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적 요충지… ‘아마겟돈’이란 말이 유래한 도시로 알려져
전쟁터 므깃도
이스라엘의 가장 지리적 입지가 좋은 장소를 꼽는다면 당연히 므깃도이다. 도시는 지중해변을 이루는 갈멜산 능선을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면 이스르엘 골짜기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지중해변에서 동쪽 내륙으로 갈 수 있는 와디 아라(Wadi Ara)의 길목에 위치해 있으며 남쪽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올라가는 도로(해변길·Via Maris)가 지나가는 요충지에 있어 역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성서뿐만 아니라 고대 중동의 문서들에서도 므깃도는 자주 전쟁터로 등장하고 있다. 구약시대 요시야가 전쟁 중 전사한 곳이며 신약시대 마지막 전쟁이 있을 아마겟돈(계 16장)이라고도 불렸다.
지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입지에 있었던 탓에 므깃도에는 끊임없이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된다. 이스르엘의 푸른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므깃도 언덕은 주전 7000년께부터 시작하여 자그마치 26번의 도시 층들이 발견되었다.
므깃도에서의 고고학
므깃도의 이러한 입지는 많은 학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독일의 슈마허(G. Schumacher)는 1903년과 1905년 2년에 걸쳐 므깃도에서 이미 발굴을 시작하였다. 비록 발굴의 기술은 현대에 비해 부족했지만 그는 기록을 남기는데 상당히 애를 쓴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파기되어 남은 것이 없으며 후에 다시 정리되었다. 므깃도에서의 가장 활발한 발굴은 미국의 유대인 대부호 록펠러의 후원을 받아 1925년부터 미국 시카고 대학의 근동 연구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2차 세계대전이 있었던 시기까지 지속된 발굴은 므깃도의 많은 유물과 건축물들을 세상에 드러냈고 피셔라든가 가이, 라몬, 그리고 라우드를 유명한 고고학자로 만들었다. 물론 이들의 업적은 이스라엘 고고학계에 있어 상당히 크다. 전체 8층의 거주지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아합의 시대 므깃도의 발굴은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당시 고고학적 기술의 발달은 미흡했고 지금처럼 유물들과 건축물을 비교 연구할 수 있는 자료도 부족했다. 결국 그들이 발굴하여 기록한 기록물들 중에는 많은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고고학은 유적지 전체를 발굴하는 일은 금하고 있다. 미래의 보다 나은 기술을 동원하여 바른 발굴과 해석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어 유적지의 70% 이상은 발굴을 금하고 있다. 므깃도의 발굴은 이스라엘의 유명한 장군이자 고고학자인 야딘에 의해 히브리 대학교의 발굴 프로젝트로 1960년부터 1971년까지 4회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이 발굴의 결과는 당시 출판되지 않았고 2005년에야 정리되어 연구보고서가 출판되었다. 시카고대학교와 히브리대학교의 주요 관심이 철기 시대 즉 이스라엘의 왕국시대라면 1994년 이후 텔아비브대학교의 므깃도에서의 발굴은 성서시대 이전의 청동기 시대였다. 특별히 최근 발굴은 고고학자들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어 보다 정확한 연대기와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어 그 업적이 크다.
성서시대 이전의 므깃도
성서시대 이전의 유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초기 청동기 시대 즉 주전 3000∼2000년께의 제단(altar)이다. 신전 뒤에 위치한 이 제단은 지름이 10m에 달하는 원형의 제단으로 돌을 쌓아 올려 단상을 만든 것이다. 단상으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 마련되어 있었고 제단 끝에 높지 않은 난간이 둘러쳐져 있었다. 희생제물이 드려진 것으로 보이는데 주변에 성서의 제물이 그랬던 것처럼 불에 탄 1살 안된 수양들의 뼈와 비둘기, 송아지의 뼈들이 발견되었다.
주전 14세기 이집트와 가나안 땅 사이에 왕래한 아마르나 문서에서 마케티, 마키투, 혹은 마케도라 불린 므깃도는 중요한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므깃도는 견고한 성벽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다. 성문은 시리아 지방에 유행했던 스타일로 지어졌는데 돌을 크게 깎아 쌓아 올렸으며 양쪽에는 방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시대에 세워진 성문은 후대 솔로몬 시대에 복구되어 재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룩소르 카르낙 신전에서 발견된 벽 부조에 의하면 주전 1478년 이집트의 강력한 왕 중 하나였던 투트모세Ⅲ는 가나안 땅으로 원정을 나왔다. 이때 그는 바닷길(Derek HaYam)을 따라 올라가 므깃도에서 가나안 연맹국들과 극렬한 전쟁을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서에서도 역시 므깃도가 갈릴리 북쪽과 이스르엘 골짜기 지역에서 중요한 위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가나안의 왕들이 연맹을 맺어 저항하는 가운데 므깃도 왕이 등장한다(수 12:21). 므깃도는 므낫세의 소유로 배분되었지만(수 17:11), 벧스안과 다아낙 같은 다른 이스르엘 골짜기의 도시들과 함께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못해 가나안 족속이 그 땅에 거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삿 1: 27).
