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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감리교회 형성사

미국 감리교회 형성사

I. 들어가는 말

미국감리교회사를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중심으로 추적해 가고자 한다. 아직 한국교회에 미국감리교회사에 관한 논문들이 전무한 상황이기에, 본 연구는 각 시대마다의 역사적 상황과 감리교회사적 발전과정을 연관지어 고찰함으로써, 미국감리교회사가 미국의 일반적 역사상황과 맞물려서 어떻게 전개되어갔는지를 역사적 비평적 방법으로 보여 주고자한다.

또한 미국교회사에 관한 연구가 너무나 방대한 작업이기에 본 논문에서는 1968년 미국감리교회(The Methodist Church)와 복음주의형제교회(The Evangelical United Brethren Church)가 합동하여 미국연합감리교회(The United Methodist Church)를 형성한 시기까지만 제한적으로 취급하기로 하겠다.

그리고 시대구분은 미국일반사의 중요한 사건과 함께 감리교회가 어떻게 대응하며 복음의 빛을 발하였는지를 추적하는 시각에서 구분지었다. 역사란 때(time)와 환경(mileu)과 인물(people)이 함께 만들어가기에 이러한 역사적 환경과 때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참여로 발전하여 가기에 미국감리교회사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을 분별한 미국 감리교도들의 참여를 통하여 어떻게 미국감리교회사가 형성되고 발전되어 갔는지를 추적하여 가고자 한다.

 

Ⅱ. 미국선교의 개척기(1735-1773):

 

감리교회의 첫 미국선교는 1735년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들이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미국으로 오면서 시작되었다. 두 형제들의 선교는 20-30명으로 감리교도를 증가시켰고, 속회형태의 소그룹영성운동을 시작하였고, 첫 찬송가를 출판하기도 하였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존 웨슬리의 영적 상태로 인하여 성공적인 선교를 이룰 수 없었다. 찰스 웨슬리도 공군장교부인의 신앙상담이 오해를 받게 되자 1736년 영국으로 돌아가 버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존 웨슬리도 소피 합키(Sophey Hopkey)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으며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 합키에게 성만찬을 주지 않음으로 인하여 합키의 삼촌인 사바나시의 행정책임자(chief magistrate)에 의해서 체포당하고 법정에 자주 불리움을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1737년 조지아주 사바나시에서 밤에 도망치듯이 보스톤으로 올라가서 영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으로 갈 때도 풍랑을 만나서 불안해하면서 모라비안들의 평안하고 기뻐하는 믿음의 자세에서 큰 도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돌아올 때도 풍랑을 만나서 불안해하면서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회심시키러 갔다가 자신도 회심하지 못하였다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제1차 미국선교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 1739년과 1742년 사이에 옥스포드 감리교도였던 휫필드(Jeorge Whitefield)가 13차례나 미국을 오가면서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함께 미국의 제1차대각성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후에 웨슬리와 예정론논쟁을 벌이면서 칼빈주의적 감리교도(Calvinistic Methodist)로 나뉘어졌다.

그후에 미국땅에 감리교회를 조직화한 것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평신도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농부인 스트로브리지(Robert Strawbridge)가 1760년 메릴랜드에 감리교신도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목수요 선생인 엠베리(Philip Embury)가 1766년 뉴욕에서 감리교신도회를 시작하였고, 1767년 영국 육군 예비역 대위 웹(Thomas Webb)이 필라델피아와 다른 지역에서 감리교신도회를 조직하였다. 1766년까지 리즈버그(Leesburg), 버지니아(Virginia) 등에도 감리교신도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1768년 감리교를 위해 예배당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미국땅에 평신도설교가(lay preacher)가 들어가게 된 것은 메릴랜드에서 스트로브리지에 의해 개종한 사람들과 뉴욕신도회의 이사 토마스 테일러(Thomas Taylor)가 편지로 웨슬리에게 요청하자 웨슬리가 미국선교봉사자로 자원할 사람들을 호소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리차드 보드만(Richard Boardman)과 조셉 필모어(Josph Pilmore)가 헌신하기로 결단하였다. 보드만과 필모어는 1769년 10월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메릴랜드와 뉴욕에서만 설교활동을 시작할 줄 알았는데, 이미 웹 대위에 의해 조직된 필라델피아감리교신도회가 100여명 이상의 회원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게되어 필모어는 필라델피아에서 남아서 이 그룹을 인도하는 설교자가 되었다. 그리고 보드만은 웨슬리에 의해 미국의 웨슬리 최고 동역자(chief assitant) 로 일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1770년 필모어는 웨슬리에게 두명의 설교가가 더 필요하다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5명이 자원하였는데 웨슬리에의해 선택된 프란시스 에즈베리(Francis Asbury)와 리차드 라이트(Richard Wright)는 성공적인 설교가들이 되었다. 특별히 26세의 에즈베리는 곧 보드만의 뒤를 이어 미국내의 웨슬리의 동역자(assistant)가 되었다.

필모어는 감리교회를 위해 장기적이고 중요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펜실베니아, 매릴랜드, 버지니아, 노스 캘로라니나와 사우스 캘로라이나, 그리고 조지아를 여행하였다. 그는 1772년 5월 26일 남부로 향한 여행을 시작하여 1775년 6월까지 계속여행하였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첫째로 미국감리교회를 웨슬리의 지도력아래 하나로(oneness) 묶게 하였고, 둘째로 감리교운동을 위한 많은 친구들을 만들게 되었고, 셋째로 벌티모어와 노르폭에 새 신도회들을 조직하였고, 넷째로 교회밖 옥외에서 연극장에서, 나무아래서, 법정에서, 술집에서 설교하기도 하였다.

 

 

Ⅲ. 미국감리교회의 형성기(1773-1784):

 

A. 역사적 상황:

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미국독립전쟁이었다. 당시 토리당파를 지지했던 웨슬리는 미국독립전쟁을 지지할 수 없었다. 독립을 요구하는 것은 세금을 낼 수 있는 중산층들의 교만한 요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미국식민지인들은 마땅히 영국정부에 세금을 내야 한다는 영국국회의 결의를 지지하였다. 많은 감리교설교가들은 단지 감리교도라는 이유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독립전쟁당시 모든 감리교회설교가들은 영국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여 모두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에즈베리(Francis Asbury)와 뎀스터(James Dempster)만 돌아오지 않았다. 뎀스터는 후에 장로교로 가버렸다. 에즈베리는 이 중요한 역사적 시기에 미국에 남아있었고 독립전쟁을 지지하였기에 후에 미국감리교회의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1777년 에즈베리는 랭킨(Rankin)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인들은 자유로운 독립국가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독립전쟁이 끝나고 1783년 9월3일 파리조약(Treaty of Paris)에서 미국이 독립국가임을 인정하게 되었고, 1787년 9월 17일 미국의 새 헌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급변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미국감리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B. 미국감리교설교가들의 첫연회:

1773년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모든 감리교 설교가들이 함께 모이는 연회가 개최되었다. 10명의 평신도설교가들(lay preachers)이 모여 네 가지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

첫째로, 모든 미국내의 감리교도들은 존 웨슬리의 영적 지도력 아래 연합해야함을 결의하였다. 둘째로, 모든 평신도 설교가들이 성례전을 집례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직안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웨슬리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웨슬리의 저술들이나 찬송가를 복사할 수 없다는 것도 결의하였다. 넷째로, 감리교회의 교리와 장정을 준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모든 감리교회의 교인들은 신도회모임에 출석해야 하고 애찬회(love feast) 모임에 출석해야 하고, 모든 목회자들은 6개월마다 보고서를 작성해야함을 결의하였다. 이것이 매해 연회를 위한 통계보고의 자료가 되었다. 1773년에 등록된 교인들은 뉴욕에서 180명, 필라델피아에서 180명, 뉴저지에서 200명, 메릴랜드에서 500명, 버지니아에서 100명, 총 1,160명이었다. 1775년까지 웨슬리에 의해 임명된 감리교 설교가들은 모두 8명이었다.

독립전쟁으로 인하여 뉴욕지역에서는 많은 감리교신도들이 감소하였으나, 기타 지역에서는 오히려 박해 속에서 성장하여 1776년부터 1783년까지 13,740명으로 세배나 증가하였다. 독립전쟁중에 일어난 중요한 문제는 성례전집례문제였다. 독립전쟁으로 인하여 영국성공회에 소속된 감리교회 목사들은 돌아가고 남아있는 평신도설교가들은 안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례전을 집행할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어떤 설교가들은 설교를 할 수 있다면 성례전을 베풀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남부에서는 서로 안수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러나 에즈베리와 북부설교가들은 성례전집행을 거부하였다.

