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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적 경건 패러다임과 한국의 경건인물들

 

본 글의 목적은 성경에 나타난 경건성(=영성) 패러다임을 이해하고  한국 기독교 인물들 몇 사람의 경건생활을 소개함으로 예수님을 닮은 삶의 모습을 찾으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청빈, 순결, 검소, 겸손,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였다.

본 글의 마지막 부분은 각자의 신앙의 여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자신의 장점, 단점들을 진솔하게 내어놓고, 예수님을 닮기 위해 실천해야 할 내용도 적어 봄으로, 각자 자신의 신앙 생활을 중간 점검하는 좋은 계기가 될 줄 믿는다.

– 차 례 –

  1. 들어가는 말
  2. 성서에 나타난 경건이해

2-1 성서적인 경건의 개념

2-2 경건 훈련

2-3 성서적 경건 유형

  1. 경건의 원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2. 바울서신에 나타난 경건성 유형

4-1 바울서신에 나타난 경건성의 패러다임

4-2 바울서신에 나타난 경건성 내용

  1. 경건훈련 실제

5-1 대화의 기술

5-2 교제(사귐)의 실제

5-3 공동체 형성

  1. 기독교인의 경건 생활

6-1 폴리갑

6-2 마틴 루터

6-3 장 깔뱅(요한 칼빈)

6-4 요한 웨슬레

6-5 조나단 에드워즈

6-6 조지 뮐러

6-7 톨스토이

6-8 사무엘 무어(모삼열)

  1. 한국 기독교 경건 신앙인

7-1 김약연 (1868-1942)

7-2 이세종 (1880-1942)

7-3 최흥종 (1880-1966)

7-4 김현봉 (1884-1965)

7-5 류영모 (1890-1981)

7-6 현동완 (1899-1963)

7-7 김재준 (1901-1987)

7-8 손양원 (1902-1950)

7-9 한경직 (1902-2000)

7-10 강태국 (1904-1998)

7-11 배철수 (1904-1988)

7-12 박윤선 (1905-1988)

7-13 정인세 (1909-1991)

7-14 오북환 (1909 – 현)

7-15 장기려 (1911-1995)

7-16 방지일 (1911 – 현)

7-17 김용기 (1912-1988)

7-19 김계용 (1921-1990)

7-20 김준호 (1924 – 현)

7-21 윤응오 (1924-2001)

7-22 안경운 (1928-1993)

7-23 이동휘 (1935 – 현)

7-24 독자 여러분

  1. 맺는 말

참고문헌

  1. 들어가는 말

1970년대 후반부터 구미신학계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에서도 ‘영성'(靈性, spirituality)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1970년대까지도 기독교에서 영성이란 말을 쓰지 아니했는데, 컴퓨터 시대가 도래하는 1980년대부터 영성이란 말이 유행어처럼 많이 쓰게 되었다. 영성 운동, 영성 훈련, 영성 목회, 영성 사역, 영성 신학, 영성 회복운동, 찬양과 예배의 영성, 영성 세미나, 영성 집회, 영성원, 영성 클리닉, 영성 계발, 영성 지능(SQ=Spiritual Quotient) 등 도처에서 쓰고 있다. 이처럼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는 현상에는 사회적이며 시대적인 이유가 있다. 고도로 발달되어 가는 과학기술문명의 영향아래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문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며 외롭고 삶이 따분하게 느껴지는 병리현상이 만연되어 있다. 육신의 삶이 편리해지고 풍요로와 진다고 더 행복을 느끼거나 만족한 생활을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 정신적으로 허전하고, 영적인 생활은 메말라가며 늘 부족하고 고독해 한다. 삶의 기쁨과 생동감, 열정과 애착을 잃어 가는 현대인들은 옛 것에 대한 향수심이 강하게 일어난다. 차분히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 정신과 영혼의 병이 심각해서 이들의 행복과 생동감을 빼앗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나약해져 가는 인간의 회복을 위해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영성에 관심을 많이 기울인다. 이런 현상의 치유방법으로 다시 영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고 인간성을 회복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자는 뜻에서 영성 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본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교회가 양적 성장 패러다임에서 질적 성숙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에서 치유와 완전을 향한 영성을 추구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한국교회는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미 수적인 증가는 둔화되거나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어, 내실을 기하는 노력이 여러 면에서 시도되고 있다.

