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자매, 어머니 (마가복음 3:31-35)
제주도 바닷가의 한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오애순’과 ‘양관식’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50년을 함께 산 남편이 안타깝게도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내는 남편에게 이런 시를 써서 바칩니다.
“어려서는 손 붙들고 있어야 / 따신 줄 알았는데 / 이제는 곁에 없어도 / 당신 계신 줄을 압니다. // 이제는 내게도 아랫목이 있어 / 당신 생각만으로도 / 온 마음이 데워지는걸 / 낮에도 달 떠있는 걸 / 아는 듯이 살겠습니다. // 그러니 가려거든 너울너울 가세요. / 50년 만에 훌훌 나를 내려두시고 / 아까운 당신 수고많으셨습니다. / 아꼬운 당신 폭싹 속았수다.”
“폭싹 속았수다”라는 말은 제주도 방언으로 ‘매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평생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묵묵히 무쇠처럼 일만 하다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남편에게 아내는 제주 방언으로 “아꼬운 당신 폭싹 속았수다”라며 진심 어린 사랑과 찬사의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3월에 공개되어 장안의 뜨거운 화제가 되었던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가족의 삶에 대한 미시적 통찰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와 여성사를 그린 이 16부작 드라마를 저는 두 번이나 보았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5월에는 어린이날(5월 5일)도 있고, 어버이날(5월 8일)도 있고, 스승의 날이자 성년의 날(5월 15일)도 있으며, 부부의날(5월 21일)도 있습니다. “가정은 /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축복 /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여 / 진정한 천국에 이르라 하시네”라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습니다.(김소엽, <5월의 노래 – 가정의 노래>)
가정(家庭)은 인간이 사랑을 경험하는 최초의 공간입니다.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시인 문삼석은 세상에서 제일 짧은 시 <그냥>에서 엄마와 아이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엄만 / 내가 왜 좋아? // 그냥…… // 넌 왜 / 엄마가 좋아? // 그냥……”
엄마와 아기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평생 어린이를 위해 글을 쓰며 살았던 윤석중 시인은 아빠와 아기, 그 둘 사이의 본능적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렇게 재치 있게 그렸습니다. 제목은 <먼 길>입니다.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윤석중, <먼 길>). 아빠는 먼 길을 떠나야 하는데, 누가 이길지 모르겠습니다.
어린이는 하나님께서 엄마와 아빠가 사는 가정에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아무 흠 없이 천진한 어린이는 존재함만으로 기쁨과 웃음 그리고 희망을 줍니다. 어느 날, 열 살 먹은 한 어린이가 방문을 닫아 잠그고 이렇게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빠가 저에게 자전거를 사주게 해주세요.’ 방 앞을 지나던 할머니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얘야, 왜 그렇게 큰소리로 기도하니? 하나님은 귀먹지 않으셨단다.’ 그러자 아이가 답했습니다. ‘할머니, 하나님은 잘 들으시는데, 우리 아빠가 못 들으실까 봐서요.’
예수님은 어린이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시기를 바라고 어린이들을 데리고 왔을 때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그걸 보신 예수님은 노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며 그 아이들을 하나하나 안고 머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마가복음 10:13-16) 고대사회에서 어린이는 온전한 인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세상의 변두리에 내쳐 있던 어린이들을 어른들 한가운데 세우시고 한 아이씩 안아주시며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어린이와 같은 자)의 것이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어느 시인이 어린이를 바라모녀 이렇게 풀이해서 들려줍니다. “잃었던 동심 그리워 / 어린이를 만납니다 / 맑은 눈 / 정직한 마음 찾고 싶어 / 갓 태어난 아기를 안아 봅니다 /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 혼잣말의 기도로 부탁합니다 / 다시 시작하게 해 다오 / 다시 노래하게 해 다오 / 거짓 진실 / 거짓 평화 / 거짓 사랑은 / 처음부터 이 땅에 /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 다오 / 어른도 어린이처럼 / 꿈을 많이 꾸어 행복한 나라에서 / 너처럼 웃으며 살게 해 다오.”(이해인, <어린이에게>)
가정은 인간이 사랑을 경험하는 최초의 공간입니다. 동시에 가정은 인간이 아픔을 경험하는 최초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가정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어야 합니다.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수용해 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많은 아이가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부모에게 최초의 폭력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십계명의 제5계명을 언급한 후에 뜻밖의 말을 덧붙입니다. 자녀들을 향해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말씀을 인용한 다음에 갑작스레 이 말을 덧붙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당시의 ‘아비들'(πατερες, 파테레스)은 절대적 권력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자녀를 감옥에 보낼 수 있었고, 노예로 팔거나,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거의 신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 아비들을 향해 바울은 자녀를 ‘노엽게'(παροργίζω, 파로르기조)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즉 자녀를 ‘화나게’ 혹은 ‘성나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비라고 해서 자녀를 함부로 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는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곧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양육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한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자녀를 위해 드리는 기도>에서 이렇게 풀었습니다. 이 기도가 오늘 우리 부모들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고쳐주소서. / 가끔 자녀를 나의 투자 대상으로 여기는 착각을, / 내 삶을 자녀에게서 보상받으려는 유혹을, /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했던 이기심을, / 그래서 그들이 내게 속해 있지만 내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소서… / 그들을 이끌어주되 강요하거나 협박하지 않고 / 그들을 돕되 대가를 기대하지 않으며 / 그들이 누릴 수 있는, / 실패할 수 있는 자유와 /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지 않게 하소서… / 매사에 그들을 존중함으로 존경받는 어린이 되게 하소서 / 그래서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유능한 사람, / 일류의 사람이 아니라 유일한 사람으로 / 우리 자녀들이 자라나게 하소서.”
