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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지도의 전통과 현대적 의미

Ⅰ. 서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성생활이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형성적 삶을 의미한다. 그것은 외적으로 어떤 교리를 고백하고 일정한 행동양식을 취하는 고정적인 삶의 형태라기 보다는 다양하고 복잡한 내면적인 삶을 통하여 이루어 가는 과정적 삶을 말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영성생활을 ‘내면적인 어떤 것’과 관련시키면서 동시에 ‘영적여행’(spiritual journey) 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특히 내면적인 삶이란 심리적으로 매우 다양한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그 내면의 일을 어떻게 식별하고 진보를 위해서 어떻게 안내하느냐가 영성형성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동방교회의 한 지혜자는 “당신이 자신의 의지로 천국에 이르고자 하는 젊은 수도자를 발견한다면, 그의 발목을 붙잡아 아래로 끌어내시오. 그것이 그에게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오. 만약 지도자에게 신뢰를 가지고 완전히 복종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지도자에게 의탁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전의지를 영성지도자에게 맡기시오. 그러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종으로 자기 자신을 영성지도자에게 드러낸 만큼 하나님은 초보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개혁교회 전통에서의 참된 영성지도자는 말씀이요 성령이었다. 원리적으로 옳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는 일에 매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경험의 주체자가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객관화시켜 투명하게 식별해 낸다는 일이 그렇게 용이한 것은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매우 내밀한 일이요 주관적인 일이기에 이미 성숙한 이들의 분별력이 있는 도움이나 안내가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회사는 ‘영성지도와 영성지도자’에 대한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로마 가톨릭의 성례전적인 의미에서 행해지는 ‘죄의 고백직’의 역할을 뛰어넘는 전통이다. 영성지도는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 임명되어진 직책과도 구분되는 역할이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영성지도는 내적인 권위 즉 카리스마적인 권위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영성지도는 임명받은 전문사역자 뿐만 아니라 수도자, 평신도등 다양한 사람에 의해서 행해져 왔다. 이러한 영성지도의 교회사적 전통을 고찰해 보면서 현대적인 의미를 조명하여 우리 시대의 영성지도의 시급성을 진단해 보려고 한다.

Ⅱ. 영성지도의 역사적 의미

영성지도에 대한 개념은 교부시대와 중세 초기의 수도원 전통 특히 동방정교회의 수도원적 경험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사막의 교부들이 제자들과의 관계에서 개인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상호작용에 의해서 영성지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성지도자는 카리스마를 지닌 거룩한 사람(holy man)으로서 아람어로 압바(abba), 또는 암마(amma)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교부들의 금언』(Apophthegmata Patrum)이라는 꽤 방대한 금언집이 전해 내려오는데, 여기에 주로 사막교부들이 제자들에게 영성지도를 하면서 남겨놓은 핵심적인 메시지가 실려있다. 특히 4세기 때 존 카시안(John Cassian)은 그의 저서 『영적인 담화』(Conferences)를 통해서 사막교부들이 보여준 영성지도의 실제와 경험을 전해주고 있다. 이 책에서 압바 모세 (Abba Moses)라고 하는 영성지도자는 영성지도를 구하는 이들에게 ‘마음의 청결함’과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조언과 그리고 ‘생각을 조절하는 법’과 ‘신중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모세는 각 수련자들에게 마음을 열어 놓고 지도자의 신중함을 받아들이라고 충고한다. 이러한 개별적인 영성지도의 전통은 수도생활이 점차적으로 제도화 됨으로서 공동체와 개인생활을 위한 특별한 규칙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그것들이 때로 개별적인 영성지도를 대신하기도 했다. 『베네딕트 수도 규칙서』등을 예로 들수 있는데, 이 규칙은 어떤 엄격한 법률적인 형태라기 보다는 공동체를 형성해 가기에 적합한 성경말씀을 재편성한 것으로서 원론적이면서 자발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행동이나 생각의 한계를 어느정도 규정지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수도자들에게 비교적 용이한 영성지도의 지침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2세기때 폐쇠적인 수도원에서 개방적이고 비교적 대중적인 영성 운동인 탁발수도단들이 등장하면서 평신도들의 영성지도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즈음 영성지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일반화된 개념이 나타났으며 객관적인 과정을 통해서 누구도 영성지도를 할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다는 확신이 퍼져 나갔다.

1. 교부시대와 동방교회의 전통

동방교회의 영성지도의 전통은 일찌기 4-5세기경 사막의 교부들로부터 비롯된다. 사막에서 완덕(perfectio)을 추구하며 독거생활을 하던 이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영성지도를 받으려고 몰려오면서 자연스럽게 스승과 제자들 사이가 형성되었다. 사막의 교부들에게 구하는 영성지도는 교리적인 가르침이 아니고 마음의 청결과 거룩성을 이루는데 필요한 안내였다. 영성적인 아버지(pneumatikos pater)나 거룩한 사람들(holy men)이라고 불려지던 그들은 단순히 영성의 길을 제시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내적인 삶을 형성하도록 도와주는 안내자였다. 사막의 수도자들은 지도자 없이 영적순례를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둘러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먼저 침묵으로 본을 보여주는 것이 일차적인 가르침이요, 그 다음에 요청이 있을 때 입을 열어 지도를 하곤 하였다. 마카리우스가 어느날 사막의 한 교부를 방문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현명한 충고를 부탁했다. 그 사막 교부는 만약 당신의 영혼을 구하고자 한다면 질문을 받기 전에는 말하지 말라. 는 대답을 남긴다. 이바그리우스가 이 담화를 기록하는 것은 당시의 사막의 전통에서 침묵과 고독이 영성지도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사막의 수도자들이 이렇게 침묵을 강조한 이유중의 하나는 영성지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영의 식별문제인데, 그것은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내면을 성찰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바그리우스는 이러한 교훈들을 바탕으로 한 체계화된 기도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악한 영의 책동과 악한 생각들의 단계들을 가르치고 있다.

