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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Jericho)

여리고를 시작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지역 여행

지난 호까지 우리는 성서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과 관련된 고고학적 흔적들과 성서적 표현을 살펴보았다. 가나안 땅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운 이스라엘 역사는 주변 국가들과 멀고도 가까운 이웃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 그들의 흔적들을 찾아가고자 한다. 현대 이스라엘로 지정된 경계선으로 볼 때 구약과 신약 시대의 이스라엘 땅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그 땅의 원주민이 아닌 이주민으로 들어와 정착했고 가나안 정복을 통해 원주민을 모두 몰아낸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았기 때문에 가나안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포로생활을 겪을 때 그 땅을 완전히 떠난 적도 있었다.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그들은 이미 잊혀져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고유문화와 종교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헬라와 로마에 의한 이스라엘 땅 점령은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혼란을 가져다준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스라엘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다양한 문화와 역사의 모습들을 찾아보는 흥미로운 일이 되리라 기대한다. 이 작업의 시작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첫 점령지인 여리고로 그 이후 가나안 정복의 여정을 따라 가고자 한다. 여정의 마지막 장소는 이스라엘의 신앙과 역사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물론 구약시대부터 시작되지만 신약시대 그리고 기독교 문명의 고고학적 흔적을 통하여 성서를 읽게 될 것이다.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여리고는 현재 요단 계곡의 강 서쪽, 사해 북쪽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 해수면 아래 258m에 위치해 있다. 여호수아서에 의하면 요셉의 자손에게 할당된 땅이었다(수 16:1). 여리고라는 이름은 레아흐에서 유래한다. 이 이름의 뜻에는 몇 가지 의견들이 있는데 아랍어로 여리고가 ‘향기로운’이라는 뜻의 ‘아리하’로 불리고 있고 레아흐가 히브리어로는 ‘냄새’라는 뜻이기에 아마도 이 곳에서 생산되는 향유 때문에 이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의견이 있다. 또 다른 의견은 달을 의미하는 ‘야레아흐’와 관련이 있고 고대 여리고가 달 신을 섬기는 중심지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

예루살렘에서 황량한 유대광야를 지나 사해가 멀리 보일 즈음 갑자기 푸른색으로 가득한 장소가 눈에 띄는데 그곳이 바로 여리고이다. 여리고는 유대 광야를 지나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사해 지역에 위치해 있고 강우량은 일 년에 160㎜밖에 안 된다. 연 평균 기온도 15∼31도에 이르는 더운 지역이다. 그러나 주변에 샘들이 있어 나무와 풀들이 무성하다. 도시 근처에 있는 엔 에스-술탄 샘에서는 1분에 3.8㎥의 샘물이 솟아 적어도 10㎢의 땅에 물을 댈 수 있다. 성서에서 여리고는 ‘종려나무의 성읍’(신 34:3; 대하 28:15)이라 묘사되고 있을 만큼 종려나무가 상당히 많이 자라고 있다. 비록 광야지역이지만 풍부한 물 자원 덕분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고 당연히 많은 거주지가 발견된 바 있다. 여리고에는 이미 주전 9000년경부터 인류가 살고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이후 20개 이상 거주지로 사용된 층들이 발견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기독교인에게 여리고는 여호수아 정복 전쟁의 첫 번째 목표였고 라합의 이야기라든가 어떻게 성벽이 무너졌는가 등 다양한 사건으로 기억되는 도시이다. 그러나 고고학에서 여리고는 인류가 건설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가 있었던 장소로 더 유명하다.

여리고에 처음 정착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우리는 나투피아(Natufia)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현대 여리고 도시에서 2㎞ 정도 떨어져 있는 엔 에스-술탄 샘 주변에 주전 10000∼9000년 사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문화는 아직까지는 토기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농사를 기초로 하고 있었다. 200∼300명의 사람들이 영구적으로 작지만 둥근 집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다. 이 집은 진흙과 짚을 섞어 태양에 말려 만든 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보통 거주지의 지름은 5m 정도 됐고 집의 중앙에는 바닥을 움푹하게 파서 만든 화로가 있었다. 이 거주지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사항은 방바닥 아래에 시신이 묻혀 있는 것이다.

