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 개론
- 책이름 : 여호수아(Joshua)
가나안 땅의 전복과 분배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이름을 따라 책이름을 붙였다. 내용은 가나안 정복과 분배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 저 자 : 여호수아(호세아)
이름 뜻 : 그의 본명은 호세아이며 그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이다.(민13:6)그는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장군이며 모세가 지도자였을 때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믿음의 사람으로 가나안 정복의 지도자로 그 사명을 훌륭하게 감당한 사람이다.
- 기록연대 : B.C 12-14 경
- 육경(六經)
창, 출, 레, 민, 신 의 5권을 모세 5경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은 모세 5경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이 책을 포함시켜 모세 6경이라고도 부른다.
- 주제 :
1) 가나안의 정복 / 약속의 성취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의 약속을 해 주셨다. 그러나 약속뿐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2) 땅의 분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른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보여 준다. 또한 이것은 믿는 사람들이 그 약속의 땅을 누리게 되었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3)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앙의 정립을 명하심
이 책 속에는 전쟁의 잔인함이 들어 있다. 특히 하나님은 가나안 거민의 완전 멸절을 명하고 계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잔인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과 그들의 우상 숭배의 문화를 단절하시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정복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앙을 세우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 내용
1) 1-5장 정복을 위한 준비
1장 : 가나안 정복의 명령 2장 : 가나안의 정찰 3-4장 : 요단강을 건넘
5장 : 여리고를 정복하기 위한 준비
2) 6-12장 가나안땅의 정복
6장 : 여리고성 7-8장 : 아이성 9장 : 기브온 족속과의 언약
10장 : 남방 왕들의 정복 11장 : 북방 왕들의 정복
12장 : 정복한 왕들의 명단
3) 13-21장 가나안땅의 분배
4) 22-24장 여호수아의 최후설교」
여호수아서 1장 1-9절
가나안 정복의 지도자 여호수아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그 후계자로 정하시고 그를 불러 사명을 주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가나안 땅의 정복을 새롭게 명하셨다. 그리고 그 일을 담대하게 그리고 꼭 이룰 것을 명하신 것이다.
- 가나안 정복의 지도자 여호수아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시고 사명을 맡겨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여호수아의 경우도 이와 같다. 여호수아는 이미 광야에서 모세의 후계자로 지목을 받았고 모세에게 안수를 통해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다시 한번 여호수아를 부르셨다.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목적은 ①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게 하셨고 ②지도자로서 가나안 땅의 정복의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 나를 불러 주셨다. 그리고 사명을 맡겨 주셨다. 나에게 맡겨진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루어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 명령 뒤의 약속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은 발로 밟는 대로 다 너의 땅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레바논에서 유브라데까지 모든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뿐 아니라 그에게 능히 너를 당할 자가 없으리라고(5) 하심으로 분명한 승리를 약속해 주셨다.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리라”(5)는 것이다. 그렇다 이 말씀은 가나안의 정복의 명령은 여호수아에게 하셨으나 그 싸움을 하실 분이 하나님 자신임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명령만 내리신 것이 아니라 그 능력도 주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정복의 비결
믿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싸움을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싸움은 여호수아가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싸움의 승리를 약속해 주셨다. 이 말은 이미 승리한 싸움을 싸운다는 뜻이다. 이런 싸움에서 우리의 할 일을 하나님은 세 가지 명령하셨다.
①하나님 앞에 바로서야 한다. (7-8)
②강하고 담대해야 한다. (6,9)
③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어야 한다.(5,9)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것이기도 하다.
▣ 오늘의 기도제목
여호수아서 1장 10-18절
여호수아의 첫 명령과 백성들의 순종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셨다. 사명을 받은 여호수아는 이제 하나님의 지도자로서 백성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시키는 것과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지파에 대한 명령과 이에 대한 백성들의 순종의 모습이 나오고 있다.
- 요단을 건널 준비를 시기는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즉시 백성에게로 나아가 백성들에게 3일 안에 요단을 건너는 일이 이루어질 것을 명하면서 양식의 준비를 시켰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자 그 즉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① 하나님의 뜻은 즉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고 ② 하나님의 뜻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준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 2 지파 반에 대한 명령
여호수아는 요단을 건너기전 다시 한번 2 지파 반에 대해 태도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있다. 그들에게 요단 이편 땅을 반드시 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세에게 약속한대로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요단을 건너고 정복하는 일에 앞장 설 것을 권한 것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인데 먼저 화합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두 지파 반이 그 뜻을 순종함으로 온 지파가 하나가되어 그 뜻을 기쁨으로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우리도 그 어떤 일보다 화합과 사랑이 앞서 간다면 하나님의 뜻은 아름답게 이루어 질 것이다.
- 백성들의 큰 순종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요단을 건널 준비로 양식의 준비와 두 지파 반의 화합된 행동을 권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어서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이었다. 그런데 온 백성들이 그 말에 전폭적으로 순종하고 따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오히려 강하고 담대히 하라는 용기까지 북돋아준 것이다. 그들의 순종과 격려가 여호수아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겠는가?
오늘도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순종으로 그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나 하나쯤”이 아니라 “아멘!”으로 화답하는 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서 2장 1-14절
행동하는 믿음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의 결과이며, 행동하는 신앙인에게 주어진다.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며, 순종은 축복의 조건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 가정에 주시는 말씀은 행동하는 신앙인 여호수아와 라합에 대한 내용이다.
- 정탐꾼을 보낸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요단을 건너기전 정탐꾼을 보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정탐한 내용의 시비로 40년 간의 방황이라는 뼈아픈 실패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여호수아 자신이 그 정탐꾼 속에 들어있었다. 여호수아는 이제 지도자로서 요단을 건너기전 다시 한번 정탐꾼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단 두 사람을 보내고 있다. 때로 많은 사람의 일이 큰일을 이루나 때로 적은 사람이 결정적인 일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정탐꾼을 숨겨준 기생 라합
정탐꾼이 들어간 곳은 공교롭게도 기생 라합의 집이었다. 이미 정탐꾼들이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의 용맹과 하나님의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라합의 심령에도 충격과 그분을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 결과 라합은 정탐을 숨겨주었고 그들을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라합의 믿음 (11절)
라합의 행동은 충동이나 두려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라합은 11절에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한 것이다.
2) 구원을 요청한 라합(12절)
그는 신앙 고백만 하고 그들을 숨기는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승리의 날에 자신과 가족들의 구원까지 요청하고 있다.
3)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나라보다 더 중요시함 (6-7)
이 일은 분명히 자신의 나라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나 그 여인의 행위는 성경의 역사에 위대한 믿음의 행위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배반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그것을 행위로 옮겼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서 2장 15-21절
붉은 줄이 주는 교훈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준 후 라합은 그들에게 그 대가로 자신을 포함한 가족의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정탐꾼들은 그 약속의 표시로 창에 붉은 줄을 드려 놓을 것을 명하였다. 후에 라합은 그 약속대로 합으로 구원을 받았다.
- 구원의 표시 – 붉은 줄
하나님은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진멸을 명하셨다. 그러면 무조건 그 뜻은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탐꾼을 숨겨준 대가로 그들은 생명의 보존의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그 표시로 붉은 줄의 기호를 약속한 것이다. 천 자체야 그 가치가 얼마나 하겠는가? 그러나 정탐꾼들은 그 붉은 줄로 인해 그 가정이 라합의 가정인 것을 알게되고 그 가정은 안전하게 보존되는 것이다. 이 붉은 줄에는 구원과 그 약속의 표시가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줄이 드려진 집에 누가 있든지 간에 상관이 없다. 그렇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의 용서를 받고 이제 심령에 붉은 줄을 드리우게 되었다. 이제 전에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참 회개하고 나가면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다.
- 붉은 줄이 주는 교훈
1) 사랑의 결과다.
기생 라합은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정탐꾼을 숨겨 주는 사랑을 베푼 것이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곧 자기 희생이 없는 사랑은 존재할수 없다. 라합은 그러한 희생적인 사랑의 결과 붉은 줄의 약속을 받을수 있었다.(고전13:5,요일3:18)
2) 믿음의 결과다.
라합은 정탐꾼들의 말을 듣었고 또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믿었다. 그 결과 그러한 행위를 할수 있었다. 야고보 선생은 라합의 이 행위는 믿음의 행위라고 했다.(약2:25)
3) 소망의 결과다.
붉은 줄을 매어 단 것은 그 가정의 구원을 바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도 이 붉은 줄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이 분을 믿고 나아갈 때 아름다운 결과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여호수아서 4장 1-24절
열두 돌의 교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앞장서서 요단강을 건널 것을 명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에 순종했고 그들은 말씀대로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며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하나님은 강은 건넌 백성들에게 한가지의 명령을 더 내리고 계신다. 그것은 한 지파에 한 개 씩 모두 12의 돌을 취하여 법궤가 섰던 곳에 세워 기념하라는 것이다. 열 두개의 돌은 기념비이다. 이 기념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잘 배워야 할 것이다.
- 기념비는 누가 세우나? – 체험한 사람이
하나님은 요단을 건넌 사람들에게 한 지파에 한 개씩 12개의 돌을 각 지파 사람들의 손에 의해 세우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그것을 여호수아나 레위인들에게 명하신 것이 아니다. 그 강을 건넌 사람들, 그 일을 체험한 각 지파 사람들에게 그 일을 명하신 것이다. 그것은 그 일을 체험한 각 사람들에 대한 신앙고백을 명하신 것이다.
롬10:10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체험을 하고도 무슨 일인지, 그 감격을 알지 못하고 무덤덤하게 지날 때가 많다. 그러나 체험한 일에 대해 신앙 고백할 때 그 감격은 배가되는 것을 체험한다.
- 기념비는 무엇을 말하나? – 그것이 세워지게된 사건을
기념비는 기리고자하는 내용이 있을 때 세우는 것이다. 이 사건은 요단강을 건넌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12개의 돌무더기를 보는 순간마다. 이때의 이 사건을 기억하게 해줄 것이다.