본래 ‘영성’이란 말은 역사적으로 정교회(Orthodox Church)에서 꾸준히 사용하였으며, 로마 캐톨릭의 수도원 운동에서 많이 쓰던 용어인데, 1980년대부터 기독교에서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정교회나 캐톨릭에서 사용하는 ‘영성’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 배후에는 경건 생활의 차원을 넘어 내면적 기도훈련, 금욕생활, 집단적 예배의식과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계에서 이 용어를 아무런 비판 없이 사용하고 있는데 문제점이 있다. 물론 김이곤 교수의 정의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의 영성이란 인간의 의식 속에서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진리에 대한 리얼하고도 실효성 있는 이해 전반을 포함한다”고 하는데 수긍은 하지만 영성이란 단어가 주는 이미지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이 책에서는 ‘영성’이란 단어 대신에 개역 성경(1956년)의 번역대로 ‘경건(敬虔 godliness)’이란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겠다. 개역에서는 57회나 ‘경건’으로 번역을 하였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경건의 영역이 영(靈)의 영역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육(肉)의 영역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영성’이란 용어가 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함이다. 또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가 마땅히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경건’이라 이해하기에 ‘영성’이란 단어가 주는 오해를 피할 수 있다. 경건한 사람을 영어로 pious person이라고 하지 spiritual person이라고 하지 않는다. ‘영성인(靈性人)’이란 말은 어색하고 그 말에 모순이 있다. 그 반대 어감이 ‘육성인’이란 말인가 ? 말씀과 기도, 구제와 봉사의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켜 ‘경건한 사람’ (참고. 눅 2:25, 행 10:2)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경건’이란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정적(靜的 static)이어서, 경건이 가지고 있는 동적(動的 dynamic)인 요소를 무시해왔는데, 본고에서는 성령의 동적인 요소와 정적인 요소 양자를 포함하는 ‘경건의 능력'(power of godliness 딤후 3:5)을 ‘경건'(piety)이라고 하자. ‘경건에 이르는 연습'(exercise unto godliness 딤전 4:7),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 , 시 12:1, 86:2),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한 성화(聖化 sanctification 딤전 4:5)등이 ‘경건’의 범주에 포함된다. 예배학의 권위자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 교수가 지적한 대로 “‘경건’은 ‘영성’의 전통적인 용어” (piety, the traditional term for spirituality)라고 말한다. 헬라어 ‘유세베이아'( )는 ‘경건'(godliness)과 ‘경건성'(piety)을 다 포함하나 이 단어는 ‘경건한 상태'(정적인 의미)보다는 ‘거룩한 행실'(동적인 의미)을 지칭한다.

요한 칼빈(=쟝 깔뱅 John Calvin, 1509-1564)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36, 최종판 1559)에서 경건성(pietas)애 대해 정의하기를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들을 알 때 나타나는 경외감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연관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경건’이란 단어를 소개하기를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두려움과 관련된 신앙으로서, 여기 나타나는 두려움 안에는 자발적인 경외심이 포함되며 그 경외심과 더불어 율법에 규정된 바와 같은 합당한 경배가 수반된다”고 했다. 철저한 신본주의적 경건(神本主義的 敬虔)을 강조했다. 칼빈 자신은 말씀과 기도로 경건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중세 말인 15세기에 시작된 모라비언(Moravian) 운동의 경건 훈련은 특기할 만하다. 보헤미아 지방의 공작부인에 의해서 시작되어진 신앙개혁운동이었다.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형제단(Brotherhood) 혹은 형제교회라는 이름으로 발전해서 영국, 미국에까지 (Bethlehem, PA) 그들의 교회가 자리를 잡아갔다. 친젠도르프가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한때 카톨릭의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를 내었고, 더러는 3만 6천여 가정이 보헤미아의 지역에서 도망쳐야 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후에 루터와 웨슬레 형제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특징은 모든 참된 교회를 사랑으로 대하고 봉사하는 디아스포라 운동이며 그들의 교육열 또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보이고자 고급교육을 시도했으며 출판사의 발전으로 성경뿐만 아니라 중요한 기독교 서적을 계속 발행했고, 무엇보다도 선교열을 가장 특징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가르치기를 사도신경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확실하게 채택되어 신앙 고백하는 경건한 신앙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 화형당함)는 로마카톨릭의 타락상을 무섭게 비판하여 사실 교회개혁을 예비하였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사보나롤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17세기에 있었던 독일의 경건 운동(Philipp Jakob Spener 1635-1705)과 18세기에 있었던 영국의 부흥운동 (John Wesley 1703-1791, George Whitefield 1714-1770, John Fletcher 1729-1785), 미국의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 19세기에 있었던 미국의 대부흥운동 (Lorenzo Dow 1777-1834, Dwight Lyman Moody 1837-1899, Charles G. Finney 1792-1875, 대학생 세계 선교운동 등) 때에 경건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다가 20세기 양차대전후 나온 허무주의와 실존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경건성 신학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중에서 독일의 할레(Halle)대학은 경건주의 신앙의 본산지가 된다. 대부분 한국 초기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 경건주의 영향을 받아 회심경험,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 전도와 봉사, 그리고 활발한 선교활동에 전력을 다하였다.