존 카시안(360-435)은 동방교부들의 영성지도의 전통을 서방교회에 전해주는데 크게 기여를 하 사람이다. 그는 동방교회의 영성지도자로 널리 알려진 에바그리우스(345-399)의 제자로 베들레헴의 한 수도원에서 수년동안 머문 후에 이집트의 사막으로 들어가 영성지도의 경험을 쌓았던 인물이다. 그는 이집트 사막의 곳곳을 다니며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은둔자들을 통하여 영성지도를 경험하며 영적 담화를 나누었다. 그 결과로서『담화집』(the Conferences)이라는 저서가 나왔다. 그 이후 그는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이유(Marseilles)에 위치한 수도원으로 가서 자신의 영성 지도의 경험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도 공식적인 고해성사가 발달되지 않았을 때에 끊임없는 회개와 양심성찰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유혹들을 수도원의 장상(senior monk)들에게 쏟아놓으라고 권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인 분별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카시안은『담화집』에서 영성지도자 압바 모세(Abba Moses)의 입을 통해서 당시의 영성지도의 전통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는 참으로 믿음과 회개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영성지도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압바 모세는 영성지도를 구하는 이들에게 마음의 청결과 하나님의 지식을 추구하라고 한다. 카시안은 영적인 지도없이 영적인 일을 시도할 수 없기에 영성지도자를 선택할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영성지도자의 무분별성은 자칫 수련자로 하여금 자기의 양심을 드러내는데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다. 카시안의 이러한 작업은 6세기경 ‘베네딕트 규율’(the Rule of Benedict)을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베네딕트의 규율은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외적인 제재조치를 담은 법조항이라기 보다는 복음적인 삶을 실천하고 내면적인 삶을 유지하고 보존하도록 도와주는 영성지도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전통이 그 이후 서방의 모든 수도원 규율의 기초가 되었고, 그 규율을 통하여 동방교회의 영성지도 전통이 서방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초기 이집트 사막에서의 수도원 주의 전통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면서 동방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러시아의 정교회에는 스타레츠(staretz)라고 부르는 영성지도자가 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카리스마적이며 예언자적인 인물들 이다. 스타레츠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특별히 지명받은 인물은 아니지만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다. 동방교회에서는 서품받은 모든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들을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교에 의해서 권위를 인정받은 사람만이 고해성사(the sacrament of confession)를 받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지도자의 역할이 고해성사를 받는 자와 일치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지만 반드시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서품을 받은 성직자이어야 하지만, 스타레츠는 서품을 받지 않은 단순한 평신도 수도자이거나 수녀일 수 있다. 대부분의 스타레츠들은 제도권적인 교회에서 공식적인 고위직 지위를 소유하지 않는다. 세라핌(St. Seraphim of Sarov, 1759-1833)과 같은 평범한 수도신부의 영향이 19세기 정교회의 감독이나 주교의 영향을 능가했던 것도 바로 스타레츠와 같은 영성적 전통 때문이다.

세라핌은 전설적인 스타레츠로서 사막의 안토니(St. Anthony of the desert)와 같은 수도자들과 매우 유사한 영적 여행의 패턴을 지니고 있다. 안토니의 생애 전반 50여년은 철저히 세상과 유리된 ‘물러감의 삶’이었으며 후반 50여년은 봉사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돌아옴의 삶’이었다. 세라핌 역시 ‘물러감과 돌아옴’(flight and return)의 삶이 잘 조화된 생애였다. 그들의 물러감의 생애는 세상 사람들에게 매우 창조적이며 가치있는 사람으로의 변환과정이었다. 그들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만 돌아왔다. 말하자면 그들 자신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자기들이 먼저 무엇을 하거나 말함으로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기도의 상태인 그 모습 그 자체로 세상을 도왔다. 안토니나 세라핌은 세상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그들이 한일이란 오직 고독한 삶 속에서의 기도외에 아무것이 없었다. 자기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세라핌은 이렇게 말했다. “내적인 평화를 얻으시오, 그러면 당신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발견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스타레츠라는 영적 아버지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안에 거하면,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데려올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고독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형성된 스타레츠는 세상 사람들과 단순히 함께 함으로서 그들을 치유할 수 있다. 그들의 영성지도는 우선 어떤 말을 통한 충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교제나 살아있는 삶의 모범에 의해서 행해진다. 그들은 말과 마찬가지로 침묵을 통해서도 영성지도를 한다. 압바 팜보(Abba Pambo)는 “만약 침묵에 의해서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그는 말을 통해서도 덕을 세우지 못할 것이라”고했다. 앞에서 이미 말한대로 ‘물러감’이란 안토니나 세라핌처럼 반드시 사막으로의 물러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간적인 사막이라기 보다는 영적인 사막 즉 마음으로의 물러감을 포함하고 있다. 외적인 고독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사회 한 가운데서 활동적인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서 배울 수 있다. 사막의 안토니는 알렉산드리아의 한 박사가 도시 한가운데에서 사막의 수도자들과 동일한 영적인 성취를 얻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전한다. 끊임없는 마음의 기도는 독거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신비적인 삶은 사막에서와 마찬가지로 도시에서도 가능하다. 사실 세상에서 봉사하는 동안에 그는 이미 스타레츠의 길을 접어들 수도 있다. 목회적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그는 내적인 여행을 시작하게 되고, 천국의 사닥다리를 오르기 시작한다. 거기서 그는 홀로 세상의 순수한 문제 해결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사막으로 물러갔던 스타레츠의 경험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찾아야 할 것은 마음의 은둔처이다.