1) 숨은 역사를 기념해 준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강을 건넘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애굽 430년간의 종살이와 광야 40년간의 방황을 끝내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서는 건넘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방법으로 건넜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 돌을 세우면서 하나님께서 앞서신 것과 홍해를 가르듯 요단을 갈르신 그 능력을 기념해야 한다고 했다.(22-24절)
- 기념비는 어떻게 사용되어져야 하나?
시청각 교육의 재료로
하나님은 그 돌들을 세우고 자녀들의 신앙 교육의 재료로 쓸 것을 명하셨다. 자녀들이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대답해 주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자신에게서 끝날 교훈이 아님을 가르쳐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받게 된다. 부모의 체험이 자녀의 신앙 교육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대의 믿음뿐 아니라 후대에 이어지는 믿음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준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이 자녀 교육의 재료가 되고 있는가? 그리고 나의 어떤 것이 기념비적으로 세워져 있으며 자녀들에게 보여지고 있는가?
여호수아서 5장 1-12절
가나안에서의 새출발
드디어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새출발의 명령을 내리셨다. 그것은 할례와 유월절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명령대로 준행하며 가나안에서의 새 출발을 하고 있다.
- 기선을 제압하신 하나님 (1절)
하나님은 가나안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신 후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개입하셔서 이루고 계심을 본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단을 맨땅으로 건너게 하셔서 건넜는데 가나안 사람들은 그 소식에 마음이 녹았다고 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방법은 때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뜻을 일단 순종하고 난 후에 우리는 그 뜻을 바라볼 때가 많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러한 행위를 통해 가나안 사람들의 기(氣)와 세(勢)를 꺾어 놓으신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다니면서 줍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전도도 이와 같다. 전도하기전의 기도는 사탄을 묶어놓는 힘이 있다. 그리고 나가면 줍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 할례를 받으라.(2-9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노예 생활을 하고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왔다. 그런데 광야에서 정탐했을 때 불순종함으로 애굽에서 나온 장정들은 다 광야에서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사람들과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을 밟을 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할례를 명하신 것이다.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백성들에게 주어진 몸에 지니는 표다.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에게 그 어떤 일보다 먼저 그 일을 명하신 것은 ① 약속을 받은 자라야 가나안 땅을 밟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② 약속을 받은 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③ 정복에 앞서 그 약속을 상기시켜 주신 것이다. ④ 하나님은 할례를 통해 수치를 굴려 보내신 것이다. 세례는 할례에 해당하는 믿는 자의 죄 씻음 받은 표이다. 세례가 천국가는 조건은 아니로되 세례를 통해 위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늘 기억하는 성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유월절을 지키라.(10-12)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절기이다. 그런데 이제 40년의 긴 광야 생활을 통과하고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이제 그들은 유월절을 통해 이루진 구원을 약속의 땅에서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하나도 정복하지 못했으나 유월절을 지킴으로 그들에게 구원의 하나님께서 정복도 이루실 것이라는 큰 확신을 갖게 해준 것이다. 구원의 큰 확신이 있다면 어떤 문제라도 문제될 것은 없는 것이다.
여수아서 5장 13-15절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군대장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을 건넌 후 할례와 유월절까지 잘 지켰다. 이제 남은 것은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 뿐이다. 이러한 때에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것이다.
- 어떤 상황 가운데 나타나셨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오긴 했으나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커다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1) 여리고 성을 볼 때
그들이 서있는 곳이 여리고 맞은편이라고 했다. 그들은 광야 40년을 헤매이면서 그렇게 큰고 견고한 성을 본적이 없었다.
2) 무기를 생각 할 때
가나안은 벌써 철기 문화를 사용하면서 철기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3) 군사력을 생각 할 때
가나안의 군사력은 조직적으로 훈련된 군인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애굽의 종살이 하다가 해방 받은 노예들이고 광야에서 40년 방황하던 백성들로서 사실상 오합지졸이었다. 여호수아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들을 이끌어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여호수아에게 힘과 용기 그리고 확신을 심어 주신 것이다.
- 언제 나타나셨는가?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정복을 하는 도중이나 정복한 후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정복을 앞두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셨다.
그 의미는
1) 성전(聖戰)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전쟁은 사람의 욕심과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시작된 전쟁이 아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조상 때부터 주시마 약속했던 땅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거룩한 전쟁인 것이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남으로 그러한 사실은 가르쳐 주신 것이다.
2) 전쟁의 승리를 확신시켜주기 위해서
여호수아에게 천사가 나타나거나,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군대 장관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여호수아에게 전쟁이 자신에 의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것은 무엇인가?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여호수아에게 “이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방의 신을 벗으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속에 모든 승리의 비결은 다 들어 있다. 이 전쟁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거룩한 전쟁이고, 하나님께서 직접 참전하시어 함께 싸우는 것이라면 이 전쟁을 할 이스라엘이 해야할 일은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힘과 방법 등 인간적인 것들은 벗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
- 생각해 봅시다.
1) 지금 나의 상황은 어떤 상황인가?(두려움이나 어려움은 없는가?)
2)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가?(나에게 뭐라고 하실까?)
3)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수아서 6장 1-7절
여리고 점령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후에 하나님은 여리고 성의 점령을 명하셨다. 그러나 그저 보내지 않으시고 작전명령과 함께 명하셨다.
- 여리고를 네 손에 붙였으니(2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내리신 명령이다. 하나님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싸움을 붙여 놓고 구경을 하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승리가 포함된 싸움을 여호수아에 주셨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요16:33절을 읽어 보라. 우리는 여기서 커다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될런지 모르거나, 불리한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다. 궁국적으로, 반드시 이긴 싸움을 싸우는 것이며, 이 싸움이 바로 영적인 싸움인 것이다.
- 하나님의 작전 명령(4-5절)
하나님은 언약궤를 메고 6일 동안은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제 7일에는 7바퀴를 도는데 마지막 한 바퀴를 돌 때에는 나팔을 불고 큰 소리를 지를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은 무조건 나가서 싸우라고 명하신 것이 아니다. 그 싸움의 작전 명령까지 내려 주셨다.
1) 어떤 상황 가운데서 가르쳐 주셨는가?
여리고 성은 월등히 강한 성이고, 이런 성을 상대로 싸워본 경험도 없다. 어떻게 싸워 할지 몰라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2) 어떻게 도우실 수 있는가?
롬 8:26-28은 기도를 못하는 우리를 위해 성령께서 도와주고 계심을 말씀하신다. 그 이유를 성령님은 우리의 심령을 감찰하시고 하나님의 뜻도 가장 잘 아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만 잘 아시는 것이 아니라 여리성도 가장 잘 아신다. 그리고 가르쳐주신 작전이므로 99%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직 100%만이 있을 뿐이다.
- 침묵과 외침의 명령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6일 동안 한바퀴씩 돌 때와 제 7일에 6바퀴 돌 때 까지 지켜야 할 일이 침묵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제 7바퀴 째 외칠 것을 명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신 듯하다.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이고, 적극적이기보다는 소극적이고, 칭찬보다는 비판을, 순종보다는 불순종의 성향이 짙은 것을 아시므로 하나님은 침묵을 명하신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부정적으로 말을 했다면 순식간에 그 일은 중단되었을 것이다. 이 일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직접 순종하면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뜻을 바라보도록 하신 것이다.
- 생각해 봅시다.
1)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것이다. 이러한 싸움의 승리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2) 오늘도 우리는 누구의 작전 명령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떤 상황 속에서 그러한 명령을 받아야 하는가? 그렇게 받는 비결은 무엇인가?
3)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말함으로 실패를 경험한 적은 없는가? 말로 실패하는 것보다 침묵으로 성취를 체험하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수아서 6장 8-27절
여리고성의 함락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의 점령을 명하시고 작전 명령을 내리셨는데 여호수아의 지도력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함으로 그 성을 함락하고 약속대로 라합의 가정을 구원해 주었다. 이 일이 가나안 땅에 퍼져 이스라엘은 크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다.
- 이 성을 너희에게 주었느니라.(16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13 바퀴 중에 12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마지막 도는 순간에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외친 말이“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이다. 이 속에는 굉장한 신앙 고백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이 성을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셨다.(2절) 그리고 작전명령을 주셨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진 순간부터 여리고 성은 자신들의 것으로 믿은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믿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7.7총동원주일을 명하셨다. 이 명령이 떨어진 순간부터 남현동은 우리 상학 교회에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 다 멸하니라.(21절)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역과 우리의 해야할 일을 발견하게 된다.
1) 사람이 해야할 일
명령을 내리신 분이 하나님이고, 작전명령을 내리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13바퀴 돌아야 할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요, 그 성이 허물어질 때 그 성을 멸하고 함락해야 하는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야할 일이었다. 하나님은 그 명령을 내리셨으나 우리가 해야할 일을 하지 않으려면 어떠한 일도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영역
하나님은 그들에게 명령을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명령을 순종하고 따르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셔야할 일을 하셨다. “성을 13바퀴 돈다고 그 성이 무너지나?”,“무너졌다고 다 이길 수 있는가?”등 여러 가지 생각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그 성을 허무셨고, 그 성은 무력하게 함락되고 말았다. 민23:19를 일고 하나님에 대해 다시 한번 묵상해 보라. 하나님의 약속 없는 인간의 행위는 무의미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위와 순종 없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또한 나에게 아무런 일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라합과의 약속 이행
이스라엘은 순식간에 여리고를 함락했다. 함락하는데 라합의 집에는 약속대로 붉은 줄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스라엘은 정탐을 숨겼을 때의 약속대로 온 식구들의 생명을 구원해준 것이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 사랑과 희생과 생명을 심었더니 라합 뿐 아니라 그의 온 식구까지 모두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룬 이 여인은 예수의 족보의 오르는 믿음의 여인이 되는 큰 축복도 받게된 것이다.
- 생각해 봅시다.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믿고 사는가?
2) 하나님의 약속을 내 것으로 만드는 비결은 무엇인가?
