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헤미야 프로젝트(4)
📖 느 Nehemiah 5:1-19
느헤미야 2장에서 4장까지는 예루살렘 성벽을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중건하면서 밖으로부터 많은 반대와 압력이 있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벽 건축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5장은 이스라엘 백성들 내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갈등과 시련의 이야기입니다.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진행되던 성벽 재건 공사는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기근으로인한 식량난, 그리고 과중한 세금 징수로 사회적 갈등이 깊어진 것입니다. 오랫동안 공동체에서 계층 간의 갈등과 대립은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해졌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성벽 공사는 결코 끝마칠 수 없었으며 극단적인 경우 공동체 구성원들의 불만이 공멸을 초래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해 새로운 믿음의 연대를 구축하고 성벽 재건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1. 성벽재건 뒤에 있었던 내적인 문제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르짖다’는 단어 앞에 ‘크게’라는 부사까지 첨가되어 있습니다. 상황이 매우 어렵게 여겨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백성들(남자들을 지칭)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었다’고합니다. 함께 크게 부르짖었다고 하는 것은 각 가정에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유다 자손들의 그 부르짖는 원망의 대상이 그들의 동족인 유다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당시 공사중에 유다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이유는 흉년으로 인한 기근과 무거운 납세의무, 도에 넘치는 고리대금의 이자 등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먹을 것이 없었고 자녀들을 팔아야했고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전답(田畓)이 부자들의 손에 넘겨야만 했습니다.
2. 느헤미야의 결단
이 때에 느헤미야가 보여준 반응을 6-7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느헤미야의 반응은 ‘크게 노하는 것’과 ‘깊이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크게 노했다’는 것은 느헤미야가 어려운 백성들의 편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관리입니다. 그에는 권력도 있고 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어려운 사람들의 편에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했다’는 것은 분노하고 끝낸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고 하나님께 여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후에 백성의 지도자들을 꾸짖으며 설득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방에 팔렸다가 겨우 돌아왔는데 우리가 또 동포를 팔아서 되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자를 받는 것을 그만두고 밭과 포도원과 집은 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비싼 이자를받는 것을 그만하도록 하여라.”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5:13)
느헤미야의 촉구로 인해서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단지 자기돈에 눈이 멀어 이전에 동족들을 착취했던 것만을 뉘우치고 눈물을 흘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더욱 경건하고 자비롭게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회개(悔改)’는 문자 그대로 하면 ‘뉘우칠회’에 ‘고칠 개’입니다. 지난 삶을 반성하여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는 ‘회(悔)’를 한 것과 아울러 자신들의 삶을 고치고 바꾸는 일까지 했습니다.
3. 느헤미야의 청렴결백하고 희생적인 삶
백성의 지도자들의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였을 때에 느헤미야도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삶이 어떠하였는지 1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관리인 느헤미야는 마음만 먹으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지배국의 관리가 식민지(피지배국)의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압제하는 것은 동서고금에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완장을 차면 달라진다.’는 말도 있고, ‘완장을 채워주면 줄 세운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리 작아 보여도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고 생각이 되면 사람들을 누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신이 총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2년 동안이나 총독으로서 받아야 할 봉급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총독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누리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리 한 것을 보면 총독의 봉급은 백성들의 세금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지고 있는 세금부담의 짐을 나누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를 1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라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서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고위관리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행동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적어도 느헤미야에게 총독의 자리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자리였습니다. 또한 느헤미야에게 총독의 자리는 누림의 자리가 아니라 섬김과 책임의 자리였습니다. 느헤미야에게 총독의 자리는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행하는 섬김의 현장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이 기도는 느헤미야가 이런 삶을 살 수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을 아니까 이런 삶을 계속 살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달라는 결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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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 증거가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느헤미야에게 “당신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면, 느헤미야는 틀림없이 “나는 내 앞에 계시고,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하나님께 그의 모든 삶을 은혜로 채워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지금 가진 지위나 권세나 권리 등을 생각해 볼 때 우리도 충분히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을 누리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사람들이 “당신은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그 분의 눈을 보고 말하십시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여기며 살기 때문입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게 될 때에 우리가 부름받아 서 있는 곳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며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보듬어 주시고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 아버지!
느헤미야처럼 저희들의 재능과 은사, 부와 권세들을 군림의 도구로 삼지 않고 섬김의 도구로 삼게 해 주십시오. 또한 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경외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우리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오늘이 우리 모두가 우리 삶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과 형제자매와 영혼들을 섬기는 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