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탄 웨슬리와 애즈베리
–웨슬리 회심 285주년을 맞아–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던 해인 2017년 4월 동북부 한인 연합감리교 목회자 사모 33명과 함께존 웨슬리의 발자취를 따라 뉴잉글랜드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웨슬리가 회심한 장소인 런던의 올더스케잇 거리(Aldersgate street),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웨슬리가 묻힌 번힐필드(Bunhil Fields), 감리교 모교회인 웨슬리 채플, 영국 감리교본부, 웨스터민스트사원, 옥스퍼드대학, 웨슬리의 생가인 앱웟의 올드 랙토리(Old Rectory, Epworth)을거쳐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웨슬리가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한 최초의 감리교 건물인 뉴룸 채플(New Room Chapel)이 있는 항구도시 브리스톨(Bristol)이었다. 뉴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감리교 예배당으로 1739년에 지어졌고 1748년에 보수되었다. 일반적으로 뉴룸으로 알려져있으나 브리스톨에서는 존 웨슬리의 채플로 불려진다. 이곳은 존 웨슬리 사역의 중심 역활을 하였고 18번의 감리교 연회가 개최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애즈베리를 포함한 설교가들의 유품을 보관한방도 있고 몇분 정도를 걸어가면 웨슬리의 동생 챨스 웨슬리의 집이 옛날 모습을 그대로 보전한 채있다. 챨스 웨슬리는 존 웨슬리보다 1738년 5월 21일 3일 먼저 회심을 경험하고 일생 동안 7천곡 이상의 찬송시를 작사한 찬송가 시인이기도 하다.
뉴룸채플 입구에는 웨슬리가 말을 탄 동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성경이 펼쳐져있는 이 기마상은 1932년 Walker. Sc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웨슬리는 브리스톨인근 필(Pill)항구에서 미국 감리교 태동을 위해 1771년 애즈베리(Francis Asbury)와 1784년 토마스콕(Thomas Coke)을 배에 태워 당시 신대륙인 미국으로 보냈다.
1771년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애즈베리는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신대륙으로 간다. 명예를 얻기위함도 돈을 벌려고 함도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여 미국의 최초의 감리교회인 St. Georges Methodist Church 설립하게 되었다.
그후에 1784년 볼티모어 있는 Lovely Lane Methodist Church에서 미국 최초 크리스마스 연회(Christmas Conference)가 열려 정식 미국 감리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00년후 1883년 조미수호조약 체결후 고종은 민영익, 홍영식을 비롯한 보빙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였다. 보빙사(報聘使)는 1883년 조선에서 서방 세계에 최초로 파견된 외교 사절단을일컫는 말이다. 한국의 보빙사절단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워싱턴 DC를 가다가 볼티모어에서 가우처(Goucher)여대 학장이요 Lovely Lane감리교회의 가우처박사를 만나 뉴욕 감리교 선교부에 조선에 대한 선교기금을 기부하게 하여 선교사 파견의 교두보가 되었다. 그 결과 아펜젤러 선교사가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땅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당시 보빙사절단은 워싱턴의 스미스소미언 박물관(The Smithsonian institution)에 조선약용식물의 표본을 기증하여 최초의 문화교류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뉴욕에서 체스터 아서(Arthur, C. A.)대통령과 2차례 회동, 양국간의 우호와 교역에 관하여 논의한 후 1884년 5월 귀국하게 된 것이다. 올해 2023년은 한국의 보빙외교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고 선교의 문이 열린지 14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존 웨슬리(1703-1791)는 1703년 6월 17일 사무엘과 수잔나의 19자녀중 15째로 출생하였다. 웨슬리가 여섯살되던 해 1909년 2월 9일 한밤 중에 목사관에 불이나서 3층 난간의 불구덩이 속에서 기적적으로 구조된 적이 있었다. 웨슬리는 장성한 다음에 어릴 때의 이 사건을 간증하면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타는 불에서 건져낸 부지깽이(A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로 간증하곤 하였다.
