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받는 종
사 53:1-5
사고로 사랑하는 딸을 잃고 난 후 딸이 쓰던 휴대폰을 사용 정지하지 않고, 그대로 간직한 분이 계십니다. 딸이 보고 싶을 때마다, 그 전화기로 전화를 겁니다.
전화를 걸면 녹음되어 있는 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돌아오면 곧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하루하루 눈물로 그리움을 삼키며 살아갑니다. 딸을 잃은 고통 가운데, 생명보다 귀한 딸의 모습을 가슴에 묻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주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에 비견할 수 있을까? 부끄러운 마음이 들고 죄송할 뿐입니다.
내 배로 낳은 딸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감사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앞세울 뿐입니다.
그런데 앞서 보낸 딸의 휴대폰에 남겨진 메시지를 들으면, 딸의 모습이 그려지듯이, 성경을 열면 ‘고난 받은 종’의 형상이 화보처럼 그려져 있는 곳이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입니다.
마치 휴대폰에 메시지를 남기듯 주님의 모습을 뚜렷하게 ‘과거의 모습’으로 남긴 예언이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문법에 이러한 시제를 ‘예언적 과거’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예언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들과 유대인들이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타까움과 감사가 어우러진 마음이고, 유대인들은 아직도 외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사야서에 나타난 고난의 종을 메시야의 모습으로 인정하길 꺼려하여 아예 건너뛰며 가르치질 않습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토라, 그 중에서도 레위기입니다.
그렇게 배워왔던 후손들이 고난 받은 종의 모습을 이사야서에서 뒤늦게 발견하고, 이것을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메시지로 인정합니다. 그런 분들이 결국 ‘예수아’를 영접하고 ’메시아닉 쥬‘가 됩니다.
구약의 말씀 중, 가장 파워풀하고 절대 부인할 수 없는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나타내신 ‘사랑의 극치’입니다. 듣고 깨달으면 부인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는 하나의 질문을 던짐으로 예언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전한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 53:1)이 질문은 단순히 물어보는 수준의 질문이 아닙니다.
실제 이스라엘 백성중에는 예언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공존해 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는 예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한 말씀이 있는데 너희들은 왜 믿지 못하는가? 질문을 던지며 예언을 이어갑니다. 분명 미래의 일임에도 자기 눈으로 보고 경험한 과거의 사실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본 예수님의 모습은 신실하시고 변함없는 모습이십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때문에 징벌을 받으셨고 우리때문에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모든 죄악을 다 뒤집어쓰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의 참된 의미와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결과에 대해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된 것”이라고 결론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의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분이 가셨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순종은 자신을 죽이는 고통을 수반합니다. 고난을 싫어한다면 순종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잘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고통의 열매입니다. 고난을 통해 배운 것들입니다.
두 발로 일어서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입으로 하는 말 한 마디까지 모두 고난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아픔 없이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아기는 부모님께 순종하기 위해 수천 번의 엉덩방아를 찧습니다.
순종은 고난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고난에 더 익숙한 사람이 더 순종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더 순종을 잘 할 수 있다면 그만큼 더 큰 영광도 받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이러한 고난을 배우고, 순종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고난의 종, 그 형상을
가슴에 새기게 하소서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