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이 가능하십니까?
빌 4:1-7
어떤 국회의원이 사람들 앞에서 완벽한 연설을 하고 칭찬을 받으려는 듯 어떤 분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연설이 어땠느냐고 물었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그 사람은 “다음부터는 좀 더듬거리게!”라고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가 영국의 자랑 윈스턴 처칠입니다.
말을 완벽하게 한다고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 어눌한 면도 있어야 사람들이 편안합니다. 자신들이 들어갈 공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 공간이 관용으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개입하실 여지를 남겨 놓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들로 너희 관용을 알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알게 하라는 말은 P.R.하라, 선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관용의 삶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나타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관용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저절로 흘러나와서 모든 이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말씀합니다.
몇몇 사람에게, 혹은 나에게 잘하는 사람에게 관대하고 친절하기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나타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친한 사람 또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관용하라는 게 아니고, 우리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관용을 알게 하고 느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속에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나를 사사건건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나를 원수처럼 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 모두를 향하여 관용하라는 말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이기에 우리들이 관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우리의 본성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 관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가깝다는 것을 기억하고 관용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오시면 모든 일을 다 공의롭게 판단하시고 선악 간에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주 예수께서 가까이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을 그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직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관용입니다.
장차 우리가 가질 영원한 것은 너무도 크고 좋은 것인데 지금 작은 것에 얽매여 큰 것을 잃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큰 것을 품고 있으면 작은 것에 관용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들을 향한 최고의 관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하면, 형제간에, 또한 외인들을 향하여 관용하지 못할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사도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자신이 깨달은 체험을 신학적으로 표현합니다. 자신을 비우는 마음입니다. ‘케노시스(κενοσις, KENOSIS, 비움)’의 지혜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비우셨듯이 우리 자신을 비워나갈 때 관용의 삶이 하나씩 이루어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관용은 자신을 비워 상대방이 쉽게 들어올 틈을 주는 예수의 마음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빌 4:6)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빌 Philippians:5)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삶에 관용을
배우고 드러내게 하소서
자신을 비워 상대방을 품을 수 있게 하소서
예수의 심장, 그리스도의 마음울 품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아침의 기도와 찬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