주전 9400년경 마을의 인구는 점차 늘어나 10배 이상의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70채 이상의 집이 지어졌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4만㎡의 세계 최초 도시가 건설되었다. 집들은 여전히 진흙 벽돌을 쌓아 둥글게 지었다. 도시 성벽 하나에는 거대한 돌탑이 있는데 여리고에서 가장 많은 관심과 시선을 받는 고고학적 발견물이다. 이 탑은 높이가 약 3.6m에 달하며 탑 아래 부분만 폭이 1.8m이다. 탑 내부에서 꼭대기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22개의 돌계단을 밟아야 한다. 이 탑에 대한 추측은 상당히 다양하다. 전망대라는 의견이 다수였지만 최근에는 홍수에 대비한 의례가 행해졌던 장소로 보고 있다. 이러한 탑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수백명의 사람이 꽤 오랜 기간 동안 노동에 참여해야만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당시 중앙 집권층의 힘이 얼마나 강했는가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유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여리고에서는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다. 주전 6800년경부터 도시는 다시 사람들로 북적댔다. 이전에 주로 농사에만 집중했던 것에 비해 이 시대부터는 양을 키우는 목축도 병행했다. 이 시대 무엇보다 유명한 고고학적 발견은 사람 해골의 발견이다. 현재 발견된 해골은 10구인데 몸은 아마도 어딘가 묻고 두상만을 집에 간직한 것으로 보인다. 턱을 제거한 해골은 전체에 회반죽을 입혔고 눈은 조개껍질을 박아 마치 눈을 뜨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몇몇 학자들은 이전시대에 사람을 방바닥에 묻는다든가 해골만을 특이하게 장식한 후 집에 간직한 것을 조상을 섬기는 신앙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해석이 알려진 바는 없다.

이 시대 층에서는 세석기와 방추, 화살촉과 돌칼 등 다양한 도구가 발견되는가 하면 동물이나 사람의 모습을 한 점토 인형이나 토기도 발견된 바 있다. 신을 형상화한 기형학적인 문양의 점토형상이나 돌 형상도 함께 발견되었다. 더불어 조개와 돌을 깎아 만든 장신구들도 발견되어 당시 예술의 발달도 엿 볼 수 있다.
[출처] – 국민일보

여호수아의 여리고城 정복사건 풀 해답은 아직 땅속에…

성서의 수많은 사건들 중 어릴 적부터 배우고 기억하는 사건은 아마 여리고 정복사건일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와 가나안 정복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정복한 지역이 바로 여리고이다. 여호수아 6장은 여리고 정복에 관한 보고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정복한 땅이기도 하지만 염탐군과 기생 라합의 만남 그리고 특이한 전술로 함락한 여리고 성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놀라움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절감하게 한다.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6일 동안 하루에 한 번씩 도시를 돌았고 마지막 칠 일째 도시를 7번 돌면서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백성들이 소리를 지르자 성벽이 무너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전술은 가능했을까? 어떤 이들은 이 전쟁이 지진의 효과라고 보기도 하고 그들이 성을 돈 것은 취약한 성벽을 확인하여 공격하기 위한 준비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호수아서 6장

지난 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리고는 사해주변 광야 가운데 있는 가장 살기 좋은 장소이다. 신석기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 오랜 기간 도시가 번영했었다. 심지어 현재도 상당히 발전한 도시가 형성되어 있으며 도시의 고대 이름인 여리고로 불리고 있다. 덕분에 고대 도시가 형성되었던 언덕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언덕은 24m 높이에 4만㎡의 면적으로 텔 에스 술탄이라 불리며 지난 세기 고고학자들의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장소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곳에서 찾고자 하는 흔적은 여호수아서 6장의 정복사건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사건의 흔적은 고고학자들과 성서학자들 사이에 가장 풀리지 않는 문제로 거론되고 있을 정도로 만족할 만한 답을 주고 있지 못하다. 고고학적인 흔적(remains)으로 연대기를 결정하는 고고학자들은 여리고 정복에 관한 충분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불충분한 고고학적 증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위험스런 주장이다.