웨슬리는 이러한 미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에는 영국성공회감독이 없었다. 웨슬리는 킹(Lord Peter King)의 초대교회에 관한 저술( Account of Early Christian Church)을 읽고 감독뿐만아니라 목사도 안수줄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또한 감독 스틸링프리트(Bishop Edward Stillingfleet)의 영향도 있었다. 그러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는 반대하였다. 안수를 베풀면 사실상 영국성공회와 분열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존은 콕(Thomas Coke)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과 의논한 후 결단을 내리게 되어, 1784년 9월 1일 오전 4:00 영국성공회목사 크레이톤(Thomas Creighton)의 보좌로 와트코트(Richard Whatcoat)와 베이지(Thomas Vasey)에게 준회원목사안수(deacon pastor)를 베풀고 그 다음날 정회원목사안수(elder pastor)를 베풀었다. 그리고 이미 영국성공회에서 안수를 받은 콕(Coke)에게는 미국감리교회를 위한 감리사(general superintendent)로 안수하였다. 그리고 웨슬리는 그가 싸인한 안수증서를 주었다. 그 편지안에 웨슬리는 초대교회의 예를 들면서 감독과 목사가 동등하게 안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짐을 강조하였다. 이미 목사로 안수받은 콕을 존 웨슬리가 다시 감리사로 안수하였으니 웨슬리는 사실상 감독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또한 매주 성만찬을 집례할 것을 주장하였고, 콕과 에즈베리가 공동으로 미국감리사직을 수행할 것을 명시하였다. 또한 예배순서(The Sunday Service of the Methodists in North America)를 만들어 동봉하였고, 영국성공회의 39개조를 24개조로 줄여서 만들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9월 18일에 미국으로 항해하여 11월 3일 뉴욕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에 이르러 웨슬리의 미국감리교회에 대한 계획을 공개하였고, 델라웨어에서 에즈베리를 만났다.

그리고는 역사적인 1784년 크리스마스연회(Christmas Conference)를 발티모어(Baltimore) 러브리 레인 교회(Lovely Lane Chapel)에서 가질 것을 합의하였다. 이 크리스마스연회는 가장 많은 설교가들이 참석하는 연회가 되었다. 81명의 미국감리교회설교가들 중에 60명이 참석하였다. 다섯가지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 첫째로, 감리교회운동(Methodist movement)을 미국 감리교회 감독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in America)로 조직하게 되었다. 둘째로, 만일 미국설교가들의 합의가 없으면 웨슬리의 감리사임명을 거부하기로 하였던 에즈베리를 만장일치로 감리사로 추천하였다. 첫째날 준회원목사(deacon pastor)를 받고, 둘쩨날 정회원목사안수(elder pastor)를 받고, 셋째날 감리사안수를 받았다. 후에 감리사(superintendent)는 감독(bishop)이란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웨슬리는 감리사를 감독으로 부르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셋째로, 39개조를 24개조로 웨슬리가 줄인 것을 받아들이되 25개조를 하나 더 추가하기로 결의하였다. 웨슬리의 설교와 신약성서주해를 교리의 표준으로 삼는 것을 하나 더 추가하였다. 새 미국교회는 웨슬리의 철야기도회전통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찬양부르기, 간증, 기도 등을 철야기도회에서 강조하고 새해이브철야기도회로 발전시켰다. 계약갱신예배(Covenant Service), 애찬회(Lovefeast)등도 계속 받아들였다. 넷째로, 설교가들은 약으로 쓰는 목적이외에 술취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결의하였다. 다섯째로,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 크리스마스연회에서 감리교신도회(Methodist Society)를 감리교회(Methodist Church)라고 부르는 결정을 하지는 않았으나 이 때부터 사실상 감리교회가 된 것이다. 웨슬리는 미국감리교도를 위해 보낸 예배서(service book)에서는 감리교회를 명시하지 않았으나 세례예문(service of baptism)에서는 감리교회란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가 강조하는 교회론은 보편적 교회(universal church)이다. 모든 신도 개개인도 공동체의식을 가져함을 강조한다. 결국 영국에서부터 시작된 감리교운동은 오랜세월을 거쳐서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란 이름으로 제도적교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Ⅳ. 미국감리교회의 성장기(1784-1816):

 

1785년 연회는 1784년 연회에서 결정된 헌법을 재확인하였다. 웨슬리의 견해를 따라 교회통치구조를 감독체제로 만들었다. 준회원(deacon), 정회원(elder), 감리사(superintendent)의 구조로 조직하였다. 20명의 정회원들과 4명의 준회원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을 관리하는 감리사 제도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통치구조에 있어서 교역자와 평신도의 숫자를 동수로 만들었다. 이것은 감리교운영의 민주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감리사(superintendent)의 직책은 “사회하는 정회원(presiding elders)”, “지역을 관리하는 지방감리사(district superintendent),” “감리교도라고 불리우는 사람들(people called Methodist)”에게 세례와 성만찬을 베푸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초기 장정이 언급하는 감독의 직능은 목사의 임명, 연회의 사회, 목사를 바꾸고 받고 시험하는 임무, 연대구조를 통한 여행, 영적 세속적 업무관장 등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독립교회가 되었을지라도 계속 신도회(society)에 소속한 회원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혼동의 요소가 되기도 하였지만, 또한 강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감리교도들이 급성장하여 5년 후인 1790년 57,631명으로 늘어났고, 15년 후인 1805년 120,000명으로 증가하였다.

미국감리교인들은 유럽과 미국의 감리교지도자들이 웨슬리와 콕과 에즈베리라고 생각하였으나, 미국의 감리교회의 감독은 콕과 에즈베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콕이 미국을 떠나 영국과 아일랜드 선교를 위해 유럽에 있는 동안은 미국감리교회교인들은 콕을 그들의 감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특히 West Indies 에서 흑인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하면서 점점 미국감리교회내의 행정적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1814년 인도(India)로 선교여행을 가던 중 사망하였다. 그래서 콕은 미국감리교회내에서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하였고 에즈베리 중심의 감리교회가 되었다. 에즈베리는 미국전역을 말을 타고 다니면서 열심히 감독직을 수행하다 보니까 명실상부 미국의 지도자로 부상하였고, 그는 독립전쟁시에도 미국을 떠나지 않고 박해 속에서도 선교활동을 지속적으로 한 점 등이 그를 지도자로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감리교회안에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는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1792년에 벌티모어에서 개최된 제1회 총회(general conference)에서 오켈리(James O’kelly)가 에즈베리의 발을 잡는 제안을 하였다. 감독이 설교가들을 임명한 후에 그 임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설교가들은 연회에 거부 의사를 호소할 수 있고, 연회가 그 거부의사를 받아들이면 감독은 그를 다른 지역(circuit)으로 임명해야한다는 의견을 상정한 것이다. 이 때부터 4년에 한번씩 총회를 갖기로 하여 1796년에 개최된 제2차 총회에서 역시 오켈리의 안이 거론되었다. 그래서 감리교회내의 권위와 자유의 긴장, 지도력의 중앙집권화와 민주주의의 긴장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이 분쟁으로 1795년 3,670명의 교인들을 잃어버렸다.

에즈베리는 웨슬리의 복사판이라고 부를 정도로 웨슬리와 유사한 지도자였다. 엄격하고, 지배적이고, 헌신적이고, 사랑과 존경을 받은 감독으로, 감독제가 그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가 감독제를 만들었다고 노르우드는 해석한다. 또한 콕이 제일 먼저 총리사(general superintendent)로 임명되었지만, 감독직을 만든 사람은 에즈베리였다. 1805년 일기에서 그가 회상하기를 그의 감독직의 권위는 하나님의 부르심, 미국선교를 가장 오래한 것, 크리스마스연회에서 선출된 것, 콕과 다른 목사들에 의한 선출, 사도적인 징표라고 하였다. 그는 너무나 금욕적이여서 건강이 안좋았다. 1816년 에즈베리가 죽은 후에 에녹 조지(Enoch George)와 로버트 로버츠(Robert R. Roberts)가 총회에서 감독으로 선출되면서 감독의 직무가 바뀌었다.

그러나 1800년부터 1850년까지 속회를 통하여 감리교회가 급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1800년부터 1850년까지 영국에서도 광부노조속회, 노동자노조속회, 농민노조속회 등이 발전하여 감리교인들이 6배나 증가하였다. 역시 영국감리교회처럼 12명의 속도와 1명의 속장으로 이루어진 속회는 기도와 성서연구와 개인간증와 영적훈련 등으로 진행되었다. 속회를 통하여 영적, 인격적 친교를 경험하게 되었다. 속장은 목회적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평신도인 속장이 만인제사장설에 근거하여 적극적으로 일하게 됨으로써 속회가 활성화 되었다.

지역설교가(local preacher)는 안수받지 않고 그가 사는 지역에서 설교하는 평신도설교가였다. 평신도설교가는 연회원은 아니었다. 평신도설교가가 때때로 안수를 받아서 순회설교가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준회원안수와 정회원안수를 거쳐 연회의 정회원이 되는 단계를 밟게 된 것이다. 1796년부터 총회에서 지역설교가의 설교자격증을 부여하게 되었는데, 신도회로부터 추천을 받고 지역회(circuit)에서 시험을 치면 자격증을 받게 되었다. 또한 1812년 총회에서는 준회원 안수를 받고 4년간 봉사하면 정회원 안수를 받는 제도를 만들게 되었다.

