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목요일: 또 다른 시작>
사순절은 조용히 끝난다. 많은 이들이 부활절 전날 밤에 사순절이 끝나리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교회 전통마다 계산법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로마가톨릭은 부활절보다 이틀 앞선 목요일 저녁에 막을 내리는 데, 정확하게는 성목요일 저녁 예배 직전이다. 그래서 성목요일 저녁 예배는 또 다른 시작으로 받아들인다.
성목요일 저녁부터 부활 주일 저녁까지의 사흘을 교회는 오래전부터 ‘성삼일(Triduum Sacrum)’이라 불러왔다. 라틴어로 ‘거룩한 사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사흘은 서로 독립된 세 개의 예배가 아니다. 사흘에 걸쳐 거행되는 하나의 전례다. 하나의 드라마가 세 막으로 나뉘어 상연되는 것이지, 세 편의 단막극이 우연히 한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첫 번째 막이 성목요일 저녁에 오른다.
성목요일
이 밤에 교회는 두 가지를 기억한다. 예수가 빵과 포도주를 들어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먹이신 일, 그리고 그 식탁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이다. 성찬과 세족, 이 두 행위는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몸짓에서 뻗어 나온 두 개의 팔과 같다.
성목요일에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만디 목요일(Maundy Thursday)’이다. 영어 ‘Maundy’는 라틴어 *mandatum novum*에서 왔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Mandatum novum do vobis).” 요한복음 13장 34절의 그 말씀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이름이 성찬 제정이 아니라 세족 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성목요일 전례에서 부르는 교송의 첫 단어가 *mandatum*이었고, 그래서 이 날 전체가 ‘새 계명의 목요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독일어권에서는 ‘그린 목요일(Gründonnerstag)’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초록색과 무관하다. 고대 독일어 *grunen*, 곧 ‘슬퍼하다, 탄식하다’에서 온 말이다. 같은 밤을 두고 어떤 전통은 ‘새 계명’을 이름으로 붙였고, 어떤 전통은 ‘슬픔’을 이름으로 삼았다. 이 밤의 결이 그만큼 단순하지 않다.
세족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손님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일상적인 환대의 관습에 속했다. 포장되지 않은 길을 샌들 신고 걷던 시대였으니, 먼지와 땀에 절은 발을 씻겨주는 것은 하인이나 안주인이 마땅히 할 역할이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가 시몬에게 “너는 내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관습의 실패를 꼬집으신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3장에 이르면 예수가 이 관습을 송두리째 뒤집으신다. 스승이자 주(主)라는 칭호를 가진 분이 노예의 몸짓을 손수 수행하신 것이다. 베드로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절대로 내 발을 씻지 못하십니다.” 이것은 겸손의 표현이라기보다 거부에 가까웠다. 주인이 노예의 행위를 하면 질서가 무너지고, 그 무너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도 그 전복에 동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대답은 한층 더 놀라웠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장면을 유월절 만찬 서사 대신 배치했다. 공관복음이 빵과 포도주의 제정을 기록한 바로 그 자리에, 요한은 대야와 수건의 이야기를 놓았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의도적인 교체로 읽는다. 요한에게 성찬의 본질은 빵을 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자기를 비우는 몸의 언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초대교회는 이 행위를 문자 그대로 실천했다. 바울은 과부 명단에 등록되려면 “성도들의 발을 씻긴 적이 있는” 여성이어야 한다고 적었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는 세족을 세례의 일부로 간주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아담이 발에 걸려 넘어졌고 독이 발에 부어졌으니, 뱀이 너를 넘어뜨린 바로 그 부위에 더 풍성한 성화의 도움이 더해지도록 발을 씻는 것이다.” (Ambrose, *De Sacramentis* 3.1.5.)
그런가 하면 305년 엘비라 공의회는 세족을 금지했다. 이단적 해석이 결부될 위험이 그 이유였다. 같은 행위를 놓고 어떤 교부는 성사의 차원으로 높이 세웠고, 어떤 공의회는 이단의 온상으로 경계한 셈이다.
이 오래된 갈등 한가운데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목할 만한 말을 남겼다. “형제의 발 앞에 몸을 굽힐 때, 그러한 겸손의 감정은 마음속에서 일깨워지거나, 이미 있던 것이라면 한층 굳건해진다.” (Augustine,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58.5.) 세족은 겸손을 가르치는 교훈의 도구가 아니라, 겸손을 몸 안에 새기는 변형의 행위라는 통찰이다.