경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1970년대에 시작되더니 1980년대부터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되고 있다. 미국 신학계에서는 실천신학 분야에서 주로 경건성을 다루고 있으나 (Richard Foster, Ben C. Johnson, Urban T. Holmes, Kent Ira Gnoff, Joann W. Conn, Michael Downey, Kristine A. Haig 등), 조직신학자(프린스톤 신학교의 Diogenes Allen, Dubuque 신학교의 Donald G. Bloesch등), 성서신학자, 역사신학자들도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한국신학계에서는 1960년대에 토착화신학으로 한국문화의 풍토 속에 떨어진 복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 1970년대는 군사 독재 속에 민중신학이 태동되어 사회 복음화에 관심을 쏟았고, 한편에서는 성령운동으로 대형(Mammoth) 전도집회(여의도광장에서 1973년 빌리 그래함 집회를 시작으로, 1974년 엑스프로 대회, 1977년 민족대복음화 대회, 1980년의 세계 복음화 대회, 1984-85년 백주년 기념성회등)가 개최됨으로 교회의 양적인 팽창이 실현되었고, 80년대 이후에는 토착화 신학과 민중신학, 성령신학의 통전화(統全化, wholeness, unity)를 시도하는 중 한국적 경건성에 대한 신학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기독교학회에서는 1987년과 1988년에 경건성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실시하는 하기 목회자 세미나를 비롯하여 여러 신학대학교나 교단에서 실시하는 각종 목회자 계속교육에서 경건 신학을 다루고 있다. 대부분 기독교의 경건 연구 내용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생명력이 넘치는 관계의 삶을 어떻게 개발할 수 있느냐 ?’에 귀착한다고 오성춘 교수는 쓰고 있다. 경건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교계에서 경건의 개념이 잘못 쓰여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교회성장의 방법으로서 영성 세미나 및 영성 훈련을 하는 경우이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다는 프로그램, 성령운동, 부흥운동을 아무런 비판의식도 없이 수용하는 것이 영성 운동이며 이를 체계화 한 것이 영성 신학이라고 이해하는 것 같다. 이 글의 논제에 따르면 경건 운동은 예수를 바르게 믿는 운동이다. 정직하고 겸손하며, 심령이 가난하고 복잡한 것에서 자유함을 받아 단순화하여 천국시민의 바른 모습을 찾는 운동이다. 교회를 교회(Meta Church)되게 하는 운동이다. 물질주의, 배금주의, 세속주의에 물든 모습에서 탈피하여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쓴 한국인들이 있다. 이 글에서는 이들의 삶과 가르침을 살펴봄으로써 성서적 경건 유형의 회복을 지향하며 바람직한 한국 교계의 경건 운동을 모색하고자 한다.

  1. 성서에 나타난 경건 이해

2-1 성서적인 ‘경건’의 개념

경건(敬虔)의 영역은 영과 육을 포함한 전인격(whole person)에 해당된다. 신약성서에서 영육을 포함한 인격을 몸(Soma)이라고 한다. 최후의 만찬을 제정하시면서 예수는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아먹어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26)하셨다. 여기서 몸이란 말은 전 인격(영과 육을 포함)을 말한다. 바울은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롬 7:4)이라고 했고, 또 ‘너희 몸은…성령의 전'(the temple of the Holy Spirit)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고후 12:2-3),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고 했다. 몸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이웃에게 책임을 다하는 상태’가 경건의 모습이다.