3) 축복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
여수아서 7장 1-26절
실패와 범죄
여리고 성을 함락한 이스라엘은 상당한 자신감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들은 내친김에 아이성을 침공했다. 그런데 그들은 뜻밖에 큰 패배를 맛보아야만 했다. 그 원인은 무엇이고 그 해결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 무서운 실패
아이성은 여리고 성 보다 적은 성이었다. 그들은 그 성을 향해 돌진했다. 그 결과 36명이 죽고 이스라엘의 군대는 쫓겨 내려오는 신세가 되었고 더 큰 문제는 백성들의 마음은 물같이 녹은 것이다. 여호수아로 볼 때는 지도자로서 겪는 첫 번째 시련이었다. 그는 이 어려움을 인해 하나님께 그 이유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를 물었다. 실패를 인해 주저앉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실패를 갖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왔고, 그 원인을 물었듯이 그러한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실패 후의 성공의 길이 있다. 실패후의 포기야말로 정말 실패다.
- 실패의 원인
1) 아간의 범죄
하나님은 이 사건의 서두에 패배를 예고 하셨다. 아이성의 점령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간의 범죄부터 다루고 있다. 그 범죄의 내용은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면서 하나님은 다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그만 아간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아름다운 외투, 은, 금, 패물을 취하였던 것이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거룩한 전쟁이다. 그런데 아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막는 일이었다.(사59:2-3)
2) 기도 없는 전쟁
3절에 정탐의 내용은 “그 성은 작은 성이니 다 올라가지 말고 3,000명만 올라가서 그들을 치게 하소서”라고 했다. 아이성의 전투에서 주목할 사항은 기도도 없고 하나님의 응답도 없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점령의 명령을 내렸고 그 결과 싸움은 패배였다. 적은 성 아이성을 보자 하나님의 도움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자신만만함, 교만은 기도를 물리쳤던 것이다.
- 범죄의 심판
여호수아는 실패의 원인이 이스라엘의 범죄임을 알고는 그 즉시 온 백성을 모으고 제비를 뽑음으로 죄인을 골라냈다. 그리고는 즉시로 처벌함으로 백성 가운데 죄악을 제하여 버린 것이다.
-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문제와 실패 가운데 산다. 그러면서도 그 이유도 묻지 않고, 문제가 있어도 그 책임도 지지 않고 구렁이 담 넘어가 듯 지날 때가 많다. 때로 나의 적은 능력, 내 생각대로 한다고 하면서 내 생활에서 기도를 몰아낼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이제 문제와 실패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통회와 자복으로 우리의 심령 속의 죄악을 몰아내자.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역사 하시도록 해 드려야 할 것이다.
여수아서 8장 1-29절
아이성의 함락
아간의 범죄를 처단한 후에 하나님은 다시금 여호수아에게 아이성을 함락시킬 것을 명하셨다. 그리고 여리고 성과 마찬가지로 작전명령과 승리를 주셨다.
- 참회의 결과 – 하나님의 음성이 들림
이스라엘은 아간의 죄를 처단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 했음을 고백하였다. 그 후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먼저 음성을 들려 주셨다. 하나님의 음성과 응답의 메시지를 듣는 비결은 무엇인가? 어떤 행위를 하고, 고행과 많은 재물을 드려야 응답을 받는 것인가? 자신을 정결케 함이 곧 응답의 길이다. 시편17편에서 저자는 응답이 있기에 기도를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4-5절에 기록되었다. 예수님은 팔 복중에서 하나님을 보는 축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라고 했다. 오늘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최선을 다한 결과 – 승리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의 약속과 작전명령을 내리셨다. 길 양쪽에 매복하고 있고 일부가 도망하는척하며 유인할 때 치라는 것이다. 아이성은 분명히 작은 성이다. 2-3천명만가도 되는 작은 성이다. 그러나 실패를 경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최선을 다했으며 일부분의 전쟁이 아니라 온 백성이 혼신을 다해서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사자는 토끼를 좇을 때에 최선을 다한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주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곧 충성이며 그 상급이 생명의 면류관임을 기억해야 한다.
- 값진 승리 – 실패가 가져다준 승리
아간의 범죄, 이스라엘의 자만심, 그리고 지도자인 여호수아 마저 아무런 저항 없이 진행된 전쟁은 실패를 불러오고 만 것이다. 자신보다 큰사람과의 패배는 상처가 안 된다. 그러나 자신보다 작고, 약하고 부족한 사람에게 패배했을 때 그 상처는 심각하다. 이스라엘은 첫 번째 전투에서 자존심에 상당히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고 보니 문제가 보였고, 죄를 발견한 이스라엘은 그 결심이 그리고 임전 태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 결과 그 어떤 전투보다 확실히 하나님의 뜻을 따랐고 큰 승리를 얻게 되었다 . 실패는 아팠으나 그로 인해 승리가 주어졌으니 그 승리는 값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베드로, 바울, 모세 등 많은 신앙의 위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우리의 단점 실패가 결코 절망의 조건이 아님을 기억하며 새로운 도약의 기회와 힘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생각해 봅시다.
1)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문제는 무엇인가? (외부에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 있는가?)
2) 생활에서 뭔가 모르게 조금씩 부족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3) 뼈아픈 실패의 경험이나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는가? 그것이 진정으로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자신의 발전에 기회나 힘으로 사용해볼 생각은 없는지 생각해 보라!
여수아서 8:30-35
에발산과 그리심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성을 함락한 뒤 모든 일을 멈추고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제단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들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율법에 기록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한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 모든 일을 멈추고 해야 할 일
이들은 지금 전쟁중이다.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금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말씀을 듣고 있다. 그들은 아이성에서을 함락하고 이싸움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임과 이 당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하고 우선 되어져야 할 일이 이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전적인 헌신의 결의를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귀한 교훈을 들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 제일주의, 말씀 제일주의이다. 우리는 내일을 멈추고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예배와 헌신을 다지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에발산에서 드려진 제사 – 번제, 화목제
번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속하며 전적인 헌신과 봉헌을 목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와 교통을 목적으로 드려지는 제사이다. 따라서 이 제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드린 제사이다. 다 싸워 이겼기 때문이 아니다. 아이성의 실패와 승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새로운 헌신과 결단 속에서 하나님만을 고백하는 제사를 드린 것이다. 실패는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때로 이 실패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기도 한다. 그것을 인해 승리까지 하게되면 그 은혜에 대한 감격은 더없이 귀한 것이 된다. 이러한 귀한 은혜와 헌신의 삶이 날마다 넘쳐야 할 것이다.
- 어디에 설 것인가?
에발산과 그리심산은 서로 마주보는 산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는 저주를 선포하는 산으로 또 하나는 축복을 선포하는 산으로 택하셨다. 그리고 백성의 절반은 에발산 쪽에, 나머지 절반은 그리심 산 쪽에 세우고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셨다. 그것은 절반은 저주받을 자이고 나머지는 축복 받을 자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 어느 쪽에도 설 수 있음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다. 주의해서 볼 것은 그 두산 사이에는 그 누구도 세우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축복과 저주의 중간은 없기 때문이다. 자 이제 나는 선택해야 한다. 아니 나의 삶을 통해 그 어느 쪽이든지 설 수밖에 없다. 내 마음은 늘 축복에 서고 싶겠으나 하나님은 나를 어느 쪽에 서라고 하실 것인가? 다시 말해 나는 어느 쪽에 설 자격이 있는 삶인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 생각해 봅시다.
1)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인가?
2)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과 헌신이 살아있는가? 만일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3) 우리의 열망은 그리심 산인데 과연 하나님은 나를 어느 쪽에 서라고 하시겠는가? 그러한 삶을 위해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여수아서 9:1-27
경솔한 언약(기브온과의 언약)
이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두려운 존재로 소문이 퍼져있다. 이스라엘이 쳐들어 온다는 소문을 들은 나라들은 긴장해서 전쟁을 준비했는데 한나라는 전쟁을 포기하고 살아 남을 작정을 하고 계략을 써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다.
- 대적들의 연합
대적들의 영역은 요단 서편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변이다. 그곳에는 헷,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그리고 여브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각기 한 종족들이다. 때로는 화친도 맺겠으니 좁은 바닥에서 서로 싸우며 힘 자랑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쳐들어온다고 하자 일순간 하나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도전을 하고 있다. 그렇다 악의 세력은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의(義)와 진리(眞理)를 넘어뜨리기 위해 세력을 모으고 대적을 한다. 예수님 당시도 그렇다. 바리새파, 사두개인, 대제사장, 온 백성들 심지어 로마의 군부와 헤롯까지 하나가 되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시험은 한가지가 와서 시험이라고 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가 한번에 몰릴 때 시험이라고 한다. 싸우면 싸울수록, 믿음이 성장하면 할수록 큰 시험이 있음을 기억하고 깨어서 기도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 기브온의 지혜
그들은 이스라엘의 소문을 듣고 멀리서 온 것같이 위장해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속이고 종으로 섬기겠으니 언약을 맺자고 했다. 그 누구도 의심할 여지없이 언약을 맺고 말았다. 예수님도“이 시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16:8)고 하셨다. 하나님의 사람들만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아들들도 지혜롭다. 그러므로 빛의 아들들이 더 지혜롭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그르칠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12제자를 세상에 보내면서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 이스라엘의 허물
1) 그들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멀리서 왔다고 했다. 그러나 떡에 곰팡이가 나고 신이 달아 빵꾸가 나고 옷이 헤어질 정도의 거리에서 왔다면 가나안땅의 밖의 사람일수 밖에 없다. 어느정도의 거리였다는 것을 어림잡아 생각해보면 알수 있는데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싸움을 하는데 아무런 예비지식이 없었다.
2) 기도하지 않고 언약을 맺음
아이성을 점령할 때 경험해 놓고도 여호수아와 족장들은 이번에도 똑같은 실수를 범했다. 14-15절은 “그들이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그들과 화친을 맺었다”고 했다.
3)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함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며 그 땅의 거민을 진멸하라고 하셨다. 그 뜻은 죄의 징벌과 죄의 단절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이 앞섰던 것이다.