러시아 정교회의 영성 지도자인 스타레츠가 지닌 은사란 첫째 “통찰력과 식별력”(διαχρισιζ)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속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타레츠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실된 내면을 정직하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인습적인 태도를 꿰뚫고 마음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온다. 그들은 말을 대단히 절제한다. 그들은 언어의 능력뿐만 아니라 침묵의 능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스타레츠의 말은 수사적 기교가 없는 대단히 단순한 것이기에 피상적으로 그들의 충고를 듣는다면 매우 진부하고 무미건조할 수 있다. 수련자가 깊은 열망과 열렬한 믿음을 가지고 스타레츠에게 다가온다면 그의 절제된 언어와 침묵이 그 마음 속으로 파고들면서 전 존재를 변환시킬 것이다. 스타레츠가 지니고 있는 통찰력에 대한 은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드러내는(disclosure of thoughts, λογισμοι)훈련을 통해서 얻어진다. 그래서 초기 동방교회의 젊은 수도자들은 매일 그 장상(elder)에게 나아가 하루 동안에 되어진 모든 생각을 드러내었다.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는 것은 죄의 고백 이상을 의미한다. 단순한 생각들, 충동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 영성지도자는 그 속에 감추어진 위험이나 심오한 징조들을 식별해 준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란 단순히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진정한 목적은 자아의 지식(self-knowledge)을 얻고자 함이다. 가능한한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두 번째의 스타레츠가 지닌 은사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한 스타레츠의 기록에는 이런 간단한 말이 있다. “그가 사랑을 소유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왔다.” 사랑은 모든 영적인 아버지가 소유해야할 필수적인 은사이다. 사랑없이 다른 사람의 마음의 비밀을 꿰뚫는다면 그것은 창조적이라기 보다는 파괴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그들을 치유할 능력도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라는 글에서 스타레츠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스타레츠는 당신의 영혼과 의지를 스타레츠 자신의 영혼과 의지로 끌어들이는 사람이다.’ 스타레츠는 모든 사람들의 죄와 구원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사누피우스와 존의 책』에서는 스타레츠는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정도가 성서의 인물들과 매우 유사하다는 증거를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다. “오 주님, 나의 자녀로 저와 함께 천국으로 인도하시던지 그렇지 않으면 나를 당신의 생명책으로부터 지워 없애주십시오.”

세 번째의 스타레츠의 은사는 인간의 환경을 변환시키는 능력이다. 스타레츠들중의 많은 이들이 치유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능력을 반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스타레츠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대로 받아들이도록 인도한다. 진정한 스타레츠는 피조물 속에서 창조자의 보편적인 임재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식별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이다. 심지어는 어떤 스타레츠는 상처받은 크고 작은 피조물들의 고통 때문에 아파하며 기도하기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묘사한대로 조지마(Zossima)라는 스타레츠는 모든 것을 껴안는 사랑으로서 대상을 변환시키고 모든 환경을 뚫고 나가며,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the uncreated energies of God) 가 피조물들을 통해서 비추어 나가게 한다. 이 변환의 능력이 바로 사람들을 회심케 하는 능력이다.

2. 중세 탁발수도회 전통

이전까지의 영성지도는 특정한 폐쇄 수도 공동체에 속한 수도자들의 영성을 형성해주는 수단이 되어왔다. 그러나 12세기 이래로 온 누리를 수도원으로 생각하고 세속으로 뛰어든 탁발수도회가 나타남으로서 영성지도의 모형도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공동체가 프란치스꼬 수도회(Francicans)와 도미니크 수도회(Dominicans)이다. 그들은 내면적인 성찰 뿐만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일등 사도직 활동을 중시했다. 그들은 내면성찰과 일정한 행동규범을 안내해주는 회칙들을 가지고 있었다. 탁발수도회의 회칙이란 엄격한 권위의 산물이거나 규제를 위한 법적인 규율이라기 보다는 복음적인 실천을 권고하는 일종의 영성 안내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프란치스꼬는 순종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외적인 권위로서의 복종이 아니고 복음서에 근거한 자유로롭고 개인적인 결단에 의한 자발적인 순종이었다. 지도자와 수련자와의 관계는 권위로 묶여진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아니고,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사막의 안토니 시대의 전통이 그랬던 것처럼 ‘영적인 아버지’(pneumatikos pater)란 자기 자신을 먼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굴복시키고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제자들을 인도하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기도와 말씀 묵상에 기초를 두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성육신에 그 초점을 둠으로 자아지식에 이를 때 비로소 완전복종이 일어나는 것이다.

