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기도시 모음>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외
+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시인, 1913-1975)
+ 가을·2
우리 모두
시월의 능금이 되게 하소서.
사과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그 햇살로 출렁대는 아아, 남국의 바람.
어머니 입김 같은 바람이게 하옵소서,
여름내 근면했던 원정(園丁)은
빈 가슴에 낙엽을 받으면서, 짐을 꾸리고
우리의 가련한 소망이 능금처럼
익어갈 때,
겨울은 숲속에서 꿈을 헐벗고 있습니다.
어둡고 긴 밤을 위하여
어머니는 자장가를 배우고
우리들은 영혼의 복도에서 등불을 켜드는 시간,
싱그런 한 알의 능금을 깨물면
한 모금, 투명한 진리가, 아아,
목숨을 적시는 은총의 가을.
시월에는 우리 모두
능금이 되게 하소서.
능금알에 찰찰 넘치는
햇살이 되게 하소서.
(오세영·시인, 1942-)
+ 가을의 기도
가을이여 어서 오세요
가을 가을 하고 부르는 동안
나는 금방 흰 구름을 닮은 가을의 시인이 되어
기도의 말을 마음속에 적어봅니다
가을엔 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바람을 잡아
그리움의 기도로 키우며 노래하길 원합니다
하루하루를 늘 기도로 시작하고
세상 만물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발길이 산길을 걷는 수행자처럼
좀 더 성실하고 부지런해지길 원합니다
선과 진리의 길을 찾아
끝까지 인내하며 걸어가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언어가 깊은 샘에서
길어 올린 물처럼
맑고 담백하고 겸손하길 원합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맑고 고운 말씨로 기쁨 전하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해인· 시인, 1945-)
+ 가을엔 따뜻한 가슴을 지니게 하소서
가을엔 마음의 등불 하나 켜 두게 하소서
하루의 아픔에 눈물짓고
이틀의 외로움에 가슴 쓰린
가난해서 힘겨운 나의 이웃이여!
그 가녀린 빛이 무관심의 벽을 넘어
우리라는 이름의 따뜻한 위로가 되게 하소서
가을엔 뜨거운 눈물의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
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
참아낸 긴 시간들이 알알이 익어갈 때
우리 살아가는 인법도 이와 같아
인내와 믿음과 기다림의 눈물 없이
어떻게 사랑을 말할 수 있으리오
가을엔 따뜻한 가슴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같은 비바람을 거치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나무를 떠나 흙으로 돌아가는 낙엽을 위하여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누구를 위하여
건강을 잃고 신음하는 그 누구를 위하여
가을엔 비움의 지혜를 깨닫게 하소서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기보다
지는 낙엽의 겸허함을 바라보게 하소서
욕망의 늪은 그 깊이를 모르고
욕심의 끝은 한이 없나니
하늘을,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오늘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하소서
(이채·시인)
+ 9월의 기도
나의 기도가
가을의 향기를 담아내는
국화이게 하소서
살아있는 날들을 위하여
날마다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한쪽 날개를 베고 자는
고독한 영혼을 감싸도록
따스한 향기가 되게 하옵소서
나의 시작이
당신이 계시는 사랑의 나라로
가는 길목이게 하소서
세상에 머문 인생을 묶어
당신의 말씀 위에 띄우고
넘치는 기쁨으로 비상하는 새
천상을 나는 날개이게 하소서
나의 믿음이
가슴에 어리는 강물이 되어
수줍게 흐르는 생명이게 하소서
가슴속에 흐르는 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마른 뿌리를 적시게 하시고
당신의 그늘 아래 숨쉬게 하옵소서
나의 일생이
당신의 손끝으로 집으시는
맥박으로 뛰게 하소서
나는 당신이 택한 그릇
복음의 사슬로 묶어
엘리야의 산 위에
겸손으로 오르게 하옵소서
(문혜숙·시인)
+ 9월의 기도
언뜻 스치는 한줄기 바람이
홀로 새벽을 깨울 때
텅 빈 가슴 내밀어
서늘한 기운으로 부풀게 하소서
한 여름내 무성했던
짙푸른 상념의 잎사귀들
가을빛 삭힌 단풍이게 하시어
그 빛깔로 내 언어를 채색하소서
숨가쁜 땡볕의 흔적
길게 늘어진 그림자 추슬러
하늘거리는 햇볕 아래
알알이 고개 숙인 열매이게 하소서
저녁 풀벌레 소리
서늘한 여운으로 숲속에 들 때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
국화꽃 잎 위에 이슬로 내리게 하소서
서러운 지난날의 기억들
해거름 석양이 드리울 제
노을빛 그리움으로 번지어
빈 들녘에 피어나는 연기 되게 하소서
(강이슬·시인)
+ 10월의 기도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본보기가 되는
사람 냄새가 나는 향기를
지니게 하소서.
타인에게 마음의 짐이 되는 말로
상처를 주지 않게 하소서.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늘 변함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살아가며 고통이 따르지만
변함없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사람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마음에 욕심을 품으며
살게 하지 마시고
비워두는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시고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게 하소서.
무슨 일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아픔이 따르는 삶이라도
그 안에 좋은 것만 생각하게 하시고
건강 주시어
나보다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10월에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더욱 넓은 마음으로 서로 도와가며 살게 하시고
조금 넉넉한 인심으로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 있는 마음 주소서.
(작자 미상)
+ 11월의 기도
낙엽 지고
찬바람 불어오는 계절에
마음까지 차가워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마음을 닮아
따뜻한 사랑이
흐르게 하소서.
(작자 미상)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