- 그러나 칭찬 할만한 것 – 함께 언약을 지킴
기브온과 잘못된 화친을 맺은 이스라엘은 비록 잘못된 것이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한 것이므로 그것을 지켰다는 것은 우리가 배울 점이다.
여수아서 10:1-21
하나님의 승리
기브온과 언약을 마친 후 가나안 5족속의 왕이 연합하여 기브온을 치려 했다. 그 이유는 가나안을 배반하고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기브온은 이스라엘의 도움을 청했고 하나님은 이 기회에 가나안 5족속을 이기도록 하셨다.
- 기브온에게 베풀어진 은혜
그들은 어차피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 가나안 족속이므로 이스라엘에게 든지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음으로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에게든지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 그런데 그들은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고 살길을 모색한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기브온을 도왔고 그들을 치러오는 적과 싸움까지 해가며 구원을 베푼 것이다. 여기서 구원의 큰 의미를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러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했더니 그 이유 한가지만으로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죄를 뒤집어 써 주셨고, 이제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끝까지 사랑하시고 버리지 않으시마 약속해 주셨다. 그런 사람 곧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 승리의 의미
이스라엘은 기브온과 관련하여 큰 싸움에 말려들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싸움의 승리를 약속하셨고 또 그대로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자.
1) 하나님께서 싸우신 전쟁이었다.
싸움터에 나간 것은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그 싸움의 시종을 보건데 인간이 싸워서 이길 수가 없는 전쟁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게 하셨다.(10절) 가나안 사람들은 싸움에서 죽은 사람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다.(11절) 그리고 패배를 알고 도망하는 사람들을 해까지 멈추게 하시고 이기게 하신 것이다. 인간의 전쟁은 수많은 병정들이 피를 흘리고 대장이 영광을 누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 자신이 싸우시고 그 영광과 기쁨을 우리 인간에게 주신다. 주님은 영적 승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으나 우리는 영생과 용서를 누리게 된 것이다.
2) 하나님의 승리는 철저한 승리였다.
처음부터 싸움의 대세는 기울었다. 그들은 패배를 인정하고 도망하는데 하나님은 그들의 왕을 잡아 처형할 때까지 그 싸움을 멈추지 않으셨다. 심지어 해가 지자 그 해까지 멈추게 하고 싸움을 계속하게 하여 그 싸움을 종결하신 것이다. 우리의 싸움을 바울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고 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이기면 만족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적인 전쟁에 있어서만은 완전한 승리만 인정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5나라를 이긴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한 나라도 제대로 이기지 못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5 나라를 이긴 것이다. 꿈도 못꾸던 일을 이루고는 자신도 놀라듯 이스라엘은 자신들도 놀라운 일을 한 것이다. 이로서 가나안 정복의 큰 자신감을 갖게된 것이다.
여수아서 10:22-43
하나님의 승리
이스라엘은 아모리 5왕을 처형하고 그 기세를 몰아 남방을 쳐서 파죽지세로 승리를 하였다. 그러한 결과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 뜻을 순종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 아모리 5왕의 처형(22-27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5왕의 처형을 명하셨다. 그것도 잔인한 처형을 명하셨다. 그러나 그 이유는 “너희가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25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고 강하게 생각했던 왕들을 능지처참함으로 다른 왕들에 대한 자신감을 갖도록 베려하신 것이다. 사자의 새끼가 사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몇 일 안 되는 새끼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어미인 사자가 무서워 그 앞에 굴복함을 보고 그 새끼들은 어려서부터 사자로 길러지는 것이다. 나는 비록 약하고 어려도 우리 하나님의 능력을 인해 우리는 능력과 승리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빌4:13,행1:8,막3:15)
- 가나안 남부의 점령(28-39)
아모리 5족속의 동맹군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스라엘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들은 남부지역을 점령하면서도 동일한 신앙과 자세로 싸웠고 그 결과 큰 어려움 없이 다 이길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처음에 100의 노력을 기울여 성취가 되면 다음에는 90,80,70으로 점점 그 자세가 떨어지는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처음과 나중 모두 동일한 노력을 기울였다. 바울은 다른 사람을 구원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내 몸을 쳐 복종한다”(고전9:27)고 했다.
- 이러한 승리의 비결 (40-43)
성경은 이스라엘의 승리의 비결은 몇 가지로 정리할수 있다.
1) 순종의 결과 였다.(40절)
40절은 그들이 남방을 이긴 이유는 “여호와의 말씀과 같았더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바라보고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2)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심으로(42절)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셨다고 한다. 여기서 전쟁의 승패는 결정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위하심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르쳐주고 잇다. 로마서 8:31-39 “누가 우리를”이라며 4번이나 설명하려고 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심이 곧 승리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수아서 11:1-15
가나안 북부 점령
요단을 건너 여리고 성을 바라보며 두려워하던 이스라엘은 벌써 가나안 동부와 남부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북부의 나머지 민족들의 동맹국의 거센 반격에 부딪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역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다. 이 싸움을 통해 우리는 참 의지할 분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 두려운 존재
처음에 이스라엘은 그렇게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은 한 족속으로는 당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본래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나 하나님만 의지했더니 존귀하고 두려운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된다. 우리는 삶을 거꾸로 살 때가 많다. 높아지려 하고, 나만 살려하고, 자신의 힘으로만 살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자신을 낮추는 자가 높아지고, 희생하는 자가 존귀해지고, 하나님만 의지할 때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을 기억하며 삶의 원리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정복을 도와준 동맹군
이제 이스라엘은 한 나라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동부와 남부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북부의 족속들은 연합국을 형성한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한 족속도 힘든데 여러 나라가 동맹을 맺었으니 큰 일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이것을 가나안 정복의 좋은 기회로 삼으신 것이다. 만일 한 족속, 한 족속 싸워야 한다면 시간은 시간대로 걸리고 힘은 힘대로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데 모여서 와줌으로 이스라엘이 찾아가야 하는 일을 덜어 준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사55:8-9)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했더니 적들의 동맹이 오히려 이스라엘의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잠16:5,7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두 구절을 읽고 그 의미를 비교해 보라.
- 우리의 의지할 이 – 하나님
동맹군의 기세는 대단하다. 그들의 무기 역시 그러하다. 그들의 군인의 수나, 무기나, 기동력은 실로 대단하다. 그들은 그것들을 소유했으므로 기세가 당당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말 발목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사르라고 하셨다. 말과 병거는 적들의 의지하는 무기이다. 이것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 명령을 통해 인간이 의지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셨다. 오늘도 우리는 가진 것, 아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다 보니 참 의지해야할 하나님은 너무 멀어지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골리앗은 창과 단창으로 나왔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이 멸시하는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갔을 때 하나님은 승리의 미소를 다윗에게 주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싸움으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여수아서 11:16-23
아낙 자손의 멸절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과 화친한 기브온이 스스로의 은혜를 절감시키는 어리석음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던 아낙 자손을 물리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기브온의 교만
기브온은 이스라엘과 속여가며 화친을 맺고는 이스라엘에게 대적을 했다. 이스라엘은 안 그래도 화친을 인해 회개하고 기브온을 진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회가 주어지자 진멸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을 혹독하게 치리 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 속담에 “봐주니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간다.”는 말이 있다. 기브온이 그러한 경우였다. 그들은 지금 이스라엘에게 잘보여도 될까 말까이다. 그 이유는 지금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이 코앞에 있는 상태이다. 사기가 중천에 달했고, 그 능력과 기세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기브온이 왜 그렇게 대적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20절에서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1)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교만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가나안의 정복하지 못한 족속들까지 신경을 써주시며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뜻이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의 모든 족속의 진멸을 명하셨다. 그런데 여호수아의 실수로 화친을 맺자 그들 스스로 계약을 위반하게 하심으로 벌을 받도록 하신 것이다.
- 아낙 자손을 진멸한 이스라엘
1) 광야에서의 두려움을 진멸한 이스라엘
아낙 자손은 이스라엘에게 잊혀질 수 없는 사람들이다. 광야에서 가나안의 정탐을 갔던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보고 온 사람들은 아낙 자손들이었다. 불행하게도 여호수아와 갈렙 외의 10 사람은 그들을 인해 가나안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함으로 40년의 방황의 벌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바로 그 아낙 자손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단번에 진멸하고 말았다. 이것은 단순히 아낙 자손의 진멸이 아니라 그들 안의 두려움을 진멸한 것이다.
2) 문제를 보는 관점
아낙 자손들이 예날과 지금이 달라진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같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의 믿음과 문제를 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제를 바라보는 자세를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인해 고통이 더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문제를 인해서라기보다는 그 문제를 사실보다 더 두렵고, 크고, 못 넘을 산으로 바라보는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광야에서 10명이 안 된다고 할 때 백성들도 모두 그 뜻을 따랐다. 그러나 그 때 가나안 정복이 가능하다고 한 사람들 여호수아와 갈렙에 의해 이 일은 이루어진 것이다.
여호수아서 12:1-23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
가나안의 정복은 다윗 솔로몬 시대에 가야 완전히 끝을 맺는다. 그러나 여호수아에 의한 가나안 정복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오늘 본문은 정복한 가나안의 왕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다. 그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자.
- 승리를 주신 분 – 하나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마 약속해 주셨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왕의 수는 1-6절에 가나안 동편에 3명, 서편에 31왕의 이름이 나온다. 그들은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이스라엘보다 앞서 있다. 거기에 비해 이스라엘은 유목민이요 방황하는 나그네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이긴 것일까? 하나님은 정복의 처음부터 개입하셨고, 친히 싸워 주셨다. 바산과 옥 그리고 시혼은 요단 동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였다. 그들이 길을 가로막아 요단으로 이르는 길이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던 나라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싸움만 하면 이겼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니 이긴 것이다. 시편 저자는 “인간의 성을 세우는 노력과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시121:1-2)라고 했다. 반대로 하나님께 의뢰하고 맡기고 나아갈 때에는 형통함과 승리가 주어진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가나안 – 싸워서 얻은 땅
약속의 땅,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 가나안이다. 그런데도 그 땅을 얻기 위해서는 본문에 열거된 적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얻을 수 있었다.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하셨다. 천국을 얻기 위해서도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1) 애쓰고 수고해야 얻는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싸워서 얻듯이, 그리고 농부가 애쓰고 수고해서 결실을 얻듯이 믿음도, 천국도 기도와 말씀의 훈련 등 애쓰고 수고해야 한다.