지역설교가들보다도 더욱 높은 지위에서 설교하며 선교활동을 하였던 사람들이 순회설교가(circuit rider)들이었다. 순회설교가들이 결혼을 하면 아내와 자녀 등 가족들을 돌보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기에, 웨슬리와 에즈베리는 독신생활을 강조하였다. 1809년 버지니아 연회에서 84명의 회원 중 3명만 결혼하였다. 그리고 서리순회설교기간 동안 결혼하면 정회원이 될 수 없었고, 만일 정회원이 된 다음 4년 안에 결혼하면 아주 시골 가난한 지역(circuit)에 임명되었다. 새들이 노는 한가한 곳에서 그들의 하니문을 즐기게 하였다. 1816년 에즈베리가 죽을 때까지 독신 목회가 강조되었다. 결국 존 웨슬리와 에즈베리는 독신생활을 통하여 감리교선교에 헌신하였으며, 찰스 웨슬리와 콕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였다. 순회설교자가 되는 단계는 다음과 같다: 감리교회원(Methodist member)-속장-권면자(exhorter)-지역설교가-순회설교가(서리)-순회설교가(준회원)-순회설교가(정회원). 지역설교가들은 안수받지 않은 평신도설교가들이었다. 그러다가 서리순회설교가, 준회원순회설교가안수, 정회원순회설교가안수를 거쳐 연회의 회원이 되는 것이다. 1796년 총회에서부터 신도회(society)로부터 추천을 받고 지역회( circuit)의 연회에서 시험을 치면 안수를 받게 되었다. 1856년 브룬슨(Alfred Brunson)이 순회설교가의 네가지 특징과 세가지 자격을 제안하였는데, 모든 감리교설교가들이 동의하였다. 네가지 성격은 첫째, 회심, 둘째, 열매, 셋째, 하나님의 부르심, 넷째, 교회로부터의 인정이다. 그리고 세가지 자격은 분명한 언변과 상식을 갖추는 것, 계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 훈련과 준비를 통해 기술을 연마하는 것 등이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를 가장 중요한 자격으로 생각하였다. 순회설교가들의 그 지역내의 시무기간을 처음에는 매분기마다(3개월)로 한정하였으나, 1804년 부터는 1년에 한번씩 바꾸되 2년이 최대한도기간으로 생각하였고, 1864년 부터는 3년으로 제한하였고, 1866년 부터는 4년으로 제한하였다.

 

V. 미국감리교회발전기 (1816-1843)

A. 역사적 상황:

에즈베리가 사망한 1816년 청년 미국은 첫 청교도 조상들의 가나안 약속을 실현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영토를 더욱 확장하여가기 시작하였고, 농업과 산업을 발전시켰고, 유럽과 영국으로부터 이민이 늘어나면서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1815년 9백만이었던 인구가 1850년 2천 3백만으로 늘어났다. 특히 농기구의 기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농사기술도 상당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기차와 증기선박과 운하와 고속도로가 발전하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미래에 대해 긍정적이고 낙관주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고, 몬로독트린과 잭슨민주주의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탐험하고 정착하는 개척자의 모험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 기간동안 제2차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감리교회의 천막집회(camp meeting)운동이 강하게 일어나서 감리교회는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1787년 버지니아에서부터 놀라운 천막집회운동이 시작된다. 그리고 에즈베리가 죽은 1816년은 이 제2차대각성운동이 중반기에 이르는 시기였다. 이 대각성운동의 주요현상은 죄인들을 회심시키는 것이다. 설교가들과 평신도지도자들에 의해 수천명의 교인들이 회심을 경험하였다. 이 영적 각성운동은 네 가지 단계를 통해서 일어났다. 첫째, 죄책의식에 사로잡힌다. 둘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서 절망을 경험한다. 셋째, 죄인들을 그리스도신앙으로 화해케 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에 대하여 희망을 갖는다. 넷째, 구원의 확증을 갖는다. 죄의식, 심판에 대한 절망, 구원의 희망은 구원의 기쁨을 가져온다. 이것이 부흥회와 천막집회의 목표였다. 이 대각성운동에 대하여 피상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감성적 성격의 운동이라고 비판하면서 더욱 지성적인 종교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고, 더욱 전통적이고 형식적인 종교분위기를 열망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반부흥적인 분파(antirevivalism)와 부흥회지지파(prorevivalism)로 나뉘어졌다. 이 운동으로 장로교회와 침례교회와 감리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

또한 이 제2차대각성운동은 제1차대각성운동보다 더욱 개인변화를 넘어서서 사회변혁을 열망하게 되었다. 모든 미국생활을 기독교화하고 사회악을 공격하기 위한 봉사단체를 구성하였다. 가난한자들을 돕는 자원봉사운동이 일어났고, 여성도 대학을 들어가는 등 여성권익을 위한 조직화운동도 일어났으며, 노예제도 페지등 도덕적 불의를 제거하는 청교도선조들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천년왕국적 이상을 위해 부흥운동과 사회개혁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필수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B. 부흥운동과 천막집회: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뉴잉글랜드지역 초월주의(Transacendentalism)자들인 토로우(Thoreau), 어빙(Irving), 롱펠로우(Longfellow) 등 지성적인 문학가들의 지지를 통하여 낭만적, 감정적, 체험적 종교가 부흥하게 되었다. 일반대중들은 문학적 철학적 낭만주의에 대하여 잘 몰랐지만, 거듭남을 비롯한 영적 경험에 대해서는 잘 알게 되었다. 문학적 철학적 낭만주의가 종교적 영적 낭만주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1784년 크리스마스연회에 의해 시작된 미감리교회는 2년 후 1787년 버지니아(Virginia)에서 미감리교회는 놀라운 경험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독립전쟁이후 낙관주의적인 사회심리가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버지니아뿐 아니라 모든 지역에 대중부흥운동과 천막집회운동이 확산되어지게 된 것이다.

예일대학교를 중심으로 티모디 드와이트(Timothy Dwight)가 이끄는 부흥운동은 학생의 1/3이 거듭나는 경험을 하는 변화를 일으켰다. 대학 캠퍼스에서 대학 캠퍼스로, 교파에서 교파로, 지역에서 지역으로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11년 미국의 중서부(Midwest) 지역에 영적 지진이 일어나고, 1812년 서부연회(Western Conference)에 많은 교인들이 등록하는 일이 일어났다.

흥미있는 사실은 칼빈주의자요 장로교설교가인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는 웨슬리적 완전주의(perfectionism)에 영향을 받아 완전교리를 설교하였다. 그는 뉴잉글랜드와 동부에서 부흥운동을 시작하여 1835년에는 오하이오 오벌린대학(Oberlin College)의 교수가 되고 총장이 되기도 하였다. 웨슬리가 강조하였듯이 피니는 개인의 내면적 변화를 강조할 뿐아니라 사회의 궁극적 변화를 강조하였다. 개인의 내면적 실제적 변화(inherent)는 사회구조적 변화(inherent)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웨슬리처럼 피니는 시장경제를 비판하였다.

피니는 노예제도폐지, 여성의 대학입학허용, 여성목사안수 등 다양한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하였다.

이 피니의 운동을 영향을 받은 감리교지도자는 피비 파머(Phoebe Palmer)였다. 그녀는 1857년부터 감리교여성평신도지도자로 성결운동(hoiliness movement)의 가장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대각성운동의 프로그램중 가장 괄목할만한 것은 천막집회였다. 천막집회의 제1단계는 감리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사이에 에큐메니칼적인 연대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교회음악으로 흑인영가(Negro spiritual)가 발전되기도 하였다. 목요일 혹은 금요일에 나팔을 불면서 시작한다. 오전 8:00, 11:00, 오후 3:00 하루 세 번씩 촛불을 밝히면서 일어난다. 4일에서 6일간 계속된다. 수백명에서 수천명이 모여든다. 밤에는 별과 캠프파이어가 함께 빛난다. 한마음과 한목소리의 찬양이 터져 나온다. 제단 주위에는 참회하는 성도들로 가득찬다. 가디스(Maxwell Gaddis)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나는 저녁 7:00시에 설교하기로 되었다. 시간이 되자 설교를 알리는 트럼핏트가 울려 펴졌다. …… 모임은 능력과 위대한 영광으로 진행되었다. …… 나는 “당신들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마끼십시오. 주님은 당신들을 돌보십니다. …… 당신들은 사람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주님께서는 그 도시를 당신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설교하자 모든 회중이 일어서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목욕하게 되었습니다. 50명 이상이 믿음안에서 참 평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천막 속에 태양이 뜨기 전에……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기도하고 찬양하였다. 감리사같은 지도자가 마지막으로 연설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악수하며 자유스럽게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서로 헤어지는 것을 아쉬어하는 마음의 아픔이 있었고, 서로 다시 만나는 희망 속에서 헤어졌다. 천막집회에 관한 책과 팜플렛들이 나왔고, 속회에 관한 책들도 나왔다. 25년동안 천막집회가 영성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천막집회는 회심만아니라 신앙교육과 영성훈련의 중심이 되었다.

유명한 천막집회노래는 다음과같은 평등주의신학을 말한다.

 

“허기진채로 오라! 목마른 채로 오라! 누더기 걸친 채로 오라!

벌거벗은 채로 오라! 더러운 채로 오라! 이가 들끓는 채로 오라!

외로운 채로 오라! 당신의 모습, 그대로 오라!”

 

감리교회의 평등주의신학은 인간의 완전과 도덕적 상태의 완전을 지향하는 개혁의 부흥운동을 위해 기초를 놓은 강력한 힘이었다.

이러한 부흥의 원인을 세가지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설교가들과 평신도들의 비상한 헌신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시대의 조건에 맞는 조직화를 이룬 것을 또하나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셋째, 예배, 넷째, 교육이라고 볼 수 있다.