세족이 성목요일 전례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까지 교회는 수백 년에 걸친 진통을 감내해야 했다. 영국에서는 왕이 직접 가난한 이들의 발을 씻기던 관습이 17세기 이후 특별 주조 동전을 나누어주는 의례로 바뀌었다. 발을 씻는 대신 돈을 건네기 시작한 순간, 겸손은 자선으로 교체되었고, 자선은 어느새 왕실의 품격을 드러내는 행사로 탈바꿈했다. 의례의 본래 의미가 서서히 증발하는 과정을 역사는 이처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제단포 벗기기
성목요일 저녁 예배에는 또 하나의 장면이 있다. 성찬이 끝나면, 제단 위의 촛대와 십자가, 성체포와 꽃병이 하나하나 조용히 제거된다. 그 사이로 시편 22편의 구절이 암송된다.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겉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것은 단순한 정리 작업이 아니다. 전례 전통에서 제단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제단에서 모든 것을 벗기는 행위는, 골고다에서 병사들이 예수의 옷을 벗긴 장면을 다시 살아내는 것이다.
벗겨진 제단 앞에서 회중은 축도 없이 침묵 속에 자리를 뜬다. 파송 찬송도 울리지 않는다. 이 미완의 침묵은 성금요일의 어둠을 향해 열려 있는 문과 같다. 성삼일은 하나의 전례이므로 성목요일 저녁 예배에는 끝맺음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 예배가 진정으로 끝나는 시점은 부활 주일 저녁이다. 사흘에 걸친 하나의 긴 문장에 비유하자면, 성목요일은 주어이고, 성금요일은 동사이며, 부활 주일은 마침표에 해당한다.
우리의 현실
한국 교회의 성목요일 풍경을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적지 않은 교회에서 성주간은 종려주일과 부활절 사이에 놓인 무표정한 평일에 가깝다. 성삼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재한 상태에서 성목요일은 그저 다음 날 금요일을 기다리는 평범한 하루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전례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서사적 중심부가 텅 비어 있는 상태에 더 가깝다.
세족식을 행하던 교회들 사이에서도 적잖은 변화가 생겼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세족식이 아예 사라지거나, 발을 씻기는 대신 손을 씻는 세수식으로 바뀐 교회가 적지 않다. 위생과 거리 두기라는 현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변화였다. 시대와 문화의 영향을 막아서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어쩌면 옳지도 않다. 형식이 달라지는 것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형식이 달라지는 동안 그 안에 담겼던 정신까지 함께 빠져나갔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다. 발이 아니라 손을 씻더라도, 몸을 낮추는 그 굽힘의 언어가 살아 있다면 세족의 본질은 이어진 것이다. 그 굽힘이 사라진 채 의례의 외양만 남거나, 아예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가 수건을 두르신 그 밤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세족식을 여전히 행하는 교회에서도 돌아볼 것이 있다. 때로 이 장면이 ‘겸손한 리더십’의 전시로 소비되는 경우를 목격하게 된다. 카메라가 따라다니고, 편집된 영상이 교회 홍보 콘텐츠로 유통된다. 예수가 수건을 두르신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비우기 위해서였다. 겸손이 전시되는 순간, 그것은 겸손의 반대편으로 넘어가기 쉽다.
성찬과 세족을 분리하는 관행도 마찬가지다. 세족식은 성목요일에, 성찬은 주일에 따로 거행하거나, 세족식만 떼어 특별 집회의 프로그램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13장의 세족은 유월절 만찬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예수가 식탁에서 일어나 수건을 두르신 것이지, 별도의 순서로 기획된 것이 아니었다. 성찬과 세족을 분리하면, 십자가에서 수평 나무와 수직 나무를 떼어놓는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세족에서 핵심은 물이 아니라 몸의 굽힘이다.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세족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 ‘굽힘’의 회복이다. 그리고 그 굽힘이 일어나는 가장 자연스러운 자리는 성찬의 식탁이다. 빵을 떼고 잔을 나누는 그 식탁에서 일어나 형제의 발을 씻기고, 다시 그 식탁으로 돌아오는 움직임이야말로 성목요일 저녁이 우리에게 건네는 오래된 문법이다. 형식이 달라져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문법은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성삼일은 기독교 전례의 가장 오래된 심장이다. 예수가 식탁에서 수건을 드시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무덤에서 침묵하신 그 사흘이 비어 있으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서론과 결론만 남고 본론이 빠진 책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글. 최주훈 목사 (중앙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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