영과 육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나 우선 각각의 개념을 살펴보고 통전(通全)적으로 이해해 보자. 영(靈, 히브리어 = 루아흐 ruah, 헬라어 = 프뉴마 pneuma, 라틴어: spiritus)에 대한 성서적 이해는 다양하다. 고린도전서 2:11-12에 보면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나 세상의 영에 속할 수 있다. 경건은 우선 하나님의 영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Pneuma ho Theos, 요 4:24). 하나님의 영이란, 첫째로 하나님의 창조적 숨결, 신적인 호흡, 혹은 살아있는 숨결 (Nishmat Hayyim, 창 2:7)로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어진 인간이 ‘살아있는 혼'(Nephesh Hayyah = living soul)되게 하는 호흡이다. 생명을 담고 있는 그릇 혹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로서 이해된다. 둘째는 임마누엘의 기운 즉 생기(生氣 Ruah, 겔 37:5, 6, 9)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임재(창 1:2), 지혜(사 11:2), 능력(사 61:1-2, 롬 1:20, 고전 4:20)을 뜻한다. 살았고 운동력(enegeia → energy)이 있는 생명의 바람이다. 에스겔이 본 마른뼈들이 큰 군대를 이루고(겔 37:9), 죽은 사람을 살려내며(왕상 18:22), 연약한 심령이 힘을 얻고(눅 24:49, 행 1:8), 병든 심령이 치유받게 되며(마 12:28, 행 4:30-31),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자유함을 받게 한다(요 3:6, 롬 8:2). 부활의 예수께서 제자들을 심방하여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아라” (Receive the Holy Spirit) (요 20:22)의 구절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성령이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6) 즉 성령으로부터 다시 태어난(born again from the Holy Spirit) 사람을 속 사람(inner man, inward man 엡 3:16, 고후 4:16), 새 사람(엡 4:23-24), 하나님의 자녀(요 1:12, 롬 8:14),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 고후 5:17), 빛의 자녀(엡 5:8) 라고 불리운다. 롬 8:13-14에 보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누구나 다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사람은 일종의 영적인 그릇으로 하나님의 영(신령한 자)을 담든가, 아니면 세상의 영(육에 속한 자)을 담는다. 하나님의 영은 생명을 주는 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 하신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 (요 6:63)고 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바르게 사는 것이 되며,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세상의 영에 속하기에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상태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9-14). 전도서 12:7에서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靈 the spirit, KJB)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했는데 생기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영에 속하여야 영생할 수 있다.

세상의 영은 미혹의 영으로 하나님의 영과 질적으로 다르다. 악령인 세상의 영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이다. 땅에 속한 지혜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소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고 했다.(약 3:15-16) 세상의 영은 하나님의 영을 훼방하고 대적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세상의 영에 속한 인간은 타락하여 불의, 불신, 교만, 불순종, 우상숭배, 탐욕, 허망한 생각, 악한 꾀, 죄인의 길, 거짓, 어리석은 판단, 위선에 빠져 (롬 1:18-32)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버린다.

육(肉)이란 개역 성경에서, 썩어질 사람(롬 1:23), 육체 혹은 육신(flesh, 헬라어 sarx, 고후 5:16), 겉 사람(outward man 고후 4:16), 육의 몸(고전 15:44), 사망의 몸(롬 7:24), 흙에 속한 자의 형상(창 3:19, 고전 15:49), 질그릇(고후 4:7), 땅의 장막(고후 5:1), 혈육(마태 16:17, 고전 15:50)으로 달리 표현하고 있다. 육은 영을 담는 그릇으로 이해된다. 영이 잘못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면 육은 정욕에 빠져 어두움의 일에 빠지게 된다 (롬 13:12-14). 그래서 영혼과 더불어 육신은 죄의 지배를 받게 되어 선한 것을 하지 아니한다 (롬 7:15-20). 성서에 죄악된 자아를 육체의 일부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세가 소명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5)고 하셨다. 모세는 신을 벗고 얼굴을 가리우며(출 3:6) 하나님 앞에 섰다. 여기서 발의 신은 부정하며 죄성이 있는 인격을 말한다. 이사야가 소명 받을 때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라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고 고백한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형용사는 예배용어로서 하나님께 가증스러운(abominable) 제물, 더러운(unclean, 레위기 11장 참고) 제물이란 말이다.

영과 육은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육의 사람이 죄성(罪性)으로 더럽혀지면 영의 사람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지 못하며, 영의 문제가 잘못되면 역시 인격이 바로 정립되지 못하여 육체에 고통과 상처를 준다. 이를 위장하려고 거짓, 낮은 자존심, 광명의 천사, 위선(이중생활, 이중인격)을 행하지만, 속으로는 늘 죄의식과 양심의 마비로 고통을 받는다. 영지주의의 이원론에 의하면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보는데, 성서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영과 육은 모두 악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영과 육은 선함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바울 서신에서는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영으로 표현하며,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를 육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영지주의의 이원론과는 다르다. 육의 몸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 (고전 15:44). 또 데살로니가전서를 마무리지으며 축도하기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함으로 경건의 영역이 전인격임을 말씀한다. 영과 혼뿐만 아니라 몸(여기서는 육을 말함)까지도 온전히 거룩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재림할 때까지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한다는 간구이다.