첫째로 헌신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감리교회설교가들은 설교에 대한 사명의식과 소명감이 강했다. 설교가들은 설교하는 것, 속회들을 조직하는 것, 병자들을 방문하는 것, 신앙이 연약한자들을 위로하는 것, 믿음이 강한 자들을 돕고 용기를 주는 것,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 경건문학을 편집하는 것, 평신도들에게 모범된 생활을 하는 것 등에 열심을 다하였다. 설교가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인건비는 작게 받았다. 1816년 설교가들은 1년 봉급이 60달라에 교통비를 더 받았다. 1843년에는 독신은 100달라, 결혼한 사람은 200달라를 지불했고 14세이하의 어린이를 위해 25달라씩 추가로 지불하였다. 또한 미국감리교회는 웨슬리당시의 영국감리교회의 연합신도회규칙(the Rules of United Methodist Societies)와 밴드규칙(the Rules of Band)에서 강조한 엄격한 성화생활규칙을 1784년 크리스마스연회에서 다시 채택하여 미국감리교회를 위한 규칙(the General Rules)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계속 성직자와 평신도의 생활원칙으로 삼았다. 곧 감리교도는 모든 종류의 악을 피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안식일을 준수하고, 술취하지 말아야하고, 금을 비롯하여 값비싼 의복을 입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방해가 되는 저속한 노래를 부르거나 저속한 책을 읽는 것을 금해야 하고, 보물을 땅에 쌓아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감리교성직자들이나 평신도들은 선을 행하기를 힘쓰되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고, 병든자들과 갇힌자들을 방문하기를 힘썼다. 그리고 날마다 자기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공중예배와 성만찬식에 참석하기를 힘쓰고, 개인기도와 금식기도와 성경연구를 힘썼다. 이러한 내면적 성결훈련 곧 온갖 세속성과 죄악성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힘쓰고, 또한 동시에 세상속으로 성육신하여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랑의 실천훈련을 힘씀으로 성화되기를 사모하는 것이 미국감리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두 번째 부흥의 원인은 조직화(organization)에 있었다. 웨슬리의 소그룹영성운동의 핵심이었던 속회가 농촌지역과 서부개척지역에서 특별히 잘 활성화되었다. 속도들은 3명 혹은 네 명에서 50명 혹은 그 이상이었다. 순회설교가가 각 속회를 가능한한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순회설교가는 평신도 중에서 속장을 임명하였다. 속장은 매주속회모임을 인도하였고, 기도와 성경공부와 권면과 영적으로 상호 용기를 주는 것을 통하여 신앙을 돈독히 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속회제도는 비단 미국감리교회뿐만아니라 후에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로 합쳐진 복음주의 협의회(Evangelical Association)와 연합형제교회(United Brethren Church)에서도 활발하게 활용되어졌다. 그리고 총회와 연회는 합법적인 정책을 만들었고, 감독들은 합법적으로 선출이 되었다.

세 번째 부흥의 원인은 예배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읽기, 설교, 권면, 기도와 찬양은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천막집회에서나 모일 때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예배행위들이었다. 찬양을 부르는 것은 매우 인기 있었다. 찬양들은 설교가나 찬양인도자에 의해 가르쳐졌다. 인도자는 회중들이 찬송을 잘 부를 때까지 앞에서 인도하였다. 찬송가들은 또한 쉽게 구할 수가 있었다. 예배의 핵심은 역시 설교였다. 설교는 성경구절에 근거하였다. 설교는 흔히 확신과 열정으로 선포되었다. 설교와 예배는 회개에로의 초대, 그리스도영접, 교회교인으로의 등록으로 끝맺는 것이 상례였다. 세례는 침례와 뿌리는 것과 붓는 것 등 세가지가 다양하게 수용되었다. 성만찬은 빈번하게 행해지지 않았지만, 아주 귀한 예식으로 생각하였다. 성직자의 수가 작았기 때문에 감리교도들은 매분기(일년에 네 번씩)마다 성만찬식을 행하였다. 미감리교회의 표준예문과 예식이 있었지만, 어떤 성직자들은 그들 자신의 양식으로 집행하였다. 감리교도들이 가진 다른 예배형식은 애찬회(LOVE FEASTS), 철야기도회, 회중금식 등이다. 형제교단(The United Brethren)은 세족례를 자주 가졌다. 속회는 집에서 모였고 천막집회는 야외에서 모였지만, 집회장소를 건축하는 것은 아주 적극적이었다. 초기 모임장소는 단순한 구조였다. 큰 통나무 오두막이상이 아니었다. 특히 서부개척지역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더욱 안정된 지역 건물들은 연방정부 건축 양식을 따라서 지었다. 성직자들의 복장은 보통 평범하고 단순하였다. 그러나 어떤 감리교설교가들은 가운을 입는 것을 더욱 좋아하였다.

네 번째 부흥의 원인은 교육이었다. 감리교설교가들은 1824년 총회의 결의에따라서 교회학교의 설립과 발전을 권면하였다. 3년후에 감리교교회학교연합회가 구성되었다. 미감리교회는 교회학교이외에 일반학교설립도 추진하였다. 1815년 메사추세츠 윌브라함에 웨슬리아카데미(Wesley Academy)를, 1830년에는 버지니아에 랜돌프 마콘 대학(Randolph Macon College)를, 1831년 커네티커트에 웨슬리대학교를, 1835년 일리노이에 맥켄드리 대학(McKendree College)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젊은 목회자들을 위한 신학교육에는 반대가 많았다. 목회를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만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신학교육은 전도와 인격적 경건을 위한 목회자들의 열심을 감소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교육받은 목회자들과 교육받지 못한 목회자들 사이에 분열을 가져 오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사이에 지적인 거리감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목회에 대한 더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교육프로그램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1816년 총회는 연회가 목회자후보생들을 위해 교육프로그램을 조직할 것을 권면하였다. 어떤 연회들은 효과적인 연구프로그램들을 개발하였다. 1841년 벌몬트주(Vermont) 뉴베리(Newbury)에 뉴베리성서신학교(the Newbury Biblical Institute)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교육의 활성화는 부흥의 중요한요인이 되었다.

네 번째 부흥의 원동력은 선교활동에 있었다. 교회는 국내와 해외의 비갱종자들을 선교하는데 큰 관심을가졌다. 선교회들은 전략들을 개발하고 선교를 위한 기금들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1820년 미감리교감독교회의 선교회(the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가 총회의 결의에 따라 결성되었다. 이것은 과거의 비공식적 선교조직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의 목적은 선교활동을 위한 기금을 확보하는 것과 선교적 노력의 중요성을 유지하는 것에 있었다. 서부개척지역과 도시들과 인디언들과 흑인들 속의 선교활동은 여러 연회들과 선교회에 의하여 착수되었다. 미감리교단의 첫 해외선교는 1833년 리비아와 1835년 남아메리카에서 이루어졌다.

다섯 번째 부흥운동의 원인은 출판사업에 있었다. 웨슬리는 일찍이 출판활동에 모범을 보여주었다. 크리스천은 기독교서적을 읽음으로써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크리스천문고”(Christian Library)를 만들었다. 좋은 책들과 자료들을 출판하고 보급하

좋은 책들과 자료들을 출판하고 보급하는 일을 웨슬리자신이 엡웟출판사(the Epworth Press)를 통하여 전개하였던 것이다. 미국감리교도들도 그의 뒤를 따라서 1789년 첫 감리교출판사 “The Methodist Book Concern”을 만들었다. 19세기에도 Joshua Soule, Nahan Bangs, Beverly Waugh 등 탁월한 메니저들에 의해 책과 팜플렛뿐아니라 교단 신학잡지까지도 출판하게 되었다. 또한 여성과 자녀들과 청년들과 교회학교를 위한 자료들을 다양하게 출판하였다. 1826년에는 “Christian Advocate”라는 주간 신문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본래 이 출판사는 필라델피아에 있었는데 1804년 뉴욕시로 옮기게 되었다.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지사를 두게 되었다. 이 출판사의 이익금은 은퇴교역자들과 과부들과 고아들을 지원하는데 쓰여지게 되었다.

 

Ⅵ. 미감리교회의 분열기(1844-1865)

A. 역사적 상황

미국독립전쟁 이후 미국인들은 더욱 노예제도에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노예문제는 교회사와 경제사의 복합적인 혼합 속에서 이루어진 문제였다. 1790년 가장 우수한 노예의 몸값이 300불, 1830년에는 1200불, 1860년에는 2000불이었다. 노예를 부리는 것과 노예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 사이의 대립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국가로써의 미국의 꿈은 노예제도를 폐기하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노예를 폐지해야한다는 감정은 서서히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제2차대각성운동을 통하여 노예제도개혁에 대해 더욱더 적극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183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예폐지운동이 더욱 활성화되기 시작하였고 1833년에 일리암 개리슨(William Lloyd Garrison)이 미국노예폐지운동회(the American Anti-Slavery Society)가 만들어지게 되었을 때 노예의 즉각적인 해방을 강하게 요구하게됨으로써, 미국이 강하게 양극화되게 되기 시작하였다. 남과 북이 각각 다르게 반응함으로써 1840년에 들어서면서 국가적 연대감이 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분열은 동시에 교회적인 분열을 가져오게 하였다. 노예문제는 장로교회와 침례교회와 감리교회의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특히 감리교회는 가장 크고 영향력있는 교단이었기에 감리교회의 분열은 1861년 미국의 정치적 분열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하게된 것이다. 감리교회는 웨슬리의 반노예제도사상의 그늘아래 있었다. 웨슬리는 1774년 “노예제도를 논박함”(Thoughts Upon Slavery)을 출판하였다. 웨슬리는 노예제도는 총체적 악으로 생각하였고 미국노예제도는 해 아래에서 행하여지는 가장 큰 악으로 생각하였다. 1836년과 1840년 총회에서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토론을 벌였다. 많은 남과 북에 있는 감리교도들은 경제적 이유뿐만 아니라 종교적 성서적 이유에서 지지하기도하였다. 어떤 교도들은 이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문제이고 비종교적인 문제로 생각하여 교회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간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감독들은 이 문제가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노예반대운동은 특별히 서북지역감리교회들을 강하게 뭉치게 만들었다. 뉴잉글랜드연회원이고 강하게 노예제도를 반대하였던 오렌지 스카트(Orange Scott)는 1843년 감리교회의 미온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웨슬리감리교회(the Wesley Methodist Church)를 조직하면서 북감리교도들 속에 강하게 노예반대운동을 가속화시켰다. 미감리교회 안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결정적으로 느끼게 한 사건이 되었다.