이런 웨슬레의 어린시절 경험이 1738년 5월 24일 런던의 올더스케잇 거리에서 모라비안교도들이 모여서 성경을 읽을 때 웨슬레의 가슴이 갑자기 뜨거워지면서 구원의 확신을 통한 회심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웨슬리를 통해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한 성령의 불이었다. 웨슬리는 마음 속에 불붙은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영국의 방방곡곡에서 설교하는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영적거인이었다.
웨슬리는 당대 최고의 명문인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고 링컨 칼리지에서 연구교수로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는 제도권안에 갇혀진 강단 설교자라기 보다는 강당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한 전도자라고 할 수 있다. 세계교회 역사상 웨슬리만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속으로 깊이 파고든 전도자도 없었다. 당시 그를 배척한 콘월 지방에는 일생 32번이나 방문해 말씀을 전하였다. 웨슬리는 그의 친구 조지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처럼 옥외로 나가 들판이나 공원, 잔디밭, 광산, 거리, 들, 시장 철조공장등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설교했던 것이었다.
브리스톨 한함 마운트(Hanham Mount)는 웨슬리의 야외설교 첫 장소이다. 브리스톨지역에서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던 버틀러감독이 웨슬리를 비난하며 강단에 서지 못하게 하자 몰려드는 수많은 인파들속에서 웨슬리가 ‘세계는 나의 교구(The world is my parish)’라고 외치며 전한 것이다. 복음에 빚진 웨슬리는 그가 말을 타고 복음을 전한 거리는 1년에 평균 5천마일, 40년 간 52만㎞로 지구를 13회 이상 순회하며 그 틈에 4백여편의 저술활동을 하며 책을 펴냈으며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목회 66년동안 한번도 걸러본 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하였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중에 1778년에는 선곡하여 525곡의 커다란 찬송가를 만들기도 하였다. 철저히 칭의와 성화에 바탕을 둔 웨슬리의 설교는 당시 타락한 영국 사회의 도덕과 경제, 윤리를 변화시킨 토대가 되었다. 그는 반백이 넘도록 다니며 45,000번의 설교를 했다. 매일 평균 2차례씩 설교를 한 것이다. 그 결과135,000명을 전도하여 결신시키는 열매를 얻게된 것이다. 그의 외모는 왜소했지만 그의 작은 몸안에 세계를 흔드는 힘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영국 브리스톨 뉴룸과 같이 뉴저지주 메디슨에 위치한 감리교소속 드류대학교 정문에 말을 탄 동상이 있다. 바로 웨슬리가 브리스톨 필항구에서 미국 감리교태동을 위해 파송한 프란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 1745 –1816)이다. 말은 달리고 달리다 지쳐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애즈베리의 모습은 한손에 성경을 들고 눈에는 총기가 살아있는 복음전도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1970년, 2023년 올해 애즈베리 대학의 부흥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존 웨슬리회심이후 오랜 세월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예비하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887년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배재학당에서 시작된 한국 최초의 신학대학인 감리교 신학대학의 뺏지가 바로 성경을 손에 쥐고 말을 타고달리는 웨슬리이다.
영국 브리스톨에서 웨슬리가 타고 출발한 말은 콘웰, 글로스터,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등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 미동부 버지니아, 메릴랜드, 펜실바니아, 뉴저지, 뉴욕, 커네티컷등13개주를 거쳐 1903년 원산에서 미 남감리회출신 하디(Robert A. Hardi, 1865-1949)선교사의 가슴에 불을 붙이고 한국 기독교 부흥의 불씨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시간에도 제2, 3의 웨슬리의 후예들을 태우고 하나님의 꿈인 잃어버린 영혼구원을 위해 복음을 들고 전세계 온누리 곳곳에서 쉼없이 달리고 있을 비전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