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기다림 (눅2:25-38)
매년 새해의 시작은 1월 1일 신정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교회력의 시작은 대림절(Advent)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은 교회력으로는 신년이 되며 따라서 대림절 첫째 주일이 신년 정월 초하루가 되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대강절. 강림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대림절’(Advent)이란 뜻은 “도착한다, 기다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항이나 버스정류장에서 손님을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려 보신적이 있으신지요.
양로원에 가시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속절없이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군가가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면 금방 실망하시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초대 교회부터 성탄절 이전 네 번 주일을 대림절 혹은 강림절로 지켰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이 땅에 강림(Advent) 즉 내려오심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기간이라는 뜻입니다. 강림이란 마치 풋볼 경기에서 상대방 골대에 볼을 가지고 터치다운하듯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touch down 즉 성육신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림절에는 강단상에 촛불 5개가 꽂혀 있습니다. 3개의 보라색과 하나의 붉은 색(혹은 분홍색), 하나의 하얀색으로 구성되어집니다. 첫번째 초는 예언의 초(희망), 두 번째는 베들레헴의 초(평화), 세 번째는 목자들의 초(기쁨), 네 번째는 천사들의 초(사랑)를 뜻합니다.
성탄절을 바로 앞둔 바로 직전 주일에는 붉은 색을 점화하는데 이것은 사랑을 상징합니다. 초의 색깔이 점점 짙어지는 것은 주님이 더욱 더 가까이 오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대림절 화환은 상록수를 이용하는데 상록수의 푸름은 변함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화환의 동그란 모양은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초’는 독일 개신교 목사인 요한 힌리히 비헤른이 어린이 보호시설 ‘라우에 하우스’에서 첫 불을 밝히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성탄절에 점화하는 하얀 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세상을 밝히시는 빛되신 주님을 상징합니다. 어둠속에 살고 있던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다리며 매 주일마다 촛불이 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림절 기간동안 둘째 주일(올해 12월 10일)을 성경주일로 지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의 빛이 되었다는 점에서 성경주일을 대림절 기간동안 지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촛불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 다시금 오실 신앙되시는 주님을 소망중에 기다리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동안 메시야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이땅에 초림하셨고 언젠가는 다시 재림할 것이라는 믿음속에서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주님의 다시오심을 믿습니다. 한때 미국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얼마나 교리를 믿고 있는지를 조사할 때 주님의 다시오심을 못 믿는다는 사람들의 비율이 제일 높게 나왔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역사관과는 달리 기독교는 직선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은 시작(알파)이 있고 끝(오메가)이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역사가 종말에 이를수 있기에 우리는 그 때를 생각하며 우리 초를 종말의 시대에도 밝게 비출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시몬과 안나의 일생은 오랫동안 희망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오심을 기다리며 사모하며 살아온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오늘을 사는 성도님들에게 너무나 아름답고 잔잔한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시몬과 안나는 ‘능동적’으로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를 메시아인줄 알아본 사람은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가 올 것을 알고 있었고 오시면 맞이하리라 생각하며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2:25)”
그러나 두 사람이 기다린 기다림은 수동형이 아닌 능동형입니다. 주님오심을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시몬은 의롭고 경건하여” 25절 오실 주님을 위해 시몬은 성령으로 자신을 다스리며 경건히 살았고 이웃을 주님을 대하듯 신실하게 대했습니다. 안나또한 금식하며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기다렸을 뿐만 아니라 섬기는 일을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해왔습니다.(눅2:37)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대에 시몬과 안나는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삶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흐트러지게 마련입니다. 병원의 환자들은 대체적으로 처음엔 희망을 가져보다가 더 이상 살수 없다는 선고를 받으면 자포자기합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폴 트루니에는 현대 신앙인들의 비극 중에 하나는 구도의 정신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만남을 위하여 오늘 우리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내 시간과 물질, 건강을 바로 사용하고 있는지 심판대에 섰을 때 주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것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적극적인 기다림입니다.
둘째, 시몬과 안나는 ‘절망중 희망’을 가지고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두 사람이 바라본 당시 시대 모습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시몬은 자신의 마음속에 평안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 때는 나라를 잃고 정치적으로 식민지 생활에 주권을 빼앗기고, 자신의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시므온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암흑시대에 이스라엘을 위로해 주실 분을 만나기 전엔 죽을 수 없다는 기다림의 기도를 간절히 했습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가져다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언약이 400년 만에 이루어져 통일 왕국이 세워졌고, 다윗 왕조 시대에는 대국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이 놀랍게 성취된 사실에 감격 했습니다. 그러나 통일 왕국도 오래 가지 않아 막을 내리고, 남북이 갈라져 분쟁의 역사를 이어오던 중 남북 왕조가 차례로 멸망했습니다. 나라도 땅도 잃었고 신앙마저 잃은 백성들에게 그들이 믿고 신뢰하던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은 잠시의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 축복을 잃어버린 백성들은 이방 나라에 포로가 되어 깊은 좌절과 절망감 속에 빠져 버렸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런 절망적이고 어두운 시대에 일어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무너진 나라의 회복을 예언하면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의 탄생을 바라 보도록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므온에게‘이스라엘의 위로자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26)는 말씀은 그를 위해 기도했더니 성령을 통해 주신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생전에 그를 볼 것이고 보기 전에 내 생명 거두지 아니하리라 는 약속이었습니다.
안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주야로 금식하며 탄식의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안나는 남편과 단 7년을 함께 살고 무려 84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살았습니다. 당시 과부에게는 대외적인 사회적인 지위를 주지 않았습니다. 환경으로만 보면 오로지 절망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불행이라는 터널을 지날 때 터널 끝에 비추이는 빛과 같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두려울 때 이길 수 있는 용기가 되기도 하고 현실을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주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버림 받았다고 생각될 때 혼자가 아니며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구나.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상기시켜 줍니다. 희망은 현실의 슬픔을 이길 수 있게 합니다.
결국 두 사람은 예수님이 태어난 지 8일 만에 부모의 품에 안겨 성전에 올라왔을 때 그리스도(Christ Messiah, the anointed one)이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시몬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너무가 감격스러워 예수님을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눅 2:30-32)
기도)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지금까지 동행해주시고 보호해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순간순간 힘겨워서 포기하고 싶고 주저앉고 싶을때가 많았지만 주님이 힘주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올해 얼마남지 않은 시간들을 주님과의 만남의 시간 ,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으로 만들어가며 후회없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사모하며 이번 대강절의 기간들을 아름다운 기다림으로 채워나가게 하시고 시작은 비록 부족하고 고통스러웠어도 마지막은 아름답고 감사한 축복의 해로 결산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