2) 영적 싸움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영적인 싸움은 끝이 없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적들은 계속 시험을 하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그 싸움에서 이겨야만 한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신 것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끝이 났다. 우리도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천국 가는 순간까지 영적 싸움이 있음을 기억하며 이겨나가야 할 것이다.
- 반드시 주실 땅 – 가나안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며 주시겠다고 하신 땅도 반드시 주셨음을 발견할 수 있다.
1) 약속을 받았으므로 받은 땅
그 땅은 아브라함 때에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다. 대충 그 기한을 잡아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400년, 애굽 종살이 430년, 광야 40년 하고서 얻은 것이다.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천국을 가는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다. 바로 그 약속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2) 성취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그 약속을 하나도 남김없이 성취하셨음을 오늘 본문은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약속이 언제까지 유효한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여호수아 13:1-23
장래의 기업에 대한 약속
가나안 정복이 일단락 되었으나 하나님은 앞으로 정복해야 할 땅을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요단 동편의 땅을 두 지파 반에게 분배하셨다.
- 성도의 삶의 시간 성취와 완성 사이 (already, not yet)
가나안 정복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여호수아가 해야할 일은 다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앞으로 이스라엘이 정복해야 할 땅을 말씀해 주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준다.
1) 우리의 삶의 시제를 가르쳐 준다.
이스라엘로 볼 때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성취되었으나 가나안의 정복의 일은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이러한 시점에 사는 사람들이다. 구원은 성취되었으나 완성된 것은 아니다.
2) 최선을 다하라.
그러므로 성취된 사람답게 살아야 하나 미완성의 상태임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해 완성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했다고 생각되면 그 이상의 노력을 포기하려한다. 그러나 완성이 끝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신앙고백을 듣고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빌2:12,3:12-14
- 두지파 반의 기업
땅의 정복이 마무리됨에 따라 땅의 분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의 땅의 분배가 먼저 나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업은 하나가 아니라 둘임을 봐야 한다.
1) 첫 번째로 받는 영광의 기업
그들은 요단을 건너기 전에 정복했던 땅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줄 것을 청원 하였다. 그 조건은 하나였다. 온 이스라엘과 함께 건너가 함께 가나안 정복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약속을 끝까지 잘 이행하였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킨 그들에게 땅의 기업을 첫번째로 주신 것이다.
2) 요단 동편의 땅의 기업
하나님은 약속에 따라 그들에게 요단 동편의 땅을 주셨다. 재미있는 사실은 가나안의 땅의 분배의 원리는 제비를 뽑는 것과 인구비례로 하는 것인데 두 지파 반에게는 하나님께서 직권으로 주신 것이다. 그들은 그 땅을 정복하고 그 누구도 생각치못했던 가나안 동편도 하나님의 주신 선물로 보고 청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약속을 이행하자 그 땅을 제비 없이 주신 것이다.
- 레위지파의 기업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이 없다. 이 말은 레위 지파가 한데 모여 살만한 땅을 분배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33절에서도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라고 하셨고 14절에 그들(두 지파 반)의 화제물이 기업이라고 하셨다. 즉 여호와의 분깃으로 드린것이 레위 지파의 기업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대로 두 지파 반은 그들이 받은 기업중에서 여호와의 분깃을 레위 지파에게 돌렸다는 뜻이다. 레위기 27:30-32,민수기18:21-32은 여호와의 분깃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첫 열매와 십일조 그리고 모든 화제물이라고 했다. 그런데 땅을 기업으로 받은 그들은 그 땅 중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분깃을 철저히 챙기시고 그 분깃을 통해 자신의 뜻을 자기 백성 가운데서 이루심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 14:1-5
기업 분배의 원칙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정복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나눠 줄 것을 명하셨다. 오늘 본문은 땅의 분배의 원칙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것이다.
- 땅의 분배의 의미 – 천국의 기업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정복한 땅을 12 지파에게 골고루 나누었다. 그리고 그 일에 동참한 사람이면 비록 이방인이라도 땅의 분배에 동참할 수 있었다. 애굽과 광야를 지나 가나안땅에 이르른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 < 애굽 – 불신의 세계, 광야 – 믿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장소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곳), 가나안 – 하나님의 나라 >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기업이 있었듯이 천국에 들어 갈 때 우리의 분깃이 있음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① 그곳은 어떤 곳인가? – 계21:3-4
② 기업은 무엇인가? -벧전1:3-9
③ 그러면 천국에서는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 – 계22:1-5
- 분배의 원칙
1) 하나님의 명대로
이것은 땅의 분배가 누구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잘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이 땅의 약속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요, 얻도록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그 땅의 분배를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가르쳐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느 정도 까지만 인정하려고 할 때가 있다. 문제는 그 어느 정도가 자신의 만족을 위한 방편이라는데 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유혹을 모두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그리고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따르며 나가야 할 것이다.
2) 제비를 뽑아
제비는 요행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공정성이다. 어떤 인위적인 의도나 행위가 하나도 가미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 뽑힌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가장 적절한 것임을 고백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고 하셨다.
여호수아 14:6-15
갈렙의 청원
가나안 땅의 분배는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편은 2 지파 반에게, 서편은 9 지파 반에게 배당되었다. 그러나 세분해서 나눠진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유다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자신들에게 자신들의 분깃이 작으니 더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잇다.
- 장자의 명분을 기억한 갈렙
갈렙의 청원은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에게 한 분깃 밖에 안 주어진 것을 문제삼고 나섰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애굽에서 나온 유일한 사람이다. 모세는 정탐할 당시 믿음을 지킨 갈렙에게 더 많은 분깃을 약속하면서 산지에 산지를 그에게 주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그 땅에 대한 언급이 없자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을 청원한 것이다. 그는 믿음의 사람답게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을 믿음으로 기억하고 청원하여 분깃을 허락 받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도 알지 못하고 믿음이 없어 받지 못할 때가 많다. 말씀과 약속 가운데 굳게 서서 그 축복을 찾아 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축복하고 기업을 삼게 함
이에 대해 여호수아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허락하였으며 축복까지 해주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정탐할 때부터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하나님은 요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를 삼았다. 그러나 갈렙은 한마디도 불평이나 원망을 안했고, 이 문제도 여호수아에게 정식으로 청원 함으로 그의 권위에 복종함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음을 본다. 갈렌은 참으로 겸손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두말할 것도 없이 허락하셨고, 이러한 인격을 아는 여호수아는 축복과 함께 그 대답을 준 것이다.
- 그 기업을 얻은 갈렙
갈렙의 청원은 참으로 지혜로움을 본다. 모세의 약속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데 갈렙은 자신도 힘이 아직 있기에 주셔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힘과는 상관없이 그 땅을 얻도록 싸워 주신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 땅의 거민이 가장 큰 아낙 자손이었다는 것이다. 정탐할 때의 갈렙의 믿음대로 그들도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한 것 같이 그들을 다 이긴 것이다.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갈렙에게 평강을 더해 주신 것이다.
여호수아 15:1-63
유다 지파의 기업
요단 서편의 땅을 9지파 반에게 나누어주는 내용이 시작된다. 15장은 첫 번째로 유다 지파에게 기업이 분배되고 있다.
- 유다 지파의 기업 – 축복받은 지파의 기업
유다의 기업은 이스라엘 전체 지역의 남쪽 경계에 해당하며 에돔의 땅과 인접한 비옥한 지역이다. 12 지파 중에 가장 좋은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이다. 야곱은 12 아들에게 축복을 했다. 그런데 야곱에게 한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창49:8-12) 특히 야곱은 유다에게 “홀이 너에게서 나오며”라고 했다. 이것은 통치자의 지휘봉을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통치자의 지파답게 합당한 기업을 주신 것이다. 더 나아가 “실로가 오시기까지”는 메시야의 도래를 뜻하는 것으로 큰 축복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한 것이다. 결과가 주어지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유다 지파의 축복은 그들의 아버지 유다가 생명을 사랑하고 축복을 심은 결과 그 자손이 거두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심고 있는가? 내가 축복을 경홀히 여길 때 우리의 자녀들은 거둘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갈6:9의 말씀대로 낙심할 줄 모르는 믿음으로 심으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이다.
- 갈렙의 기업
갈렙은 자신이 받은 기업을 얻기 위해 용맹한 자를 찾았고 그 일을 감당할 자를 자신의 사위로 맞이하였다. 그런데 그 사위인 웃니엘은 갈렙에게 두 가지를 청원하였다. 하나는 축복해 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위아래 샘 모두를 달라는 것이었다. 이 둘은 영적으로나 세상적으로 볼 때 생명 줄과 같은 것이었다. 그 장인의 그 사위이다. 웃니엘은 그 믿음대로 갈렙의 기업을 다 정복했고 하나님의 축복과 두 샘을 모두 었었다. 마7:7-12은 우리에게 기도의 귀한 교훈을 들려주신다. 구하고 두드리고 찾으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를 예수님은 세상의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너희 천부께서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사위 웃니엘이 구한 것은 물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장인 갈렙은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었으면 하였고 더 나아가 하나님은 갈렙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이다.
- 유다의 성읍들
20-65절까지 수많은 읽기도 힘든 지명들이 나오고 있다. 대충 어디에서 어디까지 등으로 설명해도 그만인데 성경은 한 성읍 한 성읍의 이름을 빠질세라 정성을 들여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 그 성읍들은 귀하고 또 귀한 성읍들이다. 그 어느것 하나 거저 얻은 것이 없으며 귀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 “내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다 지파가 얻은 귀한 기업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16:1-10
요셉 지파의 기업⑴
16-17장에는 요셉 지파의 기업이 나눠지고 있다. 16장에서는 에브라임이 그리고 17장에서는 므낫세 지파의 기업이 주어졌다.
