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촌의 한아기
요 1:1-14
서부 개척 시대, 골드 러쉬로 사람들이 서부로 밀려들 때, 금이 채굴되는 곳에 마을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금광촌에는 소문을 듣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뜨내기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에 술과 도박, 싸움이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거칠고, 무지렁뱅이인 광부들만 사는 그 금광촌의 주민은 단 한 명의 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한 명뿐인 여자가 아기를 낳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죽고 어린아이만 살아남았으니 광부들은 어떻게 아기를 처리할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아기를 함께 기르기로 했습니다.
우선 아기를 나무 상자 안에 누이고 때와 기름이 잔뜩 묻은 수건으로 덮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재우기에는 나무 상자가 너무 더러워 그대로 누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40㎞나 떨어진 도시에 사람을 보내 아기 침대를 사 오게 했습니다. 아기가 덮고 자는 더러운 수건도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아기가 입을 옷과 담요를 사 오게 했습니다.
광부들은 아기가 잠자는 방의 마루를 물과 비누로 깨끗히 청소했습니다. 매일 아침 광부들은 금광에 들어가기 전에 아기를 한번 안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손이 너무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은 비누를 사서 몸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더러운 욕도 삼가게 되었고 자라는 아기를 위해 황폐한 금광촌에 꽃도 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변화가 한 아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아기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어른들에게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를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으니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 마음에 사랑이 샘솟아 자신들을 깨끗하게 만든 것입니다. 사랑은 소망과 믿음의 날개를 가진 새와 같습니다. 그 사랑이 믿음을 싹트게 하고, 소망이 둥지를 틀게 한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아기 기저귀를 차신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설명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실 때 우리와 똑같이 ‘아기’로 오신 것입니다. 아무 힘도 없는 아기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요 1)
우리 마음에 예수를 영접할 때 우리 안에도 한 아기가 태어납니다. ‘성육신’사건은 2000년 전의 사건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말씀을 받아들일 때도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아무 변화도 느끼지 못합니다. 아무 힘이 없어 보이는 아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아기를 사랑하면서 기적이 싹틉니다. 광부들이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기를 사랑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잉태된 말씀을 돌보며 사랑하게 될 때 기적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그 아기를 우리가 지키면서 돌보면 마치 금광촌의 사람들처럼 마음에서 돈과 쾌락과 싸움의 마음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죄를 없애시는 방법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우리 안에 들어온 말씀이 우리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받고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게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말씀을 받는 훈련이 되지 않으면 마치 ‘속 빈 강정’과 같이 됩니다.
항상 ‘허한’ 느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을 볼 때가 있습니다. 믿기는 믿는데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잉태된 아기가 자라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옹골찬 신앙생활이란 ‘성육신’의 과정을 우리 안에 경험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광부들이 아기를 돌보며 사랑하는 마음과 같습니다. 그때 저절로 자신을 성결케 하고, 예배를 드리고 싶어집니다.
우리 안의 아기를 돌보며, 사랑하며 예배하는 마음입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마음이 ‘공허’하십니까? 이제 말씀을 심으십시오. 우리 안에 아기를 양육하십시오.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 안에 한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소서
말씀을 심게 하소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넘치게 하소서
이 아침의 기도와 찬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