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인 시편 55편은 “다윗의 마스길”이라는 표제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을 지은 사람은 다윗이며 마스길은 “교훈”이라고 하단부에 해석되어 있으니, 이 시편은 다윗이 이 시편을 듣거나 읽는 사람들을 교훈하려는 의도에서 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 시편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편의 배경은 다윗이 가장 절친한 친구로부터 배반을 당하여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12-13)
본문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비난하는 자가 차라리 내 원수였다면 내가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차라리 자기가 나보다 잘났다고 자랑하는 내 원수였다면, 나는 그들을 피하여서 숨기라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비난하는 자가 바로 너라니! 내 동료, 내 친구, 내 가까운 벗이라니!“
다윗을 대적한 사람은 다윗과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용장인 다윗의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와 전쟁터에서 같이 사선을 뛰어넘던 이들 중에서 동료의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료라고 해서 다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친구라는 용어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 중에서도 친우(벗)이라고 칭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말로 “친우”로 해석된 히브리어 원어는 “동거하다, 알다” 동사형인 “야다”의 강조적 수동태 분사형태이니, 친우는 상대를 알되 매우 깊숙이 알고 있음을 뜻합니다. 또한 14절에 의하면 그 친구는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에 함께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도 같이 드릴 정도로 신앙이 깊었던 친구였기에 이러한 친구의 갑작스러운 배반 앞에서 다윗은 망연자실해 있습니다.
학자들은 다윗에게 이처럼 큰 상실감을 준 친우를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쿠데타에 동조한 아히도벨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히도벨이라는 인물은 참으로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탁월했던지 “아히도벨의 계획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다윗은 삼국지의 제갈량과 같은 아히도벨을 자신의 모사, 즉 고문(대상 27:33)으로 삼았으니, 다윗이 그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친아들인 압살롬이 자신을 배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윗은 공황상태에 빠졌을 것인데, 자신의 오른팔이자 가장 절친했던 친구인 아히도벨의 배반은 다윗에게 극도의 고통과 고독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4-5)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에서 “심히 아파”로 해석된 원어의 의미는 “꼬다” 또는 “빙빙 돌리다”, “고통하다”이니, 그 뜻은 내장이 다 뒤틀리는 듯 심히 괴로운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사망의 위험이 자신에게 이르렀다고, 즉 죽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러한 극심한 심적 고통은 그를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적인 관계에서 가장 믿고 밀접했던 사람들로부터 배반당한 다윗은 어쩌면 허무, 허탈, 고독, 증오, 고통의 나락 속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자식을 원망하며, 친구를 저주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셨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이 왜 이처럼 자식으로부터 친구로부터 배신당하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원망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비둘기가 폭풍과 광풍을 피할 피난처를 찾듯이 다윗도 자신에게 엄습해오는 이 공포로부터 피할 곳과 안주할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는 과연 어디에서 피난처를 찾았습니까! 일국의 왕을 지낸 그가 비록 압살롬이 장기간에 걸쳐 쿠데타를 준비했을지라도 자신의 몸 하나 피할 곳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다윗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폭풍과 광풍으로부터 몸을 피할 피난처가 시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피난처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여 탄식하오니”(1-2)
그리고 3절 이하로 자신의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인지하고 있기에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고 쫓김을 당하는 절망의 순간 하나님께 자신을 의뢰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16)
어떤 대상을 믿는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현재의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반드시 구원해줄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을 찾게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빌 3:8-9)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가진 모든 명예와 소유를 ‘배설물’로 여기며 구원의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된 인생을 가장 큰 보람과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에 믿음도 연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아질수록 이와 비례해서 믿음도 더욱 견고해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윗은 과거의 삶속에서 얼마나 많은 시련과 위험에 처했었습니까! 바로 과거의 삶을 통해 그는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에 차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17)
두 번째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도와 간구를 지금 듣고 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1절과 2절의 외침과 상치되는 것 같지만, 17절의 믿음으로 1절과 2절을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 내 기도를 듣고 계시며, 간구하는 내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계시며, 반드시 내게 응답해주실 것입니다”로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우리의 기도생활에 대해서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권면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실존자가 아니라면 우리의 기도와 간구는 그저 공중에서 흩어져버리는 공허한 소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존자이시기에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계십니다.
3)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18)
세 번째로 다윗은 하나님은 평안의 근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5절의 두려움과 떨림과 공포에 휩싸였던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것임을 믿고 의지하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함이 가득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폭풍우 속에서 겁에 질려 사색이 되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폭풍우를 말씀으로 고요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혹여 자신들이 어떻게 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며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신의 쓰라림으로 커다란 괴로움에 처해 있던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말미암아 안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4) “옛부터 계시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낮추시리이다 그들은 변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이다”(19)
네 번째로 다윗은 하나님은 뿌린 대로 거두시는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다윗은 지금 자신을 배반하고 왕좌의 자리에서 의기양양하게 있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곧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을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로다”(23)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이들의 차지한 권좌는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권좌는 영원했나요? 압살롬은 요압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삼하 18:14-15). 아히도벨은 어떻습니까? 아히도벨이 하나님 편에 설 때에는 지혜롭고 권위 있는 모사로 존경을 받았으나, 그가 악인의 편에 설 때에 실패자가 되었고 하나님께도 버림받아, 결국 그는 나귀를 타고 고향에 돌아가 자살하지 않았습니까!(삼하 17:23) 우리 정치사를 살펴보아도 이런 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재물, 권력, 명예라는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곧 죽을지도 모르고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이 불쌍하게 생각됩니다. 자신을 배신한 벗의 최후를 아는 다윗은 상대방에게 대해 저주를 하고 있나요? 아마도 불나방을 보면서 느끼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즉 23절은 상대방에 대한 저주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하나님께서는 악인은 반드시 응징하시는 분이기에 죽음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같이 되지 말라는 권면의 말입니다.
다윗은 시편 55편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몇 가지 마스길(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살아가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과연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은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아야지만 하나님을 올바로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영원한 구원자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듣고 응답하시는 실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실존자로서 우리의 처지를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는 그분께 나아갈 때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근심과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대적하는 상대방이 지금 근심과 두려움에 더 싸여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과 상황이 무엇인가요? 오늘 살펴본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우리를 불안과 좌절에 휩싸이게 하는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믿음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아닙니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22)
기도)
우리의 구원자 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다시 한 번 바로 알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자식조차도 배신하는 것이 인간관계이고, 이로 인해 고통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약한 저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틈만 나면 하나님을 배신하는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고 오히려 무한하신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회복시켜주신 실존자이신 아버지이심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복된 하루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아직도 우리 주변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에 불나방같이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을 품고 이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오니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여주시옵소서. 이 순간 주님께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모든 짐을 다 놓습니다. 오늘의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함을 만끽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