프란치스꼬는 그의 제자들의 영성지도를 위해서 “1221년의 규범”과 “1223년의 규범” 을 남겨주었다. 이 규범에 따르면 “프란치스꼬회의 수도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서를 지켜야 할 것이며…” 라고 시작된다. 프란치스꼬의 생애나 그가 남긴 규범은 무엇보다도 복음서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영성지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동일한 순종으로 일관되었다. 프란치스꼬는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발견하도록 지도했다. 프란치스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완전복종 한다는 의미는 자연스럽게 자기자신을 ‘거짓자아’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이고,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는 ‘자기 기만’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 자아와의 솔직함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첼라노의 토마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의(프란치스꼬) 제자들은 그들이 선교여행에서 돌아오자 마자 자비하신 주님이 그 여행동안 자신들을 향해서 어떻게 좋은 것들을 베풀어 주셨는가를 고백했다. 만약 자신들이 게을렀거나 어떤 의미에서든지 배은망덕하였다면 그들은 겸손히 그리고 기꺼이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로부터 고침을 받거나 질책을 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아버지에게 생각이나 마음의 충동들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고백했다.” 그들은 서로가 한점의 숨김도 없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었다. 그들은 프란치스꼬의 수정과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프란치스꼬는 자신의 지도 뿐만 아니라 수도자들이 서로 서로 형제애를 발휘하면서 영성적인 나눔의 삶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솔직했고, 신실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영성 지도를 구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활동 수도자로서 사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그 행위들의 동기를 철저히 살폈다. 자신들의 행함이 하나님의 뜻인지 혹은 자아만족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기꺼이 자기 자신을 개방하였다.
영성지도자들은 특히 제자들의 기도생활을 도왔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꼬는 제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를 자유롭게 수여받기 위해서 은밀히 혹은 함께 기도하기를 권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기 유익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끊임없이 성령님께 기도할 것을 촉구했다. 프란치스꼬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기도결과를 서로 나누고 지도를 받은 후에 어떤 일에 결정을 내리곤 했다. 프란치스꼬는 결코 압바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적 충고를 구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았다. 프란치스꼬회의 수도 규율에 따르면 영성지도의 원칙은 대개 이렇다. 1) 성서에 대한 명상적 반추를 한다. 2) 복음서가 직면한 상황들을 제자들에게 제시함으로서 실제적으로 도전을 받게한다. 3) 각 수도자들이 진정한 은혜의 역사를 식별하기 위해서 경험들을 나눈다. 4) 공적으로 사적으로 자문과 기도를 통해서 인도를 받는다. 프란치스꼬회의 영성지도의 모델은 프란치스꼬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되어진 것이기에 경험적일 수밖에 없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영성지도의 예는 시에나의 카더린(St. Catherine of Siena)의 저서 『대화집』(Dialogue) 88-109에서 보여준다. 그녀는 누가 누구로부터 어떤 표준으로 영성지도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대답은 진리를 듣고자 열망하고 진리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개방한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지도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 지성의 눈에 비치는 빛 그 자체라고 하면서 이성의 식별을 중요시 한다. 이 지성의 눈은 믿음에 의해서 열려지고, 여기에 비추어지는 빛은 세단계로 열려진다. 첫단계의 빛에 의해서 우리는 영적여행을 시작한다. 이 빛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보게되며, 인간의 헛된 야망과, 깊은 죄성, 우리 안에 있는 육성과 영성의 투쟁 등을 인식하게 된다. 두 번째 단계의 빛은 지체치 않고 서둘러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순례자들에게서 인식되어지는 빛이다. 여기에는 두단계의 훈련을 포함하고 있다. 한편은 끊임없는 금욕수련을 통해서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향하여 참된 자아를 열어놓는 것이다. 다른 한편의 훈련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허락된 삶의 시련을 겸손과 인내와 끈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로서 가장 밝은 믿음의 빛은 감사와 찬양으로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비추기 시작한다. 이렇게 될 때 모든 이기심은 사랑의 불꽃에 의해서 불태워지고 하나님과의 연합의 상태로 들어간다. 이러한 단계를 보면서 우리는 카더린의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영성지도의 원칙은 무엇보다도 믿음의 눈이 열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영성지도자의 우선적인 책임은 수련자가 기독교 믿음의 중심적인 진리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영성생활이 자아의 인식(혹은 자아의 지식)으로부터 이웃에게로 진보하고 상승하고 있는가이다. 카더린은 이러한 일반적인 원칙아래에서 영성지도의 유의사항을 이렇게 지적한다.

첫째 판단하지 말라(마 7:1-5; 102). 오직 성부 하나님만이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 영성지도자가 자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사는 겸손함이 없다면, 그는 곧 마귀에 의해서 속임을 받게되고, 눈먼 지도자가 될 것이다. 두 번째 지도자는 수련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와 느낌에 대해서 민감해야 한다. 지도자는 때때로 수련자가 영성적인 빛과 기쁨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는가를 인식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두움과 고독과 큰 혼란으로 투쟁을 벌이고 있는가를 인식해야 한다. 지도자는 이러한 시련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지탱해 주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세 번째는 모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각 개인이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길로 인도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명백하게 잘못된 길로 인도되어지고 있다고 할 때 부성적인 가르침이 필요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개인의 독특성을 발견하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

카더린은 영성지도에 있어서 영혼 안에 남겨진 영성적 위안(consolation)이나 기쁨과 열망에 대한 식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때때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마귀로 인하여 기도를 나태하게 하는 속임수의 올무에 빠져들 수 있다. 이 때의 치유책은 감각적인 하나님의 경험에 매어달리지 말고, 하나님 자신을 구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구하고 있다는 증거는 ‘겸손한 자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라가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추구하는 기분좋은 영적경험은 덕성에 대한 열망이 없기에 양심의 고통과 가책만 남기고 사라지게 된다. 거짓 기쁨은 이기적인 사랑으로 표현되며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의 열매로 나타난다. 카더린에게 있어서 영성지도의 목표는 경건(거룩성)을 성취하는 것인데, 그것은 결코 자연적인 인간성에 대한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성에 대한 변환(transformation)을 의미한다. 이 변환이란 우리 영혼 안에 부여된 삼위일체 형상의 회복을 의미하며 믿음 소망 사랑을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그 절정에 이룬다. 그 거룩성의 완성은 자신의 내면성찰 뿐만 아니라 설교되어진 복음서와 묵상되어진 복음서가 성취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복음서가 개인의 내면과 실존세계 속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스며들도록 도와주는 매개체가 바로 영성지도의 중요한 임무이다.

