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의 빈도: 얼마나 자주 떡을 떼어야 할까>
“목사님, 우리 교회는 왜 이렇게 자주 성찬을 해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너무 자주 하면 은혜가 흔해지는 거 아닐까요.” 옆에 계시던 한 장로님은 거꾸로 물으셨다. “저는 매주 떡을 떼었으면 좋겠습니다. 칼뱅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면서요?”
물론, 루터교회는 매주 성찬이 디폴트 값이라 우리교회 이야기는 아니다. 장로교회에서 목회하는 친구가 들려 준 이야기다. 한 사람은 자주 하면 은혜가 헐거워진다 걱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주 하지 않으면 예배가 헐거워진다 걱정한다. 두 사람의 질문의 답이 500년 묵은 한 문서에서 담겨있다.
그 문서가 칼뱅이 1541년 제네바에 돌아온 직후 작성해 시의회에 제출한 『교회법령』(Ordonnances ecclésiastiques)이다. 거기서 칼뱅은 분명히 적었다. 주의 만찬은 가능한 자주 거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가 머릿속에 둔 그림은 매 주일이었다. 그러나 그 문서는 칼뱅의 손에서 그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제네바 소의회는 손을 댔고, 일 년에 네 번이라는 횟수를 못 박았다. 부활절, 오순절, 9월 초, 그리고 성탄절에 가까운 한 주일. 이렇게 분기 성찬이 제네바의 표준이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칼뱅의 분기 성찬’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사실 칼뱅의 신학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칼뱅의 좌절’이다.
이 차이를 그냥 흘려보내면 안 된다. 칼뱅 자신의 글을 들춰 보면, 그가 무엇을 원했는지가 너무도 또렷하기 때문이다. “주의 만찬은 적어도 일 주일에 한 번은 신자들의 모임 앞에 놓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이 흐름을 끊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Inst. IV.17.44). 이어서 한 발 더 들어간다. “분명히 우리가 따르고 있는 관습은 사도적 관습이라기보다는 마귀의 작업이다”(Inst. IV.17.46). 사탄의 작업이라니, 칼뱅이라는 사람의 글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격한 어조다. 매 주일 성찬이 끊긴 자리, 그 자리가 칼뱅에게는 신학적 양보가 아니라 영적 패배의 흔적이었다.
그러면 왜 시의회는 칼뱅의 청을 거절했을까. 자료를 따라가 보면 답은 의외로 신학적이지 않다. 정치적이고 행정적이다. 매 주일 성찬을 거행하려면 컨시스토리(Consistoire)의 점검 절차가 매 주일 작동해야 한다. 제네바의 컨시스토리는 매주 목요일 모여 시민들의 신앙과 삶을 점검하던 기구였는데, 분기 성찬 직전 주간이 되면 그 활동이 일주일에 두세 번으로 늘었다(Karin Maag, Lifting Hearts to the Lord, 152-58 참조). 이 점검을 매 주일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사실상 시 행정 인력을 두 배 세 배로 돌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시의회는 그 부담을 감당할 의사가 없었고, 더 솔직히 말하면 교회의 권한이 시민 일상에 그토록 자주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 제네바의 분기 성찬은 결국 16세기 도시 행정의 한 행정 결정이다. 칼뱅은 평생 그 결정을 고치려 했고, 끝내 고치지 못한 채 떠났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듣는 통념 하나를 다시 꺼낼 필요가 있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분기 성찬은 칼뱅의 신학적 결정이다”라는 말이 너무도 당연하게 통용된다. 그 말을 토대로 어떤 분들은 “칼뱅의 후예가 매 주일 성찬을 한다는 건 칼뱅 정신에 어긋난다”고 단호히 말씀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자료 위에 그 말을 올려놓으면 정확히 정반대가 된다. 매 주일 성찬이야말로 칼뱅이 원했던 것이며, 분기 성찬이야말로 칼뱅이 끝내 받아 안아야 했던 양보였다. 그러니 칼뱅을 따른다는 명목으로 일 년에 한두 번만 성찬을 하는 한국 교회의 관행은 정직하게 말하자면 칼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칼뱅이 가장 안타까워했던 그 자리를 충실히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한국 개신교 성찬 빈도의 가파른 후퇴는 어디에서 왔을까. 흔히들 “장로교가 칼뱅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답하지만, 이것 역시 절반의 사실이다. 한국 장로교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분기 성찬을 비교적 충실히 지켰다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 후 빈도가 연 4회에서 연 2회로, 다시 연 1~2회로 줄어든 결정적 압력은 칼뱅이 아니라 미국 변경의 천막 집회에서 흘러들어 왔다. 19세기 미국 부흥회 양식에서 예배의 무게중심은 분명했다. 회심을 끌어내는 설교와 결단의 초청. 그 흐름 안에서 성찬은 거추장스러웠다. 시간이 길어졌고, 사전 점검 절차도 번거로웠으며, 무엇보다도 결단의 정점을 깨뜨렸다. 미국 부흥회가 한국에 들어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성찬은 자연스럽게 뒷줄로 밀려났고, 부활절과 추수감사절 같은 명절 행사로만 살아남았다. 한국 개신교의 성찬 후퇴를 칼뱅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17세기 제네바의 시의회 결정을 다시 한 번 칼뱅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이다.