- 요셉의 축복 – 두 몫의 축복
야곱은 12아들 가운데 요셉을 가장 사랑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렸을 때(아버지와 함께 있을 떼)에는 철부지였다. 일도 안 했고 아버지의 편애(偏愛)속에서 채색 옷이나 입고 형들의 실수를 고자질하는 아들이었다. 그 결과 형들에게 버림을 받았고 애굽의 팔려가 노예로, 죄수로 그리고 국무 총리 까지 되었다. 그가 12 아들 중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1) 자신의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번도 형들을 원망한다든지,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든지, 자신의 현재 상황을 비하하거나 부정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노예일 때도, 죄수로 감옥에 있을 때도 그저 자신의 신분과 환경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2)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꿈 해몽으로 국무총리가 되어 형들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앞서 보내 당신들을 구원하게 하시려고”라고 하며 오히려 형들을 위로했다. 이것은 그의 믿음이었다. 요셉은 형들의 버림을 받아 아들의 신분에서 노예로, 애굽에서 주인의 아내의 모함으로 죄인까지 되었으나 결국 국무총리가 되게 했던 것이 바로 이 믿음 때문이었다.
3) 악을 선으로 갚았다.
형들은 요셉을 버렸으나 요셉은 도리어 그들을 구원했고 아버지와 온 가족을 좋은 길로 이끌었다. 원수 사랑이 예수의 사랑이다. 그런 요셉을 하나님은 지극히 높여 축복해 주신 것이다.
4) 두 몫의 축복
그러한 아들에게 야곱은 두 몫의 축복을 주었다. 그 두 몫을 요셉 자신에게 준 것이 아니라 요셉의 두 아들에게 베풀므로 요셉의 두 아들이 12 지파 속에 들어오는 복을 받은 것이고 그 후손들은 그 축복대로 두 기업을 받은 것이다.
- 적은 실수 , 큰 손해
에브라임에게 주어진 기업에 게셀 지방에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다. 그들이 강해서인지, 봐줘서 인지는 모르나 가나안 사람들은 결국 에브라임과 함께 살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치 않으셨다. 신7:2-4은 그 이유를 그들이 이스라엘의 자녀를 유혹하여 우상숭배를 하도록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정말 그 후손들은 우상숭배의 주동자들이 되어 큰 죄를 짖게된 것이다. 이로 인해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말았다.(왕상12:5) 때로 실수는 적으나 그 대가가 엄청날 대가 있다. 이것이 죄의 속성임을 기억하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 17:1-18
요셉 지파의 기업⑵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이미 요단 동편의 땅을 받았고 나머지 절반의 땅을 나눠주는 내용이다. 특히 므낫세 지파에 아들이 없는 슬로보핫 가족의 분깃이 주어지는 내용과 야곱으로 부터는 두몫을 받았으나 그 수효가 마놓아진 요셉지파로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더 많은 땅의 분배를 요구했고 그 요청을 허락받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 슬로보핫의 딸들
슬로보핫의 가족은 이미 요단을 건너기전에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그 대답은 같은 지파끼리 결혼을 한다면 그 땅을 줄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슬로보핫의 딸들은 그들의 분깃이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받아야 할 줄로 생각하고 같은 지파 안에서 결혼을 했고 그 기업도 받았다. 이것은 축복에 대한 자세 곧, 그들이 축복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 축복을 받았는지를 말씀해주는 내용이다.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① 사모하지 않으므로 ② 모르기 때문에 ③ 믿음이 없어서 ④ 축복의 행동(삶)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고 축복에 대한 자세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 요셉 지파의 요청
므낫세 반 지파 곧 마길의 가족 등은 이미 요단 동편의 땅을 받았고 나머지 절반은 요단의 서편에 땅을 나눠 받았다. 그들은 요셉의 축복이나 약속을 이야기 한것이 아니라 큰 민족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이해 할수 있다. 하나는 그들의 욕심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만큼 큰 축복을 받은 지파임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하튼 여호수아는 그들의 요청을 100% 수용하였고 브리스와 르바임 사람의 삼림을 더 받았다. 요셉지파는 자신들이 받은 축복이 얼마나 큰지 자신들의 받은 몫으로는 도무지 부족할 정도의 축복이었다고 한다.
- 스스로 개척하라.
그들의 요청에 대한 여호수아의 대답은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이었다. 여호수아도 같은 요셉지파다. 웬만하면 더 좋은 길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스스로 개척하라는 대답을 한다. 그 의미는 ① 안일하게 얻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② 자신들의 분깃을 받고 부족해서 요청한 것이라면 스스로 그 지경을 넓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준 땅은 여러 가지로 악조건이었다. 철병거가 있는 강한 적이 있었고 산새가 험하고 삼림이 우거진 곳이었던 것 같다. 그런 불평을 하는 요셉 지파에게 여호수아는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며 그 땅의 정복할 것을 명하고 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내가 받은 축복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축복이 우리의 삶에 넘쳐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18:1-28
회막 이동과 땅의 분배
이스라엘은 요단 동편에 2지파반, 서편에 2지파 반의 땅을 분배하고 땅의 분배가 이러저러한 일로 좀 늦어진 겉 같다. 이런 가운데 길갈에 있던 회막을 실로로 옮긴 후에 땅의 분배를 마무리 지으려는 여호수아의 뜻을 볼 수 있다.
- 길갈에서 실로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에서 제작된 회막을 길갈에서 실로로 옮겨서 설치하였다. 우리의 환경의 변화에 따른 신앙자세나 기도 제목이 달라지듯이 그들의 삶의 장소의 변화에 따른 회막에 대한 그들의 자세도 상당히 달랐음을 바라본다.
1)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회막을 짖도록 명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만나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 주실 뿐 아니라 회막에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하시고 이동하심에 따라 광야 40년의 인도를 받았다.
2) 길갈에서
길갈은 요단을 건넌 후 처음 자리 잡았던 곳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재정리하였다. 할례도 행하고 유월절도 지켰다. 그리고도 자신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은 힘과 용기를 주셨고 때로는 작전 참모로서, 때로는 용맹스런 장군으로 전쟁에 앞서 주심으로 가나안 정복을 한 것이다.
3) 실로에서
가나안 정복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을 실로 옮겼다. 길갈은 이미 가나안의 변두리가 되었다. 다시 말해 가나안의 한 복판으로 옮긴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정복한 땅의 분배며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만 남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첫째, 회막 중신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둘째,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셋째, 상황과 장소는 바뀌었어도 그들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미진한 문제를 풀다. – 땅의 분배의 마무리
이스라엘은 5지파의 땅을 분배하고 힘이 들어 얼마간 시간을 지체했던 모양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회막을 실로로 옮긴 후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고 사명을 마무리 지을 것을 새롭게 결심을 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정리가 되고 풀어져 나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19:1-51
땅의 분배의 완료
18-19장에서는 가나안의 정복과 분배가 완료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11-28 베냐민 지파 , 19: 1- 9 시므온 지파 (유다의 땅을 나눠 받음)
19:10-16 스블론 지파 (작지만 비옥한 땅), 19:17-23 잇사갈 지파
19:24-31 아셀 지파, 19:32-39 납달리 지파,
19:40-48 단 지파 등이 골고루 땅을 분배받았다.
우리는 여기서 가나안 땅의 정복과 분배에 개입하시어 역사(役事)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약속은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하신 약속은 하나도 남김없이 이루신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순종과 원망 그리고 불신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크신 사랑과 인내로 그들에게 관용하시고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을 이행하신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의 제자로서 충성하며 고난에 동참할 것을 권하며 “주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 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리라”(딤후2:11-13)고 하셨다.
- 연단 시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기업으로 얻은 것은 거져된 일이 아니다. 애굽에서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죽어야 했다. 광야에서 40년의 기간을 방황하며 길의 위험과 먹고 마실것을 인해서 수많은 적들과 전쟁의 위협을 겪어야만 했다. 요단을 건넌 후에도 그들은 그 땅을 거져 얻은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전쟁을 했으며 승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패배의 아픔도 겪어야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하신 후에 땅의 축복을 주신 것이다. 약1:2-4, 벧전 1:7-9,롬5:3-4 등은 인내와 연단 후에 영광과 소망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히브리 기자도 징계 후에 “의의 평강한 열매”가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 공평하신 하나님을 만나게된다.
하나님은 12지파에게 골고루 그리고 공평하게 땅을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하시며 하나님은 선인에게와 악인에게 햇빛과 비를 골고루 주신다는 말씀을 하셨다.(마5:43-48)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편견이나 편애가 될 경우는 그러한 공평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지파를, 아니 온 인류를 동일하게 그리고 공평하게 사랑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20:1-9
도피성을 세우라.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분배를 마치신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피성을 세울 것을 명하셨다. 그리고 친히 세워질 장소를 택하셨다.
- 생명을 사랑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가나안의 분배가 끝나자마자 도피성을 세울 것을 말씀하셨다. 도피성은 부지중(不知中)의 오살자를 보호하기 위한 곳이다. 하나님은 무고한 피를 흘린자를 생명으로 다스리신다. 그러나 때로는 불가항력적인 사고로 생명까지 잃게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오살자가 그 가족에게 죽는다면 그 또한 무고한 피흘림이다. 하나님은 살인자를 처형함으로 생명의 귀중성을 경고 하셨듯이 오살자를 보호하심으로 다시 한번 그 뜻을 보여주신 것이다.
- 도피성이 세워질 장소
도피성이 세워질 장소에 대해 두 가지로 말씀 하셨다.
1) 높은 산지에 세우라.
도피성은 두 가지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 보수자 곧 원수 갚을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장소라야 한다. 둘째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 잘 보이는 곳에 세워져야 한다. 높은 산지라면 그 두 가지 조건은 충분하다. 특히 누구나 잘 보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광야에서 뱀에 물린자 중에 산 사람은 오직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쳐다 본 사람이다. 예수님도 이 말씀을 하시며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셨다.(요3:14-16)
2) 각 지역별로 세우라
도피성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강 양편으로 세 곳씩 여섯 곳에 세우도록 하셨다. 누구나 어디서나 쉽게 피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사람은 누구나 허물과 죄가 많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기 때문에 실수한 인간의 피난처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 성령님도 우리 연약함을 잘 아실 뿐 아니라 도와 주셨다.(롬8:26)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을 내어놓고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이다.