3. 근대 영성지도의 전통

근대 영성지도의 전통으로서는 첫째 깔멜 수도회의 전통을 지닌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62) 나 십자가의 성요한(John of the Cross, 1542-1591) 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영신수련』(The Spiritual Exercises)이라는 영성수련 안내서를 펼쳐냄으로서 영성지도의 확실한 기틀을 마련해준 로욜라의 이냐시오(Igantius of Loyola, 1495-1556)를 들 수 있다. 세 번째는 개혁자중에서 존 깔뱅으로부터 영성지도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첫째 깔멜수도회는 관상(contemplation)수도회이기에 무엇보다도 영성지도가 중심과제일 수밖에 없다. 관상적인 경험자체가 지극히 내면적인 일이기에 깊은 성찰과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이들의 섬세한 안내가 필요하다. 만약 적당한 영성지도자가 없다면 수련자는 자기가 걸어야 할 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에 영적생활이 평면적이거나 답보상태를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누구보다는 영성지도의 필요를 절실히 느낀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의 영성적인 경험을 이해하고 지도해 줄 적절한 지도자를 오랫동안 찾지 못했다.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수도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기에 때때로 오해를 받아 적지않은 고초를 치루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영성생활에서 깊은 좌절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테레사는 탁발 수도회에 속한 베드로(Peter of Alcantara)수사를 영성지도자로 맞이함으로서 많은 시련과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자신의 경험들을 외적으로 묘사하는 방법도 몰랐다. 그런데 자신을 이해하게 하고 자신에게 일어난 많은 경험들을 설명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이 바로 베드로라는 영성지도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서 영성지도의 필요성을 곳곳에서 역설하고 있다. 특별히 초심자는 영성지도를 통해서 영적성장에 가장 도움이 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확인받아야 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높은 관상의 단계에 이르른 사람도 영성지도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상태에 이르게 되면, 혼자 해석하고 식별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내적 현상들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 때의 영성지도란 자신의 내적인 기도의 삶을 객관적으로 반추하고 식별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테레사는 영성지도 지상주의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만약 적합한 영성지도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주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에 대해서 실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그녀는 자신의 경험적인 생애를 돌이켜 보면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 5)는 철저한 믿음을 전제로 영성지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영성지도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관심은 ‘자아에 대한 인식’(self-knowledge)이다. 왜냐하면 자아에 대한 철저한 인식없이 영성생활의 진보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테레사는 자아인식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영성생활을 통하여 주님은 각 사람들에게 여러 종류의 은총을 허락하시는데 이 은총들은 한결같이 자아의 지식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 안에 거하시며 자아에 대한 지식이 높아지면서 주님께 더욱 가까워진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을 아는 일이다. 우리 자신의 빈곤함과 비참함을 살피고 또 살피는데 마음을 쓰고, 우리가 지닌 것이라고는 당신께 받은 것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자아의 인식의 자리에 내려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영성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힘’ 을 우러러 보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낮아지심에 비하여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 존재인가를 인식함으로서 보다 높은 덕에 이르를 수 있다. “우리자신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면 우리의 이성과 의지의 품격이 한결 높아지게 되며, 모든 선을 잘 수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테레사에는 수련자들로 하여금 ‘자아의 지식’에 이르게 하는 것이 영성지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비참함에만 몰두하지 않도록 그 시선을 높고 높은 하나님을 향하여 우러러 보게 함으로서 높은 덕에 이르게 하는 것도 영성지도의 핵심이다.

테레사에게 있어서 자아에 대한 훈련은 어떤 외적인 활동으로부터 비롯된다라기 보다는 기도생활이라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습득되어진다. 그녀의 저서중에서 가장 원숙하고 종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성』(The Interior Castle)은 기도의 삶을 통한 내적인 성장상태를 단계적으로 묘사해 놓은 세밀하고 심도있는 영성지도의 지침서이다.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하나님을 향한 내면적인 경험과 심리적이고도 전인격적인 상태를 테레사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설명해 준 영성지도서이다. 그러므로 수련자는 이 책을 통하여 자신의 영성경험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고 식별하면서 영적성장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Igantius of Loyola, 1495-1556)가 쓴 『영신수련』(The Spiritual Execises)은 기독교 영성사에 나타난 영성지도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교황 피우스 11세는 1919년 성직자들에게 보내는 교서(Mens Nostra)에서 “『영신수련』은 가장 지혜롭고 가장 포괄적인 영성지도의 안내서이며… 깊은 회심과 경건에로 이끌어 주는 가장 건전한 안내서라고 했다.” 이 책은 영성지도에 대한 단계를 비교적 논리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훈련을 단계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영성지도자가 반드시 개입되어야 하는 것이 이 안내서의 특징이다. 이 책은 영성지도자의 역할을 이론적으로 자세하게 명시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영성지도가 있어야 하는 훈련이기에 영성지도법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주는 근거를 제시해 왔다. 수련자는 이 책의 안내를 따라서 영성훈련을 하는 동안 영성지도자는 수련자의 내면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지켜보면서 수련자를 격려하고 성령의 이끄심을 받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영성지도자는 결코 자신의 경험을 투영시키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어느 한편에로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고, 오직 저울 추처럼 중용을 지키면서, 창조주가 피조물과 더불어, 또 피조물이 자기의 창조주와 더불어 직접 만나서 응답하도록 맡겨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지도자는 단순히 수련자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는 것만은 아니다. 수련자가 내적으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동요를 겪고 있는지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이 “내적으로 어떤 동요를 겪고 있는 영혼에게 수련자의 영적 진보를 위해서 유익되고 알맞은 안내가 무엇인지를 결정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련자가 위안(consolation)이나 고독(desolation)같은 마음의 충동도 느끼지 않거나, 여러 가지 영들로 인해 어떤 동요도 받지 않는 것을 발견할 때 그 원인을 살피고 이에 합당한 조처를 취해 주어야 한다. 혹은 수련자가 고독함과 유감으로 시달리고 있음을 발견할 때에는 그에게 강경하고 엄한 태도를 취하지 말고, 유순하고 친절하게 해서, 다음을 위하여 용기와 힘을 얻도록 도와준다.’ 이와같이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성지도의 요소는 영성식별이다. 그는 『영신수련』 안에서 영성지도자를 위하여 비교적 긴 “영성식별 규범(rules for discernment of spirits)”을 포함시키고 있다. 영성지도의 근거는 바로 수련자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인 움직임을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규범 안에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한 부분은 유혹과 영성적 고독을 다루고 있고, 다른 한 쪽은 하나님의 감동에 의한 생각과 움직임들과 영성적 위안을 마귀의 속임수와 구분하는 법을 다루고 있다.