자녀는 내게 속해 있지만 ‘내 것’이 아닙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부모도 부모로서 성장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서로 섬기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한 자녀들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 곧 어버이를 공경할 것입니다.
한문으로 어버이는 부친(父親), 모친(母親)이라고 합니다. 둘 다 ‘어버이 친(親)’ 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뜻글자는 우리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의 마음을 잘 담고 있습니다. 옛날 시골에는 닷새 만에 장이 서곤 했습니다. 장이 서면 아들은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장터로 팔러 갑니다. 집에 계시는 어머니는 농사일과 집안일을 하십니다. 하지만 생각은 장에 간 아들에게 가 있습니다. 오늘 갖고 간 물건을 잘 팔았는지, 누구와 시비는 붙지 않았는지… 어머니는 도통 자식 걱정뿐입니다. 어느덧 저녁이 되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아들은 돌아오질 않습니다.
저녁을 다 지어놓고 기다리다 못한 어머니는 동구 밖까지 나가봅니다. 언덕 위에 올라 보니 장터에 나갔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침 언덕 위에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 나무 위에 올라 멀리 장터를 바라봅니다. 바로 이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어버이 친(親)’ 자입니다. 이 글자는 ‘설 립(立)’ 자 아래 ‘나무 목(木)’ 자가 있고 그 옆에 ‘볼 견(見)’ 자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버이란, 나무 위에 올라가 서서 멀리 자식 오기를 바라보는 자입니다.
이에 못지않은 한자가 또 하나 있습니다. ‘효도 효(孝)’ 자입니다. 아들은 갖고 간 물건을 늦게까지 다 팔고서 고등어 몇 마리와 어머니께 드릴 물건 몇 가지를 사서 돌아옵니다. 그런데 동구 밖에서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아이고 어머니, 다시 아프실 텐데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제가 엎어드리겠습니다. 제 지게 위에 올라타세요.’ 그래서 효도 효자는 ‘아들 자(子)’ 위에 ‘늙은이 노(老)’ 자가 올라타고 있는 모습입니다. 지게 위에 늙은 어미나 아비를 업고 오는 자식의 모습, 그것이 바로 효입니다. 자나 깨나 자식 걱정에 동구 밖 언덕 위 나무 위로 위태롭게 오른 존재가 어버이이고, 그 어버이를 등에 업고 가는 존재가 바로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부모 자식에 대한 한자 문화권의 이해입니다.
예수님은 효자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 가운데 계실 때에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시고, 또 제자를 향해서는 “보라 네 어머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했습니다.(요한 19:26-27) 예수님은 그런 효자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어느 날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이 걱정되어 찾아왔을 때 사람들 앞에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가 3:31-35, 마태 12:46-50, 누가 8:19-21)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이 말을 듣고 매우 섭섭했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가정은 인간이 사랑을 경험하는 최초의 공간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고통을 경험하는 최초의 공간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가정은 가부장제의 축소판으로 여성과 어린이들과 장애인들이 소외되고 차별받는 곳이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라는 주님의 반문은 단순히 피를 나눴다고 가족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진정한 가족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까?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새 가족입니다. 세상의 가족은 인간의 피로 맺어지지만, 하나님의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집니다.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시고 갈라진 것을 자기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에베소서 2:16)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하나님의 새 가족이 만들어집니다.
며칠 전 선종(善終)하신 프란체스코 교황은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꽃이 꿀이 없으면 벌이 찾아오지 않는 것처럼 사람에게 따뜻함이 없으면 사람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꽃에 향기가 없으면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 것처럼 사람에게 사랑이 없으면 머물러 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꽃이 시들어 버리면 벌과 나비가 떠나가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 적막하면 사람들이 떠나게 됩니다. 항상 시들지 않고 꿀이 듬뿍 고여 있고 향기 나는 꽃처럼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아무 노력을 안 해도 저절로 건강한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따뜻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삭막하거나 적막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이라도 서로 찾아오지 않고, 찾아와도 머물지 않고, 곧 떠나게 될 것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이런 가정을 잘 돌보고 가꾸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으로 보듬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십시오. 그래야 아내 ‘오애순’이 남편 ‘양관식’이 세상을 떠날 때, “아까운 당신 수고많으셨습니다 / 아꼬운 당신 폭싹 속았수다”라며 진심 어린 사랑과 찬사의 박수를 보낸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지탱하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나의 “형제, 자매, 어머니”에게 진심 어린 사랑과 찬사의 박수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끝에 서면 / [우리는] 자신이 했던 어떤 일도 /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뿐입니다. // [나는] 행복했는가? / 다정했는가? / 자상했는가? // 남들을 보살피고 이해했는가? / 너그럽고 잘 베풀었는가? /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했는가?”(쇠렌 키르케고르, <천국으로 가는 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 그렇게 서로 섬기로 사랑하여 “항상 시들지 않고 꿀이 듬뿍 고여 있고 향기 나는 꽃처럼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장윤재목사, 이화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