- 오늘의 도피성, 교회
오살자에게 피난처는 도피성이다. 그 곳에 가야만 산다.
하나님은 오늘 그곳으로 교회를 세워 주셨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유일한 기관이다. 여기에 오면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가기만 하면 살려줄 곳은 어디인가? 병원이나 은행이 아니다. 삭게오가 돈만으로 살수 없음을 고백하며 돈을 포기하고 예수님 품에 안겼다.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4:12) 예수님만이 오직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여호수아21:1-45
레위 지파의 기업
오늘 본문은 가나안의 분배후 도피성까지 설정하시고 마지막으로 레위 지파의 기업을 나누는 내용이다. 레위 지파의 기업을 나누는 것을 끝으로 가나안 땅의 정복과 분배는 막을 내린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업이고 성물이 기업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레위 지파에게 땅을 나눠주고 있다. 그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자.
- 그들의 삶의 자리 –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업이 없다고 하셨는데 땅을 나눠주셨다. 그런데 그 땅은 레위인들이 모여 사는 한 장소가 아니라 분배받은 12지파의 기업 중에 좋은 땅을 골라 그 가운데 거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이요,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를 원하셨고 그 일을 레위 지파에 맡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의 삶은 곧, 레위지파를 중심으로 한 삶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 곧 주의 종을 중심으로 한 삶이라는 사실이다. 주님은 참 목자에 대해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심으로 성직자의 자세도 말씀해 주셨다.
- 레위인의 기업
하나님은 레위인에게 기업이 없다고 하셨는데 좋은 땅만을 그들의 기업으로 주셨다. 어떻게 된 일인가? 레위지파는 땅을 정복할 때도 한 번의 전쟁도 하지 않았고 기업을 나눌 때도 측량을 하거나 제비를 뽑은 일도 없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성막에서 제사를 집전하는 일과 성물을 관리하는 일외에는 한 것이 없다. 하나님은 이러한 레위 지파에게 누구보다 좋은 땅을 주셨다. 그리고 그 좋은 땅은 12지파가 받은 기업 중에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릴 땅을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에 돌려 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셨고, 하나님의 성물이 그들의 기업이 된 것이다. 그렇다. 성직자는 자신의 양식을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 한일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생명을 드리고 하나님의 양식을 먹고사는 사람이다.
3.땅과 함께 주신 선물 – 안식(43-45절)
이제 레위지파에게 돌아갈 기업까지 완료하심으로 가나안 정복과 분배는 끝이 났다. 성경은 이 일이 다 끝이 난 것에 대해 “여호와께서 열조에게 주마하신 온 땅을 …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거기 거하였느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을 다 이루시고 다 주셨다. 그런데 44절은 우리에게 덤으로 안식까지 주셨다. 안식은 적들도 다 이기게하는 승리가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호수아22:1-9
두지파 반의 교훈(1)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편을 기업으로 받고도 요단을 건너 가나안 정복의 일을 끝까지 도왔다. 이제 전쟁은 끝났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과 그들이 취한 탈취물을 나눌 것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귀한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다.
- 형제를 도운 사람들
요단 동편은 원래 이스라엘의 기업으로는 생각지도 않은 땅이다. 그 땅은 두지파 반의 요청에 의해 그들의 기업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약속할 당시 모세는 한 가지 조건으로 요단을 건너가 함께 정복을 도와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와의 약속대로 이행했음을 본다. 그들은 어떻게 도왔는가? 본문은 세 가지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1) 명령대로 도왔다.(2절)
일반적인 사랑은 나에게서 나온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이 조건적임을 보게된다. 그리고 어떤 한계에서 사랑이 제한되고 있음도 본다. 그러나 신앙에서의 사랑은 다르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랑이다. 그래서 어떤 조건도 있을수 없으며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다. 따라서 제한이라고는 그 사랑을 다할 때까지 해야 한다는 의무가 제한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의 명령을 따랐고 순종함으로 도왔다고 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은 무엇인가? 요 13:34 / 요일 4:11 / 롬 13:8 /
2) 오래도록 도왔다.(3절)
한 순간 일시적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14:10에 의하면 여호수아가 광야에서부터 행한 것이 45년이니까 광야 40년을 빼면 가나안의 정복의 기간을 약 5년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러면 두 지파 반은 5-7년이라는 기간을 자신들이 아닌 형제들의 땅을 얻는 일이 이루기까지 목숨을 걸고 위해서 싸웠다는 결론이 나온다. 요즘은 자신을 위한 희생도 하지 않는 시대고 남을 위한 희생처럼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두지파 반이 보여준 사랑은 참으로 고귀한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3) 오늘까지 도왔다.(3절)
오늘까지라는 말은 가나안 정복이 끝나고 기업을 나누고 도피성과 레위지파의 기업까지 나누는 순간까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끝까지”라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마지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다 이루어지는 순간, 완성되는 순간, 목적 달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는 일이 있더라도 그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요13:1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시15:4은 이런 사랑을 베푼 자가 주의 장막에 거하는 복을 받게 되겠다고 하셨다.
오, 주여! 이런 사랑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여호수아22:1-9
두지파 반의 교훈(2)
르우벤,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편을 기업으로 받고도 요단을 건너 가나안 정복의 일을 끝까지 도왔다. 이제 전쟁은 끝났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과 그들이 취한 탈취물을 나눌 것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
는 이 말씀을 통해 귀한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다.
- 장막으로 돌아가라.(4절)
여호수아는 아낌없이 수고하고 사랑을 베푼 두지파 반에 대해 “너희의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는 명을 내렸다.
1) 아름다운 순종
그들의 순종이 돋보인다. 가나안 정복을 위해 “할만침 했으니 돌아가겠소”라고 해도 그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런데도 여호수아의 명령이 있은 후에야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면서도 그 명령보다 내가 앞서서 하나님의 뜻도 주관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두지파 반은 하나님의 명령을 도중에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난 후 주의 종의 명령으로 그 일은 마침으로 아름다운 순종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2) 그들이 가야할 곳 – 가정
수많은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정을 떠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삶의 터전인 가정으로 돌려 보내셨다. 우리의 삶의 터전은 가정이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의 터전인 가정이 아름답게 세워지길 원하신 것이다. 우리는 때로 일만 잘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가정이 저절로 세워지고 잘되는 것이라고 생각은 잘못이다. 오히려 거꾸로 삶의 터전인 가정이 든든히 세워질 때, 그리고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으로 세워질 때 밖에서의 일은 잘되어지는 것이다.
- 그들에게 주어진 교훈 –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 만을 섬기라. (5절)
여호수아는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며 위의 두 가지 명령을 내렸다. 이제 그 들은 가나안을 전복하고 기업으로 얻은 땅에서 살게 되었다. 여호수아는 그러한 그들에게 어떤 원리로 살아갈 것을 권하신 말씀이다. 그들이 그 땅을 얻은 것은 그들의 조상의 믿음으로 받은 약속대로 된 것이다. 출애굽 한 것도, 광야를 지나온 것도 그 땅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이제 우리의 삶은 포도나무되신 주님의 가지이므로 주님과의 연합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
1) 탈취물을 나누라.
그들은 전쟁을 하면서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충분히 나누도록 하셨다. 전쟁을 한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이요 기쁨이다. 싸움은 힘든 것이나 싸움을 인해 탈취물이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
2)여호수아의 축복
여호수아는 장막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축복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며 축복받은 사람들은 이들 뿐이었다
여호수아22:10-34
잘한 잘못(1)
두 지파 반이 집으로 돌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 이것을 안 9지파 반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기 위한 단을 쌓은 줄로 알고 싸움이라도 해서 막으려 했다. 9지파반은 전쟁 전에 제사장과 10명의 방백들을 대표로 보내 알아보게 하였고 그 결과 그들이 우상을 섬기기 위해 쌓은 단이 아님을 확인한다는 내용이다.
- 단을 쌓은 것이 왜 문제인가?
성막이 당시에 실로에 있었다. 그리고 오직 그 성막에서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두 지파 반이 요단 저편에 단을 땋았다니 그 단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9지파 반은 그 단이 “가나안 원주민이 섬기던 우상을 위한 단이 아닌가?”하는 생각 밖에는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싸워서라도 그 단을 헐려고 했던 것이다.
- 단을 쌓은 두 지파 반 – 잘한 잘못
그들은 형제를 끝까지 돕고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장막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기 전에 여호수아는 계명을 지키고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권면을 들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집으로 가자마자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 이것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
우리는 그들의 지극히 순진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임을 보게된다. 주의 종의 말대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면서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상실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부족한 생각
그들의 순진한 믿음은 좋으나 그들의 단을 쌓은 행위에는 몇 가지의 문제가 있다. 그들이 단을 쌓을 정도의 단순한 믿음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단을 쌓기 전에 그들은 적어도 두 가지 정도는 생각해 보았어야 했다. 하나는 절차상의 문제다. 그들에게는 지도자 여호수아가 있었고, 대제사장 엘르아살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의중이 있음에도 지도자들과 아무런 상의가 없었다. 교회에서도 그러한 경우가 간혹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헌물이나 봉사를 했는데 교역자와 아무런 상의가 없어 나중에 적지 않은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다른 하나는 정립되지 않은 신앙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만 생각했지 회막이나 다른 사람들이 우상을 위한 단이라고 생각할 것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의 믿음만 있으면 고만이지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의 믿음은 나 하나가 아니라 공동체의 일부분이므로 나 하나의 잘못이나 부족은 전체의 잘못과 부족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22:10-34
잘못된 믿음
1.문제 해결에 나선 9지파 반
두 지파 반이 단을 쌓았다는 소식을 접한 9지파 반은 대단히 흥분했다. 2-3절에 보니까, 싸움이라도 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그들이 한일을 돌아본다면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배울수 있을 것이다.