초기 이냐시오를 추종하는 예수회 회원들은 ‘영신수련’을 지도하는 영성지도자는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명시한 바 있다.

1) 영적인 일에 통달해 있어야 한다. 특히 『영신수련』에 나타난 방법들에 익숙해 있어야 한다.
2) 신중하고 사려깊고 친절해야 한다. 인격적으로 수련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
3) 영성지도자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거기에 맞는 품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4) 자신의 노력이나 기술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를 두라.
5) 수련자에게 자신의 경험을 보태는 것에 대해서 매우 조심해야 하며 수련자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법을 배우도록 하라.
6) 수련자를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주의를 기울이라.
7) 영성지도자는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철저히 연구하라.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영성형성의 과정으로서 이성과 감성의 일치를 소중히 여겼다. 그에게 있어서 명상이란 단순한 지성적인 사유가 아니라 내적인 감성의 차원에서 사건에 참여하는 경험을 의미한다. 특히『영신수련』에서 제시하는 상상력을 이용한 관상기도는 마음으로 느끼는 느낌(heart-felt feeling)이 영성식별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주관적인 내적경험을 식별한 후에 영성형성으로 이어주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안내자가 필요하다.

종교개혁 이래로 개신교의 영성지도의 전통은 매우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영성지도’라는 권위적인 색채가 사제주의(sacerdotalism)와 밀접한 관계성이 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영성지도자를 찾는 로마 카톨릭의 전통보다는 덜 일반적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영성 지도의 전통이 있었다. 특히 개혁자들이 선택한 영성지도의 형태란 주로 편지였다. 편지를 쓰게 된 것은 어떤 특별한 이유에서라기 보다는 영성지도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 지리적으로나 신분상의 이유로 직접적인 접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혁전통 안에서 영성지도의 예를 특히 깔뱅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베노와트는 깔뱅을 ‘영혼들의 지도자’라고 지칭하고 있다. 당시 개혁교회의 영성지도란 일정한 어떤 권위가 요구되거나, 지속적인 관계(수도원 안에서의 장상(prior or prioress)과 평수도자와의 관계처럼)가 요구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종종 위기관리를 도와주는 ‘위기 상담자’(crisis counsellor)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뱅은 양심의 성찰을 지도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서신을 통하여 지속적인 영성지도를 주고 받았다. 당시 분위기가 올바른 신앙을 정립하려는 시기인지라 깔뱅은 주로 올바른 양심으로 바른 교리를 선택하는 일에 초점을 두고 영성지도를 하였다. 깔뱅에 의해서 영성지도를 받았던 가장 탁월한 예로는 페라라 공작부인(the duchess of Ferrara)과 까니 부인(Mdam de Cany)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페라라 공작부인에게 보낸 서신으로는 지금까지 11편이 남아 있지만 그것은 절반도 안되는 것이라고 두메르규는 주장한다. 깔뱅이 페라라 공작부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통해서 영성지도의 예를 엿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거룩한 교리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열매를 맺게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언제 그것이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개혁시켜 우리를 변화케 하는지… 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 거룩한 가르침이 없다면 우리는 헛되이 하나님의 이름을 취할 뿐입니다. 나는 지금 당신이 아직도 하지 못한 일을 하라고 권고하는 바가 아니고, 이미 당신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날마다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고들에 대해서 페라라의 공작부인은 기꺼이 환영하고 받아들인다는 답신을 전한다. “깔뱅 선생님,… 저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언제나 계속해서 편지로 충고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저는 언제나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는 크나큰 교회의 개혁 문제에만 매달리지 않고 잘못된 교리나 환경에서 영성적인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목회적 관심과 영성지도에 대한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깔뱅은 또한 서신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영성지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가 영성지도를 구하는 대상으로는 주로 윌리암 파펠(William Farel)이나 마틴 부처(Martin Bucer)였다. 그는 자신의 문제와 슬픔을 편지를 통해서 파렐에게 쏟아 놓으면서 위로와 인도를 구했다. “꾸오롤(Courault)의 죽음은 나를 너무 짓누루고 있어 제 슬픔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깨어있는 것이 나에게는 익숙해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괴롭힘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우울한 생각 때문에 매우 지쳐 있습니다.” 깔뱅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직접 만나 조언을 듣고 싶었지만 만날 기회가 없었기에 아쉬운 마음으로 편지를 통해서 영성지도를 구했던 것이다. 그의 개인편지를 들여다 보면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의 번뇌나 내적 고통을 얼마든지 엿볼 수 있다. 깔뱅은 자신의 아내가 죽었을 때 그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기도 하였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한 슬픔을 억누려 하고 있습니다. 친구들도 제게 대한 의무에 열심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그들이 저에게 유익이 되고 그들 자신에게 유익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에 의해서 제가 얼마나 큰 힘을 얻고 있는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제 마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중후한 공적인 일을 수행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설교하면서도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영혼들이 개인적인 보살핌과 개인적인 영성지도가 얼마나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사람이다.