 

B. 1844년 총회와 미감리교회의 분열

1844년 뉴욕시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총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남부교역자들의 많은 퍼센트가 노예를 소유한 목사들이었다. 그래서 남부목회자들은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불평등하도록 기름부음받았다고 생각하였다. 노예제도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성서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하나님의 명령이요 인간사랑의 법칙이라고 하였다. 두 가지 기본적이고 서로 상관된 이슈가 함께 나타났는데, 노예제도와 총회의 힘과 감독의 힘 사이의 관계를 인하여 갈등하게 된 것이다. 다섯 감독 중의 하나인 제임스 앤드류 감독(Bishop James O. Andrew)이 첫째 부인이 데려온 두 흑인노예가 있었는데 노예들을 남겨둔 채 죽었고, 다시 결혼한 둘째 부인이 역시 노예들을 결혼 전에 이미 소유하고 있다가 결혼하면서 데리고 왔다. 앤드류감독은 노예를 사고 판 적이 없다고 호소하였다. 오랜 토론과 논쟁 끝에 총회는 앤드류감독이 부인들의 노예라고 할지라도 노예를 소유하는 한 감독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다고 결론짓게 되었다. 그런데 소수들은 앤드류감독에 대한 총회의 처리는 부당하다고 항의하였다. 그래서 총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총회파(the conference party)는 다수파로써 아무리 감독이라 할지라도 감독은 총회의 회원으로 총회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반대파는 소위 헌법파(the constitutional party)로서, 교회의 헌법이 감독의 권한을 인정하고 있는데 총회가 감독에 대항하여 결정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결국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주(state)의 연회회원들은 분열의 계획(a Plan of Separation)을 행동화하기에 이르렀다. 경계지역(border line)에 있는 연회들은 개체교회와 연회가 다수의 투표에 의하여 어느 쪽으로 소속할 것인지를 결정하였다.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지역의 주들의 연회대표들은 켄터키주 루이스빌에서 만났다. 그들은 감리교감독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로부터 분열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교단이름을 남감리교감독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라고 부르게 되었다. 감리교감독교회와 형제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하기도 하였다. 문제가 되었던 제임스 앤드류 감독과 조슈아 소울(Joshua Soule) 감독이 새 교단의 지도자로 초대받았다. 새 교단의 첫 총회는 1846년 버지니아주 페터스버그에서 개최되었다. 장정과 찬송가가 그 모임에서 제정되었다.

감리교감독교회(북감리교회)의 회원들은 분열에 대해 복합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부는 1844년 총회의 과정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지만, 일부는 분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특히 두 교단의 경계지역에 많은 갈등이 일어났다. 경계지역에 살고 있는 감리교도들은 두 교회에 사이에서 어디에 충성을 바쳐야 하는 가 고민하게 되었다.

1848년 북감리교회의 총회는 분열에 대하여 적개심을 보였다. 1844년 총회대표의 1/3도 안되는 대표들이 다시 선출되었다. 1848년 총회는 남감교회와 형제관계를 맺지 않을 것을 결의하였고, 분열의 계획을 위헌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미 분열은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에 북감리교회는 재통합을 시도할 수 없었다.

남감리교회와 북감리교회 사이의 고통은 1850년경까지 계속되었다. 각 교단은 각각 따로 총회를 개최하였고, 1852년 북감리교회의 총회는 총회와 연회에 평신도대표를 출석시킬 것을 논의하였는데 결국 171대 3으로 부결되었다. 두 교회는 모두 신학교육을 토론하였다. 두 교회는 신학교육이 여전히 일치할 수 없는 주제였지만, 교육목회의 개념을 논의하게 되었다. 1850년 후반까지 여전히 노예문제는 두 교회의 이슈가 되었다. 북감리교회는 노예를 소유하는 교인들은 교회입교인명부에서 이름을 없앨 것을 요청하는 일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은 제명하는 것은 너무나 과격한 행위라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경파들은 계속 제명을 주장하였다. 1858년 남감리교회에서는 노예를 사고파는 것을 금지하는 규칙(the General Rules)의 문제를 삭제하였다. 노예문제는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라고 결론짓게 된 것이다. 노예문제는 정부의 손에 넘기게 되었다.

한편 1844년 총회를 계기로 또 하나의 분파가 일어났다. 이들은 노예제뿐 아니라 감독제도 거부하는 무리들이었다. 남북감리교회를 동시에 비판하는 입장이다. 그들은 순수한 웨슬리적 감리교회를 원한다는 의미에서 “웨슬리감리교회” (The Wesleyan Methodist Church)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1844년 총회를 개최하고 1만 5천 6백명이 회원으로 가입하였고 6개의 연회를 조직하였다.

1860년 에이브라함 링컨이 미국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대통령취임일인 1861년 3월까지 남부의 주들은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라는 새 정부를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 1861년 4월 21일 남부정부가 사우스 캘로라이나 포르트 섬터(Fort Sumter, South Carolina)에서 발포함으로써 남북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은 1865년 리 장군(General Lee)의 포위까지 계속되었다. 남북감리교회는 미국내의 개신교조직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부유한 교파로써 그 갈등과 무관할 수 없었다. 경계연회들 속의 긴장은 극도에 달하였다. 북감리교회의 감독들과 출판사와 연회는 통일을 신실하게 지지하였다. 그들은 애국적 태도를 보여 주었고, 통일군대(Union Army)를 위해 군목을 5백 명이나 모집하였다. 군대 속에 기독교적인 활동을 조직화하는 “the United States Christian Commission”을 1861년 만들었다. 북감리교 군목들은 통일군대(Union Army)가 남으로 전진하는 것을 뒤따르게 되었고, 북감리교회의 군선교활동을 조직화하였다. 남감리교회는 북감리교회처럼 남쪽정부(the Confederacy)를 돕게 되었다. 그들도 군목들을 군대에 파견하고, 성경과 기독교서적을 나누어주고, 군대 속에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북감리교회처럼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심슨 감독은 링컨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심슨감독은 일리노이 스프링에서 있었던 링컨 장례식을 집례함으로써 감리교회는 비공식적 국가교회(unofficial national church)가 되었다. 심슨은 이렇게 링컨을 애도하였다.

당신의 입의 자유의 외침의 메아리는 세계를 통하여 울리고, 노예의 아들들은 기쁨으로 듣는다. 우리는 우리의 순교자로 당신을 관씌우고 온 인류는 당신을 승리의 아들로 관씌웁니다. 영웅, 순교자, 친구, 안녕!

 

Ⅶ. 역사적 도전과 감리교회의 응전기(1866-1913)

A.역사적 상황: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인들은 나라의 미래에 관한 많은 문제들을 접하게 되었다. 어떻게 남부 주들이 다시 통일될 수 있을까? 지역감정이 치유될 수 있을까? 해방된 4백만의 노예들의 사회적 위치는 무엇인가? 전쟁으로 약화된 남부의 경제를 어떻게 회생시킬 것인가? 이런 저런 문제들이 국가재건의 프로그램과 함께 만나게 되었다. 19세기 미국인들의 생활 속에 전쟁후의 역사의 재건은 그리 행복하지 않은 역사의 장으로 심판받았다. 18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미국인들의 생활은 적개심과 사기와 오해와 분노로 가득차게 되었다.

1866년 몇몇 미국인들은 아마 다음 반세기 동안에 미국인들의 생활 속에 일어날 막대한 변화 혹은 재건의 어려움들을 미리 볼 수 있었다. 중공업의 성장과 철도의 확장으로 일어난 경제의 산업화는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율을 보였다. 그리고 산업의 확장은 노동불안정을 가져왔고, 강력한 노동조합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심각한 인구증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1860년의 3천1백만 인구보다 1915년에는 3배가 많은 1억에 달하게 되었다. 대략 2천만의 이민들이 이 시기에 몰려들어 왔다. 또한 도시 수가 증가하고 도시의 규모가 커짐으로 미국은 도시화되어가는 나라가 되었다. 인구의 도시집중화는 문화적 사회적 축복인 동시에 가난과 착취와 부패를 가져오게도 하였다. 미국교회들은 역사재건에 개입하기도 하였고, 많은 역사적 도전을 받기도 하였다.