이 시대의 왕들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 중에는 상아판에 조각된 왕의 모습이 있다. 상아판의 조각은 이집트나 앗수르 같은 지역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왕이 연회에 앉아 있는 장면으로 왼쪽에는 왕이 날개 달린 그룹을 연상시키는 아름답게 조각된 왕좌에 앉아 있고 앞에는 시녀를 동반한 왕비가 왕에게 포도주를 대접하면서 로투스 꽃의 냄새를 맡고 있다. 시녀의 뒤로는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이가 끌려오고 있으며 왕의 뒤로는 왕에게 드리는 사냥감을 들고 오는 내시가 보인다. 2010년의 발굴에 의하면 므깃도에서는 토기 주전자에 담긴 채 발견된 보석들이 있다. 보석들 중에는 홍옥석으로 만든 목걸이용 구슬들과 반지, 귀걸이 등이 대량으로 발견되어 주전 1400∼1000년 사이 므깃도의 부유한 귀족층을 상상케 하였다.
솔로몬의 요새
지난 호 이스르엘 골짜기의 대부분 도시들이 다윗이 사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곳을 점령할 때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었다고 언급한 것처럼, 므깃도도 역시 다윗에 의해 이스라엘의 도시가 되었다. 이 입지 좋은 도시를 솔로몬이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솔로몬은 므깃도를 다악낙과 더불어 이스르엘 아래 사르단 가에 있는 벧스안 온 땅을 아힐룻의 아들 바아나에게 맡겨 행정을 책임지도록 하였다(왕상 4:12). 특별히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을 건축한 것처럼 므깃도와 더불어 하솔과 게셀에 철병거성을 건축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왕상 9:15). 대부분 학자들은 이 세 도시가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솔로몬이 요새 혹은 병거성을 건축하였다고 보고 있다. 비록 아직도 학계의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세 도시에는 주전 10세기 솔로몬 시대와 유사한 건축물들이 세워져 솔로몬의 도시를 증명하는데 자주 사용되고 있다. 특별히 1960년대 므깃도를 발굴한 야딘에 의하면 아합 시대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성문 이전에 므깃도에는 하솔과 게셀에 있는 것과 유사한 ‘육방 성문’이라 이름 지어진 솔로몬시대의 성문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 성문은 양쪽에 방이 세 개씩 있다. 더불어 병거와 말을 둘 수 있는 마구간과 여러 행정건물들이 솔로몬의 시대에 세워졌다고 주장했다.
2중 성문·지하터널 뚫은 급수시설 갖춰 견고한 요새였지만 앗수르에 점령 당해
아합의 도시
므깃도는 지중해변에서 동쪽의 내륙으로 연결되는 와디 아라(Wadi Ara)길과 남쪽 이집트에서 북쪽 중동지역으로 가는 ‘바다 길’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요지에 위치해 있는 도시이다. 솔로몬이 다윗의 왕국을 계승했을 때 그는 분명 이 중요한 도시를 요새화해야만 했다. 성서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을 견고하게 할 때 하솔, 게셀과 더불어 므깃도에 성을 건축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왕상 9:15).
야딘(Y. Yadin)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솔로몬의 병거성(chariot city)을 므깃도에서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후대에 지어진 건물들로 인해 정확한 아웃라인을 밝혀내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적어도 아합의 시대에 므깃도는 요새화되었으며 아합의 건축물의 상당부분이 솔로몬 시대의 건물과 오버랩된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특별히 예루살렘에 구약시대 솔로몬의 궁전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므깃도의 여러 행정 건축물들은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
아합 시대의 므깃도를 들어서면 상당히 인상적인 거대한 돌을 깎아 쌓아 올린 성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성문의 양쪽에는 솔로몬 시대와는 달리 2개씩의 방들이 있어 전체 ‘4방 성문’이 되었다. 성문은 병거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이중문을 달았을 것이며 앗수르에서 발견된 문들처럼 청동을 입혀 견고하게 사용하였을 것이다. 주전 722년 므깃도가 앗수르에 함락된 이후 성문은 양쪽에 방 하나씩 있는 2방 성문으로 개조하여 사용되었다.
마구간과 궁전
성 안으로 들어와 만나는 행정건물 중에는 마구간이 있다. 고대 말은 일반인들이 소유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다. 말은 전쟁에 사용되는 왕의 병거를 끄는 동물로 상당히 고가였으며 오직 왕과 군대에 속한 동물이었다. 우리는 이미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 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왕상 10:26)라는 구절을 통해 상당히 준비된 군대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솔로몬의 병거성 중에 하나가 므깃도라고 보고 있으며 말이 귀한 동물이었기 때문에 분명 행정적인 건물을 세워 보호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므깃도에는 현대의 마구간을 상상하게 하는 건물이 두 구역에서 발견되었다.