Ⅲ. 영성지도의 현대적 의미

역사적인 전통으로부터 비추어 볼 때 첫째 영성지도자는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즉 자기 자신을 성령이 역사하는 통로로 열어놓고 하나님과의 일치의 삶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맥스 투리안(Max Thurian)은 “영성지도 혹은 영혼의 치유는 주어진 심리적 영성적 상황에서 성령의 인도를 추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영성지도자는 수련자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영성의 흐름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진행과정을 면밀히 추적하면서 영적진보를 도와준다. 영성지도의 역할은 결코 제도권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으며 순수한 영적인 은사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어떤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 주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도록 도와주고 각 개인에게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감지하도록 도와준다. 영성지도자와 수련자는 그 관계가 일대 일의 관계이고 명령이나 지시의 관계가 아니고 도움과 돌봄의 관계이다. 목회적 배려와 상담적 배려가 전제된 지도이지만 수련자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은총의 신비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영적지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둘째 영성지도자는 자기 자신의 영적 성장에 대해서 헌신되어져 있어야 하며 경험을 지닌자여야 한다. 그리고 지식과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무엇보다도 경험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 예를 들자면 단순한 관상상태에 대한 경험적인 이해가 없으면 그러한 상태에 들어간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것은 오히려 수련자의 영적진보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째 지식이 중요한데, 여기 지식이란 단순한 교과서적인 지식이 아니라 내적으로 스며든 경험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기독교 영성사적인 전통에서 볼 때 지식은 식별적인 지혜와 관련되어 있다. 특히 자아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지식을 얻게되며 그것은 곧 겸손과 지혜로 연결된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련자의 영성경험을 기독교적인 경험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성서의 지식이나 교부들이나 기독교 영적스승들의 지혜 등에 충분히 익숙해 있어야 한다. 네째 영성지도자는 식별의 사람이어야 한다. 식별적인 지혜나 통찰력을 발휘하여 그 사건들이나 경험들이 수련자의 영성형성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인식하여 성장에의 방향에로 안내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영성지도는 지도자와 수련자와의 관계보다는 하나님과 수련자와의 관계 자체에 초점을 두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대화에 참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원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보도록 하고 만약 원한다면 하나님께 어떻게 가까이 갈 수 있는지를 도와준다. 영성지도자의 일차적인 관심은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체험을 하고 있느냐이다. 신앙체험과 영성지도의 관계는 음식재료와 요리의 관계와도 같다. 음식 재료가 없으면 요리를 할 수 없듯이 영성적 체험이 없이 영성지도가 있을 수 없다. 영성지도란 하나님이 어떤 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어떻게 의사를 전달하시는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런 하나님께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응답하게 하며, 하나님과의 친교를 깊게 하고, 그 관계에 바탕을 둔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지도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일차적인 조처는 수련자를 하나님과의 관계체험으로 인도해 주는 것이다. 그 관계체험을 알려주는 징조를 전통적으로 관상적 체험이라고 일컬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의 관상의 의미는 복음서 안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과 예수님께서 관심하시고 행하시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자신을 참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관상적인 태도는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사건 사물에 주의를 기울일 때 시작된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서의 각종 인물들과 뛰어난 그리스도인에게 주의를 기울여 관심을 쏟는 동안 자신의 존재를 그 사건들과 삶 속에 참여시키게 된다. 하나님을 단순히 삶의 뒷배경으로서가 아니라 성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 그리고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고 전 피조세계를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성지도자들은 수련자들이 관상을 체험하고 스스로 관상적인 삶을 유지하도록 끊기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초월적인 체험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적인 삶을 도와주기 위해서 단계적으로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들이나 자신을 잊어버리도록 인도한다. 영성 지도자들은 수련자들이 자기 몰두로부터 벗어나기까지 지속적으로 인내하며 도와주며 그리고 마침내 수련자가 궁극적인 실존의 세계인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해주어야 한다. 영성지도자는 수련자들이 즐기는 어떠한 활동을 통해서 관상적인 상태에 이르는가를 주의해 보아야 하며, 일단 그러한 사실이 발견된다면 그러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훈련의 한 방편으로 삼아서 절정에 이르는 관상경험을 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새나 꽃등 자연물을 관찰하거나 바하나 헨델 기타 고전적인 종교 음악등을 감상함으로서 자신을 잊어버리고 보다 차원높은 어떤 세계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러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도와주는 것도 영성지도자가 할 일이다. 그러므로 영성 지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어떤 개인이 하나님의 현존 안에 들어가는 체험을 하느냐 그 체험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성장을 위하여 어떤 대처를 하고 있느냐이다.