 

B. 감리교회의 재건:

역사재건기간 동안에 미감리교회가 겪은 중요한 관심중의 하나는 남감리교회의 재건이었다. 남감리교회의 교인수는 1860년의 75만에서 1866년의 50만으로 줄어들었다. 순회설교가들과 지역설교가들의 수도 줄어들었다. 많은 남부교회들이 파괴되거나 심하게 훼손되었다. 많은 교회들은 그들의 지도력을 잃어버렸다. 출판과 교육과 선교활동은 의혹을 받게 되었다. 출판과 교육과 선교의 회복에 대해 심각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어떤 감리교도들은 북감리교회와의 합동을 원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나 미주리연회에서 1865년 파미라 선언(The Palmyra Manifesto)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남감리교회를 계속 지속시킬 것을 선언하였다. 더욱이 1865년 남부감독들은 목회연설(a Pastoral Address)을 만들어서 남감리교회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였고 1866년 총회를 소집하였다. 그 총회는 출판과 교육과 선교프로그램을 다시 재건하기 위한 기초작업을 세웠다. 1870년까지 남부교회는 생명력을 회복하였다. 남감리교회의 흑인 교인들이 점차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1870년 남감리교회총회는 “the Colored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형성하기를 결의하였다. 모든 흑인 교인들을 이명하도록 의도하였다. 아프리카감리교감독교회(African Methodist Episcopal)와 아프리카감리교감독시온교회(African Methodist Episcopal Zion)가 이미 남부에서 구성되었다. 1870년 12월에 “The Colored Methodist Episcopal Church”가 탄생하게 되었다. 마일스(William H. Miles)와 반더호스(Richard H. Vanderhorst)가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그들이 남감리교회에 의해서 정식으로 취임되었다. 그 교파는 오늘날 크리스천감리교감독교회(The Christian Methodist Episcopal Church)라고 알려져 있다. 전후 몇 십 년간 교회재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남감리교회는 교인들이 점차 증가하여 1860년부터 1920년까지 7만5천에서 2백만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북감리교회는 1백만에서 4백만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전쟁기간 동안 교회 안에 신학적 구조적 불일치로 인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중에 가장 심각한 논쟁은 웨슬리의 성결과 성화에 관한 교리였다. 존 웨슬리는 기독자의 완전을 강조함으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많은 감리교도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 안에서 크리스천의 점진적인 성숙함의 의미에서 크리스천 완전을 해석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완전을 제1의 축복을 받은 거듭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제2의 축복으로 순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라고 보았다. 미국감리교회는 1870년과 1900년 사이에 완전교리 이슈로 인하여 양분되었다. 갑작스러운 제2의 축복을 좋아했던 감리교도들은 미국 개신교도들 속에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성결운동 무리들은 그들의 신학잡지, 천막집회와 조직화를 통하여 복음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강조함으로써 감리교회 안에서 강한 반발을 만나게 되었다. 19세기말까지 감리교회가 성결에 대한 강한 열정이 결핍되었음을 수정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성결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많은 무리들이 감리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나사렛교회(the Church of Nazarene)와 필그림성결교회(the Pilgrim Holiness Church)등 새 교회들의 그룹을 만드는 참여하였다.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논쟁이슈는 신학적 자유주의의 등장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이 논쟁의 핵심이슈였다. 또한 성서본문의 정확성과 저자와 연대에 대한 지금까지의 결론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면서 성서를 비판하는 과학적 방법도 문제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초월성이나 심판보다는 하나님의 내재성이나 사랑에 대한 진보적 강조도 토론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신성에 대한 강조보다는 그의 인성에 대한 진보적 해석도 문제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평신도들의 참여가 많이 증가하였다. 1830년부터 연회와 총회에 평신도대표를 참석시키기로 하였다. 1910년부터는 평신도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수를 동수로 하였다. 평신도는 전국적인 수준과 지역적인 수준에서 그들의 직업과 개체교회에서 그들의 지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도 교회생활의 주류에 참여하게 되었다. 첫째로, 여성도 개체교회와 연회에서 평신도직책을 맡게 되었고, 뉴욕시에서 개최된 1888년 북감리교회의 총회에 크리스천여성절제연합회(Women’s Christian Temperance Union)의 지도자 프란시스 윌리어드(Frances E. Williard)를 비롯하여 다섯 명의 여성 대표가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성도 남성처럼 정회원이 되는 것은 신학적으로나 헌법적으로나 사회적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그래서 결국 1904년에서야 비로소 여성이 정회원이 되었다. 둘째로, 여성이 설교가로 안수받는 것이나 설교가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여성은 선교사나 집사로 교회를 섬길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안수받을 수 있고 설교가로 자격증을 얻을 수 있는가?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남북 감리교회가 모두 여성안수를 거절하였다. 1880년 북감리교회총회에서 여성안수문제나 여성설교가 자격증이 모두 거절당하였다. 결국 남북이 합쳐지는 1939년가서야 여성안수를 허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감리교개신교회(the Methodist Protestant Church)는 1880년 뉴욕연회에서 여성목사안수를 안나 하워드 쇼우(Anna Howard Shaw)에게 베풀었다.

 

 

Ⅷ. 미국감리교회의 신학적 성숙기(1914-1939)

 

A. 역사적 상황:

1917년 세계 제1차대전에 미국이 국제평화를 위해 개입하게 되었다. 퀘이커를 위시하여 평화주의자들은 전쟁참여를 반대하였으나, 감리교회는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의 전쟁참여정책을 애국적인 심정으로 지지하였다. 감리교회출판부는 퀘이커를 비롯한 평화주의자들을 공격하였다. 20세기의 첫 50년동안 역시 감리교회는 내면적 경건의 개인윤리를 계속 강조하였다. 모든 알콜성음료 들을 마시는 것을 금하였고, 절제운동이 모든 교회회중들과 주일학교 속에 발전하게 되었다. 절제운동을 위해 헌금을 약정하는 절제주일이 연중행사가 되었다. 1880년 이래로 포도쥬스가 성만찬예식을 위해 사용되도록 하였다. 모든 종류의 절제문학이 권장되고 출판되었다. 20세기 초반 몇몇 총회의 선포에 따라 감리교회는 국가기관을 통하여 도덕개혁을 성취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선언하였다. 1920년에서 1933년 사이에 알콜금지법안을 통과시키려하였다. 1928년 대통령선거에서 로마가톨릭 후보 알 스미스(Al Smith)를 반대하였다. 중요한 이유는 그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가 아니라 그가 알콜을 즐긴다는 이유였다. 1928년에는 감리교도들이 승리하였으나 1933년 다시 패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알콜주의와의 투쟁은 그후로도 계속되었다.

 

B. 미국감리교회신학의 변화:

1890년경 진보적 개신교신학운동이 신학을 현대화하였다. 복음주의신학의 옛 패턴이 18세기로부터 계승되어 1930년까지 지배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수와 진보사이의 논쟁은 치열하였다.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을 신앙의 파괴분자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신앙의 본질의 구세주들로 생각하였다. 전통적 복음주의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개인구원, 그리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다림을 계속하여 강조하였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속죄주로 믿기보다는 선생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또한 보수주의자들은 순간적 구원의 경험을 강조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은 크리스천성장의 점진적 성격을 정상적인 패턴으로 생각하였다. 진보주의자들은 저 세상에 대한 복음주의적 관심을 이 세상적인 것으로 바꾸고, 하나님나라를 더욱더 이 세상에서 실현하려고 하며, 천국건설에 인간적인 책임을 더욱더 강조하였다. 이것은 웨슬리의 사상에서 더욱더 과격하게 벗어나는 해석학적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웨슬리는 인간의 죄악성을 강조하는 인간본성의 비관주의(pessimism of human nature)에 기초한 은총의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를 주장한 반면에, 진보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자신이 해야할 의무를 강조하는 인간본성의 낙관주의(optimism of human nature)에 근거하여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은총의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를 강조하려고 하였다.

 

C. 미국감리교회의 합동:

남북감리교회는 합동을 위해 거친 장애물들을 헤치고 서로간의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남북교회들은 각각 상대방의 총회에 대표들을 파견하고, 함께 해외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하며, 합동을 위해 연방교회회의(the Federal Council of Churches)같은 기구를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두 교회들은 함께 공동의 찬양과 공동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 공동예배서와 공동예식서를 만들어 1905년과 1935년에 각각 출판하였다.

합동을 열정적으로 말하기 시작하던 1916년에는 남감리교회에는 흑인교인들이 없었다. 북감리교회에는 흑인교인들이 25만명이나 있었다. 그래서 1924년에 합동을 위한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흑인목사와 흑인교인에 대한 서로의 견해가 너무나 달랐고, 지역회(jurisdiction)에 대한 견해도, 감독의 직책에 대한 견해도, 총회의 권위에 대한 견해도 너무나 달라서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 전역을 6개 행정지역회로 나누고 1개의 종족지역회로 나눈다는 것이다. 종족지역회란 흑인지역회를 말한다. 몇몇 감리교개신교회(the Methodist Protestant Church) 지도자들이 세 감리교단의 합동을 열망하는 신선한 제안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1935년부터 합동위원회가 가동되었다. 북감리교회가 지역회를 분할하는 계획안에 대하여 가장 많이 논쟁하게 되었고, 흑인들이 강하게 반발하였으나 결국 1938년 남감리교회가 합동계획안을 수용하였고, 북감리교회도 합동계획안에 대하여 침묵함으로써 인준하는 분위기를 만들게 되어, 마침내 전체감리교회가 합의하게 되었다.

결국 1939년 4월 26일부터 5월 10일까지 개최된 캔사스시티총회에서 세 감리교단 곧, 북감리교회(the Methodist Church)와 남감리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와 감리교개신교회(the Methodist Protestant)가 합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합동한 감리교회이름을 “The Methodist Church”라고 만들었다. 남부소수그룹이 반대하였고, 북감리교회의 진보파나 흑인감리교도들의 불만은 남아있었다. 합동당시의 북감리교회 교인수가 4,684,444명이였고, 남감리교회 교인수가 2,847,351명이었으며, 감리교 개신교회가 197,996명이었다.

