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가능케 하는 희망의 씨앗
누가복음 24:1~12
해가 아직 떠오르지 않은 이른 아침, 몇몇 여인들이 향품을 들고 무덤을 향해 걸어갑니다. 죽은 이를 위한 마지막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무겁고도 복잡했습니다. 사랑하는 스승을 잃은 슬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무엇보다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절절한 마음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여인들은 주님의 죽음을 정리하려는 마음으로 걸었겠지만, 정작 그들이 마주한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주님의 시신이 사라진 자리를 둘러싸고 당혹과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때 그들 앞에 “무서운 모습”의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질문이 던져집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이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놀람을 넘어, 그들의 관점 전체를 흔들어 놓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간 이 여정이, 생명의 문 앞에 닿아 있던 길이었음을 그들은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 뒤에 이어진 말씀. “기억하라.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여인들의 모든 혼란은 이 한마디에서부터 방향을 되찾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기억합니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하리라.” 그 말씀을 기억한 순간, 비어 있는 무덤이 허무함이 아닌 소망의 증거로 바뀝니다. 기억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새롭게 여는 열쇠가 됩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지식의 축적일까요, 감정의 고양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은 ‘기억’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 주님이 보여주신 삶의 방식, 주님과 함께했던 갈릴리의 시간. 그것을 마음에 품고 사는 것입니다. 고난과 상실이 우리를 흔들 때, 그 기억이 다시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말씀이 다시 살아나고, 생명이 다시 움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소식은 사람들의 귀에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이 달려가 전한 이야기는 “미덥지 않은 듯이” 들렸습니다. 제자들조차 믿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성과 경험이 지배하는 시대에,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전설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복음은 늘 그러한 ‘불가능해 보이는 진실’로 우리를 부릅니다. 설명이 아니라 증언, 논리보다는 삶의 흔들림 속에서 깨달은 진실로 다가옵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달립니다. 그는 여전히 후회와 자책의 무게에 눌려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한구석에 부활의 가능성을 붙들고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는 “이 일을 놀랍게 여기며” 돌아옵니다. 이해하지 못해도, 온전히 믿어지지 않아도, 그 놀라움이 그의 삶에 균열을 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균열에서 부활은 시작합니다.
부활은 우리의 머리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균열, 질문, 상처, 공허함 속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을 가능케 하는 것은 ‘기억’입니다. 갈릴리에서 들었던 주님의 말씀, 우리를 붙들었던 은혜의 순간들, 절망 중에 문득 들려온 말씀 한 구절, 어느 예배 중에 불쑥 밀려온 눈물 한 방울. 그 기억들이야말로 부활을 가능케 하는 씨앗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무덤처럼 닫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을 꺼내 보십시오. 주님이 살아 계셨던 장면들을 마음에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기억 위에 다시 믿음을 세우십시오. 여인들이 그러했고, 베드로가 그러했듯, 우리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 기억이 오늘을 살게 하고, 내일을 꿈꾸게 합니다.
부활은 먼 하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우리의 삶 가운데 시작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부활절 아침에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 기억이 바로, 오늘 당신 안에서 부활이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