여리고 탐사 및 발굴

처음 여리고 탐사를 시작한 사람은 영국의 워렌(C.Warren)으로 1868년 수십 명의 아랍 인부들과 함께 언덕을 파 들어갔다. 하지만 오직 돌로 만든 성벽을 기대했던 워렌에게 흙벽돌만이 발견되자 그는 발굴을 멈추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여리고에서 첫 번째 시행된 전문적인 발굴은 1907∼190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미 이스라엘 다른 유적지에서 발굴한 경험이 있었던 전문 고고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워렌에 비해서는 체계적인 발굴이 진행되었다. 특별히 그들은 도시의 기초 암벽에 무너져 있는 상당한 양의 흙벽돌 더미를 발견했고 여호수아가 파괴한 성벽이라는 결론을 내림으로 전 세계 기독교 사회는 흥분했었다. 그러나 발굴이 진행되면서 여러 시대에 걸쳐 사용된 다양한 성벽들이 발견되었고 어느 것이 여호수아 시대의 것인가 선택을 해야만 했다. 결국 주전 1500년경 파괴된 성벽이 이스라엘의 파괴로 인한 것이라고 보면서 이스라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연대도 같은 시대로 보게 되었고 보수적인 학자들은 아직도 이 연대를 신봉하고 있다.

위의 연대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영국의 가르스탕(J. Garstang)은 주전 1930년부터 여리고의 성벽을 찾는 발굴을 시작했다. 가르스탕은 여리고에서 여러 시대에 걸친 무덤들을 발굴하게 되면서 토기라든가 가구, 도구 등 무덤의 부장품들을 통해 오히려 고대 생활사를 밝히는 데 보다 많은 공헌을 하였다. 여리고 성벽의 경우 그는 여호수아의 파괴가 1500년경이 아닌 1400년경이라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가르스탕은 외부 성벽과 내부 성벽 두 성벽이 나란히 있었으며 외부 성벽의 경우 심한 파괴와 화재의 흔적이 보인다고 말했다. 더불어 성벽 내에서 굽지 않은 빵 반죽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갑작스런 파괴의 현장을 말해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케년(K.M.Kenyon)은 여리고에 보다 발전된 기술과 토기 분석법을 적용하여 발굴을 지휘했다. 케년은 지난 호 언급했던 신석기 시대 세계 최초의 도시 여리고의 거대한 성벽과 탑을 발견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바 있다. 그러나 캐년은 오히려 후기 청동기 시대 즉 여호수아의 정복시대에 여리고에는 도시가 없었으며, 앞서 언급된 무너진 흙벽돌 더미를 동반한 심각한 화재 현장은 오히려 이집트가 주전 1550년경 여리고를 파괴한 흔적이라고 주장했다.

케년의 이러한 발표 때문에 구약학계는 상당히 혼란에 빠졌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이 정복한 여리고에 성벽이 없었다면 성문 위에 살았다는 라합의 집은 어떻게 된 것이며 그들이 돌았다는 성벽은 어디에 있었는가? 안타까운 것은 1993년 여리고가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이 되면서 고고학자들은 물론 성지순례객조차 한동안 이 고대 도시를 방문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아직도 성벽이 언덕 어딘가에 있다는 주장과 흙벽돌이다 보니 빗물에 씻겨 내려가 사라졌다는 의견도 있다.

최근 조사현장

1997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니그로(L. Nigro)와 마르체티(N. Marchetti)가 팔레스타인 자치구역 고고학 부서가 생긴 이래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텔 에스 술탄을 발굴할 기회를 가졌다. 이들은 케년이 발굴한 주변을 한 달 동안 재 발굴하였는데 케년의 의견에 동의하여 여호수아의 전쟁 흔적을 발견한 바 없다고 발표했다. 그들의 발표가 발굴을 시행한 지 얼마 안 되어 순식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팔레스타인 정부가 유대인들의 역사와 여리고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발표에 대해 최근 여리고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우드(B. Wood) 박사는 이미 지난 세기 여리고에서 독일 고고학자들과 가르스탕, 그리고 케년에 의해 발굴된 자료에서 여호수아 정복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 학자들의 의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의 발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화재에 의해 무너진 거대한 흙벽돌 더미가 바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의 여리고 정복의 흔적이며 이 흔적의 연대는 주전 1400년이라고 주장했다.