 

 

Ⅸ. 사회적 성화운동기(1939-1968)

 

A. 역사적 상황:

1930년대 미국의 경제공항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은행들이 문을 닫고 노동자들의 권익이 무시되고 실업이 폭증하고 경제적인 혼란에 빠지게 됨으로 교회는 서서히 사회참여에 관심갖게 되고 사회복음(social gospel)을 발전시켜 가게 된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크리스천은 내면적 인격적 성화(personal sanctification)를 이루어 가면서 동시에 사회적 성화(social sanctification)를 이루어 가야함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감리교회는 사회신경(Social Creed)을 통하여 더욱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남부지역보다도 동북부지역에서 더욱 사회적 성화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또한 20세기 초반 세계 제1차대전 때처럼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세계 제2차대전을 맞이하게 되면서 교회는 경건과 애국심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신앙적 경건훈련은 애국심으로 형성된 도덕적 열정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B. 사회적 성화운동:

1. 사회신경(Social Creed): 1908년 북감리교회총회에서 사회신경을 만들면서 사회참여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게 되었다. 사회신경에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와 정의가 실현되어야함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황금율을 사회의 최고법으로써 그리고 사회적 질병을 위한 확실한 치유의 원리로써 인식하였다. 1914년 남감리교회에서도 사회신경을 채택하고, 1916년 감리교개신교회에서도 이 사회신경을 채택하였다. 이 사회신경에서 아동노동의 폐지, 여성노동의 보호, 노동시간의 단축(6일 노동에 하루 8시간 노동),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건비보장, 사회보장(social security), 노동조합의 합법화, 보험보장, 그리고 은퇴보장 등을 주장하였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감리교회총회는 매년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산업화의 도전을 받으면서 경제적 협력구조의 형성과 정의로운 경제체제의 구성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군사주의문제, 종족문제, 인구문제 그리고 절제운동에 정치적 행동과 참여를 보이게 되었다. 1907년 사회봉사를 위한 감리교연방조직인 “Methodist Federation for Social Service”를 조직하였다. 1913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인디아나주 인디아나폴리스에서 개최된 남선교회전국연합회창립총회에서 사회복음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감독으로는 웰치(Welch), 브레이크 (Blake), 맼코넬(McConnell)등이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고, 사회적 성화운동을 신학적으로 전재하는일에 앞장선 신학교수들은 롤(Harris Franklin Rall), 하크니스(Georgia Harkness)등이었다.

 

2. 평화주의와 참전의 문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감리교회는 1939년 합동선언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지 2년 반이 지난 다음에 열린 1944년 합동이후 제2차 총회에서 이 문제를 갖고 심각하게 토론하고 결국표결하기에 이르렀다. 티틀(Ernest F. Tittle)은 1939년의 평화주의적 입장을 재확인하는 주장을 하였고, 팔린(Charles C. Parlin)은 승리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사병들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교역자들의 투표결과는 참전 170대 참전반대 169이었고, 평신도들의 투표결과는 참전 203대 참전반대 131이였다. 감독들과 정치가들 사이의 대화가 워싱톤에서 개최되었고, 1945년 샌프란시스코 유엔총회에 미국개신교도들이 시위를 벌였으며, 그리하여 1945년 미국의 도덕적 정치적 목소리는 옥스남 감독(Bishop G. Bromley Oxnam)이 이끄는 감리교도들의 운동에 의하여 형성되게 되었다.

 

3. 종족주의문제: 감리교회는 교회의 안과 밖의 종족주의적 장벽을 허물기 위한 투쟁에 참여하였다. 1950년부터 모두 흑인으로만 구성된 중앙지역회(Central Jurisdiction)를 폐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954년 대법원에서 모든 학교를 흑인들에게도 개방해야함을 결정함으로써 더욱 활발하게 종족주의를 타파하는 운동이 감리교회 속에 가속화되게 되었다. 1956년 총회에서 종족주의 문제만 4천이상의 청원서가 있었다. 총회는 종족차별을 정죄하고 강요된 종족구분제도를 정죄하는 결의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흑인개체교회들과 흑인연회들을 그것들이 지역적으로 위치한 백인지역회(the white jurisdiction)에로 전입하는 것을 법제화하였다. 그러나 8년 안에 몇몇 연회와 개체교회들만이 전입하고, 1964년까지 17개 흑인연회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들은 양쪽으로부터 모두 공격을 받았다. 쓰라리고 긴 토론 끝에 1964년 총회가 중앙지역회(Central Jurisdiction)을 없애는 두 번째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1967년 9월까지 모든 흑인 연회들이 그들이 속한 지역회(Jurisdiction)로 의무적으로 전입하기로 결정하였다. 1년 안에 모든 연회들이 그들이 지역적으로 소속된 지역회로 전입하였으나, 남부지역 흑인연회들은 지역회에 전입하지 않았다.

4. 성차별문제: 1930년경 합동에 대하여 논의를 시작할 때부터 여성목사안수는 매 총회 때마다 이슈가 되었다. 1939년 합동연회에서 결의하지 못하고 1956년에 가서야 여성목사안수를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1970년에 들어가서야 본격적으로 여성들이 안수를 받게 되었다.

 

5. 노동과 경제문제: 1900년 국제여성피복노조를 결성하여 일주일에 여성과 소녀들이 70시간 노동을 강요당하는 것에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아동들이 위험한 노동에 투입되었고, 노동자들이 이유없이 짧은 시간에 경고받고 해직당하였다. 노조화운동을 정부와 고용주가 반대하였다. 교회들이 중산층과 가까워지고 노동자계급과 멀어지고 개체교회지도력은 경영주그룹들이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중산층과 노동자층의 양극화를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의식있는 교회들은 노동자를 위한 센터를 만드는가하면, 어떤 교회들은 산업노동자를 지배하기도 하였다. 1919년 철강스트라익이 일어났다. 맥코넬(McConnell)감독이 철강스트라익의 원인을 조사하는 중에 새로운 눈을 뜨면서 노동계층을 위해서 일하는 영웅이 되었다. 또한 1930년대 경제공항시대의 가난의 원인은 노동자들의 실수가 아닌 것을 감리교회가 발견하게 되었다. 경제체제의 근본문제를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감리교도들은 크리스천사회행동운동(the Christian Social Action Movement), 화해를 위한 친교(the Fellowship for Reconciliation), 산업민주주의를 위한 연대(the League for Industrial Democracy) 등 제반 경제개혁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뉴딜정책이 감리교회의 사회신경의 원리와 상통하는 것이 많았다. 1932년 총회는 산업과 농업과 종족문제를 위해 입장을 표명하였다. 기독교신앙은 개인 구원뿐 아니라 사회구원을 위한 복음 포함하고 있음이 일반화되게 되었다.

 

6. 절제운동: 사회복음과 절제운동은 같은 맥락에서 전개되었다. 절제운동은 크리스천의 사회문제개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1908년 총회는 선언하기를 “감리교회는 절제운동회이다”라고 하였다. 헌법에서 금주조항을 넣으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철저한 금주운동가들과 온건한 사람들사이에 견해차이가 있었다. 대통령선거에서 Alfred E. Smith라는 카톨릭후보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가 카톨릭신자라는 이유가 아니라 그가 술주정뱅이라는 이유에서 반대하였다. 1928년 총회연설에서 감독이 “미국이 칵테일을 즐기는 대통령을 선출할 것인가?”라고 연설하였다. 감리교회는 계속해서 알콜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을 하였고, 술의 악습에 대항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C. The Evangelical United Brethren Church와의 합동:

1968년에는 감리교회(the Methodist Church)와 복음주의연합형제교회(the Evangelical United Brethren Church)가 함께 합동하여 “연합감리교회”(The United Methodist Church)가 되었다. 1956년부터 복음주의연합형제교회와 감리교회는 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대화이전에 에즈베리와 복음주의연합형제교회의 창시자 오토바인(Ottobein)과 보엠(Boehm)이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1958년 3월 6일부터 7일까지 합동위원회가 신시내티에서 첫모임을 가졌다. 1958년 EUB총회에서, 1960년 감리교회 총회에서 각각 논의한바 성공회(Episcopal Church)와는 합동을 추진하지 않고 경건주의전통을 가진 교회끼리 합동을 추진하기로 의논하였다. 교단의 크기가 문제되었다. EUB성도가 80만이고, 감리교회성도가 일천만이었다. 흡수통합의 우려가 있게 되었다. 또한 감독체제에 문제가 있었다. 감리교회는 종신감독제요, EUB는 4년제 감독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리사의 위치가 문제되었다. 감독이 임명하는 감독이냐? 연회가 선출하는 연회의 대표냐? 감리교회의 감리사는 6년 임기에 감독이 임명하는 체제요, EUB는 4년임기에 연회에서 선출한다. 그리고 신학적 차이가 또한 문제시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를 타협과 대화로 극복하고 1968년 4월 23일 달라스에서 “연합감리교회”(The United Methodist Church)란 이름으로 합동하기에 이르렀다. 양감독 밀러(Reuben H. Miller)와 위키(Lloyd C. Wicke)가 서로 합동을 위한 악수를 나누게 되었고, 그후에 모든 감리교회 성도와 EUB성도들을 대표하는 대표들이 악수하였다. 감리교회성도는 10,289,000이였고, EUB성도들은 738,000이였다. 결국 미연합감리교회는 미국개신교회 중 남침례교회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교단이 되었고, 14개국에 28개 해외연회를 가진 대교회가 되었다. 또한 미연합감리교회는 다양한 신학적 다양성을 지니면서도 에큐메니칼하게 연대하는 교회로 미국교회와 사회를 이끌어가는 교회가 되었다.