이 건물은 솔로몬 시대에 지어졌다가 아합 시대에 재건축된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를 잘 다듬은 돌을 쌓아 지어 행정건물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건물 내부에는 양쪽에 돌기둥들을 세워 세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가운데 부분은 흙을 다져 마치 우리의 마당처럼 되어 있고 측면의 바닥은 자갈돌을 깔아 포장하였다. 돌기둥들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말을 묶어 놓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기둥 사이에는 돌로 만든 구유가 놓여 있었다. 이 건물들 전체의 면적을 계산했을 때 아합 시대에 이 마구간에는 450마리의 말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앗수르의 살만에셀 III세는 주전 853년 가나안의 왕들과 시리아의 칼카르라는 장소에서 전쟁을 벌인 적이 있다. 이때 앗수르의 기록에 의하면 아합이 병거 이천을 보냈다. 아마도 아합은 이 마구간에 수용한 말들을 가지고 마구간 앞에 있는 50m×50m의 마당에서 훈련을 한 뒤 전쟁에 내보냈을 것이다.
므깃도에서 발견된 행정건물 중 우리에게 예루살렘을 상상하게 해주는 건것은 비트 힐라니(bit hillani)라 불리는 건물이다. 비트 힐라니는 아카드어로 창문이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시리아에서 주로 발견되는 왕이나 영주의 주택을 말한다. 길고 좁은 두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가로로 넓은 면에 있는 방에는 양쪽에 기둥이 서 있어 건물의 현관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이 방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세로로 긴 방이 있는데 왕이나 영주가 앉아 행정을 보던 보좌의 방이다. 건물은 전체 2층의 구조로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기둥이 서 있던 현관에 있었다. 므깃도의 건물 6000번이 비트 힐라니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이 건물의 전체 구조는 열왕기상 7장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의 솔로몬의 궁전과 상당히 유사하다. 건물에 사용된 기둥 위를 장식한 기둥머리의 경우 성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종려나무 가지를 아로새긴 형상으로 이러한 기둥머리는 므깃도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하솔, 게셀 등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수자원
겨울에만 비가 오고 여름에는 한 방울의 비도 오지 않는 이스라엘에서 수자원을 확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유적지들에서는 각 지역에 맞는 독특한 급수시설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전쟁을 하러 온 적군에게도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각 도시는 전쟁 중에도 수자원을 지키기 위해 땅 속으로 터널을 파서 샘에 도달하는 시설들을 마련했다. 이 샘은 도시 밖의 적군에게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적군은 자신들이 포위한 도시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더불어 자신들마저도 물 공급이 원활하지 못할 경우 전쟁을 그만두어야 하는 위기에 봉착하기도 하였다. 므깃도에도 이러한 급수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합의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시설은 언덕의 꼭대기에서부터 소용돌이 모양으로 굽이치는 층계를 파 내려가 수직으로 30m 깊이의 수갱을 팠다. 수갱의 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성 밖에 있는 샘까지 70m 길이의 수평 터널이 뚫렸다. 샘은 적군이 볼 수 없도록 거대한 벽으로 막아놓았다.
앗수르의 점령과 요시야의 죽음
이렇듯 견고한 요새였지만 므깃도는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다. 앗수르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마깃두(므깃도)와 사메리나(사마리아)로 행정구역을 나누었다. 므깃도에는 앗수르의 건축 양식에 영향을 받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므깃도에서 발견된 건물 1052번과 1369번은 중앙에 직사각형의 안뜰을 두고 방들이 이 안뜰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앗수르의 건물이었다.
앗수르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바빌론이 중동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요시야는 이 틈새를 이용하여 앗수르에게 빼앗겼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때 이집트의 왕 느고는 앗수르를 돕고자 북쪽으로 원정을 나갔고 요시야는 이를 저지해야만 했다. 그들은 항상 전쟁지역이었던 므깃도에서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요시야는 승리하지 못했고 므깃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왕하 23:29). 주전 586년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면서 므깃도에는 더 이상 도시가 건설되지 않았다. 그러나 므깃도가 가지고 있는 접전지라는 전통은 신약시대에도 기억되었다. 요한계시록 16장에서 마지막 전쟁이 있으리라고 예언된 아마겟돈은 히브리어의 하르 므깃도 즉 므깃도 언덕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발음한 명칭으로 전쟁의 상징적인 장소로 사용되었다. 일부에서는 므깃도 언덕 앞 즉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많은 전쟁이 있었기에 이 땅이 전쟁의 피와 시신으로 인해 땅은 붉으며 비옥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