성서에서 보여준 경건(敬虔性, piety)이란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는 인간이 초월적인 하나님과 만나서 교제하면서 형성되는 관계성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삶의 과정을 말한다. 도우니(Michael Downey)는 궁극적 가치(Ultimate value), 즉 최고의 이상이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추구(human quest)라고 이해했다. 성서적 경건성이란 경건의 능력을 얻기 위해 영과 육의 통합체로서의 피조 인간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형성되는 인격적인 바른 관계성을 말한다 (The Biblical spirituality is defined as the right human relationship and communion with God, in the grace of Jesus Christ,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불완전한 인간은 본래의 창조적 영성을 회복해 가야 한다. 벤 죤슨(Ben Campbell Johnson)에 의하면 기독교 경건을 다음과 정의하고 있다. “성령을 통해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위한 인간의 능력이다. 이는 확대된 의식의 체험이며, 역사적 배경 속에 나타난 본질이며, 세상 속에 나타난 창조적 섬김(봉사)이다 (A human capacity for a relationship with God as revealed in Jesus through the Spirit; Experiences of a heightened/ expanded consciousness; Substance in the historical setting; Creative service in the world) (약 1:27).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1563) 1번에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이뇨 ?” 물음에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 곧 몸과 영혼이 나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 자신의 피를 희생하여 나의 모든 죄 값을 다 갚아 주셨고, 악마의 지배에서 나를 완전히 해방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는 나를 잘 지켜 주시기 때문에 하늘에 계시는 나의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머리털 하나도 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모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한 그의 목적에 반드시 부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에 의해서 그는 또한 영생을 나에게 보장해 주시고, 나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뜻을 다하여 기꺼이 그리고 언제나 그를 위하여 살도록 해 주십니다.”

헬라어에서 영이란 말이 용어적으로 명사적 용법(pneuma, spirit)과 형용사적 용법(pneumatikos, spiritual)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하나님 자신의 삼위일체적인 영을 말하지만, 후자는 인간 속에 내주하며 인격을 형성하는 영을 말한다. 그래서 허호익 교수의 정의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의 영은 ‘영’ ‘거룩한 영’ (Spirit)이라고 하며, 인간 속에 있는 영의 자리를 영성(靈性 Spirituality, Spiritualit t)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홍근수 목사는 “복음에 복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종하여 사는 삶의 노력이거나 예수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할 때 살아있는 응답을 하는 것이며 삶의 실천을 통해 응답하는 것이 기독교의 경건이라는 것이다.

성령운동과 다른 점은 경건성은 삼위일체적인 전체성을 강조하여 성부의 임마누엘의 삶, 성자의 성육신의 삶,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포함된 영역이며 삶의 자리이다. 종교성(religiosity, 종교형식주의, 위선적 행위가 많음)과 다른 점은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성실한 자세로 경건의 능력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2-2 경건 훈련 (piety practices)

인간의 경건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회복하려는 인간의 성실한 훈련과 노력을 요구한다. 디모데전서 4:7에 보니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당부한다. 여기서 ‘연습하라'(exercise)라는 말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훈련함을 의미한다. 이 동사는 본래 운동선수들이 하는 육체적인 훈련을 말하나, 당시 스토익 철학을 비롯하여 여러 문서에서 이 동사를 비유적으로 수용하여 정신적, 영적인 수련(discipline)을 뜻하고 있다. 경건에 이르는 훈련은 하나님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유익이 된다. 경건 훈련과 관계되는 말로 많이 쓰이는 말은 ‘경건형성'(spiritual formation)이란 단어이다. 해이그(Kris Haig)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하나님의 사업과 협조하는 과정인 동시에, 세상에 대해서는 거룩의 청지기가 되는 과정 (a process of cooperating with God’s work, of being stewards of the sacred in our lives and world)
  2. 영혼의 미용체조처럼 자기 발전을 위한 훈련 (self-improvement project like lowering your cholesterol or working out, a sort of calisthenics of the soul);
  3.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계속 동참하는 과정 (the ongoing process of human beings cooperating with the work of the Holy Spirit, who seeks to shape us more and more into the image and likeness of Jesus Christ).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를 향하여 꾸준히 달려가는 모습(히 12:1-2)이 경건 훈련의 모습이다.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과 작별하면서 바울은 회고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고 했다.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해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 (딤후 4:7-8상)라고 쓴다. 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그의 경건성 훈련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구약의 인물들 (특히 족장들, 일부 사사들, 예언자들, 바른 제사장들, 의로운 지도자들, 경건한 자들)이나 신약의 인물들 (사도들, 믿음 좋은 여인들, 신실한 교회지도자들)은 평생 경건성 훈련에 힘썼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5) 구절은 경건성 훈련의 기초가 되는 말씀이다. 말씀의 훈련, 기도의 훈련으로 성화(聖化, sanctification)하여 신의 성품(the divine nature)인 믿음 → 덕(virtue) → 지식 → 절제 → 인내 → 경건(godliness) → 형제우애(bortherly kindness) → 사랑(벧후 1:5-7)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경건성 훈련은 초대교부들의 경건한 삶, 중세의 수도원 운동, 교회개혁정신, 근대 경건주의자들의 믿음생활, 청교도들의 철저한 경건 생활, 그리고 현대 성령운동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신앙의 훌륭한 선배들이 경건성 훈련을 통하여 부족한 인격의 결함을 고쳐나가고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훈련을 받았다.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매순간 회개하고 죄사함 받아 깨끗하고 신령한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하이델벨크 요리문답은 경건 훈련에 대해 좋은 지침을 보여준다. 이 내용 구조가 세 부분으로 첫째 인간의 고뇌에 대하여(Von des Menschen Elend), 둘째 인간의 구속에 대하여(Von des Menschen Erl sung), 셋째 감사에 관하여(Von der Dankbarkeit)로 되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율법 말씀 앞에서 심히 죄인인데(첫째), 복음을 통하여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둘째),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따라 살아야 한다(셋째)는 것이다. 경건의 영역은 죄 사함 받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마땅히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다윗은 기도하기를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塗抹)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0)라고 기도했다.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이 경건의 생활이다.(렘 4: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났음이라” (요일 3:9)