Ⅹ. 나오는 말:

교회의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하여 우리는 미국감리교회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역사는 미래의 신비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과거를 앎으로써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추측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행위를 섭리하시고 간섭하시고 개입하셔서 그의 뜻을 보이심으로 미래에도 그와 비슷한 것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신다. 우리는 미래에 어떻게 더 잘 운영해야 할지를 과거사 속에서 배운다. 하나님은 미래에 우리가 무엇을 창조해 가야할지를 역사로부터 배우도록 강권하신다. 역사는 어떤 체험을 반복하지만 그대로 똑같이 반복하거나 과거사건들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비슷하게 반복하는 것 같으면서도 과거보다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나선형적 발전을 만들어 간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이 연합하여 역사발전을 이룩하는 것을 배운다면, 기대하지 않는 방법으로 다양하게 패턴이 나타나기도 하고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이 18세기 영국사회와 교회를 개혁한 것처럼 미국감리교회사에서도 다시 사회와 교회를 개혁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역사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결코 과거에 일어나지 않았던 어떤 놀라운 것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신다. 전에는 듣지 못하였던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여시되 우리를 갱신하도록 남녀지도자들을 선택하시고 사용하신다. 당신의 지도자들을 사용하신 미국감리교회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은총과 자유를 동시에 선포하게 하셨다. 미국감리교회는 변화하는 문화적 역사적 요구들을 만나면서 은총을 선포하는 본래의 목적과 의도를 성취하여 왔고, 또한 자유를 열망하는 역사와 문화의 도전 앞에 성실히 응답함으로써 역사와 문화를 변혁시켜가는 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감리교회사의 회고와 전망을 다음의 일곱 가지 차원에서 총괄하여 요약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미국감리교회사의 중요한 특징은 성화(sanctification) 혹은 경건(piety)이다. 존웨슬리와 찰스 웨슬 리가 조지아에 가져온 종교의 첫째 특징은 성화와 경건의 삶이었고 그것이 미국감리교회사 속에서 이어져왔음을 지금까지 고찰하여 왔다. 웨슬 리가 조지아에 온 것은 성결의 삶을 추구하는 일을 격려하기 위해 왔다. 또한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 경건은 우리의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과 같이 섬기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영적 평화가 성결의 부지런한 추구에서 오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롭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겸손한 응답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회심경험을 통하여 깨달은 후에도 그는 성화의 과정에서 경건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경건과 성화의 추구는 완전성화에로 나아가는 열심히 발전하였다. 이러한 성화와 완전의 교리는 미국감리교신학의 특징으로도 강하게 자리매김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1760년대에 미국에 이민온 토마스 웹(Captain Thomas Webb)도 강조하기를 신앙의인화만으로는 충분치않고 부분적인 크리스천이 되게 하고 성화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1세기 후에 영국과 미국에서 감리교도들은 경건과 성화의 삶으로 가장 존경받게 되었고 완전에 관한 웨슬리의 가르침은 중요한 진리가 되었다. 2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미국감리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가 성화론이다.

둘째로, 미국감리교회사의 중요한 특징은 전도(evangelism)다. 웨슬 리가 처음 미국선교를 시작할 때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 자신마저도 회심하지 못하였다고 탄식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디언들을 회심시키기를 간절히 열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라비안들을 만나면서 더욱 좋은 길을 발견하였다. 더욱 풍성한 복음설교를 하게 되었고, 측량할 수 없는 영적 자원을 풍성하게 갖게 되었으며, 이상하게 뜨거워진 마음으로 복음에 대한 새로운 차원으로 그는 영력을 지닌 복음전도자가 되었다. 이러한 뜨거운 복음전도의 정신은 미국감리교회의 위대한 정신중의 하나가 되었다. 각 시대마다 다른 형태의 전도방법을 요구할지라도 변함없는 감리교전도정신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십자가복음으로 뜨겁게 거듭남을 체험하는 복음전도였다. 초기 미국감리교회 설교가들은 열렬한 복음전도자들이었다. 역사가 발전하면서 그 복음전도열정이 식어지긴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감리교회성도들의 열망은 복음전도의 열심을 새롭게 회복하는 것이었다.

셋째로, 감리교회사의 또하나의 특징은 뜨거운 예배다. 미국감리교회는 웨슬리시대부터 예배의 혁명을 일으켜 왔다. 옥스퍼드에서부터 조지아에 이르기까지 성례전적 예배, 체험적 찬송부르기, 즉흥적 대표기도, 즉흥적 설교, 애찬회 등의 새로운 예배전통이 계속 이어져 왔다. 감독체제와 성례전적 의식에서는 고교회적 요소가 강조되었지만, 참으로 예배에 있어서는 차가운 고교회적(high church) 의식과는 전혀 다른 저교회적(low church) 뜨거운 마음의 예배였다. 그리고 천주교 사제 오스틴(John Austin)으로부터 청교도 작사자 왓츠(Isaac Watts)에 이르기까지 에큐메니칼적으로 찬송을 모아서 시편과 찬송모음집을 만들어 출판하였다. 영국감리교회처럼 미국감리교회도 찬송으로 태어나 찬송으로 발전하여 온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넷째로, 미국감리교회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친교라고 말할 수 있다. 웨슬리에 의해 미국감리교회 속에 심겨진 또 하나의 요소를 찾는다면, 친교라고 할 수 있다. 1729년 11월의 신성클럽(Holy Club)이나, 1736년 4월의 미국 사바나의 모임이나, 1738년 5월의 런던 모임이 모두 교회(church)의 성격이 아니라 영적 친교의 신도회(society)의 성격이었다. 자유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기도와 찬양으로 시작하고 기도와 찬양으로 끝을 맺고, 신앙 안에서 서로를 세워 주고 서로서로 가르치고 권면하고 꾸짖기 위해 일주일에 한두번씩 모여서 영적 친교를 열망하는 모임이었다. 이것은 예배와 같은 종교적 의무를 띤 모임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특수한 친교모임이었다. 영국감리교회에서나 미국감리교회에서나 친교는 영적 성장을 위해 가장 소중하게 인식되었다.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회는 사회성이 강하게 강조되고 친근하고 가정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영국처럼 밴드(band)나 속회(class)가 모두 살아난 것은 아니고 속회만이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속회마저도 점차 사라지고 어른주일학교(adult Sunday school)로 바뀌면서 영적 나눔보다 가르침이 더욱 강조되었다.

다섯째로, 미국감리교회사의 특징은 훈련(discipline)이라고 볼 수 있다. 웨슬리는 규칙쟁이였기에 영적 훈련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의 길에 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웨슬리는 신성크럽에서도 사바나에서도 엄격한 규칙에 따라 목회하였다. 1743년에 감리교도를 위한 일반적인 규칙(General Rules)을 만들었는데, 30번이나 개정하였다. 이 규칙이 나중에는 미국감리교회의 행정적인 핸드북역할을 하게 되어 장정(Discipline)이란 이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선한군병으로 어려움을 견디려면 철저한 영성훈련이 필요하였다.

여섯째로, 미국감리교회사의 특징은 평신도지도력(lay leadership)이다. 미국감리교회의 역사는 헌신적인 평신도들의 수고로 발전하게 되었다. 1766년에 아일랜드에서 이민온 농부가 메릴랜드에서 감리교회를 위해 통나무집을 짓고 속회모임을 조직하였고, 델라웨어와 버지니아와 펜실베니아 등에서 설교하였다. 그는 세례와 성만찬집례까지도 하였다. 아일랜드출신 목수는 뉴욕에서 설교하기 시작하여 감리교신도회를 조직하였다. 조지 휫필드에의해 회심한 두사람, 구두수선공과 청량음료판매원은 필라델피아에서 감리교 속회모임을 만들었다. 선장 토마스 웹(Captain Thomas Webb)은 뉴저지, 뉴욕, 필라델피아, 벌티모어 등에서 복음전도에 앞장선 개척자로써 감리교회를 발전시킨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다. 그후에 에큐메니칼운동의 지도자로써 세계교회협의회(W.C.C.)를 탄생시킨 존 모트(John Raleigh Mott)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감리교평신도지도자였다.

일곱째로, 미국감리교회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사회봉사(community service)였다. 웨슬리가 미국선교 활동 시에 조지아에서 의사로써의 기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사고와 질병이 일어났을 때 유일한 교육받은 사람으로써 웨슬리는 의학서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병고치는 일을 실행하는 식민지 지역의 선교사로써 그 역할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의학서적 연구와 실제적인 치료경험을 살려서 쓴 것이 그 유명한 “원시의학”(Primitive Physic)이다. 이것이 필라델피아에서 1764년에 다시 출판되었다. 그리고 웨슬 리가 사바나선교시절에 모든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영국의 킹스우드학교를 설립한 것보다 훨씬 먼저 있었던 일이다. 아빙돈에 대학을 세우고, 1787년 콕과 에즈베리에 의해 콕수베리대학을 메릴랜드에 설립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학교들을 세우는 놀라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왔다. 웨슬리는 또한 사바나에서 사회개혁프로그램을 발전시켰다. 그는 끊임없이 부도덕과 술취함과 노예제도에 대하여 공격하였다. 미국감리교회사는 이러한 웨슬리의 사회봉사와 사회개혁의 정신을 따라서 노예제도의 반대운동, 술과 담배의 금지와 절제운동, 영성해방운동, 부의 분배와 나눔의 운동, 다양한 불의와 부조리의 구조를 개혁시켜가는 운동에 앞장 서는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여덟째로, 미국감리교회사의 마지막특징은 에큐메니칼정신이다. 흑인노예제도문제로 남북감리교회로 나뉘어졌었으나 다시 합동의 역사를 창출하였고, 개혁교회전통과 루터교회전통을 지닌 형제교회(EUB)와 연합하기도 하였고, 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하여 다양한 에큐메니칼 선교와 사회봉사사업에 앞장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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