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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과 사명(데살로니가전서 2:1-12)

사도 바울은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2차전도 여행을 하면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에서 3주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밤중에 빠져나와야 할 정도로 박해가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박해로 인해 개척한지 몇 달 밖에 되지 않은 데살로니가 교회는 박해 속에서 복음을 전해준 사도들과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가 박해와 신학문제들에 직면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고 있는 복음이 헛되지 않음을 역설합니다.

[복음이 헛되지 않음(1-2)]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헛되지 않다고 말하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복음을 전했으며 어떠한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계속해서 써 내려갈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해가는 이유는 복음이 그 내용으로만 진실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과정과 동기도 진실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에는 그에 합당한 동기와 삶의 실재가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먼저 그 동기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들의 명성과 인정을 얻기 위해 복음을 전한 것이라면 복음은 헛된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믿는다면, 복음의 내용이 헛됨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고백이 헛되지 않는 복음에 합당한 삶의 실재를 살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어떠한 목적과 삶으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지 아래에서 말합니다.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사도 바울과 일행은 빌립보에서 옥에 갇혔다 풀려나자 말자 데살로니가로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앞서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했다고 하는데, 사도행전 16장에서 그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사도바울은 점치는 여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았지만, 그 주인들에게 모함을 당해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습니다.

그 일은 바울에게 치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의 경우 재판에서 형이 확정되기 전에는 처벌할 수 없었으나,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은 정식 재판도 없이 태형을 당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40대 이내의 매를 맞지만, 바울은 그 수에 상관없이 많은 매질을 당하였고, 감옥에서도 깊은 내실에 갇혀 발에 족쇄가 채워져 결박되었습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빌립보로 건너왔지만, 복음을 전하다 치욕스러운 일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많은 싸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싸움’이라는 말은 히브리서에서는 ‘경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한 디모데전서에서는 같은 단어를 ‘믿음의 선한 싸움’에 사용하고 있듯이, 바울이 믿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가 믿음을 ‘선한 싸움’으로 받아들이기에, 치욕을 당하고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일, 바울이 믿음을 고난을 벗어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실족했을 것입니다. 복음을 따르는 삶은 이 땅에서는 끝나지 않는 분투이며 경주입니다.

그는 빌립보에서의 치욕을 당한 후에도,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2절 끝부분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힘입어’라고 하는 말에서, 그들의 믿음의 싸움의 동력이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에게서 동력을 얻어 복음을 전했다면 그들은 이미 실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실패할 때 복음도 실패한 것처럼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는지, 자신의 내적 동기에 의해 힘입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자신의 내적동기에 의해 자신을 위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어떻게 증명됩니까?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사용한 복음 전도 방법입니다.

[복음,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3-6)]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간사함과 부정과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간사함은 원어의 의미로 ‘잘못된 방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부정은 ‘불순한 동기’라는 의미가 있고, 속임수는 ‘사람의 마음을 기만하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세 가지를 넓게 해석할 때, 인간적인 관계와 감정과 처세를 의존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복음의 전도가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복음은 그 자체의 목적이 있지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타인과 잘 어울려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사역은 처세가 아닙니다. 더욱이 신앙생황 또한 처세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방식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동기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동기는 신앙생활 방식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동기와 근원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에 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동기에 대해 말합니다.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았으니 우리가 이와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동기와 목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심을 입고’, ‘위탁받았다’는 것은 모두 수동형으로, 바울의 복음 전도의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전한 동기와 목적은 바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고 또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서신서에서 여러번,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자신의 진실성이 입증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구절에서도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진실하다고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 하는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그 이후로도 하나님께 자신의 심장폐부까지 훤히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해 믿음을 고수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앞에 한번 자신을 비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5~6)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아첨하는 말은 ‘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과장되고 꾸며진 말’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복음은 아첨하는 말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복음은 듣기 좋은 말도 아니고, 대책 없는 위로도 아닙니다. 사람의 환심을 사는데 목적이 있는 사람은, 듣기 좋은 말을 신앙적인 말인 양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맞추어 주는 아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의 형벌을 받아 죽으셨기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전하는 말이 그렇지 않다면, 복음과 무관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바울을 또한 ‘탐심의 탈’을 말하는데, 아첨은 또한 탐심과 관련됩니다. 아첨은 상대방을 위한 말이 아니라 환심을 얻기 위한 자기의 탐욕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탐심은 결국 자기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조차도 수단으로 여기는 것인데, 바울은 영광을 얻으려고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복음, 타인에게 주기를 기뻐함(7-12)]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사도 바울은 권위를 주장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유모는 기르고 먹이며 양육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군대의 교관과 유모는 둘 다 훈육하고 양육하는 사람이지만, 그 방법이 다릅니다. 군대의 교관은 규율과 귄위로 훈육하지만, 유모는 유순한 말과 젖으로 양육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한 바울은 권위를 내세우는 교관처럼 하지 아니하고, 유모처럼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유순한 유모처럼 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엄하게 잘못을 질책하기도 하고 매를 들겠다고 까지 말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도라고 말하지만, 권위를 내세우고 권위로 복음을 전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순한 태도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어떻게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지도 말합니다.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바울은 ‘너희를 사모했다’는 표현을 쓰며, 그들에 대한 애정이 복음을 전하는 하나의 동기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복음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주기를 기뻐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들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 고초를 당하고 다시 데살로니가로 와서 또다시 박해를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사도들은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실질적인 생명의 위협을 매일 감수하며 그 길을 피하지 않고 데살로니가에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도 가감 없이 복음을 전하다 박해를 당하고 밤에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바울은 보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들을 기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밤잠 못자며 보살피지만, 아기에게 보상받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받은 기쁨을 감사해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복음 사역은 보답을 바라며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 또한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 자체로 기쁨을 얻는 것일 것입니다.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바울 자신들의 권위와 유익을 위하지 않고 또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사모하였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그들이 스스로 일해 자급하였다는 것입니다. 폐를 끼치지 아니한다는 말은 ‘짐을 지우지 않는다’ 는 말로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에 의할 때 복음을 전하며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가 사도들에게 있지만(고전9:12), 그 권리를 얻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데도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순전한 목적과 동기가 또한 생계에 있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믿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 생존하는 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은 복음의 진실성이 자신이 한 행위로 증명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10-12)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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