기독교 신학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만남과 관계성을 다루는 것이다. 하나님과 “신비적인 합일” (Unio Mystica)을 목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며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삶을 체험함을 성찰하는 것이 그 과제이다. 기독교의 경건성 신학은 통전적인 성격을 지닌바 이론(교리적 영역)과 실천(윤리적 영역)을 분리하지 않고 이 양자를 포함하고 있다.

2-3. 성서적 경건 유형 (the paradigm of piety)

거룩한 하나님의 생기(生氣)를 받아 생령(生靈)이 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바른 관계성을 이룬다. 이런 인간의 모임이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어 경건성 훈련에 힘썼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경건 생활에는 일정한 틀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족장 아브라함과 이삭의 신앙 여정을 통해 그들의 경건 생활 및 경건 유형을 살펴보자.

2-3-1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旅程) <창 12-25장>

<요약>

약속(계약/언약) ⇒ 결단, 믿음, 순종, 경건, 성화 등 ⇒ 완전, 성숙, 성취(상급)

(창12:1-3) (창12:4 – 25:11) (창21, 출1장, 수1-11장)

  1. 자손약속(열국) 1. 순종 (12:4, 22:1-17) 1. 이삭 낳음(창21장)
  2. 땅 약속(가나안) 2. 믿음 (15:6) 2. 가나안정복(수1-11장)
  3. 복의 근원 3. 성화 (17:1-2) 3.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아브라함의 고향은 슈메르인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ans)로서 고대 바벨론의 수도이며, 달신(Moon god)인 닌나(Ninna)신전 있었다. 현재 명칭은 이라크의 라크리 시이다.

가족: 아버지- 데라 (나홀의 아들, 70세에 아브람을 낳음, 하란에서 205세에 죽음)

아내 – 사래 (후에 사라로 이름이 고쳐짐, 아브라함의 이복누이동생, 10년차이)

형제 – 나홀(하란의 딸 밀가와 결혼), 하란(롯을 낳음, 우르에서 일찍 죽음)

탈무드에 의하면 데라는 달신 우상 제조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는데 어느 날 바벨론에서 두 번째로 큰 달신의 신전이 있었던 하란(오늘날 터키 동남부 지역, 시리아 국경지대에 위치, 현지명 Harran)으로 이주하여 가서 살게 되었다. 데라는 그곳에서 죽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창 11:31-32, 12:4). 그러나 성서는 데라의 가족을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사오게 한 목적이 아브라함으로 가나안땅을 주기 위함임을 후에 밝히신다 (창 15:7, 느 9:7, 행 7:2-4). 순례의 길 (신앙인의 여로) 을 평생 걷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소명 받을 때 받은 세 가지 약속 : 말씀과 계시의 내용

㉠ 새 땅 약속 (12:7, 13:14, 15:7이하, 17장, 26:2이하-이삭에게, 28:13이하, 35:12-야곱) 약속

창세기 23장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매장지를 사다 (400세겔=4.5Kg)

여호수아 때에 가서 이 약속은 실현되며(수 21:45), 다윗-솔로몬 때 최대 영토

㉡ 후손 약속 (12:2, 13:15, 15:1-6, 17-18장, 21:1-7, 22:17, 46:3)

㉢ 복의 근원의 약속 (12:3, 22:18, 26:4, 28:14) –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실현됨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하란을 출발하여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 (창 12:4-9)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말씀 순종-실행함)