다른 한쪽 측면도 짚어 둘 필요가 있다. 매주 성찬이 무조건 옳다는 식의 단순화도 정직하지 않다. 종교개혁 당시 빈도는 교파마다 들쭉날쭉했다. 루터교는 원칙적으로 매 주일 성찬이었으나 회중의 실제 참여는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까지 떨어졌다. 잉글랜드 공동기도서는 부활절을 포함해 적어도 일 년에 세 번을 규정했고, 차츰 연 4회 또는 매월로 늘어났다. 헝가리 개혁교회는 대림절, 성탄절, 재의 수요일, 부활절, 승천일, 오순절 여섯 차례를 지켰다. 스코틀랜드 일부 교구는 부활절 무렵 일 년에 한 번에 머물렀다(Maag, Lifting Hearts to the Lord, 145-152 참조). 같은 신앙고백 안에서도 빈도가 이렇게 달랐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말해 준다. 빈도는 교리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빈도는 각 공동체의 영적 무게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 준다.
그러니 빈도의 문제를 “얼마나 자주 해야 정통이냐”는 식으로 묻는 건 질문의 접근이 틀렸다. 진짜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우리 공동체는 무엇을 가장 자주 만나고 싶어 하는가. 설교만으로 그리스도를 충분히 만난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매우 진지한 신학적 입장이지만 종교개혁자 누구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루터는 말씀의 사역(ministerium verbi)에 성찬이 따라붙어야 비로소 예배라고 보았고, 칼뱅도 같은 입장에 있었다. 둘은 임재의 방식에서 서로 갈리지만, 빈도에 관해서는 신기할 정도로 같은 편이었다. 매주, 가능하면 매 주일.
이 사실을 알고 다음 성찬 주일에 떡 한 조각을 받게 되면 무언가가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 한 조각의 떡은 16세기 어느 시청 회의실에서 칼뱅이 끝내 관철하지 못했던 청원의 잔영이다. 매 주일 그 식탁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싶었던 한 사람의 평생 좌절의 흔적이다. 동시에 19세기 미국 천막에서 부흥의 열기에 떠밀려 뒷줄로 물러나 앉아야 했던 식탁이 다시 회복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자주 하면 흔해진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자주 만나지 않으면 잊힌다는 말도 똑같이 일리가 있다. 우리는 떡과 잔을 어떤 자리에 두고 사는가. 이것은 한 공동체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고 무엇을 가장 그리워하는지를 보여 주는 꽤 정직한 자기 진술이다.
성찬의 빈도는 결국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 아닐까. 자주 만나고 싶은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대접하는가. 분기마다 만나는 친구가 있고, 매 주일 만나는 친구가 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얼마만에 만나야 할까. 우리 공동체의 식탁을 언제 펼쳐 놓을지는 칼뱅이 답해 줄 일이 아니라 그 식탁을 둘러앉은 우리 자신이 답해야 할 일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칼뱅의 이름으로 식탁을 멀리 두는 일만큼은 적어도 칼뱅 자신은 결코 반기지 않을 것이다.
글. 최주훈 목사 (중앙루터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