 지휘관들이 히스기야를 도왔습니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 유다의 공병대가 바위굴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적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면 성 밖에 있는 기혼 샘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곳에서부터 지하 터널을 파서 성 안의 실로암 못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역대하 32:30) “기혼 샘의 위 연못을 막은 사람도 히스기야입니다. 그는 기혼 샘의 물줄기를 옛 다윗 성의 서쪽으로 곧장 흐르게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는 일마다 다 잘 되었습니다.”
산헤립이 침공해 올 경우 예루살렘 성문을 모두 닫아야 하는데 예루살렘 성안의 사람들이 먹는 샘물이 바로 성 밖에 있는 기혼 샘물뿐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기혼 샘물로부터 터널을 뚫어 성안에 있는 실로암 까지 연결하기로 하고 암반을 파 들어가는 대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히스기야 왕은 기혼 샘으로부터 흐르는 물줄기를 바꾸어 놓는 터널공사를 완성하여 기혼 샘의 물을 히스기야 터널을 지나 실로암 못까지 흐르도록 하였습니다.
약 2,500명의 사람들이 암반 터널 공사에 참여했는데, 기혼 샘과 실로암 양쪽에서 서로 파 들어가는 형식의 공사를 해서 533 m의 터널을 뚫는 엄청난 공사를 해냈습니다. 그런데도 약 15 cm 정도의 오차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S자 형태로 된 이 터널은 길이가 총 540 m에 이릅니다.
지금도 히스기야 터널에는 차가운 샘물이 흐르고 있고 물에는 작은 물고기도 살고 있습니다. 터널 내부는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폭과 약 2 m 정도의 높이로 파 들어가면서 중간 중간에 마주오던 사람과 비켜설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터널을 통과하는데 약 30분 정도 걸립니다.
1838년 미국의 성서지리학자 로빈슨은 기혼 샘에서부터 좁은 터널을 따라 실로암까지 탐사한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2,500년의 세월동안 퇴적된 바닥의 진흙층 때문에 그는 거의 기다시피 하여 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그로부터 약 30년 후, 영국의 워렌(Warren)도 `히스기야 터널’을 처음부터 끝까지 탐사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기혼 샘 근처에서 수직으로 11 m 정도 위로 올라가는 통로를 발견하고는 다윗의 부하인 요압이 몰래 성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수구”(사무엘하 5:8)라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히스기야 터널의 마지막 비밀은 1880년에 비로소 밝혀졌습니다.
1880년 여름 어느 날, 예루살렘 실로암 마을의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실로암 못에서 물놀이를 하면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아이가 물이 흘러나 오는 지하 터널 안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6 m 정도 들어갔을 때 그 아이는 터널 입구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으로 벽에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공사는 양쪽 끝에서 부터 시작되어 중간 지점의 약 1.2 m를 남겨놓고 양쪽이 만났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1880년에 발견된 비문은 여섯 줄로 모두 200글자 중에서 1백77자만 보존되어 있는데 이 비문에 의하면 양쪽에서 파 들어간 인부들이 중간에서 만나 지하터널의 역사적 개통을 자축하는 극적인 장면이 묘사돼 있습니다.
“3 규빗(1.3m)쯤 남았을 때 반대편에서 상대방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터널이 뚫렸을 때 동료를 얼싸안고 도끼를 서로 부딪쳤다.물은 샘으로부터 1천2백 규빗(525 m)을 흘러나왔다.”
이러한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고 당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영국의 콘더(C. R. Conder), 세이스(A. H. Sayce),독일의 구테(H. Guthe) 등 고고학자들은 모두 경쟁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된 이 고대 히브리어 비문 해독에 매달렸습니다.모두 여섯 줄로 200자가 기록된 실로암 비문은 마치 오늘날의 신문기사처럼 지하 터널 개통 당시의 분위기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이 히스기야 터널을 보게 되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기혼 샘에서부터 실로암 못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315 m입니다. 그런데 적들이 예루살렘 성을 쳐들어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당시 유대인들은 525 m나 되는 긴 터널을 똑바로 파지 않고 왜 구불구불하게 팠을까? 지금까지 많은 고고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답을 찾고자 하여 많은 노력하였습니다.
1978년부터 다윗 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을 시도할 때 지질학자인 단 길(Dan Gill)은 지질 정밀 조사 끝에 결론을 내리기를, 이 터널지역에는 원래 40,000년 전부터 형성되어진 바위 틈새가 서로 이어져 있었다고 밝혀 내었습니다.
즉, 히스기야의 공병대원들은 단순히 물이 흐르는 기존의 바위 틈새를 따라 팠기 때문에 구불거리는 수로를 따라 히스기야의 터널을 파나갔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당연히 양쪽에서 파 들어오다가 도중에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실로암 비문이 발견된 지 10년이 지난 1890년 어느 날 밤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한 그리스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혼자 연장을 들고 히스기야 터널로 들어가서 이 비문을 떼어내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 도굴꾼은 예루살렘의 한 골동품 상점에 비문 조각들을 팔아 넘겼습니다.
이렇게 이 비문이 새겨 있던 돌판을 마구 떼어내는 과정에서 비문의 작은 조각들이 바닥의 물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소문을 접한 오스만 터키 당국은 이 유물을 압수하여 이스탄불에 있는 박물관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탐사와 발굴활동을 하던 스위스 출신의 고고학자 콘라드 시크(Conrad Schick)는 곧바로 이 비문의 모형을 완성하여 원래에 있었던 그 자리에 붙여놓았습니다. 비문 돌 판이 있었던 곳에는 모조품을 붙여 놓았는데, 이 원래의 기록된 돌 판은 현재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통일되었던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왕이 죽은 후,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다윗의 가문은 거의 400년 동안 유다를 통치하였고, 얼마 동안은 번영하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국은 자신들의 국경을 확장하기를 열망하는 신흥제국들에 의하여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 왔습니다.
강력한 앗시리아 군대의 피할 수 없는 공격에 대비하여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기혼 샘으로부터 실로암 연못 안으로 직접 연결되는 긴 수로를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공사는 예루살렘 성이 적들에게 포위당한다고 할지라도 물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는 예루살렘의 생명수가 되었습니다. 그 물은 오늘도 히스기야 터널 안으로 흘러 들어오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BC 586년 아브 달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을 정복하고 솔로몬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의 귀족들과 지식인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갔다가, 바벨론을 정복하였던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수 있게 된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유대 총독으로 임명된 느헤미야의 지도에 따라 느브갓네살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건설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헤롯 대왕에 의하여 확장되어 건축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AD 70년에 있었던 제 2 성전의 파괴와 함께 다윗 성도 파괴되었으며, 그 잔해물들은 계곡과 연못 위로 버려졌으며 묻혀지게 되었습니다.
오토만 제국 시대에 다시 쌓아진 옛 예루살렘 성 부근에 옛 예루살렘의 유적들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발굴 작업을 계속하여 오던 영국의 고고학자 Charles Warren에 의하여 예루살렘의 제 1 성전의 잔해와 Charles Warren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 비밀 수로 시스템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Source: HaEun 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