12:7 (가나안의 세겜 땅에 도착하였을 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8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그후 아브라함이 남쪽으로 이주해 갔는데 그가 다녔던 길이 훗날 ‘족장의 길’로 불리워진다. 오늘날 중앙산악지대로 해발 800-1000미터이다. 이삭, 야곱, 요셉 등 족장들이 이 길을 이용하여 출입하였다. 남방(네겝)지방에서 우거할 때 기근을 만나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이집트로 갔다. (창 12:10-13:1) 사라의 아리따움으로 인하여 이집트인에게 부부관계로 소개하지 않고(남편이라는 사실을 알려질 때는 아브라함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오라비-누이동생 관계 (창20:12에 보면 실지로 이복 누이동생임) 로 소개했다. 이런 일은 후에도 그랄 지방(가데스와 술 사이)에서 다시 일어났고 (20:1-18), 아들 이삭도 그랄 지방에서도 부인을 자기 누이라고 속이는 행위를 반복했다 (26:1-11). 족장의 부인들이 위기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은 친히 간섭하시어 사라를 지켜 주실 뿐 아니라, 그는 이로 인하여 많은 재물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창 12:16-18, 20:6, 15-16)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에 돌아온 아브라함 가족은 처음 제단을 쌓았던 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창 13:3) 그곳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벧엘은 약속과 말씀의 제단으로 은혜와 경륜을 상징한다면, 아이는 낭패와 실망, 좌절과 어둠, 절망을 상징한다. 아브라함의 나그네 생활은 이 두 사이를 살아가지만, 벧엘의 제단을 통하여 아이의 장막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승리할 수 있었다. 아이에서 받은 상처와 문제를 벧엘에서 치유하며 해결하여 새 생활을 날마다 이루어 나갔다. .아브라함은 십일조와 할례를 시작한 인물이 되었다.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할 때 승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제단과 장막의 생활을 조화있게 병행해 나갔다. 제단적인 삶과 장막적인 삶을 통해 하나님을 소중하게 여기는 목표로 정하고 성숙한 믿음생활을 해 나갔다.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그는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제단은 희생과 헌신의 삶을 말한다. 물질적, 시간적, 정신적 희생을 말하며 제단을 쌓는 생활은 그의 삶과 가치관을 변화시켰다. 장막은 세상에 속한 것으로 임시적이다. 장막을 장막 되게 하는 것은 제단이다. 제단이 없는 장막은 헛되며, 제단이 있는 장막은 주께서 친히 관리해 주신다. 하나님은 제단을 통해 인생과 만나주시고 경륜을 이루어 가셨다.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약속한 세 가지 언약(계약)을 성실하게 실행하여 가고 있었다. 그에게 이를 자주 상기시켜 주셨다.

(1) 무수한 자손을 주심 –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시고 (창 15:6, 롬 4:9, 22, 갈 3:6, 약 2:23)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묶어 제물로 바치기까지 순종했을 때에 다시 자손의 축복을 하심 (창 22:16-18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 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 하였음이니라)

(2)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심 – 삼 년된 암소, 암염소, 수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취하여다가 비둘기를 제외한 세 마리의 짐승의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으니 해가 진 후 타는 횃불(=하나님의 임재)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면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고 출애굽을 예견하며 그 후 가나안 정복을 약속해 주시다 (창 15:8-21). 여기서 짐승을 쪼개어 언약을 맺는 것은 고대근동당시에 중요한 상업계약을 맺을 때 짐승을 쪼개어 마주 대하여 놓고 계약체결 자들이 손을 잡고 함께 그 가운데로 걸으면서 약속하기를 누구든지 먼저 이 약속을 어기는 자는 이 짐승처럼 몸이 중간에 (가운데라는 셈어 ‘birit’에서 계약이라는 말인 ‘berith’가 나옴) 찢겨지는 벌을 내리기로 한 것이다 (렘 34:18-19). 아브람은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다 (레 1:14-17). 그래서 계약(개역에서는 ‘언약’)을 체결한다고 할 때 원어에 ‘cut the covenant’ (karat berith)로 되어 있고 한문의 계약(契約)이라 할 때 ‘계(契)’는 창세기 15:8-11을 연상시킨다. 즉 짐승 세 마리를 한가운데로 칼로 잘라 개처럼 죽임을 당한 모습이란 뜻이다.

(3) 할례를 베풀게 하여 몸에 하나님의 영원한 계약을 새김 (창 17:7, 10, 13)

창 17:1-2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1) 전능하신 하나님 El Shaddai (원어 뜻 ‘두 山,’ 즉 어머니의 가슴모양) <만남>

2) 언약을 세우다 I will cut my covenant.(일방적 은총계약 契約) <동행>

3) 완전하라 (성숙하라), 자라서 부족함을 보충하라, 믿음의 열매 맺으라 <완전>

언약의 표시로 할례를 제정하셨다. 모든 남자는 난지 8일만에 할례(=남근을 싸고 있는 양피의 끝을 베어냄, circumcision)를 받게 하여 아담이 범죄한 부정의 피, 곧 불순종의 흔적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행하는 유아세례가 이 정신에 기원한다. 하나님은 이삭 날 것을 다시 약속해 주시면서 그를 통하여 영원한 언약을 약속해 주시며 이삭은 난지 8일만에 할례 받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창21:4).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아니했다. 람함 랍비는 다음과 같이 그가 받은 10가지 시험을 정리하였다.

