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찬송 — 로마 총독이 목격한 것
서기 112년, 소아시아 비두니아 총독 소(小) 플리니우스는 당혹스러운 보고서를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올린다. 그가 심문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이렇게 진술했다.
“정해진 날에 새벽 동트기 전에 모여, 그리스도에게 마치 신에게 하듯 응답송으로 찬양을 불렀으며, 범죄가 아니라 도적질과 간음과 배신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으로 서로를 묶었다.” (Pliny the Younger, *Epistulae* X.96, c. 112 AD)
라틴어 원문의 “stato die”는 ‘정해진 날’이라는 뜻이다. 플리니우스는 그것이 무슨 요일인지 굳이 적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미신 집단’의 정기적 모임이 로마의 질서를 위협하느냐였지, 그것이 무슨 요일이냐는 아니었다.
이 보고서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두 군데 있다.
먼저 ‘동트기 전(ante lucem)’이라는 시간이다. 이 사람들은 해가 뜨기 전, 어둠 속에서 모였다. 노예도 있었고 자유인도 있었다. 로마 제국에서 일요일은 평범한 노동일이었지 쉬는 날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범죄자 이단 집단”은 일하러 나가기 전, 새벽 어둠 속에서 모인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편의의 문제로 볼 수 있을까. 부활의 날 그 새벽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해도 뜨지 않은 어둠 속에서라도 함께 모여야 했을까.
다음은 ‘그리스도에게 마치 신에게 하듯(quasi deo)’ 노래했다는 표현이다. 로마 관리의 눈에 비친 초대교회 예배의 핵심은 윤리도 교리도 아닌, 노래였다. 간절한 새벽의 찬송. 어쩌면 그것이 주일 예배의 가장 오래된 얼굴인지 모른다.
같은 시기,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마그네시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말고, 주의 날/주의 삶에 따라 살라(μηκέτι σαββατίζοντες, ἀλλὰ κατὰ κυριακὴν ζῶντες)”고 권면한다(*To the Magnesians* 9.1). 그런데 이 구절의 그리스어가 일으키는 논쟁이 만만치 않다. ‘κυριακήν’이 ‘주의 날’이라는 특정 요일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주님에 속한 삶의 방식’을 뜻하는가? 현대 그리스어에서 Κυριακή는 그냥 ‘일요일’이 되어버렸지만, 2세기 초에 이 단어가 특정 요일만을 지시했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다만 이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그나티우스에게 ‘안식일에서 주의 날로의 전환’은 단순한 요일 변경이 아니다. 유대적 율법 중심의 시간 질서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중심 시간 질서로, 세계관 자체가 이동한 것이다. “주일”이라는 이름 안에는 그 거대한 전환의 기억이 담겨 있다.
*150년경, 로마 — 유스티누스가 황제에게 보고한 주일 예배
주일 예배의 가장 이른 전체 묘사는 순교자 유스티누스에게서 나온다. 155년경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보낸 《제1변증서》 67장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일요일이라 불리는 날에, 도시와 시골에 사는 모든 이들이 한 장소에 모인다. 사도들의 회고록이나 예언자들의 글이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낭독된다. 낭독자가 마치면, 감독/주교/장로(president)이 이 좋은 것들을 본받도록 권면하고 격려한다. 그런 다음 우리 모두 함께 일어서서 기도한다.” (Justin Martyr, *First Apology* 67, c. 155 AD)
유스티누스가 밝힌 일요일 예배의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님이 어둠과 물질을 변화시켜 세상을 만든 첫째 날이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날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기 때문이다. 창조와 부활이라는 두 사건이 하나의 요일 위에 포개지면서, 일요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날’이라는 의미를 얻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놓치기 쉬운 맥락이 있다. 유스티누스의 이 기록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모인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해명’하는 자리에서 나왔다. 그는 이 관행이 위험하지 않다고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심상치 않다. 2세기 중반까지도 그리스도인의 일요일 모임은 로마 사회에서 ‘설명이 필요한 행위’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공인된 관습이 아니라 의심받는 관습. 유스티누스가 이 변증서를 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참수당했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주일에 모이는 일은 처음부터 결코 가볍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자세로 주일을 맞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교회력과절기. By 최주훈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