1)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여 해결하였다.
그들은 한 사람의 지도자와 각 지파에서 대표자를 뽑아 그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지도자로 그리고 각지파에서 두령을 한 사람씩 뽑아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였다. 그들은 9지파 반을 대표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책임을 위임받은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다. 온 국민이 다 따지겠다면 일이 얼마나 복잡하겠으며 또 일은 제대로 처리되겠는가?
2) 절대적인 신앙
그들은 무조건 찾아가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칙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다. 다시 말해 단을 쌓은 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신앙 원칙이 있었다. 이방신을 섬기는 우상의 단이라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단이라도 실로의 단 이외의 다른 단은 안 된다는 신앙이었다. 절대적인 신앙에는 타협이나 정당히는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두 지파 반에게 발람의 사건과 아간의 사건을 상기시키며 신앙의 절대성을 세워 이야기함을 본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도 바꿔져서는 안될 것은 바꿔져서는 안 된다.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이러한 절대적인 신앙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3) 대화로 풀어가는 지혜
처음에 그들의 마음은 싸워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은 한 순간에 대화의 국면으로 전환되었고 그들은 그들이 할 말을 분명하게 다 말하였고 그리고 두 지파 방의 이야기도 모두 들은 후에 그들이 내려야할 결정을 내렸다. 때로 우리는 먼저 마음에 모든 판단을 다 내리고 우선 행동부터 할 때가 있다. 선입견은 어떤 일이나 만남에 가장큰 장애물임을 기억하고 허무는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다.
4) 단의 이름
엣 / 두지파 반이 한 대답은 그들의 생각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우상의 단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한 것 뿐”이러고 대답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엣이라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는 뜻이다. 그리고 9지파 반도 그들의 이 말을 듣고 충분히 납득이 됐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절대신앙에서 결핍되기 쉬운 이해와 용납이 돋보인다.
여호수아23:1-16
마지막 권고(1)
23장은 여호수아의 고별사와 같은 것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3-11절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싸워주실 것이라는 것이고, 12-16은 여호와를 떠날 때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저주로 갚으실 것을 말씀하고 있다.
- 마지막을 바라본 여호수아(1-2절)
사람은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잘 사는 것 만큼 마무리를 잘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때가 다한 줄 알고 자신의 사역과 인생을 마무리 짖고 있다. 그의 마무리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신의 사역에 대한 마무리로 자신의 사역인 땅의 정복과 분배를 완수했음을 이야기하였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사역의 대상인 백들에게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권면함으로 마무리 짖고 있다.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때를 알아 마무리 지은 여호수아와 같이 때를 아는 지혜, 마무리 짖는 지혜를 얻어야 할 것이다.
- 가나안 땅에서의 삶의 원리 – 하나님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과 분배를 마치고 백성들에게 유언과 같이 그들에게 권면한 것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라는 것이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야 할 원리인 것이다. 이 원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 의미조차 없다. 이것을 여호수아는 두 가지로 가르쳐주고 있다.
1) 축복의 비결(3-11절) /
첫째, 하나님을 아는 원리(3절)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고 싸워주셨으며,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까지 어떻게 이끌어 주셨는지를 기억하라고 한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 하셨는지를 안다면 지금도 내일도 그러한 인도함은 보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6절) – 율법책은 하나님께서 신앙의 원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는 하나님의 뜻도 모르는 것이며 그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입각한 신앙, 그리고 지켜 행하므로 순종하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친근히하고(8), 사랑하라(11)
신앙에 의무가 없으면 방종하게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의무만 있다면 형식적이게 된다. 성경은 신앙의 원리로 하나님을 친근히하고 사랑할 것을 명하고 있다. 그렇다 명령을 지키고 행하는 것보다 더큰 원리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친금히 할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더 크게 우리가슴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다시말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이 되기위해 늘 충만함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23:1-16
마지막 권고(2)
23장은 여호수아의 고별사로 크게 두부분으로 되어 있다. 3-11절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싸워주실 것이라는 것이고, 12-16은 여호와를 떠날 때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저주로 갚으실 것을 말씀하셨다.
- 가나안 땅에서의 삶의 원리 – 하나님
1) 축복의 비결
하나님을 아는 원리, 말씀위에 선 신앙, 친근히하고 사랑하라.
2)저주의 비결
수 23:12-16 은 저주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기분에 의해 축복과 저주를 내리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축복하실 자를 축복하시고 저주하실자를 저주하신다. 본문은 바로 그러한 원칙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따라서 따를 것을 따르고 피할것은 피하는 지혜를 얻어야 할 것이다.
첫째, 불순종 심기 (12-13절)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을 모두 쫒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르고 순종함으로 온전한 승리가 주어지는 것을 체험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다 쫓아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로인해 적지 않은 고통이 있을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들 자체가 고통이 아니다. 그들을 인해 여러 유형의 범죄가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하시고 그 범죄에 빠지게되면 하나님은 그들을 채찍으로 사용하여 징벌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잔류한 가나안 족속은 무력하기 짝이없다. 그러나 힘이 빠진 이스라엘, 하나님 떠난 이스라엘에게는 사자와 같이 승냥이와 같이 덤벼들 것이다. 이스라엘은 적은 불순종을 심었으나 그것이 자라나 열매를 거둘 쯤에는 커다란 저주를 결실해 뼈아픈 눈물의 기도로 해야 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을 배반하기(16절)
하나님은 언제나 일방적인 말씀을 하시지 않으신다. 출애굽만해도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순종하면 해방 시키시고 가나안 땅을 주시마 약속하시고 백성들도 하나님 뜻을 따르마 맹세하고 계약을 맺은 것이다. 그런데 언약 범함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행위이요 그래서 범죄이다. 더군다나 다른 신들에게 가고 그들에게 절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은혜 베풀어 주심을 전면 부인하는 것으로 하나님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결정하고 따른 자신도 부인하는 것이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고 하나님도 믿을 수 없는 자를 결코 사랑하지 않으심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셋째, 저주의 성격을 알아야 한다.(15절)
하나님은 선한 일을 말씀하셨는데 모두다 이루어졌음을 여호수아는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저주하신 것에 대해서도 이스라엘이 멸절하기 까지 내리실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여호수아24:1-13
하나님의 은혜
여호수아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결단을 촉구시키려 하고 있다. 이 일에 앞서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왜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 역사적인 눈을 가진 여호수아의 신앙
여호수아는 아브라함이 고향에서 부름 받기 전의 상황에서부터 오늘까지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역사적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있음을 본다. 독일말에는 역사란 단어가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과거의 사실을 담은 일반적인 역사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구원을 이루신 역사 곧 구속사가 있다. 여호수아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이 구속사적인 신앙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이해했던 것이다.
2.하나님의 은혜
그러면 여호수아는 그 역사 속에서 어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았는가?
1) 불러 주신 은혜(2-4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주셨다. 그런데 그 상황이 우상을 섬기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신을 찾아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시어 진리를 깨우쳐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아들로 주셨고 또 그에게 에서와 야곱을 그리고 야곱에게 12아들을 주셨음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찾아오시고 불러주시기를 예수를 통해 12제자를 그리고 그 누군가에 의해 나까지도 불러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2) 구원의 은혜 (4-8절)
여호수아는 어떻게 이스라엘이 애굽의 430년 종살이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그들이 또한 어떻게 해방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시고 재앙을 내려 주심으로 그리고 홍해까지 갈라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다.
3) 인도하심과 보호해주신 은혜(9-10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길 40년을 그리고 아모리 사람의 손에서, 발락과 발람의 저주에서 지켜주신 것이다.
4) 가나안을 주신 은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7 족속이 사는 땅을 주시되 그들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신으로 그들의 삶의 여건을 마련해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그들이 사는 땅을 주신 것이다.
여호수아24:14-33
결단의 촉구와 응답
여호수아는 역사적인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생애를 마감하고 있다. 여기소 우리는 여호수아의 신앙적 결의를 볼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1.결단을 촉구하는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한두번도 아니고 재삼 재사 몇 번씩 반복하며 신앙의 결단을 타이르는 것이다.
1) 자신의 신앙부터 고백한 여호수아(14-15절)
여호수아는 어떤 신을 섬길 것인지 택하라고 한다. 그러나 백성의 대답이 있기 전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는 자신의 신앙고백부터 하고 있다.
2) 대답을 듣고도 결단을 확인하고있다(19-20절
여호수아는 백성들의 결단이 있었는데도 하나님이 질투의 하나님임을 깨우치며 어떻게 할 것인지를 다그쳐 물은 것이다.
3) 결단한 자에게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23절).
그것은 우상을 제하여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마치 어린아이를 돌보는 부모와 같이 신앙을 챙기고 있다.
- 백성들의 응답
백성들은 그러한 여호수아의 결단을 촉구하는 소리를 듣고 두말할 것 없이 오직 하나님만 섬길 것을 약속하였다. 백성들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대답하였다. ① “다른 신은 결단코 섬기지 않겠다.”(16절) ②“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21절) ③“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24절) 그들은 하나님 앞에 그리고 여호수아 앞에서 그들의 신앙을 또렸 또렸한 목소리로 고백함으로 여호수아의 마음을 노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로마서 10:10은 고백이 단순한 말이 아니라 구원의 하나의 조건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 .세사람의 마무리 (29-33절)
본문에는 세사람의 생이 마무리 되고 있음을 볼수 있다.
1) 여호수아
하나님은 그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워 가나안 종복과 분배의 뜻을 이루셨다. 그리고 그를 그의 지파의 기업 곧 자기의 땅에 묻히는 복을 주셨다.
2) 엘르아살
그는 아론의 아들로 여호수아에게 마치 그의 아버지 아론과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를 여호수아보다 앞세워 부르지 않으셨다. 여호수아가 그 뜻을 다 이루는 것을 보게 하시고 그를 불러 주셨다.
3) 요셉
요셉은 애굽에서 죽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유언이 자신의 뼈를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유언은 그의 자손들에 의해 응답됨으로 그의 생애는 가나안에서 마무리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