1) 본토 친척으로부터 떠나라 (창 12:1-2)

2) 가나안 땅에서 기근을 만나다 (창 12:10)

3) 이집트에서 사라를 누이로 속이다 (창 12:12-20)

4) 조카 롯이 북방의 네 왕에게 사로잡혀 가다 (창 14:1-16)

5) 하갈을 씨받이로 맞아들여 이스마엘을 낳다 (창 16:1-16)

6) 99세때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다 (창 17:10-27)

7) 그랄 지방에서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다 (창 20:1-18)

8) 사라가 이삭을 낳은 후 하갈을 집에서 쫓아내라고 부탁하다 (창 21:10)

9)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기업을 받지 못하게 추방(excommunication)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창 21:10-21)

10) 모리아산에서 독자(獨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창 22:1-14).

 

이 중에 열번째 시험을 통과함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2)

이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본즉 한 수양(ram = 감사제물로 드리는 제물)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이 수양(ram)을 아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다. 그는 이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Jehovah-jireh)라 했다. 즉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혹은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란 말이다’ (The Lord will provide; El provided). 여기에서 영어 단어인 ‘섭리’ (providence)란 말이 나왔다 (창 22:8). Rhode Island주의 주청사가 있는 수도 이름을 침례교인들이 프로비덴스라고 했다.

이삭을 90세에 출산한 사라는 이삭의 나이 37세때에 죽었다. (창 23:1) 이때 남편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 였다. 이에 아브라함은 사라를 위해 헷 족속으로부터 매장지를 구입했다. 이는 실로 아이러니칼 하다. 창 12:1-2과 15:8-14에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137세 되도록 땅 한 평도 없었다는 것이다. 창 23:6-11절에 보니 아브라함은 아주 저(低) 자세로 헷족속 에브론(Ephron)에게 간청하여 헤브론 땅(=기럇-아르바)에 있는 막벨라 동굴(cave of Machpelah)을 은 400세겔(shekel = 4.5 kg; 1 세겔=11.4그램)로 엄청난 고가(高價)를 지불하고 (후에 삼하 24:24에 보면 성전장소를 은 오십 세겔로 구입함) 자기 땅으로 구입하다. 이 매장지가 후에 조상의 무덤이 되어 지금까지 성소가 되고 있다. 아브라함-사라, 이삭-리브가, 야곱-레아가 묻혀있다 (헤브론 성전). 그래서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고향이 되었다. 출애굽 할 때 정탐군들이 바로 이 지역을 40일간 정탐하였다. 그들이 400년 동안 돌아오고 싶었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

♧ 아브라함의 경건성 패러다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이 패러다임은 성서의 다른 인물에도 적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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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삼 단계로 정리해서 살펴보자

1) 만남의 단계 – 부르실 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음 (소명, 결단, 믿음, 순종)

2) 동행의 단계 – 순례의 길, 만남의 연속 (인내, 연단, 성화훈련, 경건 생활 및 경건 훈련)

3) 완전의 단계 – 약속의 성취를 받음, 성숙한 인격을 가짐 (소망, 사랑, 영생)

◎ 적용 : 창15:1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1) 방패 – 보호, 약속, 진리, 안전 (신 33:29, 시 18:2, 30, 84:11, 144:2) <만남>

2) 두려워 말라 – 믿음, 신뢰, 성화 (사 41:10) <동행>

3) 상급 – 약속성취, 면류관, 열매 <완전>

 

2-3-2 이삭의 생애와 믿음의 여로(旅路) <창 21-35장>

이삭의 출생예고: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창 15:4)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 17:15-16)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 (창 18:10)

이삭의 출생: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라가 잉태하여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

(100세)와 사라(90세)으로부터 출생하다 (브엘세바에서) (창 21:1-2)

할례를 받다: 이삭은 난 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다 (창 21:4)

젖을 떼다: 젖을 떼던 날 큰 잔치를 가지다. 곧 이스마엘(이삭보다 14년 위)과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 에서 쫒겨남으로 이삭은 아브라함의 독자(only son)가 된다 (창21:9-21, 22:2, 12)

(& Rev. Samuel Yoon 윤사무엘목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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