우드는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이 남겨놓은 발굴 현장을 방문하였는데 후대에 여리고의 성벽을 지탱하는 벽이 무너진 흙벽돌 더미 위에 세워진 것을 확인하였다. 그는 이러한 현상은 이미 다른 발굴들에서도 발견된 바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 발굴 현장이 훼손되었고 씻겨져 내려가 단지 사진과 그림으로만 남겨져 있을 뿐이기에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의 생생한 현장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논란은 멈추지 않고 있다. 최근 성서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이 람세스 2세 즉 주전 1250년경 출애굽했고 1200년경 가나안 정복전쟁을 했다고 연대를 추정하고 있어 여리고의 함락 흔적에 대한 발견은 다시 미궁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텔 에스 술탄 유적지를 하늘에서 찍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여리고는 일부분만 발굴이 이루어졌고 해답은 아직도 땅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여리고 계속>

 

 

엘리사의 샘·헤롯의 궁전… 예루살렘 길목 핵심도시였다

왕국시대의 여리고

왕국시대의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오고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 지리적 중심지역으로 경제, 사회, 정치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윗은 요단 동편에 있던 암몬 땅에서 하눈이 왕이 되었을 때 인사차 신하들을 보냈다. 하지만 하눈은 암몬 관리들의 이간질로 다윗이 보낸 신하들의 수염을 절반이나 잘라버렸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더불어 가나안 지역에서도 수염은 성인의 상징으로 생각됐기 때문에 이것은 상당히 모욕적인 행위였다. 결국 다윗은 수염이 자라기까지 이들을 예루살렘과 하룻길 정도 떨어져 있는 여리고에서 머물도록 했다(삼하 10:1∼5).

여리고는 주전 9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보이며 꽤 번성한 도시로 북왕국 이스라엘에 속한 성이었다. 처음 여리고에 성을 쌓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상 16장 34절에 의하면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 성을 건축할 때 쌓을 때는 맏아들을 잃었고 성문을 세울 때는 막내아들을 잃는 고통이 따랐다. 이는 여호수아를 통해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수 6:26)고 말씀하신 예언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히엘이 건축한 여리고 성에는 특별히 선지자의 제자들이 살고 있었다(왕하 2:4∼18). 학자들은 여리고에 마치 오늘날 목회자를 위한 신학교처럼 선지자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간 이후 엘리야의 성령이 엘리사에게 임하는 것을 보고 엘리야의 제자들은 엘리사를 따르게 됐다(왕하 2:15). 특별히 엘리사가 여리고에 있는 좋지 않은 물의 근원에 소금을 뿌리고 물을 고치는 장면이 있다(왕하 2:19∼22). 여리고의 물의 근원은 에인 에스 술탄(Ein es-Sultan)이라고 불리는 오아시스로 현재 이곳은 엘리사의 샘이라 불린다. 샘은 1분에 1000갤론 이상의 물을 제공하고 있으며 여리고 도시에 물을 대고 있다.

여리고의 흥망성쇠

여리고 성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파괴된 뒤에도 작은 도시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갈대아 군대 즉 바빌론이 주전 586년에 유다를 점령했을 때 바빌론 군대는 여리고 평지에서 시드기야를 내쫓았고 결국 유다의 군대는 패배하고 말았다(왕하 25:5). 유다 멸망 이후 여리고는 한동안 버려진 폐허도시로 변해버렸다. 주전 539년 고레스는 고대 도시가 위치했던 텔 에스 술탄에서 남동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 새로이 도시를 건축했다.