영성지도에 있어서 또 다른 면은 자신의 양심을 의식적으로 성찰하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양심을 드러내는 것’(manifestation of conscience)이 영성지도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영성지도자는 각 사람의 행동에 대한 관심보다는 각 영성의 근본적인 태도나 내적인 열망, 어려움을 대처하는 태도, 선과 악에 응답하는 방법등에 관심을 갖게 한다.” 자주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내면 깊이의 욕구나 열망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 머튼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식별하는데 있어서 율법적인 개념의 인도를 받는다면 내면적인 욕구나 열망을 왜곡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창조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재창조 되기를 기대 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우리의 자유를 이용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의 순수한 마음의 열망은 자주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중요한 징조가 된다. 말하자면 겸손하고 진지한 우리 내면의 욕구가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소원이다. 그러므로 토마스 머튼은 ‘우리가 내적인 진실을 말하는 법과 내면 깊이에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성지도의 중요한 관심은 내면적인 자아, 즉 진자아에 대한 것이다. 영성지도자는 사람들의 눈에 비추어진 자아나 자기 자신의 눈에 비추어진 자아 보다는 하나님의 눈에 비추어진 자아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한다. 그는 우리의 소명에 관한 내적인 진실, 즉 우리 영혼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나 은혜의 과정들을 알기 위하여 성령께 순종하면서 영성지도를 해야한다.

영성지도는 일대 일의 관계를 수행하고, 믿음 안에서 성장을 도와주는 입장에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두 가지의 순간이 있다. 첫째는 서로가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각 개인의 삶의 장을 통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표현하도록 하는 순간이 있다. 두 번째는 점차적으로 이 음성을 적당하게 다듬어 가고 응답해 가는 순간이다. 이렇게 과정으로서 영성지도를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은 절차를 하나의 모델로 제시할 수 있다.

1) 수련자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을 확인하고 그 경험을 하나 하나 열거하며 말로 표현 하도록 한다.
2) 수련자로 하여금 경험으로부터 받은 느낌이나 의미를 찾아내도록 한다.
3) 수련자가 내적인 의미를 통해서 부름을 받은 것에 대하여 충실하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워 준다.
4) 수련자로 하여금 구체적인 믿음의 행동을 하도록 여러 대안들을 개발케 하고, 그 대안들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수행의 결과들을 평가하게 한다.

따라서 영성지도자는 수련자에게 계속적으로 경험을 요구하며 경험을 식별하며 그 경험에 대한 의미와 내적인 성찰을 촉구하며 그리고 가장 적합하게 응답하도록 선택을 요구하게 된다. 토마스 머튼은 영성지도의 근본적인 의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성지도는 영성형성과 지도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그 안에서 특별한 소명으로 인도하고 격려한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에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명의 목표점과 하나님과 일치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여기 영성지도란 계속적인 지도와 격려의 과정이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으며 각 개인들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깊게 해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실현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Ⅳ. 결론

심리적인 상담가들이 각 개인의 삶의 정황, 자아 이미지 구축, 관계적 삶 속에서 야기되는 내적인 갈등과 고통 등에 관심을 두는 것처럼 영성지도자도 그러한 일에 역시 관심을 둔다. 그러나 영성지도자는 한걸은 더 나아가 수련자가 겪어야 할 경험의 최종적인 차원이 무엇이냐에 관심이 있다. 즉 이 모든 상황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당신의 삶 속에서 당신은 하나님을 얼마나 강력하게 만나고 있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움직이고 있으며 부르고 있는가? 당신의 일상적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에게 영적으로 어떻게 자라가기를 원하시는가? 이러한 궁극적인 경험을 인식하고 적합하게 응답하게 해서 영성적 성장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성숙한 영성지도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청된다.

우리는 종교다원주의적인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이 문화는 각기 다른 모든 종교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각기 다른 표현양식에 불과하다고 믿는 사상이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지만 결국은 하나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에게 신이 있다면 그것은 내면적인 신이며 자아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든 종교를 인정하나 배타성은 거부한다. 서로 다른 종교로부터 필요한 정도 만큼 흡수하여 혼합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범신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절대적인 초월자에 대한 귀의보다는 내면 안에 있는 신, 각 개체에 존재하는 신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적 문화에 영향을 받고 있는 상당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기독교에서의 ‘믿음’을 동양신비종교에서의 ‘깨달음’으로 그 자리를 대체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이제 동양의 전통에 눈을 돌리고 위협받고 있는 자신들의 사회와 고통받고 있는 자신들의 종교들을 위해 무언가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지 찾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의 교회가 종교의 참된 영적 측면을 상실했다’라고 말하면서, 조직적 종교를 통하지 않고도 개인적 체험이나 깨달음을 통해서도 기독교의 믿음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문화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위협받고 있는 오늘의 시대적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경험적인 차원의 위험성 때문에 교리적인 측면만을 크게 부각시킴으로서 그 정체성을 유지해 보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명한 대처 방안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체험적인 기독교를 역동성이 없고 생명력이 없는 사변적인 기독교로 변질시킬 위험을 안고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체성에 대한 위험이 도사려 있을지라도 기독교 영성의 생동력을 위해서는 경험적인 차원이 부각되어져야 한다. 더욱이 우리 시대는 ‘얼마나 아느냐’의 문제보다는 ‘얼마나 경험했느냐’라는 문제를 더 소중히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경험적인 차원을 잃지 않으면서 독특한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한 모색중의 하나가 풍부한 영성적인 경험과 전통적인 지혜를 이어받아 성경적이고도 교리적인 지식을 갖춘 영성지도 체제를 우리 교회 안에서 회복시키는 것이다(유혜룡교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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