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초 영국의 영화산업계를 한때 이끌었던 크리스천인 아더 랭크(Joseph Arthur Rank, 1888-1972)는 사업에 대한 많은 염려를 하던 중 하루는 걱정을 푸는 한가지 아이디어를 개발해 냈다. 염려거리가 생길 때마다 그날의 날짜와 내용을 기록해서 염려상자에 넣어 두고는 매주 수요일을 염려의 날로 정해 상자 속의 메모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수요일, 그는 특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때때로 걱정거리가 적힌 메모지를 상자에 넣을 당시에는 대단히 큰 문제였는데 그것을 훗날 다시 읽어볼 즈음엔 이미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되는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정말 고민하며 염려할 만한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염려’라는 말의 헬라어는 ‘메림나오'(μεριμνάω)로서 ‘갈라진 마음’ 여러 조각으로 나누다’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 상이한 방향들로 분산되는 것을 뜻한다. 영어로는 ‘worry’ 즉 ‘물어 뜯는다’, ‘이빨로 목을 물어 뜯어 질식시킨다’는 뜻이다. ‘심빠이(心配)’라는 말 역시 마음이 갈라진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염려하는 이유는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하며 마음이 고정되지 못하고 흔들릴 때 염려에 빠지게 된다.
초대교회 문서에 나오는 성도들의 이름 중에는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이름이 많았다. ‘티테디오스 요한’, ‘티테디오스 바울’, ‘티테디오스 제임스’ 그런데 이 ‘티테디오스’라는 말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예수를 믿고나서 자신의 삶이 변하게 되고 염려해서 벗어나자 자기 이름에 덧붙인 애칭이었다.
하늘을 높이 나르는 독수리는 산과 강을 어떻게 건널지 염려하지 않는다. 독수리는 바람이 불어오면 그 바람을 타고 그 큰 날개를 펴서 하늘상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독수리는 바람이 불어올때 켤코 바람을 탓하지 않는다. 바람이 폭풍이 되어 거세게 불어올때에도 독수리는 본능적으로 폭풍을 향하여 날아간다. 불어오는 폭풍을 타고 더욱 더 높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어느 정도 하늘로 올라가면 폭풍권을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오히려 그 바람을 타고 바라고 소원하는 항구에 더 빨리 이르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의 강을 건너왔지만 요즘 사는 것이 버겹고 힘들다는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린다. 사람들의 마음도 조급하고 인심이 메말라가는 것 같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을 ‘독수리’라고 말한다. 하늘의 꿈과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이민자들은 삶이 힘겹고 각박해져도 자신의 인생이 추락할때에도 낙심하지 않는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신32:11)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기 때문이다.
“오직 주를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이사야 4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