여리고의 풍부한 경제적 자원은 페르시아 통치 시대뿐만 아니라 헬라문명시대에도 유대인 지역의 중심도시가 되게 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가나안 지역을 점령했을 때 여리고는 그의 개인 소유가 될 만큼 가치있는 도시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의 장군들이 점령지역을 나눠가질 때 여리고는 셀루시드 왕조의 땅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반란을 두려워했던 셀루시드 왕조 중 바키데스 장군은 여리고 주변에 방어벽들을 쌓고 이 성을 요새화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전 167년 여리고는 마카비를 선두로 한 유대인들에게 빼앗겼으며 한때 예루살렘을 차지했던 유대인 제사장 왕조인 하스모니아의 통치를 받았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고도에 위치한 (해저 400m) 사해에 접해 있는 여리고는 겨울 우기 내내 싸늘한 예루살렘에 비해 훨씬 따뜻하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겨울에 사해와 여리고 지역으로 휴가를 보내러 가는 것처럼 하스모니아 왕조도 여리고에서 겨울을 보내기 위해 헬라문명의 영향을 받은 궁전을 건축했다. 겨울 궁전은 텔 에스 술탄에서 남쪽으로 약 3㎞ 떨어진 와디 켈트 계곡에 위치해 있다. 와디는 가나안 지역의 독특한 지형이다. 일반적으로 겨울 우기에 석회석 암반의 지반이 약한 곳으로 물이 흘러 형성되는 계곡인데 여름에는 물이 전혀 없지만 겨울에는 강처럼 흐른다. 특별히 유다광야의 와디 켈트는 여름에도 부분적으로 물이 남아 있는 웅덩이들이 있으며 자연이 만들어낸 장관이 펼쳐지는 계곡으로 유명하다. 이 계곡의 겨울에 흐르는 물을 끌어들여 궁전 안에는 수영장이 만들어졌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헤롯은 어느 날 여리고 궁전에서 연회를 열고 하스모니아 왕조의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그의 처남 아리스토불루스 3세를 수영장에서 익사시켜버렸다. 그리고 헤롯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 선포했다.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그의 부인 클레오파트라의 도움으로 유대인의 왕이 된 헤롯은 감사의 선물로 여리고를 바쳤다. 하지만 주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했고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여리고를 다시 헤롯에게 주었다. 헤롯은 여리고에 로마식 도시를 건설했다. 하스모니아 왕조의 겨울 궁전을 확장하고 현재 와디 켈트의 계곡 양쪽 툴루 알 알라크(Tulu al-Alaq)라 불리는 유적지에 세 개의 궁전을 새롭게 건축했다. 계곡의 양쪽은 다리를 만들어 서로 왕래할 수 있게 했다. 가장 큰 궁전은 첫 번째 건축한 궁전으로 그 크기만 87×46m에 달한다. 로마식 아쿠아덕트(수로 다리)를 만들어 궁전의 수영장과 목욕탕에 물을 채웠다. 145×40m 규모의 정원을 만들었고 로마식 기둥이 세워진 방들이 있었다. 주변에는 병거 경기가 열렸던 극장도 있었으며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따 ‘시프로스(Cypros)’라 불렀던 요새를 세워 방어벽을 구축했다. 훗날 이 요새는 수도사들의 광야 은둔장소로 이용되다 수도원이 됐다.

헤롯의 궁전을 중심으로 여리고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큰 도시로 발전했다. 신약시대 여리고를 방문했던 예수님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만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행했으며(막 10:46; 눅 18:35), 키 작은 세리 삭개오를 만났다(눅 19장). 예수님의 유명한 예화 중 선한 사마리아인의 경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는 이야기다(눅 10:30). 최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목 언덕에 예수시대 여관이 있었을 법한 유적지가 발견돼 기독교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주후 70년 로마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이후 여리고는 더 이상 중요한 도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주후 324년 이후 비잔틴 교회의 순례객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수도원과 교회들이 세워졌고 여리고는 다시 한 번 번성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여리고 시험산(Mt. of Temptation)에는 주후 5세기 이후 세워진 그리스정교회의 수도원이 존재하고 있다.

공동 집필

임미영 박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한신대학교 장신대학교 강사>

김진산 박사

<새사람교회 공동목회, 서울신학대학교 호서대학교 건국대학교 강사>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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